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를 한 장씩 읽으면 7년 반 후에는 다 읽게 되거든. 진짜 멋지지? 7년 반 후면 가장 중요한 유대 율법서를 통독하게 된다니까." (p.10)



친구 안드레아와 조깅을 하던 이 책의 저자 '일라나 쿠르샨'은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아 자신 역시 탈무드를 읽는 7년반짜리 프로젝트를 실행보기로 한다. 7년 반.



오후 7시쯤 조깅을 마치고 헤어졌지만 안드레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장 7년 반짜리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어떤 기분일까? 7년 반 후의 내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전히 이스라엘에 살까? 가슴에 쌓인 고통과 수치심을 여전히 느끼려나? 다들 장담하듯 시간이 약이 되어 거기서 벗어나 있을까? 내가 즐겨 인용하는 시에서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시간은 평온을 가져오지 않네 / 당신들 모두 거짓말을 한 것" 이라고 썼다. 시간은 평안을 가져오지 않고 끝없이 뻗은 듯했고, 7년 반 후에도 여전히 슬픔에 젖은 나를 상상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p.11-12)



7년 반 짜리 계획이라니, 너무 새로웠다. 7년 반이라니. 그러고보면 내가 무언가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빨리, 빠른시간, 단기간을 요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이어트 광고를 보면 언제나 한 달 만에 8kg 감량, 세 달만에 20kg 감량 등으로 써있지 않던가. 그러나 다이어트를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건강한 몸, 건강한 체중으로 만들기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는 일을 그렇게 단시간에 해낼 수 없을 뿐더러, 단시간에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다이어트든 공부든 그게 뭐든, 장기간에 천천히 가는 것이 목표에 가장 근사치로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니던가. 다이어트도 그리고 내 경우엔 영어 공부도 나는 조급했다. 이번 해에 영어를 마스터 하는거야! 라고 숱하게 결심했지만 언제나 영어 책을 펼쳐 보지도 않았지. 어쩌면 답은 바로 이거였는데! 7년 반 이라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뭔가 내 안에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성취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오래가 답인것인데!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자, 그렇다면 내가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히 천천히 하면서 성취할만한 목표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 역시 장기간 프로젝트 하나를 설정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구체적 목표가 있다면 살아가는데 좀 더 의욕이 생기니까. 물론 내게 구체적 목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시간을 7년 반 이라든가 3년 혹은 6개월이라 정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그쪽으로 설정해두었다. 그러나 7년 반짜리 장기 프로젝트 하나를 내 인생에 더해도 좋을 것 같다. 일라나 쿠르샨은 탈무드를 팟캐스트로 듣고 또 읽으면서 매일 공부한다. 그렇다면 나는 성경을 읽어볼까?



살면서 성경은 한번쯤 읽어봐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상 해오던터라, 일라나 쿠르샨의 탈무드에 나는 이내 성경을 떠올렸건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건, 모든 종교가 여성혐오를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놀랐던 것은 작가가 페미니스트이며 하버드대를 졸업했고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탈무드를 계속해서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랍비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생활 터전이 이스라엘이며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아마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매일 아침 하나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책의 성격상 저자는 수시로 책에서 탈무드를 인용하는데, 그 인용문들을 읽으면 '도대체 종교는 여자에게 왜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버려.... 종교여, 여자들에게 왜그래요? 왜 모든 종교가 여자들을 이렇게 다루는거죠?





탈무드 역시 인생을 함께할, 특히 한 침대를 쓸 남자가 없는 여자를 안쓰럽게 본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현자 헤이시 라키시는 유명한 금언을 인용해 이런 말을 다섯 번이나 한다. '탈브 엘메이타브 탄 두 몰메이타브 아르멜로', 문자 그대로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둘로서 앉아 있는 게 더 낫다'란 뜻이다. 이 말에 대해 랍비들은 다채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탈무드의 여러 현자들은 여자가 얼마나 견뎌야 남편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아바이에이: 남편이 개미만 하더라도 아내는 자유로운 여자들 사이에 의자를 놓는 걸 자랑스러워 한다.

라브 파파: 남편이 소모기(보풀 세우는 기계)라 해도, 아내는 그를 대들보에 걸어 놓고 부부 생활을 한다.

라브 아쉬: 남편이 쭉정이여도, 아내는 냄비에 렌즈콩이 부족하지 않다.


탈무드는 여자가 싱글이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듯하다. 그렇더라도 아바이에이, 라브 파파, 라브 아쉬는 마지막 말은 하지 않는다. 마지막은 이런 주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다 간통을 저지르고 자식을 남편의 아이라고 한다." 즉, 결혼에 목멘 여자들은 사실은 혼외정사로 임신하고 핑계를 찾으려고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 남편이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불륜으로 가진 아이의 법적인 아버지를 지목할 수 있으니까! (p.135-136)



싱글의 반대 개념은 기혼이겠지만, 탈무드의 결혼관에는 괜찮은 점도 제법 많다. 캐투봇 편은 결혼 생활과 결혼 계약서 '케투바'에 명기된 책임과 관련된 계율을 다룬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논제가 여자들에 대한 평가(그리고 폄하)에 집중된다. 현자들은 결혼의 재정적인 면, 즉 남자가 특정 액수를 주고 아내를 얻는 거래를 검토한다. 특히 규수가 혼인 당시 처녀인지 여부가 액수를 좌우한다.

처녀성은 케투봇 편의 첫 챕터의 핵심 주제다. 신랑이 신부가 처녀가 아닌 걸 알면 허위 거래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자가 성관계를 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입었음이 드러나면, 이 경우 처녀가 아닌 규수들처럼 액수를 깎아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나온다. 아무튼 모든 여자는-처녀든 아니든- 전 재산을 갖고 아버지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한 남자에게서 다른 남자에게 넘겨졌다. (p.145-146)


우리는 이미 『페미사이드』를 통해 여자로 인해 이동하는 재산이 여자의 손에는 쥐어진 적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아래 인용은 '인도'의 것.



여성들은 결혼할 때 부모의 집을 떠나 매우 멀리 떨어진 남편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젊은 여성들은 일단 결혼하고 나면 죽은 뒤에라야 남편의 집을 떠날 수 있으며 모든 고통과 굴육을 참아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다. 며느리는 새 자겅에 적응하려면 늘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며느리는 시가 식구들에게 고분고분 순종해야 하며,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해서도 사심 없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남편의 가족은 현금은 물론 특별히 지참금 용도로 제작하거나 구입한 보석 및 가정용품을 받는다. 지참금을 딸이 받는 상속 재산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Goody 1976).

이와 관련해서 집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첫째, 지참금은 신부가 아니라 신랑 가족에게 전달된다. 시부모는 지참금의 분배에 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갖는다. 둘째, 내가 아는한, 토지는 절대 지참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여성에겐 재산이 없다. 이른바 그녀의 재산으로부터 아무런 부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젠더에 따라 특정된 성격이 만들어진다. 남자들은 국가 경제에 공헌하고 생계비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외부세계에 대해 무지하며, 자녀양육과 가사에 몰두한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지참금 마녀 사냥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다. (p.231-232)






소타(부정한 여자)는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의 손에 이끌려 성전으로 끌려간다. 대제사장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망신스런 재판에서 '쓴 물'을 마시게 한다. 여인이 죄가 있다면, 물의 마법이 그녀의 배를 부풀리고 허벅지를 처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의 저주'가 될 것이다. 여인이 결백하다면, 아기가 들어서 배가 부풀 테고. 그러니 유죄든 무죄든 소타의 운명은 몸에 물리적으로 남아서 모두가 보게 되고, 그녀를 간녀에서 구경거리로 만든다. (p.178-179)




어떻게든 여자의 몸에 물리적으로 남는다라. 이것은 드라우닝 풀, 익사의 웅덩이와 같은 게 아닌가.





Drowning Pool '익사의 웅덩이'라는 뜻으로, 봉건 시대 스코틀랜드의 법에 따라 여성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 웅덩이나 우물을 가리킨다. 16-17세기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의 유무죄를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에 빠뜨려진 여성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뜨면 마녀로 간주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p.7)












어떻게 이런 것을 깨우침과 가르침의 책으로 매일 공부할 수 있는지 내가 갸웃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그녀가 탈무드를 가르치는 여러 젊은이들. 그들이 탈무드에 불만을 가졌고 의심을 품었다.




산헤드린 편 마지막에 토라의 한 구절이라도 신성하지 않게 여기면 내세에 자리가 없다고 나온다. 한 학생이 "그렇군요. 한데 제 성생활을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구절은 어쩌죠?" 라고 받아쳤다. 이 학생처럼 나도 어떤 구절들은 부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또 평등하고 다양성이 확보된 요즘 세상에서 문제가 될 구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드라시가 '출구'를 제공하기에 특정 문구들을 삭제할 필요는 업을 것이다. 물론 오랜 훌륭한 미드라시의 전통도 고려해야 할 테고. 토라는 아주 촘촘하기 때문에, 저마다 독창적으로 읽어도 될 것 같다. 미드라시의 독창적인 가능성을 높이 산다고 해서, 토라에서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긴 해도 난 전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후자가 겁난다고 물러나진 않는다. (p.240-241)



물론 저자는 탈무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쌍둥이를 대하는 자세였다. 일라나 쿠르샨은 첫 결혼에 실패하고 재혼을 했다. 재혼해서는 아들을 낳고 뒤이어 쌍둥이로 여자아이 둘을 낳았는데, 어린이집에 맡긴 쌍둥이들에게 수유하러 가면서 늘상 엄마를 반기는 아이들을 보고는 '누구에게 먼저 젖을 먹일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두 딸 중 선택해야 할 때마다 '미츠바를 지나치면 안 한다'는 계율이 떠올랐다. 페사힘과 탈무드 전반에 나오는 이 계율은, 눈앞에 명령이 있으면 완수한 후에 다른 명령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제는 제단의 네 귀퉁이에 제물의 피를 뿌릴 때 가장 가까운 귀퉁이부터 뿌려야 한다. '미츠바를 지나치면 안 되니까.' 나는 이 계율을 바꿔서 속으로 읊조렸다.

"쌍둥이를 지나치면 안 된다."

사제가 피를 뿌리러 제단에 가서 한 귀퉁이를 지나쳐 다른 귀퉁이로 가지 않듯, 나도 한 아이를 지나쳐서 다른 아이에게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멀리 있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안아준 아이를 내려놓고 다른 아이에게 갈 즈음에는 둘 다 울고. (p.353)



이거야말로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가 감탄에 감탄을 했다. 한 명을 지나쳐서 누군가를 먼저 안아주지 않는 것. 지나치는 순간 아이는 '나를 지나쳤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테지만, 지나치지 않고 가까운 곳의 아이를 먼저 안으면 더 멀리 있는 아이는 일단 울음을 터뜨리긴 하겠지만 자기 차례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일라나 쿠르샨이 그러했듯이, 그것이 어떤 책이든 자신의 상황에 맞게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자기 삶 안에 녹여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종교인인 내 입장에서 탈무드를 읽거나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일라나 쿠르샨처럼 받아들이며 읽어낼 수 있을지, 내 뜻대로 독창적으로 해석이 가능할지는 난 여전히 자신할 수가 없다. '왜이래?', '나한테 왜이러지?' 가 먼저 나오지 않을까. 우리는, 그러니까 일라나 쿠르샨과 나는 태어난 장소와 자란 환경이 다르므로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가장 다른 점은 그녀가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어쩌면 그래서 탈무드에 대한 거부감이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독신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오므리와 교제 중이었지만, 관계에 파열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이즈음 이별을 확신했다. 어쩌면 훨씬 전에 헤어져야 마땅했지만, 혼자인 것 보다는 안 맞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나았다. 바로 2년 전에 안 맞는 사람과 결혼하고 이혼했으면서도. (p.133)



어떻게...어떻게 혼자인 것 보다는 안 맞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렸는데, 영화속에서 마츠코도 혼자인 것보다는 개같은 남자라도 옆에 두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걸까? 깊은 외로움인걸까? 안 맞는 사람을 옆에 두느니 혼자인 게 훨씬 낫지 않나? 내가 이별을 결심한 데에는 그가 나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둘 기미가 보였기 때문인데? 차선으로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탈무드에서 여자가 싱글이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듯이, 일라나 쿠르샨도 싱글이면서 행복한 자신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건가? 아, 괴롭다.....




그렇게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마침내 찾아냈다. 그래서 재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7년 반동안 탈무드를 듣고 읽어온 기록이며 그러는 동안 그녀는 이혼을 하고, 연애를 했고, 이별을 했고, 재혼을 했고, 아이를 셋 낳았다. 역시 7년 반은 긴 시간이다.


게다가 첫 결혼의 실패와 달리 이번에 만난 남자에게는 깊은 안정감을 느끼고 또 그 인연에 감사한다.



대니얼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신의 지지를 절감했다. 이런 남자가 내 삶 속에 들어와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일요일 철학 클럽』-내가 좋아하는 시리즈-에서 난관 끝에 결혼한 이사벨 달하우지가 나인 것 같았다. 작가 알렉산더 캑콜 스미스는, 욕실에서 나온 사랑하는 하이메를 보면서 이사벨이 진짜 '그녀의 것'인지 의심했다고 말한다. 나 역시 밤에 대니얼이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어깨에 물을 묻힌 채 나오면 궁금하다. '당신이 진짜 내 남자일까? 당신과 함께하다니 이런 행운이! 단점투서잉인 나를, 공상에 빠져 사는 나를 사랑할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큰 환히를 누리는 게 물가능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현재에 향수를 느꼈다. 내 어깨에 내려앉은 이 순간이 이미 날아난 것 같았다. 대니얼이-여기 있는 그의 존재가-현실일 리 없고 어느 날 깨어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일 것 같았다. 그가 눈부신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p.306-307)



뭐 이렇게까지 감사할 일인가, 남자 하나 만난 것 가지고.. 싶으면서도 나 역시 저런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느껴본 적 있던 터라 '좋을 때다...' 싶다. 어느 날 깨어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은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부디 행복하오, 일라나 쿠르샨이여...











자, 이 책을 다 읽었고 나는 이제 7년 반짜리 장기 프로젝트... 를 찾아야겠다. 뭘 하면 좋을까. 꾸준히 쭈욱- 해나가면서 결국은 끝마칠 수 있는 것은 뭐가 좋을까. 이 생각하자마자 영어공부! 가 떠오르지만, 이내 '하기 싫다....'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면 나는 독서를 내내 하고 있고 또 이렇게 글 쓰기도 내내 하고 있으니, 더이상의 장기 프로젝트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면 지쳐버리니까....



그나저나 어제도 리뷰를 두 개(큰 가슴의 발레리나, 그만해 거짓말)나 썼는데, 오늘은 이 페이퍼를 포함해 페이퍼 두 개 쓸 기세... 왜죠....





***102 쪽에 오타가 있는데, 하하하하. '메길라(에스더서 두루마리)'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 메길라 라고 계속 잘 쓰다가 다섯번째 줄에서 '메갈리아' 튀어나옴.....****************














오므리는 황제의 포도주가 금 그릇에 담기자 상한 것을 지적하면서, 그릇의 본질은 담긴 물질의 특성과 관계있다고 말햇다. 더구나 이 구절에서 토라는 포도주가 다른 액체들처럼 그릇의 모양을 띤다는 점을 제시하는 듯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나 자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배운 지식 전부가 담기는 그릇으로 본 것이다. 내 본모습은 내가 가진 지식과 관계가 있다. 그릇이 거기 담긴 포도주의 모양을 결정하듯이. 내 지식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나니까. 더구나 금 그릇이 포도주를 상하게 하듯, 나와 내가 배운 토라 사이에 화학 작용 같은 게 일어난다. 내가 공부하는 토라는 날 변화시키고, 내 통찰력은 공부 중인 토라를 변하게 한다. - P84

하지만 이런 생각을 폴은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저녁 그가 저녁 기도를 할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기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 『돈키호테』의 이 챕터를 마저 읽고 싶은데. 마리브(유대교의 저녁 예배)를 건너뛸 테야"라고 대답했다. 그는 눈에 보이게 동요했다. 난 "왜 그러는 거야?"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돈키호테』를 읽는 게 더 중요한 사람과 함께할 수 없어." - P96

어떻게 이미 지워버린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난 탈무드가 아니라,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에서 답을 찾았다.


내게는 가보기 두려운 곳이 100군데나 있지
그의 기억이 넘쳐나는 장소들!
그래서 그의 발이 닿거나 얼굴이 빛난 적 없는 조용한 곳에
안도하며 들어서면 나는 말하네.
"이곳에는 그의 기억이 없네!"
그리고 경악해서 서 있지, 그가 너무도 기억나서! - P98

아이러니하게도 팔에 성구함을 두르는 날이 늘어갈수록 우리 결혼은 점점 망가졌다. 매일 아침 폴과 나는 정원이 보이는 1층 아파트 부엌에 나란히 서서 기도했다. 하지만 우린 상대보다 신과 더 오래 대화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평행 놀이처럼, 혼자 하는 놀이를 하듯, 우리도 평행 놀이를 했다. 좀 희망적인 날이면 난 프랭크 바이다트의 시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사랑은 두 사람이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랑이다.‘ 하지만 둘의 기도가 같은 방향을 향하는 지 알 수 없었다. - P108

남자들과 여자들을 슈퍼마켓에서 파는 물건이라고 상상해봤다. 여자들은 신선 식품이어서 임박한 유효 기간이 찍혀 있었다. 남자들은 통조림이라서, 마음을 끌진 않아도 결국 누군가 고를 때까지 계속 선반에 진열될 수 있었다. - P135

아침 일찍 공부를 못 하면,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끝낼 때까지 부담을 느끼도록 종일 탈무드를 갖고 다닌다. 그날의 분량을 마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또 하루에 할 일을 완수하는 편이다. 운동부터 일기 쓰기까지. 어떤 일에 도전하면 좀처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 P171

그 주에 일이 많아 걷지 못하면, 내 처지와 무관한 책들에 몰입해 현실을 잊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시집을 읽고 병원 대기실에서 단편 소설을 읽었다. 우체국이나 슈퍼마켓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장편 소설을 읽은 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책에서 많은 걸 얻었다. 가방에 책 세 권을 넣고 다닌 적도 많았다. 꼼짝 못하고 붙들렸을 때 읽을 거리가 없으면 단테가 그린 지옥에 던져진 것과 같을 테니까. - P213

대니얼이 삶에 자리를 내준 것은 내게 특권이었고, 그를 내 삶에 들일 만큼 신뢰했다. 또 함께하는 새 인생이란 벼랑에 나란히 서려니 전율이 느껴졌지만, 난 소망을 품었다. 우리가 짓는 ‘혼인의 집‘이 늘 함께하는 성소일 거라는 소망을.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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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4-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오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24 09:56   좋아요 0 | URL
역자가 메갈인가... 생각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