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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데이먼 주연의 굿윌헌팅이란 영화가 있다. 천재지만 불우한 윌. MIT청소부로 일하고 또 길거리에선 쌈박질 뿐이다. 그러다 한 수학과 교수에게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그는 윌을 자신의 친구인 심리학 교수 션(로빈윌리엄스)에게 데려간다. 얘 정신상태 좀 고쳐달라고. 윌과 션의 첫 대면. 션의 연구실. 연구실 책을 훓어보던 윌이 이런 말을 한다.  

"당신 하워드진 읽어봤어? 미국민중사 말야.. 죽인다고" 

하워드 진. 미국의 대표적 좌파 역사학자. 그의 글을 읽을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글이 솔직하다. 꾸밈이 없다. 그리고 성찰이 있다. 머리로 쓴 글이 아니라 가슴으로 쓴 글들.  

가끔씩 미국애들(정확히는 한국계 미국인)과 얘기하다가 하워드진 얘기를 꺼낸다. 모른다. 슈퍼파워 미국만세 모드. 연이은 '사상교육'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위대한 조국 미국이 그렇게 아름다운 국가는 아니었구나라며 실토한다.  

 

 

 

 

 

 

 

모두 좋은 책들이다. 감동의 물결. 내용이야 이런저런게 있겠지만.. 역시 핵심은 하나다. 국가위에 민중이 있다고. 따라서 국가이익을 위해 민중의 이익을 결코 침해할 수 없다고. 민중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고 싸우자고. 그리고 지배권력이 벌인 전쟁에 반대하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떤 딴지를 걸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워드 진이 옳다. 

"그 어떤 정부라도 생명, 자유, 행복추구에 대한 목표를 파괴하면 그 정부를 바꾸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인민들의 권리이다." - 미국 독립선언서 (권력을 이긴 사람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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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에서 푸코의 The birth of biopolitics 가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일단 반갑고, 또 역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소승은 푸코 전공자도.. 그렇다고 철학 전공자도 아니지만..

얼마전 모 저널에 푸코주의.. 어쩌고 하는 논문(현재 출판작업중)을 투고한 적이 있다.

아마추어리즘에 충만한 논문이고.. 또 그래서 더더욱 애정어린 글이다. 

 

그 논문에서 인용한 푸코의 핵심 문헌은 3가지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앞 두권은 국역본과 영역본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읽었고..

생명관리정치는 번역이 안돼 영역본을 읽었다.

불어원전을 보는게 최고겠으나.. 불어라곤 고딩때 예쁜 불어선생님한테 배운게 전부다.

세권 모두 집필서가 아니라 푸코가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연록이다.

 

공부를 하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 "푸코 천재 맞다"

후기 푸코의 방법론을 푸코는 스스로 "계보학"이라 칭한다.

쉽게 눈으로 보이는 거.. 상식적인 거.. 뻔한거.. 이런걸 뒤집어 보자는 거다.

전복적 사고.. 앎의 봉기.. 상식의 배후에 자리잡은 권력관계 뒤비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로 주권권력을 다루고..

안전영토인구는 자유주의 통치성을..

마지막 생명정치는 신자유주의를 다룬다.

 

모두 놀라운 저작들이지만..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푸코의 혜안이 더더욱 돋보인다.

레이건.. 대처류의 권력들이 씨앗을 퍼뜨린 신자유주의..

이후 30년동안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모든 가치의 핵심기준은 딱 하나. "거 돈되니?"

 

인간성은 파괴되고.. 공동체도 해체되고..

모든 인간은 효율성을 대원칙으로 하는 체제의 충순한 노동기계가 되고 말았다.

대학? 연구의 질이 아니라 논문 편수로.. 교수가 되고 연구비를 챙긴다.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진득한 연구는 없고.. 붕어빵 논문들만 양상된다.

논문 기계가 된다.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면을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포착하고 해부한다.

푸코는 그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전후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미국의 시카고 학파에서 찾는다.

모두 국가개입에 대한 혐오,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독일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더 막나간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모든 생활.. 결혼, 육아, 범죄 등등까지도 효율성의 논리로 재단한다.

인간을 존엄성을 가지는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 본다.

"인적 자본(human capital)" 무시무시한 단어다.

영화 매트릭스속 인간과 닮았다.

가상현실은 찬란하지만.. 그저 가상일뿐이다.

현실속 인간은 인공자궁에서 갇혀 기계들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는 인간 건전지일 뿐이다.  

 

그러나 푸코가 신자유주의의 핵심으로 꼽는 건 뭐니뭐니 해도 "경쟁"이란 단어다.

그는 강변한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을 일인기업가로 만든다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된다고.

남보다 더 나은 것을 생산할때에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30년.. 우리네 사회를 보는 것 같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복지의 수혜자가 아니라.. 개인의 역량강화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외되고.. 배제되고.. 탄압되는가. 

 

인간도 생물이니 진화의 대상일터이고.. 그렇다면 경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어떤 경쟁인가라는 문제다.

너죽고 나살자의 경쟁인가.. 아니면 너살고 나살자식 경쟁인가.

동물세계를 보면.. 먹이사슬 관계를 빼고(그것도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동류끼리는 너살고 나살자식 논리가 지배한다. 고상한 말로 상생이라 하는가.  

언젠가 다큐에서 남극대륙의 추위에 집단적으로 대항하는 펭귄들의 모습에 감동받은적이 있다.  

수천마리의 펭귄들이 밀집대형을 이뤄 거센 눈보라를 견뎌내는 장면.

 

신자유주의가 괴물인 것은 바로 이런 동류 생물들의 연대의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털없는 원숭이 인간" 지구상 유일하게 한종만 있는 생물인 인간들의 공동체는 철저히 짓밟힌다.

어쨌든 이런 신자유주의도 이젠 끝물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태껏 친재벌 정치권력이 요새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이던가.

경제민주화.. 복지.. 국민행복.. 

그들의 카멜라온 자기변신이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말이라도 고맙다.

 

푸코의 논의는 한국정치판에서 돌아가는 양태를 뒤집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준다.

결국 권력이 원하는 국민행복이라는 것은..

지리산에 반달곰을 풀어놓고 우리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다고. 

물론 그 반달곰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전자 장치가 달려있다.

정말 행복할까?

 

푸코는 말한다.

권력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위험한 거라고.

어떤 이가 푸코보고 그럼 당신의 권력은 또 뭐냐? 저항권력은 권력 아닌가? 라고 비판하자..

푸코는 또 이렇게 답한다.

 

"그래.. 우리는 우리에 대항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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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2012년 한중일 삼국의 체제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왜 북한은 여전히 반미 프레임에 갇혀 있고..

왜 일본은 여전히 제국주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왜 중국은 인민의 쟁명을 두려워하는가. 

 

세권의 책은 이에 대해 답한다.

존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는 1945년 패전직후 맥아더의 점령정책을.. 

첸리첸의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 반우파투쟁을..    

한성훈의 <전쟁과 인민>은 1950년 한국전쟁을..

그 원인으로 든다.

 

일본. '대동아전쟁'의 최고 책임자는 천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후 살아남는다. 온전히 미소 세력경쟁의 덕택이었으리.

일본의 전쟁책임은 유예되고.. 일본인 스스로는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들의 전쟁으로 죽어간 수천만명의 동아시아인들은 망각되면서.

 

중국. 마오는 모든것(물론 권력까지)을 비판하라며 쌍백운동을 부추긴다.

그러나 한달 후 말을 바꿔 쌍백운동 참가자들을 우파로 몰며 탄압한다.

사회주의 민주를, 공산당의 진정성을 믿었던 비판세력은 마오에게 배신당했다.

중국공산당의 '무오류성'은 바로 이 반우파투쟁을 통해 신성화된다. 지금까지.

 

북한. 김일성 정권은 한국전쟁이 살렸다. .

전쟁에 승리해 산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인민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미군에 의한 인민살상은 북한정권의 온전히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반미프레임은 전략적으로 수립되고 이용되었다. 역시 지금까지.

 

푸코는 권력을 군주권력, 규율권력, 그리고 조절권력으로 나눈다.

군주권력은 생사를 박탈하는 권력이고,

규율권력은 개개 신체에 작동해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권력이며,

조절권력은 자유롭게 나두는 권력이다. 방목이다. 물론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들은 징벌당한다.

이 세가지 권력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항상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이런게 맞다면 2012년 일본은 조절권력이 강하며..

중국과 북한은 군주권력과 규율권력이 강하다.

이런 권력양태는 미국에 의해(일본), 반우파투쟁(중국), 한국전쟁(북한)에서 잉태되었다.

평화로운 동북아질서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들 역사적 기원들의 '민주적' 해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권력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말이다.

필요한 것은 역시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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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죽음과 그 아들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북한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붕괴? 생존?

아니.. 북한은 도대체 어떠한 나라인가?

 

북한의 "국가정체성"은 정말 있는가? 정체성, 이데올로기.. 권력의 논리이고 시스템의 논리가 아닐까? 정체성은 권력에 의해 '발명' 된 것은 아닐까.

 

위계사회를 이루는 동물집단의 우두머리에게는 이데올로기가 필요없다. 물리적 완력만 있으면 되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보다 교묘해졌다. 물리적 완력에 정신적 완력을 더한다. 그게 노동대비 효율적인 통제기제고 동원기제일 터이니. 권력의 통치기제는 점점더 "교묘"해진다. 끝이 없다.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의 핵심은 "유격대 국가"이다. 항일빨치산파들의 유격대 이데올로기가 북한 인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라는 것. 마이어스의 <왜 북한은...>은 북한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인종적 민족주의"라고 본다. 순수한 조선인민, 어린아이같은 조선인민, 백지같은 조선인민.. 이러한 사고가 끊임없이 주입된다는 것. 따라서 지배권력은 그들의 자애한 어머니로 인식된다는 것. 

 

이에 비해 김성보, 이종석의 <북한의 역사>는 해방이후 현재까지 북한의 역사를 담담히 그려낸다. 특별히 북한은 무엇이다라고 규정내리지 않는다. 외국연구자들과 국내연구자들의 차이일까. 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북한이 매우 특별해 보일 수밖에 없을터.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일지도 모른다.

 

북한을 보며 남한을 생각해 본다. 평양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 개선문, 일사불란한 매스게임.. 이런 걸 보며 우린 전체주의를, 통제를, 규율을 떠올린다. 그만큼 북한권력의 통제기제가 초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통제술의 초급단계다.

 

남한은 어떠한가. 권력(시스템)의 통제술은 보다 교묘해졌다. 자유? 우리는 과연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생존하기 위해 스펙에 목매고, 멀쩡한 외모를 뜯어고칠수밖에 없는 우리는 과연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생존하기 위해 영어논문에 목매는 지식분자들은 과연 이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복지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신체를 관리당하고 노동기계로 최적화되는 건 또 무엇인가? 

 

북한을 보며 코웃음 치는 우리들은 시스템에 의해 보다 교묘하게 통제당하고 또 동원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거대한 매트릭스속의 부속품. 

 

물론 여기서 사고를 멈춘다면 우린 실존의 문제를 놓치게 된다. 먹물들의 철부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남한의 교묘해진 통제술을 비판하는 것이 북한의 초보적 통제술이 정당화되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양쪽 모두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린 다시 근대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깔고 있는 '성찰적' 근대성으로.

 

북한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그동안의 통제기제는 더이상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 따라서 통제기제가 보다 교묘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인류사에서 시스템의 최고난도 통제기제가 자본주의라는 것. 김정은이 이런 전후를 이해할만큼 영리할까.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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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말엔 무언가 이기적이고 야비한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제정치에서도 현실주의 이론가들은 강대국의 권력정치를 옹호하는것이냐?라며 비난받기 일수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현실주의 패러다임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국제정치학계가 내놓는 정책적 처방들을 보자. 결국 미국의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들은 가끔씩 가치와 분석을 혼동한데는 있다. 가치는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이고 분석은 참과 거짓에 관한 문제이다. 현실주의적 분석을 하면 자동적으로 현실주의적 가치를 옹호한다는 게 아니다. 이상주의적 가치를 갖고도 얼마든지 현실주의 분석을 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1, 2차대전을 겪으면서 일군의 학자들은 국제정치에 대한 이상주의적 분석에 맹공을 퍼붓는다. 그들은 무정부성이 판치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것. 그래서 인간들은 합리적 사고와 교육과 이성의 발전을 증진시키고 그를 기반으로 국제법,기구를 만든다면 국제평화가 이뤄질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금새 유럽각국엔 파시즘이 들끓고 종국에는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2차대전이 터졌다. 이상주의적 사고가 2차대전을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히틀러라는 괴물을 잉태시켰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들 일군의 학자들이 바로 '고전적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니버,카,모겐소 등이다. 정확히 말해, 이들은 '윤리적' 현실주의자들이다. 방점은 윤리적에 찍힌다. 현실주의는 그러한 윤리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즉, 세계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은 결국 국가간 탐욕과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라는 것.

 

전후 국제정치학에선 가치문제가 사라졌다. 특히나 신현실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래, 국제정치분석은 마치 뉴턴이론을 갖고 물리세계를 설명하듯, 연구자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분석만 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멋드러지게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단지 개인의 도적적 판단에 맡길뿐이다.

 

전간기의 이상주의자들이 분석 무시한 가치에만 빠져있었다면, 최근의 현실주의자들은 가치가 없는 '기계적' 분석에 함몰되어 있다. 도플갱어다.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있고.. 또 업으로 하려고 한다면.. 고전적 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듯하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이 또한 하나의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연방이나 보다 완벽한 국제연맹의 청사진과 같은 유토피아에  비해 최근의 추세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한 우아한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공사를 보다 확실히 다져둘 필요가 있다."

 

E.H.Carr, "20년의 위기" (김태현 역)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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