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출처 : 미미님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그래서, 저는,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 때조차도 뭔가를 강경하게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딱 제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만 말할 수 있었죠. 페미니즘이 층위가 다양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진실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층위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결국 사안에서 페미니즘을 선점해서 돌출하는 주장만이 ‘페미니즘‘으로 받아들여지잖아요. 그래서 지금 굳이 책을 찾아 여러 종류의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낙태에 찬성하고, 모자보건법에 아동을 지우고, 난민을 반대하고, 사회적 성취를 하지 못하는 울분을 토로하고, 가족을 건사하는 일을 폄하하면서, 여성이 하는 눈물의 호소라면 상황을 살피지 않고 곁에 서는 태도들을 페미니즘이라고 보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제가 페미니스트인 채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일하는 것에 모순을 느끼지 않았는데, 지금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분들은, 제가 하는 말, 저의 삶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거‘라고 하더라구요. 페미니즘에 다양한 층위가 있으니, 페미니즘 비판이 부당하다는 말은 그래서 저는 좀 이상하게 들리네요.

참, 제3세계 페미니즘,에 대한 불만은 이해합니다만,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자체의 출발이 제1세계 여성들이다보니 그런 분류가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인지하기에 기이한 사고라고 생각하는 자연과 좀 더 가깝고, 여성의 역할과 책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에코 페미니즘,같은-에 대해 그 사람들은 이름붙일 말을 몰랐던 거라고 생각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구경하는 개인홈피중에 김규항님의 규항넷이 있다. 여기에서 '자연을 좋아한다는 말'(http://gyuhang.net/3772?TSSESSIONgyuhangnet=5dead0ce10da31c24bdadef87c7f085e)을 보았다. 나는 그 단정적인 태도가 거슬린다. 

지금의 나는 말과 글, 로 표현되었을 때 왜곡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전해지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다른 서평에 인용한 것처럼(https://blog.aladin.co.kr/hahayo/11596640 당연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믿음조차 의식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결핍된 것이 의식되고 그래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타인에게 말하려는 것은 그 즐거움의 결핍이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은밀한 두려움이다. -p137,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다. 심의용 지음.

사람이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핍 때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게 아닌가. 위선이라고 해도,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싫었다. 저런 태도는 서양인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과연 현대적으로도 유의미한가, 질문하면서도 저런 단정적인 태도에 물러난다. 위선,이라도 '선'이다. 위'악'보다는 위'선'을 권장하고, 끊임없이 연기함으로써 어느 순간 '선'해지기를 권장하고 싶다. 동양에서 묘사하는 자연과 서양에서 묘사하는 자연은 얼마나 다른가. 편한 것을 쫓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옳은 게 아니고, 그 말 자체가 화자의 결핍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말 자체가 위선이라고 해서 단정적으로 배척해야 할까. 싫어도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보다 두려운 것은 저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 입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80205.html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회사의 성희롱고충상담원,이었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고 나조차도 만족할 수 없었다. 교육을 받았지만, 질문이 생겼고 질문에 들은 대답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에게 생긴 질문은 이 행위가 정말 조직에 이로운가, 였고 매뉴얼 교육을 받으면서 강사에게 한 질문은 '어떻게, 문제제기가 들어오자마자 분리했는데 주변에서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죠?'였다. 그 때 강사는 조직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조직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나는 고충상담원이고 어떤 식으로 개입하게 될 텐데, 사건은 처리하는 과정에도 처리한 후에도 충분히 전파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조직에 막 진입한 사람이 원하는 처벌수위는 지나치게 높아서 원하는 수위보다 낮다고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욕을 먹고, 느리고 긴 처리과정에서 '은폐'라고 욕을 먹는다. 교육받은 사례 중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작은 조직에서 벌어진 걸 처리했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작은 조직이라 피해자거나 가해자, 목격자나 증인, 위원회의 위원, 어디든 걸쳐 있었다면서 외부위원으로 참여한 분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들으면서, 그 모든 행위들이 조직에 도움이 되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춘추전국 이야기를 읽다가 '절영지회'라는 고사를 읽었다. 장왕의 연회에서 갑자기 불이 꺼지고 어떤 신하가 왕을 모시던 미인에게 수작을 건다. 미인은 그 자의 갓끈을 끊고 왕에게 고해서는 그 자를 잡아내라고 청한다. 왕은 불을 켜기 전에 모두의 갓끈을 끊으라고 명한다. 여기서 살아남은 신하는 3년 후에 용맹히 싸워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


성희롱과 추행과 강간, 성과 관련된 범죄들도 법이라면 경중을 따질 수 밖에 없다. 각각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무게에 맞게 벌을 정해야 한다. 가벼운 죄에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이, 무거운 죄를 막는데 도움이 될까? 갓끈을 끊어놓고 왕께 고하는 미인처럼, 벌을 청한다고 벌을 줘야 할까. 지금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가볍기 때문에 드러낼 수 있고, 드러냈기 때문에 더 무거운 벌을 받는 상황이 된다. 무거운 죄라면 피해자가 드러내길 꺼리기 때문에 , 형사법의 처리과정에서 확정되기 전까지 보호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벼운 죄라면, 법으로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개되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균형은 깨어지고 적개심은 커진다.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공개하는가? 폭력이 사라지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관계의 불균형 가운데, 모호한 정의들로 가득 찬 그 말을 정의는 할 수 있을까? 성희롱과 추행과 강간을 성폭력,으로 뭉뚱그리고, 그 모든 피해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동체에 이로운가. 강간과 살인을 같은 무게의 범죄로 보는 것은 순결 이데올로기와 무엇이 다른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추풍오장원 2021-01-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제발 알라딘의 죽림칠현들이 이런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텐데요.

별족 2021-01-28 09:55   좋아요 1 | URL
댓글은 달아주지 않으시겠죠. ^^

추풍오장원 2021-01-31 09:04   좋아요 0 | URL
느끼는 바도 없는 것 같군요^^

공쟝쟝 2021-01-31 09:20   좋아요 5 | URL
제가 죽림칠현 중에 하나였군요 ㅋㅋㅋㅋ 아 ㅋㅋㅋ 님아 ㅋㅋㅋ 별칭 재밌네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31 20:18   좋아요 3 | URL
어느 지점에서 공감하고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느끼길(그리고 바뀌길) 바라는 건지도 궁금하네요 ㅎㅎㅎ

공쟝쟝 2021-01-31 00: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 글에 트랙백을 다셨길래 조금더 구체적인 생각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셨을거라 추측해보고, 저의 의견이 더 자세했으면 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댓글을 답니다.

1. 제목이 조직에 이로운가 인 부분
저는 정의당의 조직안위에 전혀 관심도 없고, 어떤 연관도 없는 일개 시민입니다. 다만 오랜기간 대의와 조직보위논리로 많은 진보진영의 여성 활동가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꺼내어 말하기 어려워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장혜영 의원의 입장문이 와닿았습니다. 공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진보정당이 척박한 한국의 정치현실에서의 무려 정의당이니까요. 그의 입장문에 조직에 이로운가를 생각했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무겁게 숙고했을 거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당이 아닌 성평등을 외쳐온 정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정치에도, 진보정당의 정치에도 옳은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공개하다니요. 제가 되려 묻고 싶군요. 정의당은 무얼 위해 싸워야 합니까. 공개하지 않는 방법이 정의당 조직에 정말로 이롭습니까?
물론 장혜영을 지지하는 제 초점은 한 동료 시민이자 여성으로서가 더 큽니다. 말하지 않았다면 용기낼 필요 없었고, 용기내지 않았다면 조용했을 거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장혜영이라는 개인과 또 성평등을 외쳐온 국회의원은 그의 표현대로 ‘사건에 영원히 갇혀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갇히지 않기로 결단한 그 용기가 어떤 긍정적 징후로 읽혀 뿌듯했습니다. 미투를 비롯해 많은 동료시민 여성들이 용기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정의당이 이 상황을 풀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되려 아주 조금도 없던 정의당에 대한 기대가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적어도 제겐 장혜영님의 입장문이 조직에 이롭게 느껴집니다.)

2. 인용하신 갓끈에 대해
희롱과 추행과 강간을 구분해야한다 하셨죠. 경중을 따져야한다 하셨죠.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해 더 무거운 벌을 받고 있다는 내용으로 읽힙니다. (저는 왜 거기서 살아남은 신하가 나라를 구할 거 같지 않고 안희정이 될 것 같죠? .....) 작은 도덕적 해이로도 더 큰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인의 직업윤리(?)아닌가요. 희롱, 추행, 강간 다르지요. 그러나 그 모두는 ‘성폭력’ 맞습니다.

덧붙여, 장혜영의 입장문에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진술이 없었던 점은 제가 좋은 글이라고 느끼는 지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뭘했다는 건데, 그건 추행이네/아니네, 여타의 사건에 따라올 자극적 보도들과 언설들... 사법적으로 다투어 결론난사건 마저도 사건 정황에서 피해자의 행동을 탓하며 꽃뱀이니 몰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않으면서 다수대중의 2차 가해를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폭력이 사라지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무엇이 폭력인지 또 무엇이 존엄인지에 대해 미투 이후의 우리 사회가 근본부터 다시 묻고 다시 성찰하고 정립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족 2021-01-31 06:31   좋아요 3 | URL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 조직(정의당)의 안위 따위 관심없다, 2. 작은 죄를 크게 벌하면 큰 죄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거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1. 제가 말하고 싶은 조직은 정의당이 아닙니다. 국가공동체입니다. 저는, 조직이 건강한 상태는 ‘야, 이 미친 놈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추행이 벌어졌을 때 당한 사람이 바로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로 말 할 수 있고, 그 상황에서 해소될 수 있으면 그건 그대로 건강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냐면, ‘못 해, 어떻게 말해?‘라고 하고는 절영지회의 미녀처럼 더 높은 권위로 달려갑니다. 절영지회가 고사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 시대가 왕의 미녀를 추행하고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일 겁니다. 국가 안에 남성과 여성이 있고, 국가가 여성만을 보호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2. 경중을 따져야 하는 이유는, 장혜영의원이 법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국민들 간 분쟁이 벌어졌을 때, 심판하는 근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작은 도덕적 해이로도 큰 질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타가 오히려 정치적 혐오를 키운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나는 그렇게 살지 않지만 정치인은 그러면 안 되지,라는 모순된 말이 민주주의 안에서 시민이 가져야 할 태도일까요? 결국 정치인들이 벌이는 언설을 자기 자신에게도 비춰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게다가, 그런 자신의 믿음을 법으로 만들어 나를 통제할 사람들인데요.

저는 미투의 처음을 좋아합니다. ‘무언가 성적인 문제로 괴로움을 토로하는 젊은 여성 곁에서 나이든 여성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단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요. 여기서는 그 일이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라는 위로입니다. 긴 인생에서 짧은 순간, 성적인 문제를 과장해서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성적으로 해석하고 바짝 긴장해있는 특정한 시기에 부풀리는 위험들이라고 다독이는 말입니다. 지금의 미투처럼 나의 불안으로 상대를 처벌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공쟝쟝 2021-01-31 08:08   좋아요 6 | URL
미투의 변질에 대한 염려와 불만 잘 알겠습니다. 해일 오는데 조개 줍는 소리 하시네요.

추풍오장원 2022-10-2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족님의 이 글을 최근에 다시 읽게 됩니다... 올바름으로 무장한 파시스트들 정말 넌덜머리가 납니다. 없는 사람 배곯는 사람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는 말뿐인 사람들..

별족 2022-10-20 11:04   좋아요 1 | URL
제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어서, 저는 좀 안타까운 맘이 큽니다.
 

회사의 신문스크랩은 원자력관련 이슈를 모아서 보여줍니다. 지난 금요일, 회사의 신문스크랩에서 한겨레의 아침햇발 '국회의사당에 원전을 짓자'(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0669.html)를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설명할 말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커런트 워'란 영화에서 에디슨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고압의 전류로 소를 죽이고, 교류가 위험하다는 여론전을 펼칩니다. 교활한 여론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기의 대중적 이용은 교류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교류와 직류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선택하게 됩니다. 기술은 칼과 같은 도구일 뿐이고, 선택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지금 옳은 게 먼 미래에도 과연 옳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저는 그 논설이 에디슨이 펼쳤던 교활한 여론전처럼 독자들을 두려움을 조장하여 조종할 수 있는 존재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논설은 '원자력발전소가 안전하다면 수소충전소를 지은 것처럼 국회의사당에 원전을 짓고 그 주위에는 주상복합을 지어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살게 하라'고 합니다. 아직까지 수소충전소만큼 컴팩트한 원자력발전소는 없는 상황에서 그 말은 그저 '원자력을 안전하다고 말하는 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논설위원님은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토론에 대해 토론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토론의 결과는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 밖에 없지만, 토론의 과정은 민주주의를 학습할 수도 있고, 공동체의 가치관을 더 단단하게 할 수도 있고, 무언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의 깨달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의 과정에서 협잡이나 사기, 협박이나 조롱이 끼어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상대방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그 선택을 했다고 단정하고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결국은 얻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단정하고 조롱하는 토론자에게 어떤 사람이 동조하고 싶어할까요? 결국에는 토론을 보고 결정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 외면하게 만듭니다. 어떤 결정이든 이뤄지고 난 다음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토론자로서의 예의를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