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인으로 자라 독일대학에 진학한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더욱 부러웠다. 내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저 편에 있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유창한 수단을 지닌 사람들, 채겡 등장하는 그 수많은 비유와 은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간단한 비유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나는 늘 대비되었고, 그들에 대한 부러움은 곧 자괴감으로 변형되어 나를 괴롭혔다. (19쪽)
쇼베의 동굴에서 벽화를 그린 그 사람은 분명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국어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예술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한 쇼베와 현재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예술을 통해 지금 현재의 한계에서 벗어나기를 상상하고, 경제적 유용성이라는 좁은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인류의 보편언어로 의사소통하며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여행을 시작하는 첫 장소는 당연 쇼베여야 한다. 쇼베에서 우리는 인류 보편언어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다. (74쪽)
예술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예술가에게 돈은 자신이 혼신을 기울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그 수단이 없으면 모든 것은 그저 생각에 그친다. 생각에 그친 예술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예술이 후세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생각이 물질적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돈이 그 역할을 한다. (175쪽)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는 자신의 고향이 아니라 빈을 선택했다. 빈은 그래서 특별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가 선택한 도시이기 때문에. (189쪽)
어디로 떠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현실을 버틴다. 그렇게 버티며 모은 돈을 떠난 그곳에서 아낌없이 쓴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직시하기 두려울 정도로 병든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커질 때마다 탈출구를 찾는다. 탈출구는 여기가 아닌 곳, 현실에서 벗어난 그 어떤 곳이다. 그곳은 ‘다른 나라‘, ‘예술‘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다른 나라‘에선 현실이 작동을 멈춘다. 그곳에서도 역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겠으나, 다른 현실로 도피한 사람에게 그곳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곳의 언어와 맥락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여행객의 눈에 그곳은 나를 떠나게 했던 현실의 원칙이 지배하지 않는 곳으로 보인다. 모든 것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260쪽)
음악은 시각예술처럼 즉각적이진 않지만, 듣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발휘한다. 예술이 발휘하는 효과 자체는 비정치적이다. 예술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효과를 발휘하려는 요량으로 무엇을 재현하지 않는다. 빈과 파리의 예술가들이 투쟁 덕분에 예술은 궁정예술과 제의적 예술의 형태에서 벗어나 자율적 예술로 변하면서 그 자체로 목적 없는 행위로 나아갔다. (341쪽)
아름다운 대상을 아름답게 묘사하면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면 사실을 ‘미화‘한 것이다. 예술은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 유대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전쟁으로 영토팽창을 꾀하는 1930년대의 독일제국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런데 예술이 아름답지 않은 정치를‘미화‘해냈다. 1934년의 뉘른베르크가 그 증거다. (347쪽)
도시는 그렇다. 바로 옆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깜쪽같이 감출 수 있는 게 도시다. 도시에 사는사람은 너무나 많은 자극을 받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웬만한 일이 아니면 그리고 자기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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