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때분에 보조개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다면 죽음에 대한 낭만도 갖게 됐다. 그당시 나는 국어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면 국어 선생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거다. 뿐만 아니다. 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를 보고서는 펑펑 울었었다. 그 영화의 여자주인공처럼(아마 하희라였을거다), 죽기 전날 반 아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써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싶었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잊지 못하겠지. 영화 『라스트 콘서트』는 그중 압권이었다. 죽어가는 여자를 관객석 앞에 앉혀놓고 남자는 마지막 연주를 들려준다. 그녀는 그 연주를 들으면서 숨을 거둔다. 당시 그 영화의 여주인공은 백혈병 환자였는데, 그 때부터 백혈명은 뭔가 낭만적인걸로 느껴진거다. 참 철없던 때의 얘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랑 매일 하교를 같이 하던 친구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마 그말은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누구나 가끔은 내뱉었던 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된다고. 너, 죽으면 니 영혼이 스르르 빠져나와서 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변에 머무를 것 같지? 절대 아냐, 끝이야, 끝. 너는 그냥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너라는 존재가 무(無)가 돼. 죽음에 대한 환상따위 갖지 말고 살어. 죽음에 대해서 결코 낭만을 갖지마, 라고 말했다. 대체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 나는 왜이렇게 변한것일까.


나는 여전히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귀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을' 때 그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육체가 죽는 순간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듯 정신적인 기능도 정지하고 그상태로 끝. 암흑. 그 뒤는 더이상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서 그 사람을 지켜보는 일 같은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죽고나서 모든것이 끝나는 상황이 두려웠다.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아무것도 경험할 수도 없다는 게, 누구의 옆에도 있을 수도 만날 수도 없다는 게 두려웠다. 이 두려움을 24시간 365일 가지고 사는건 아니지만 간혹 후려칠 때가 있다. 누군가 이 불안을 좀 해소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 죽음을 원할때도 있었다. 끝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내가 고통스러울 때 그랬다.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슬픔이 극에 달해있을 때면, 내가 죽어 없어진다면 이런 생각을 혹은 이런 고통을 멈출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내게 대체적으로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드물게 해결책이 되는 듯도 보였다.



그래서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표지를 보고 읽고 싶어지면서 동시에 망설였다. 이 책이 나의 두려움을 해소해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나고 싶다가도 그 순간은 내가 가장 두려울 때로 미뤄둬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했다. 무엇보다 표지에 쓰인 말이 잊혀지질 않았다.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문장이 거기 쓰여있었다. 나는 반드시 죽을 거라는 말.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 그런데 정말 이 책을 읽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가진 두려움은 위로로 탈바꿈하게 될까? 나는 평안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될까?



그러나 책의 절반까지 셸리 케이건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얘기한다. 실제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철학적으로 주장하고 또는 반박한다.무엇보다 셀리 케이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셸리 케이건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에 대한 정의가 나와 같은데, 이 사람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죽고 나서 내 몸이 부활하거나 내 인격이 이식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p.245)



물론 과학적 시선으로 더 많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죽음이라는 개념에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p.266)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때, 그것을 입밖으로 내어 말할 때 나는 당연한 듯 영생에 대해 생각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바라왔다. 그러나 셸리 케이건은 영생이 지루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조금 더 길게 사는게 아니라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모든것들이 지겨워질 거라는 거다. 하고 싶어서 선택한 공부도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것도 계속해서 할 수는 없고, 수학이 지겨워져서 과학을 해도 다른 음악을 찾아듣고 다른 그림을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거다. 나는 영생이 반복되는 일상들로 인해 지루해질 수도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럴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수긍하며 다소 놀랐다. 아, 그래, 나는 막연하게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삶이 어떻게 유지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그러면서 반발심이 들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게 가능하다면 이미 존재하는 학문외의 다른것을, 이미 존재하는 예술외에 다른 것을 우리 인간들은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루하거나 지겹지 않을수도 있지 않나? 물론 영생은 이제 내게 다른 식으로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가 영원히 산다면, 그렇게 계속해서 자손을 번식한다면, 그때 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늘까지 닿는 집을 짓는다 해도 거기엔 분명 한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셀리 케이건은 우리가 세운 삶의 목표와 가치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작해야 백년 정도를 살 수 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에 대해서 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거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세운 몇 가지 삶의 목표-대단할 건 없는 목표라지만- 나는 그걸  마흔이 되기전에 하겠어, 쉰이 되기 전에 하겠어, 라고 결심하진 않았지만 죽기 전에는 이것들은 해보고 싶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이건 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되 가장 스트레스 받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인용문을 그래서 몇 번이나 읽어봤다. 에키푸로스가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p.306)



셸리 케이건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까닭을 철학적으로 근거를 대며 얘기해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두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다. 결국 셀리 케이건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이 긴 책을 한 권 읽었다고 해서 '그래, 죽음과 대면하자' 하고 내 생각이 바뀌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하는 말들이 가끔은 퉁 치고 넘어가려는 것도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겠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같지 않다. 이 책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아이비리그의 명강의라고 하는데, 책으로 JUSTICE 와 DEATH를 둘 다 만난 나로서는 정의 쪽이 더 재미있었다. 잠깐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은 죽음보다 살아가는 일이 더 재미있기 때문일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래서만은 아닌듯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때문에 나는 별 넷을 줄 수 있었는데, 그건 누군가가 내가 두려워했던 바를 공개적으로 말해줬다는 데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니. 나는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이 책을 반드시 읽고야 말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그가 조목조목 '자신만의' 철학으로 죽음에 대해 얘기해주는 글들을 읽으니 이 세상에 나만 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건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은 위안이 된다. 어쩌면 나는 이 세상의 보편적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죽음과 대면할수는 없을것 같다. 책장을 덮고서도 여전히 두렵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셸리 케이건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생각들에 관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에필로그中)고 했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만족스런 독자가 되긴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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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08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도 관념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우리.
이 책 담아갈게요. 보관함에 있지만 진짜로 장바구니로.ㅎㅎ
새해부터 저는 '죽음'에 붙들려있어요, 다락방님.
아니 지난 12월부터요.

다락방 2013-01-09 15:06   좋아요 0 | URL
이상해요, 프레이야님. 영하 [아무르] 탓일까요. 최근에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꽤 자주 말하는 것 같아요. 현재 화제의 서재글에 올라있는 자노아님의 글도 죽음에 대해 얘기한 페이퍼구요. 지금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하는 때인걸까요.

프레이야님, 제가 소설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예일대 교수의 명강의를 책으로 읽는 것보다는 죽음에 대하여 잘 쓰여진 소설을 읽는 쪽이 적어도 제게는 더 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셸리 케이건이 강의를 한다면 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요.

Mephistopheles 2013-01-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 이건 절대 답이 없어요.-

다락방 2013-01-09 15:0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예일대 명강의 교수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제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잘 모르겟어요, 메피스토님.

2013-01-09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0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0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1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1-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없던 시절에 자주 죽음을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누군가는 분명히 마음 아파하겠지.
죽음을 누군가에게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었구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그냥 순간순간에 충실하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그건 어떤 대의나 가치에 충실하게 사는 것일수도 있고,
욕망이나 욕구에 충실한 삶일 수도 있겠지요.
그 선택이 각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말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대답은 정말 어렵지요!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

다락방 2013-01-14 09: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감은빛님, 복수의 수단. 어쩌면 그랬던것도 같아요.
물론 저는 복수의 수단보다는 낭만적인 수단이었지만 말이죠.

죽음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서 기본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진 않는것 같아요. 전 언제나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일단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자고 생각했거든요. 아마도 그대로 계속 살게될 것 같아요. 감은빛님 말씀처럼 순간순간 충실하게 사는거, 그게 답인것 같아요.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 앞으로 더 나이들면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요.

장분도 2013-05-22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책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매일 고민하고 연구하고 도구들을 계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 두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identity와 Destiny 인 것 같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요.)

모든 사람들 안에 talent 가 있고,
그 talent를 발견하면 vision이 되고,
비전은 꿈이되고,
꿈은 목표가 되고,
목표는 방향을 같게 하고,
그 방향으로 포기하지 않고 걸으면, 우리 삶에 passion이 생기게 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Passion은 영향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리더십이 있다고 부르고,
이 리더십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고 부르며,
그 사람은 결국 자기의 identity와 destiny를 define하고 passion을 가지고 리더의 자리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아이러니하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

저는 지금 뉴욕 LGA공항 라운지에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집니다.
10년 후 혹시라도 제가 이 글을 다시 우연히 보게 될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것에 얼마나 의미가 있고,
사람들이 어떻게 identity와 destiny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지, 전하는 행복 전도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장분도 2013-05-22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책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매일 고민하고 연구하고 도구들을 계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 두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identity와 Destiny 인 것 같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요.)

모든 사람들 안에 talent 가 있고,
그 talent를 발견하면 vision이 되고,
비전은 꿈이되고,
꿈은 목표가 되고,
목표는 방향을 같게 하고,
그 방향으로 포기하지 않고 걸으면, 우리 삶에 passion이 생기게 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Passion은 영향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리더십이 있다고 부르고,
이 리더십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고 부르며,
그 사람은 결국 자기의 identity와 destiny를 define하고 passion을 가지고 리더의 자리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아이러니하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

저는 지금 뉴욕 LGA공항 라운지에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집니다.
10년 후 혹시라도 제가 이 글을 다시 우연히 보게 될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것에 얼마나 의미가 있고,
사람들이 어떻게 identity와 destiny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지, 전하는 행복 전도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