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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말엔 무언가 이기적이고 야비한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제정치에서도 현실주의 이론가들은 강대국의 권력정치를 옹호하는것이냐?라며 비난받기 일수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현실주의 패러다임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국제정치학계가 내놓는 정책적 처방들을 보자. 결국 미국의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들은 가끔씩 가치와 분석을 혼동한데는 있다. 가치는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이고 분석은 참과 거짓에 관한 문제이다. 현실주의적 분석을 하면 자동적으로 현실주의적 가치를 옹호한다는 게 아니다. 이상주의적 가치를 갖고도 얼마든지 현실주의 분석을 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1, 2차대전을 겪으면서 일군의 학자들은 국제정치에 대한 이상주의적 분석에 맹공을 퍼붓는다. 그들은 무정부성이 판치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것. 그래서 인간들은 합리적 사고와 교육과 이성의 발전을 증진시키고 그를 기반으로 국제법,기구를 만든다면 국제평화가 이뤄질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금새 유럽각국엔 파시즘이 들끓고 종국에는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2차대전이 터졌다. 이상주의적 사고가 2차대전을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히틀러라는 괴물을 잉태시켰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들 일군의 학자들이 바로 '고전적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니버,카,모겐소 등이다. 정확히 말해, 이들은 '윤리적' 현실주의자들이다. 방점은 윤리적에 찍힌다. 현실주의는 그러한 윤리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즉, 세계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은 결국 국가간 탐욕과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라는 것.
전후 국제정치학에선 가치문제가 사라졌다. 특히나 신현실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래, 국제정치분석은 마치 뉴턴이론을 갖고 물리세계를 설명하듯, 연구자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분석만 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멋드러지게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단지 개인의 도적적 판단에 맡길뿐이다.
전간기의 이상주의자들이 분석 무시한 가치에만 빠져있었다면, 최근의 현실주의자들은 가치가 없는 '기계적' 분석에 함몰되어 있다. 도플갱어다.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있고.. 또 업으로 하려고 한다면.. 고전적 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듯하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이 또한 하나의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연방이나 보다 완벽한 국제연맹의 청사진과 같은 유토피아에 비해 최근의 추세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한 우아한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공사를 보다 확실히 다져둘 필요가 있다."
E.H.Carr, "20년의 위기" (김태현 역) p.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