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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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기억.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들. 그에게 느끼던 감정, 그리고 전해오던 감정들. 나에게 사랑의 기쁨 외에 사랑의 아픔까지 전해주던 그 때의 감정들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공지영 작가의 책을 읽어오며 이번 작품만큼 그의 연륜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을 쏟아부은 듯한 느낌. 모든 감정을 끌어 모아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울리게 만드는 단어.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스무 살의 나, 열아홉 살의 이미호 로사와 스물두 살의 요셉의 사랑을 떠올린다. 첫사랑이라는 건 이루어지지 않아 불리는 이름인가 싶다.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랑, 미숙한 사랑을 표현하는 게 첫사랑이 아니던가.

 

곧 딸아이의 아이가 태어날 할머니가 될 이미호 로사. 우연히 첫사랑과 40년 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스물에 느꼈던 감정들과 40년이 지난 뒤에 느끼는 감정들은 어떻게 다를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깝고 그리운 감정들을 갖게 한다. 그 유명한 피천득의 산문 「인연」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어쩌면 첫사랑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끝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운 감정들을 기억 속에 갇혀 있게 해두고 어떠한 순간에 아주 잠깐 꺼내볼 수 있는 감정으로 남겨야 하는 거다.

 

 

 

사실 나이라는 건 숫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본다. 사십 대에 첫사랑을 만나는 것과 오십 대 후반에 첫사랑을 만나는 건 확연히 다를 것이다.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해야할 나이. 어쩌면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르는 나이. 물론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들은 할머니가 될 로사와 이미 할아버지가 된 요셉이 어떠한 대화들을 나눌 것인가 였다. 과거에 사랑했던 기억들을 어떻게 표현할까가 관건이었던 것 같다.

 

40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 것일까. 인간이 시간을 피해갈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간직할 수 있다면, 이미 영원을 사는 거라도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까?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영원은 영원히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으리라. (17페이지)

 

 

 

이미호는 대학의 영문과 선생들의 헤밍웨이 심포지엄이 열리는 문학 기행에 우연히 참여하게 된 김에 첫사랑에게 연락을 취했다. 40년 만에 만나게 되는 첫사랑이었다. 미호는 곧 할머니가 될 테고, 첫사랑의 그는 네 아들을 둔 아버지이며 벌써 손자들도 있는 거로 페이스북에 나타났다. 40년 만에 만나는 첫사랑과의 재회라.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하게 여겨졌다. 사랑에 관련된 소설이라 함은 그들이 이루어 질 것인가에 관심을 두게 된다. 하지만 소설은 마지막까지 독자들에게 긴장의 끈 놓게 하지 않는다.

 

돌아보니까, 아픈 것도 인생이야. 사람이 상처를 겪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라는 것을 겪는다고 하고 그게 맞지만, 외상후 성장도 있어.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 우리는 가끔 성장한단다. 상처가 나쁘기만 하다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피하지 마. 피하지만 않으면 돼. 우린 마치 서핑을 하는 것처럼 그 파도를 넘어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야. (251페이지)

 

첫사랑과의 대면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기억, 즉 로사의 기억과 요셉의 기억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건 잊고 어떤 기억은 선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 요셉은 먼 바다까지 헤엄쳤던 일을 말하지만 로사에겐 생소하다. 즉 잊었던 기억이다. 헤어지는 장면 또한 그렇다. 로사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는 레스토랑에서 그의 계획들을 뒤로 하고 뛰쳐 나왔던 일은 40년 동안 늘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정작 요셉은 그 기억을 말끔하게 지워버렸던 것 같았다. 자신에게 너무 아픈 기억들은 종종 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누군가 물었다면 대답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치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마치 예기치 않은 만남과 헤어짐이 그렇듯, 그저 운명이라고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라고. (260페이지)

 

그토록 사랑했는데 미호와 요셉은 왜 헤어졌는가. 40년이 지난 뒤의 이들의 첫사랑은 과연 이루어 질 것인가 애타게 만들었다. 첫사랑은 다시 만나야 하지 말아야 하는가. 첫사랑과의 추억이 영원할 수 있는 건 다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소설에서는 이들이 이루어지길 애타게 바라게 된다. 어쩔 수 없다.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해피 앤딩을 바라게 되넌 것이다.

 

삽입된 그림이 책의 퀄리트를 더 높였다는 건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 같다. 더불어 미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 책의 다른 한 페이지 즉 역사의 시간 속에 있게 한다. 잡혀 들어갔던 아버지의 죽음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이들의 상황들에 눈시울을 젖게 한다. 그러면서도 느낄 수 있는 건 어머니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같은 성격이어서 부딪쳤던 것들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공감력이 아닐까 싶다.  

 

40년만에 만나는 첫사랑과의 재회는 과거의 기억과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비로소 내 곁의 사람들과의 진실된 마음을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 봄, 맨 먼저 피어나는 금둔사의 홍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우리도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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