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죽음과 그 아들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북한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붕괴? 생존?

아니.. 북한은 도대체 어떠한 나라인가?

 

북한의 "국가정체성"은 정말 있는가? 정체성, 이데올로기.. 권력의 논리이고 시스템의 논리가 아닐까? 정체성은 권력에 의해 '발명' 된 것은 아닐까.

 

위계사회를 이루는 동물집단의 우두머리에게는 이데올로기가 필요없다. 물리적 완력만 있으면 되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보다 교묘해졌다. 물리적 완력에 정신적 완력을 더한다. 그게 노동대비 효율적인 통제기제고 동원기제일 터이니. 권력의 통치기제는 점점더 "교묘"해진다. 끝이 없다.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의 핵심은 "유격대 국가"이다. 항일빨치산파들의 유격대 이데올로기가 북한 인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라는 것. 마이어스의 <왜 북한은...>은 북한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인종적 민족주의"라고 본다. 순수한 조선인민, 어린아이같은 조선인민, 백지같은 조선인민.. 이러한 사고가 끊임없이 주입된다는 것. 따라서 지배권력은 그들의 자애한 어머니로 인식된다는 것. 

 

이에 비해 김성보, 이종석의 <북한의 역사>는 해방이후 현재까지 북한의 역사를 담담히 그려낸다. 특별히 북한은 무엇이다라고 규정내리지 않는다. 외국연구자들과 국내연구자들의 차이일까. 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북한이 매우 특별해 보일 수밖에 없을터.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일지도 모른다.

 

북한을 보며 남한을 생각해 본다. 평양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 개선문, 일사불란한 매스게임.. 이런 걸 보며 우린 전체주의를, 통제를, 규율을 떠올린다. 그만큼 북한권력의 통제기제가 초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통제술의 초급단계다.

 

남한은 어떠한가. 권력(시스템)의 통제술은 보다 교묘해졌다. 자유? 우리는 과연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생존하기 위해 스펙에 목매고, 멀쩡한 외모를 뜯어고칠수밖에 없는 우리는 과연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생존하기 위해 영어논문에 목매는 지식분자들은 과연 이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복지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신체를 관리당하고 노동기계로 최적화되는 건 또 무엇인가? 

 

북한을 보며 코웃음 치는 우리들은 시스템에 의해 보다 교묘하게 통제당하고 또 동원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거대한 매트릭스속의 부속품. 

 

물론 여기서 사고를 멈춘다면 우린 실존의 문제를 놓치게 된다. 먹물들의 철부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남한의 교묘해진 통제술을 비판하는 것이 북한의 초보적 통제술이 정당화되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양쪽 모두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린 다시 근대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깔고 있는 '성찰적' 근대성으로.

 

북한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그동안의 통제기제는 더이상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 따라서 통제기제가 보다 교묘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인류사에서 시스템의 최고난도 통제기제가 자본주의라는 것. 김정은이 이런 전후를 이해할만큼 영리할까.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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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말엔 무언가 이기적이고 야비한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제정치에서도 현실주의 이론가들은 강대국의 권력정치를 옹호하는것이냐?라며 비난받기 일수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현실주의 패러다임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국제정치학계가 내놓는 정책적 처방들을 보자. 결국 미국의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들은 가끔씩 가치와 분석을 혼동한데는 있다. 가치는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이고 분석은 참과 거짓에 관한 문제이다. 현실주의적 분석을 하면 자동적으로 현실주의적 가치를 옹호한다는 게 아니다. 이상주의적 가치를 갖고도 얼마든지 현실주의 분석을 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1, 2차대전을 겪으면서 일군의 학자들은 국제정치에 대한 이상주의적 분석에 맹공을 퍼붓는다. 그들은 무정부성이 판치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것. 그래서 인간들은 합리적 사고와 교육과 이성의 발전을 증진시키고 그를 기반으로 국제법,기구를 만든다면 국제평화가 이뤄질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금새 유럽각국엔 파시즘이 들끓고 종국에는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2차대전이 터졌다. 이상주의적 사고가 2차대전을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히틀러라는 괴물을 잉태시켰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들 일군의 학자들이 바로 '고전적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니버,카,모겐소 등이다. 정확히 말해, 이들은 '윤리적' 현실주의자들이다. 방점은 윤리적에 찍힌다. 현실주의는 그러한 윤리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즉, 세계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은 결국 국가간 탐욕과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라는 것.

 

전후 국제정치학에선 가치문제가 사라졌다. 특히나 신현실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래, 국제정치분석은 마치 뉴턴이론을 갖고 물리세계를 설명하듯, 연구자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분석만 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멋드러지게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단지 개인의 도적적 판단에 맡길뿐이다.

 

전간기의 이상주의자들이 분석 무시한 가치에만 빠져있었다면, 최근의 현실주의자들은 가치가 없는 '기계적' 분석에 함몰되어 있다. 도플갱어다.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있고.. 또 업으로 하려고 한다면.. 고전적 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듯하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이 또한 하나의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연방이나 보다 완벽한 국제연맹의 청사진과 같은 유토피아에  비해 최근의 추세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한 우아한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공사를 보다 확실히 다져둘 필요가 있다."

 

E.H.Carr, "20년의 위기" (김태현 역)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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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언젠가부터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희대의 뜬구름 잡기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인간중심적인..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인간의 보잘것 없는 시각에서 이데올로기를 전쟁을 평화를 권력을 그리고 종교를 '재단'한다. 또 그게 진리라며 다툰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초고도 문명의 외계인이 지구 가까운 곳에 전망대를 세워놓고 인간들을 관찰하고 있다면.. 그들은 어떠한 조사보고서를 쓸까? 인간이 밀림에서 위장막을 덮어쓴채 동물을 탐색하듯. 그들의 탐사보고서는 바로 <털없는 원숭이>의 내용과 닮아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지금에서야 읽었다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또 행운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우리 인간이란 털없는 원숭이의 일거수 일투족이 동물적 습속의 결과물일 뿐인지 반성케 하는.  

다른 동물과 확연히 다른 유아독존 인간들의 찬란한 문명? 그렇게 고상한 인간들은 여전히 서로 대규모 살육을 하고 이젠 스스로 멸족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고상한 인간들이. 차라리 동물들의 전쟁이 보다 순수하다. 그들의 전쟁은 죽음이 아니라 경쟁자의 도망침, 기껏해야 복종이다.  

그러나 인간의 전쟁은 상대의 전면적 죽음이다. 최신무기는 상대 경쟁자가 도망하거나, 복종하고 있다는 상황을 인식할 기회를 박탈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털없는 원숭이들의 전쟁을 그 어떤 동물들의 그것보다 위험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민주주의, 사회주의.. 뭐 이런 고상한 이념들은 또 무엇이던가? 영장류들이 최초 숲속에서 나와 들판에서 다른 육식동물들과 경쟁에 내몰렸을때 더 이상 그들은 숲속에서 처럼 일인지배하의 강력한 위계체제를 지탱할 수 없었다. 다른 육식동물과 먹이 경쟁을 하려면 상호간 협동이 필요했던 것. 위계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낮은 위계에 있는 구성원들의 일정한 밥그릇도 약속해 줘야 했던 것. 우리가 거품무는 민주주의,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기원은 그러한 생물학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좋은' 지식은 성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성찰이란건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관찰자 입장에서 반성해 보는 것일게다. 현재의 너무나 인간중심적 사회과학은 결코 성찰적일 수가 없다. 거들먹 거리는 사회학 연구자들은 필히 자연과학을 수용해야 한다. 물리학에서, 생물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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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를 열심히 보고 있다. "명"드라마다. 한가지. 드라마속 경복궁 촬영이 나오는데.. 혹여나 궁을 파괴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노파심.   
 

세종.. 애민군주? 그렇다. 어쨌든 백성을 위해 한일이 많았을터이니.  그러나 그가 그런 일들을 한 것을 '애민'이라는 너무 추상적 한 단어로 돌리긴 무언가 부족하다. 역시 권력관계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조선정치는 개국초기부터 고종때까지 끊임없는 왕권과 신권(척신들, 외척들, 사림들)의 싸움판이었다. 주로 신권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면 간간히 신권을 압도했던 왕이 나타나곤 했다. 그들이 바로 태종이고, 세종이며, 세조였으며, 연산군 이었고, 광해군, 정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원군이었다. 

왕이 신권을 억누르는 방법은 여러가지였을터. 태종,세조 등이 칼을 이용했다면 세종이 선택한건 바로 "대중노선"이었다. 헤게모니 신권을 타파하기 위해 백성들을 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 그것이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가 아니었을까. 일종의 포플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어디에나 그런 전략은 사실 드문게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도 그 뒤엔 대원군의 대중동원이 있었다. 20세기 중국의 마오쩌둥의 대중노선도 그 전형적 예였으리.. 

 

 

 

 

 

 

 

그렇다. 조선!  

우리의 저 더러운 현대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그것에 맞닿아 있는 조선 오백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싫어도 그래야 한다. 

<조선의 힘>은 글자 그대로 조선의 힘. 그래도 살맛나는 시절이 아니었겠는가라는 소리다. <망국의 역사>.. 김기협은 조선은 이미 인조반정.. 더 나아가 세조의 왕위찬탈에서 끝났어야 하는 역사로 서술한다.  

누가 옳은가?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그 어디에 정답이 있겠냐만..) 누가 옳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권력"의 문제로 나아간다. 조선이고 나발이고.. 권력은 정당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착한 권력 따윈 없다. 이런 어설픈 생각이 들어서일까. 김연수의 <조선 지식인의 위선>이란 책은 와닿는다. 정말. 저자가 누군진 잘 모르지만..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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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의 핵심은 결국 권력 분석이다. 사회관계의 권력은 자연세계의 중력을 의미한다. 빅뱅이후 어디서나 중력이 작동 했듯 인간의 모든 관계는 결국 권력관계일 수밖에 없다. 권력은 DNA보다 나이가 많다.  

권력은 무엇인가?   

"Matrix is control" 

영화 매트릭스 속 모피어스의 대사.  결국 권력은 매트릭스며, 매트릭스는 권력이다. 통제다.

"배후 디비기!"

푸코의 연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배후 찾기다. 그 사회적 권력의 배후 디비기.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아니 수용하라고 강요당하는) 권력관계의 작동 메카니즘을 분석하겠다는 거. 권력에 대한 고고학이고 계보학이다. 

정신병은 순수한 의학적 병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정치적이다. 사회적 위험인물에 대한 딱지 붙이기. 정신병은 발명된 것이다. 감옥, 학교, 병원.. 건축구조는 동일하다.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사람에 대한 감시를 쉽게 하는 구조. 감시가 있고 훈육이 있으며 처벌이 있다. 그리고 인간을 규율화시키는 또다른 메카니즘.. 신자유주의. 

   

 

 

  

  

 

 

"그러니까 규범은 권력에의 요규를 담고 있다. 규범은 단순히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권력의 근거와 합법성을 마련해 주는 거점이다."  (푸코가 캉길렘을 인용하며. 비정상인들 p. 69)  

가끔씩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석과 가치의 구분을. 경험주의 논리를 갖고 세상을 설명한다고 그가 경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다. 논리와 가치의 구분을 보호해야한다. 꼭 정글속으로 들어가야만 게릴라가 되는 건 아니다. 학적 게릴라는 왜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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