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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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를 문학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성의 시각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작품 속의 필력과 세계관만으로는 한 명의 소설가를 실재적이고 입체적으로 아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드리블과 패스만으로 펠레의 인간성을 알 수 없고, 가창력만으로 이승철의 삶의 소신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소설은 소설가의 필력과 사유와 의지로 창조된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에 대한 다양한 '객관'을 얻어낸다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작가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나마 간접적으로 작가에 대한 탐구를 객관화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픽션'이 아닌 '논픽션'의 글로 작가를 읽는 것이다. 소설이 아닌 산문이나 수필로 만나게 되면 소설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소설가를 탐구하는 데 보다 객관적이 된다. 소설의 서사는 작가적 상상력이 기반하지만, 수필과 산문은 작가의 진실된 고백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내가 매번 소설가가 쓴 수필집을 만날 때마다 흥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1C가 낳은 한국문학의 특별한 아이콘 정이현의 첫 산문집 『작별』은 소설가 정이현을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인 텍스트다. 작년에 출간된 정이현의 산문은 '작별'과 '풍선'의 제목으로 가름되어 두 권으로 구성되었다. 두 권 중에서 내가 『작별』을 먼저 손에 든 이유는 책의 부제 때문이다.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는 인상적인 부제는 즉각 내 마음속에 꽂혀 책의 선택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그렇게 정이현의 산문 『작별』은 내 손에 들어왔다.

  어떤 책은 덮고 난 후에 더 가까이 사귀게 된다. 작별하고 나서야 한 사람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책의 서두 <작가의 말>에서 정이현은 위의 문장으로 산문을 시작한다. 책 제목 '작별'이 갖는 실질적 의미와 작가의 책에 대한 사색, 그리고 이 책의 골격까지 정갈하게 메타포한 문장이다. 책 속에는 작가의 일상적 고백과 주관, 다양한 책을 읽은 후의 느낌과 단상, 소설가로서의 고독과 번민이 매우 잘 담겨 있다. 수많은 '당신'을 만난 것도 책이었고 수많은 '당신'을 떠나보낸 것도 책이었다, 라고 말하는 작가 정이현. 과거 읽었던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며 자신의 독서 세계와 주관적 단상을 늘어놓는 진솔한 그녀의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보다 '객관적'으로 작가 정이현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책 속의 「가득하게」 카테고리에 있는 다섯 편의 산문이 자못 인상적이다. 작가는 다섯 편의 산문 속에서 소설가로서의 책읽기에 대한 열정과 자존감, 문자문화의 본질적 가치와 위대함, 문학적 위기에 직면한 한국 문단의 아픈 현실 등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서술했다. 대형서점에서 점점 그 차가 벌어지고 있는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의 지리적 점령비율의 현실 앞에서 독자에게 '응원'을 주문하는 소설가 정이현의 목소리가 처연하다. 그리고 그 처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나 또한 가슴이 일렁인다.

  잘 다듬어지지 않는 산문집은 '산만집'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이현은 산만한 글의 구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앞부분의 일기와 같은 몇몇 글을 제외하고는 전부 책을 읽은 후의 리뷰의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어 산문집의 전체적 통일성을 보증한다. 문학을 위시하여 다양한 방면의 책을 두루 읽고, 그 읽음 속에서 자신과 사회를 뒤틀고 해석하는 작가의 글담이 흥미있다. 비단 문학과 사랑뿐만 아니라 소외된 여성성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신랄한 작가의 논지가 담겨있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균형적이다.

  매번 확인하지만 정이현은 글을 참 잘쓰는 작가다. 문학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고민에 대한, 사회적 오류와 모순에 대한 정이현의 솔직하고 담백한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산문집의 존재성은 충분하다. 글 잘쓰는 한 인기 여류작가의 타자 문학으로 관통한 사랑과 문학과 사회에 대한 '논설'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산문집을 살포시 권한다. 그리고 한 세트로 함께 구성된 다른 산문 『풍선』으로 손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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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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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은 과연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엉뚱하면서도 흥미있는 질문이다. '제국주의'의 의미가 세계의 변화 속에서 점점 확장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결국 크고 강하고 힘센 나라가 작고 약한 나라에 침투하여 군사적·경제적 영향력 및 이익을 꾀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군사력을 위시한 강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촌놈'이 주는 어감은 그러하지 못하다. 어떻게 촌놈이 제국주의를 노려볼 수 있단 말인가.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흥미있는 제목 못지않게 신선한 미래의 전망을 전제에 두고 설파하는 경제 이야기다. 『88만원 세대』를 첫 번째로 '한국경제대안 시리즈'의 4부작을 완성해가고 있는 저자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그 시리즈의 세 번째로 배치했다. 작금의 동아시아의 정치적·경제적·역사적 상황에 기인하여 앞으로 한·중·일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신선하면서도 자못 어두운 미래상을 제시한다. 또한 점차 제국주의적으로 흐르는 한국의 현재상을 우려한다. 그러면서 '평화'라는 소중한 가치를 코드화하여 경제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역설한다. 

  한국전쟁 이후 평온하기만 한 동아시아의 현대사에 전쟁이라는 극히 어두운 미래상을 예견한다는 것이 무리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 중국과의 동북공정 분쟁, 그리고 북한과의 대치 상황은 그 가능성을 제로화하지 못하는 요소들이다. 더욱이 국제유가는 계속해서 급등하고, 대체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세 나라의 피나는 혈투는 경제전쟁으로 불리우며 동아시아 지역에 묘한 긴장감을 드리우고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 이후 더욱 속도를 내고 있는 한국의 제국주의 경향을 꼬집는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감행한 이라크 파병을 비롯하여 한미FTA 협상 속의 내밀한 요소들, 2002년 들끓었던 월드컵 쇼비니즘, 황우석 사태와 <디-워> 논쟁에서 드러난 민족적 포퓰리즘, 2007년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경제영토'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로 치닫는 한국의 현재상을 저자는 신랄하게 조명한다. 그러면서 역사상 한 번도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더욱이 운영할 능력조차 갖지 못한 '촌놈들'의 제국주의라 이기죽거린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 경향이 일본과 중국의 그것과 맞닥뜨릴 때에 벌어질 지도 모를 전쟁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선포한다.

  저자가 이 책의 주요 독자층을 지금의 10대에 맞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절대악이며,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운 시기에 만들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신념이 책 속에 깊게 배어 있다. 지금의 10대 젊은이들이 훗날에 일어날지 모르는 먹구름을 책임지는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청소년들이 '평화'라는 인류 최고의 가치를 신중하게 인식하고, 경제에 어떻게 스며들어 작동하며, 그로 인한 미래가 어떠할지 희망하며 역설하는 저자의 논지는 일견 공감된다.

  기실 그렇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지구 공동체를 밀림의 숲으로 만들어버렸다. 소위 '정글자본주의'로 불리는 신자유주의는 잘사는 나라가 약육강식의 논리로 더욱 잘사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저개발국가의 가난과 소외는 외면되고, 개발도상국가의 선진국 진입은 요원하다. 미국에 의해 자행된 이라크 전쟁도 평화를 위함이 아닌 석유를 위한 경제전쟁이다. 중동의 석유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초강대국 미국의 노림수가 이라크 전쟁의 내밀한 계획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은 주류 경제학으로 대두되며 당분간 세계 경제를 주도할 전망이다. 국가간의 무역장벽은 점점 무너질 것이며, 철저한 국익과 시장의 논리로 침투받게 될 것이다. 한미FTA도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에 맞닿아 있는 아이콘이다. 최근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논란 또한 신자유주의의 상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경제지형의 움직임은 철저한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를 건설하면서 건조하고 어둡고 긴장감있는 지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인간성은 피폐해지고, 평화보다 경제적 이익이 우위에 서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는 인간을 위한 원리이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 때에 영장으로서의 위대함이 빛을 발한다. 인간이 인간성을 잃고, 오로지 자신과 자국의 이익을 위한 존재로 살아간다면 인류는 파멸의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전쟁을 위한 산업은 돈이 되고, 평화를 위한 경제는 돈이 되지 않는 오류와 모순의 사회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의 미래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에 반대한다"라는 단 한 문장을 자신의 파토스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희망은 보증되지 않을까.

  무조건 '착한' 경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가치를 언급하는 것이다. 220년 전의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곱씹는다면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인류사에 얼마나 소중한 가치였는지를 재인식하게 된다. 한 번도 식민지를 건설해보지 않은 한국이 어설픈 제국주의 논리로 경제적 비대함을 꾀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그 기반 위에 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힘과 정신력을 길러줘야 한다. 바로 거기에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미래가 있으며, 동아시아의 공존과 상생이라는 당연한 희망이 있다. 

  비록 어둡고 암울한 미래상을 전제한 경제학이지만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망에 대한 예방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의 존재성은 부각된다. 냉전이 종식된 지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다. 동아시아 또한 영원히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가 비가 오기 전에 만들어졌던 것처럼, 평화도 평화로울 때에 그 기준과 기반을 만들어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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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역사
아루카 나츠키.유이 다이자부로 지음, 양영철 옮김 / 삼양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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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시끄럽다. 매일 아침마다 뉴스와 신문은 전날 밤 광화문 앞에 몇 만명이 모였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일면 탑으로 보도한다. 정부는 무능했고, 국민들은 화가 났다. 출범한 지 불과 100일밖에 되지 않은 정부가 십만이 넘는 군중을 도시의 중심으로 나오게 한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 민심을 외면하고, 더욱이 극도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일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정부는 미국을 너무 얕잡아 봤다. 어쩌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취임 극초반기의 민심 이반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질과 속성에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미국과 관련된 민심의 혼란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국내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미군에 의해 발생한 효순이·미선이 장갑차 사건은 수많은 군중을 시청 앞으로 모이게 했고, 아직도 상반된 평가가 잇따르는 한미FTA 협상 타결 후에도 적잖은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유럽을 위시한 서구 선진국에서도 반미시위의 규모는 결코 녹록지 않다. 특히 아랍권에서의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며 강렬하기도 하다. 20세기 후반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세계 도처에서의 안티 물결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세계 초강대국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쉬운 질문이면서도 두세번 곱씹으면 결코 만만치 않은 질문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대극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 인권의 유토피아, 장애인들의 천국, 민주주의의 전도사 등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불리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어느덧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해석이 학자들 사이에서 다수설로 일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급부상하며 세계 제일의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자국 내외의 많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꿈과 기회의 국가라는 이면에는 세계 제일의 양극화 사회가 존재하고, 자유와 인권의 이면에는 총기사고를 위시한 각종 범죄가 도사리는 불안정한 사회가 존재하며, 평화와 사랑을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의 이면에는 석유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전쟁제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제대로 알고 연구해야만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헤게모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은 자명하다. 미국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연구할 때만이 불완전한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제이션에서 살아남는 자생적 길임을 단언한다. 

  현재 미국 관련 도서는 수많이 출간되었고 또 출간되고 있다. 주류역사를 초점으로 그저 사실에만 입각한 책이 있는가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영역에서 미시적인 관찰을 보여준 책도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혼란한 미국의 현재성을 분석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책도 쉽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두 명의 일본 지식인이 집필한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역사』는 230년의 미국사를 주류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시간의 흐름이 아닌 몇가지 주제로 카테고리화해 미국사를 서술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실 미국역사에 대한 상식적 수준의 개괄을 정리한 도서는 서점에 수없이 많다. 이 책의 경우도 미국역사의 객관적 서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의 주관성은 철저히 배제된 채 미국의 주류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해석'과 '변혁'이 아닌 그저 '반영'의 잣대로 미국사를 풀이하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이라면 바로 목적에 충분히 충실했다는 점이다.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부분을 알맞게 주제화하여 무난하게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마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부분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닌 21세기에 이슈가 되는 열다섯 개의 아이콘으로 카테고리화하여 미국사를 가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환경'을 위시하여 경제, 국민통합, 젠더(gender), 문화, 민주주의 등의 코드로 미국사를 서술한다. 각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도판과 표, 그래프와 주석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저자의 세심한 배려이다. 게다가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칼럼'과 '미국 역사 깊이 읽기'라는 코너로 내용을 부언하며 마무리한 점은 단연 깔끔하다. 

  하지만 저자의 주관적 '논설'이 결락된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이미 객관적으로 정리된 주류의 미국역사는 출판계뿐만 아니라 각종 미디어에서 많이 노출된 바 있다. 저자 나름의 미국사에 대한 견해와 비주류적 관점, 합리적인 비판의식 등이 언급되었다면 더욱 힘있는 인문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제 더이상 '미국'이라는 아이콘은 통일된 시각의 객관화로 공유하기에는 수없이 많은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본사람이었기에 일본 학계와 출판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미국사를 기대했던 것은 애당초 무리였던 것이다.  

  지식인의 미국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건전한 비판은 대중의 안목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균형있게 미국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학문은 객관적 '사실'만을 지향하는 작업이 아니다. 학문의 종국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가장 좋은 최선의 세계로 <변혁>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닿아 있다. 230년의 미국사를 마치 잘 다듬어진 교과서를 보는 것인양 체계적으로 다룬 점은 돋보이나 조금 더 멀리 나가지 못한 아쉬움은 끝내 잔존한다. 하지만 괜찮다. 건전한 주관화와 진실된 용기는 제대로 된 <앎>을 전제하기 마련이며,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존재가치는 딱 그 즈음에 있다.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미국은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다. 어마한 시장규모를 기반으로 한 경제력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타국이 쫓아갈 수 없는 문화의 힘은 아직 건재한 미국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시대는 급변하며, 영원한 제국은 일찍이 인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국의 과거를 학습하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안목은 응당 필요한 작업이다. 비단 쇠고기나 FTA를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21세기 미국을 <정확히> 알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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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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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산문집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특질이란 게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있는 사유의 세계와 브랜드화 된 작가 자신의 문학적 개성이 희석되지 않은 채 산문의 활자 속에도 오롯이 내재되어 있다. 굳이 격이 다르다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산문과 수필에서도 드러나는 소설가 특유의 아우라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끔 독특하다.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가 그렇다.  

  여행은 대략 좋은 것이다. 여행 자체에 대해 나쁘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 물론 여행이라는 고도의 열정과 극한 정신력이 필요한 작업에 대한 인간의 호오는 대개 여행의 목적에 따라 가름되곤 한다. 뚜렷한 목적과 동기를 갖고 떠나는 것과 아무런 의미없이 무작정 떠나는 것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여행의 내밀한 속성이 숨어 있다. 그저 아무런 계획과 의미없이 떠난다 할지라도 여행은 반드시 무언가를 인간에게 선사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여행이든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 그리고 여행이라는 가슴 두근거리는 작업. 이 두 가지 조화에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가 있다. 언제나 유머러스한 활자를 만들어내는, 하지만 결코 가벼운 문장을 완성하지 않는 그가 여행을 권리화한 내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잘나가는 한 소설가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여행'의 속성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은 내 머릿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일렁였다. 

  작가 김연수는 러시아, 일본, 독일, 미국, 중국에서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특유의 재치있는 글담으로 편안하고 부담없이 자신의 여행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하지만 김연수에게 여행은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는 외연적 정의가 아닌 자신의 삶과 문학의 세계를 곱씹고 입체화하는 기회의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수에게 여행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바로 그 욕망으로써 자아와 문학을 재조명·재해석하고자 하는 작가 김연수의 갈망이 책 속에 잘 녹아 있다. 

  이 책에는 김연수의 문학적 이상想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작가 차학경의 『딕테(Dictee』 중 어머니의 생애를 다룬 「칼리오페 서사시」를 읽다가 "당신은 움직입니다. 당신은 옮겨집니다. 당신이 곧 움직임입니다.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고정된 어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단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문장을 윤동주의 시 「길」과 연결짓는다. 김연수는 문학의 본질을 여기서 발견한다. 뭔가를 찾아 영구 운동하지 못하는 문학, 영구 망명을 꿈꾸지 못하는 문학은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 될 수 없음을 피력하는 작가 김연수. 바로 여기에서 그의 문학적 이상과 맞닿아 있는 '여행할 권리'의 속성을 풀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너무 장황하고 산만하게 산문집의 구성력을 비통일화시킨 점은 아쉽다. 소설가로서의 여행할 조건과 권리는 대중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기 마련이다. 러시아의 우스리스끄만, 일본의 나고야와 도쿄, 독일의 밤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미국의 버클리와 옌지, 중국의 룽징과 후쟈좡 등 '국경' 바깥쪽의 리얼리티를 사모한 김연수 자신의 내면 세계의 계속된 열창은 '여행할 권리'보다는 '문학의 의무'에만 일관하며 한 부분을 접사화시킨다. 그렇기에 '김연수'와 그의 '문학'에서 모두를 조건없이 포용할 수 있는 독자가 아니고서는 비공감될 수 있는 문장일 수 있다.  

  더욱이 책의 마지막 일본 도쿄에서 작가 이상((李箱, 1910~1937)의 죽음을 재조명하며 거대한 분량을 할애한 부분에선 고개가 심히 갸우뚱거린다. 마치 취재파일의 기사를 쓰듯 이상의 작품과 주변인물들의 고백을 수차례 인용하면서 그의 의문사를 다큐멘터리화한다. 게다가 동시대 시인이었던 박인환(朴寅煥)과 김수영(洙洙暎)을 교차·대조시키며 산문집의 거시적 통일성에서 일탈하기도 한다. 작가 이상의 죽음과 당시 도쿄에서 그가 실망했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는 김연수의 지나친 활자 할애는 한 천재 작가에 대한 후배세대 작가로서의 경외와 동경 이상의 의미를 넘지 못하고 있어 깊이가 덜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누구든 어디든 떠나야 한다는 김연수의 일탈 예찬은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역'과 '휴게소'와 '공항'은 언제라도 나를 매혹시킬 세 개의 공간이라 고백하는 작가 김연수의 모습에서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다.  

  여행은 나를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준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 말하는 김연수의 심정을 내 마음속에 품는다. 그리고 긍정한다. 세상의 모든 여행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광시야각을 <반드시>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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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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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몇 년 동안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각종 미디어에서 수없이 조명하고 천착하는 아이콘이 되어왔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조는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지만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의 군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근자에 폭발적으로 조명받고 있는 그의 존재감은 과연 어떤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왕에 대해 왜 21세기 한국사회는 현미경을 들이대며 재천착하는 걸까. 

  조선시대 최고의 군주로 세종을 꼽는데 주저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룬 세종은 수백 년이 지난 후손들의 마음속에 강렬히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 못지 않게 정조의 대중적 인기가 녹록지 않아 자못 흥미롭다. 세종이 왕조 500년의 안정과 기틀을 마련했다면, 정조는 모순된 왕조를 혁신한 군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당파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던 18세기에 등장해 수많은 반대 세력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정치력에서는 오히려 세종보다 몇 수 위라는 것이 역사학계와 대중들의 일관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는 당시 혼란한 정국을 발군의 정치력으로 수습하고, 신권에 의해 난자당한 왕권을 회복하며 조선의 개혁을 이룬 이산 정조를 다룬 책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어렸을 적 아버지가 귀주에 갇힌 채 굶어죽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자란 이산이 어떻게 그 한을 인내하며 뒷날의 역사가 인정하는 위대한 군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한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방적 서술이 아닌 관점별로 정리하여 한 군주를 조명하고 있어 보다 합리적인 가독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책은 총 4개의 카테고리로 가름하여 정조시대를 서술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최대의 행차였던 1795년의 을묘원행을 전면에 배치하며 제왕의 위세를 보여주려 했던 정조의 위엄을 소개한다. 2부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핍박과 고진 역경을 헤치며 왕위에 오른 정조의 정체성과 이를 풀어가는 정치력을 얘기한다. 3부에서는 개혁군주로서의 정책과 업적을 세심하게 서술한다. 계속해서 홍국영을 위시한 정조 안의 사람들과 반대세력인 정조 밖의 사람들을 소개하며 내용을 마무리짓는다. 

  딱딱한 한 시대의 역사를 다뤘음에도 이 책이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는 맛깔난 대화체로 풀어낸 저자의 재치에 있다. 한 군주와 당시의 시대상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저자는 정조와 신하·백성간을 흥미로운 상상적 대화체로 조화시킨다. 다소 가볍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본래 정조가 민초의 삶에 각별한 애정을 보인 군주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그러한 유머러스한 접근은 정조라는 군주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고 본다. 더욱이 정조가 상언言·격쟁錚의 제도를 집대성한 왕이었기에 백성에 대한 정조의 사랑을 위트있는 문체로 우의하여 승화시킨 점에서 그 가벼움은 문제되지 않는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개혁군주'라는 타이틀을 시종일관 흔들리지 않는 초점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이노베이터'라는 책의 부제를 일관되게 뒷받침하며 조선을 개혁한 군주로서의 정조의 존재감을 잘 드러낸다. 신하가 군왕을 세우는 당시의 모순된 조선왕조를 군왕이 신하를 세우는 정상적 국가로 되돌리려 했던 정조의 혁신의지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펼쳐졌고 어떻게 열매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조 사후 역사에 있어 결과적으로 조선이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정조라는 아이콘을 보다 입체적으로 천착하는 것은 응당 필요하다. 정조의 죽음 이후 정순왕후를 위시한 노론 벽파의 한풀이로 개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으며, 순조의 친정과 함께 또 다른 피바람이 불며 외척의 세도정치라는 조선 후반기 씻을 수 없는 망국의 원인이 된 역사적 귀결을 볼 때 이 부분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연결의 빈곤함은 몹시 아쉽다. 요컨대 조선의 망국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조 사후의 중요한 역사를 불과 여섯 페이지의 에필로그로만 담은 점은 나무보다는 숲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역사의 거시적 인과성을 배제한 구성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에 대한 저자의 무리한 해석이 비공감된다. 남편 사도세자와 적대적 관계였던 노론 집안의 딸로서 남편이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혜경궁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아들인 세손(훗날 정조)까지 잃을 수는 없었기에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겠는가. 이에 대해 정치적 입장과 계산으로만 풀이하여 혜경궁홍씨를 재단한 것은 옳지 않은 접근이다. 아직도 혜경궁홍씨와 《한중록》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팽팽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리하게 정치적 색깔을 객관화시킨 해석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책에 대한 호오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다시 정조로 돌아가보자.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당쟁이 심할 수록 공동체의 행복은 요원해지는 법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당파싸움의 현장에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기틀을 상식적으로 개혁하려 했던 정조는 응당 위대한 이노베이터였다. 작금의 우리사회를 보자. 21세기 한국사회의 나침반은 리더십의 부재와 민심의 요동으로 불행복을 가리키고 있다. 어쩌면 최근 정조의 리더십과 개혁의지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것도 이러한 21세기 혼란한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방증하는 것이리라.  

  한국인들은 아무에게나 '대왕王'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지 않는다. 한민족 5천년의 장구한 역사는 그리 많은 대왕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제 한국인들 사이에서 '정조대왕'은 결코 뜨악한 호칭이 아니다. 어느 신하보다도 뛰어난 지덕을 겸비한 군주, 발군의 정치력과 추진력으로 백성들의 절대 지지를 받은 군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철저한 준비로 면밀함이 돋보인 군주, 무엇보다 조선의 뼛속까지 바꾸고자 했던 혁신군주 정조는 그야말로 위대한 <대왕>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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