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여동생네 가족이 왔었다. 일요일인 어제는 미세먼지는 있었지만 날이 좋아, 여동생과 조카들과 함께 올림픽공원엘 갔다. 아이들이 뛰고 소리지르는데, '뛰지마!' , '소리지르지 마!' 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어서 너무 좋았다. 저렇게 뛰어노는 게 좋은 아이들한테 집 안에서는 뛰지 말라고, 살살 걸으라고 말해야 하는 이 슬픈 현실. 흙 ㅜㅡ


그렇게 아이들과 놀이터에서도 시간을 보내고 또 미술관 앞 조각상들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걷는데, 열살 조카인 타미와 내가 싸우게 됐다. 아주 사소한 것 때문이었는데, 소마미술관 앞 조각상 중 하나를 보고 내가 '성모마리아인가보다!' 한거다. 타미는 쪼르르 달려갔는데, 작품명에 <이불을 뒤집어 쓴 여인>이라고 되어 있는가 보았다.


"이모 이불 뒤집어쓴 여인이라잖아!"


하는 게 아닌가.


"아, 그래? 이모는 성모마리아인 줄 알았지."

"이모, 성모 마리아면 기도를 하고 있었겠지!"

"야, 아무리 성모 마리아라도 24시간 365일 기도만 하겠어? 밥도 먹고 똥도 싸고 잠도 자고 쉬기도 해야지!"

"이모, 성모 마리아가 성당에 있지 여기 왜있어!"

"그럴 수도 있지!"

"이모, 생각좀 해!"

"이모 나름대로 생각했거든?"

"더 생각해!"

"야, 니 이모만큼만 깊이 생각하라 해!"



이러면서 싸운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놈의 자식이 지 이모한테 생각 좀 하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흑흑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모, 이모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ㅜㅜ



그리고 걷다가 나는 여동생에게 영화 《어드리프트》에 대해 얘기해줬다. 줄거리도 얘기해주고 또 내 생각도 곁들여서. 그거 보고 나니까, 나는 이랬고 저랬고... 그런데 옆에서 내 손을 잡고 걷고 있던 타미가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었는가 보다.



"이모, 그거 진짜 있었던 일이야?"

"응.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래. 그 주인공은 지금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항해한대."



그랬더니 정말이냐며 되게 재미있어 하는 거다.



"타미야, 재밌지?"

"응, 이모 얘기 또 해줘!"

"또 해줄까?"

"응!!"



하아- 그런데 무슨 얘기중에 충동적으로 어드리프트 얘기를 한거라, 내가 타미에게 적합할 만한 것은 무엇이 있나 생각해도 퍼뜩 떠오르질 않는 거다. 가만있자, 뭐가 좋을까. 나는 나의 독서앱과 알라딘에 들어와서 화면을 넘겨보며, '가만있자, 뭐가 좋을까~' 했는데, 타미는 기다리다말고, "이모, 열 셀 동안 얼른 시작해!" 하더니 카운트다운을 하는거다. 요놈의 자식..



최근에 내가 읽은 책들은 죄다 페미니즘 도서라서, 여동생에게라면 《캘리번과 마녀》에서의 마녀사냥까지의 흐름을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이게 고작 열 살 된 아이에게 적합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몰라 숙숙 넘기다가, 오오, 《파리의 노트르담》얘기를 해주기로 했다.



"타미야, 이건 영화로도 있고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아주 유명한 이야기야."

"이모, 진짜 있었던 일이야?"

"아니, 이건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인데, 실제 있을법한 이야기이지."



이러면서 얘기를 시작했는데, 아아, 작품 선정 잘못했어... 일단 콰지모도가 기형의 외모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멸시 받고 성당의 종치기... 이것을 설명하기에 몹시 난감했고, 에스메랄다가 집시 여인인데 왜 미움을 받는지 설명하기도 너무 난감했고...그래서 건너뛸 건 건너뛰고 하면서 이야기를 짧게 끝내는데, 그 과정에서 타미는 내 이야기를 되돌려가며 질문도 하고 재미나게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너무 후회가 남아. 다른 이야기로 해줄걸, 괜히 그걸 이야기해서 중간에 '미친 여자'라는 워딩을 쓴 게 너무 걸리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아, 시간을 돌리고 싶지만 이미 입밖으로 낸 이야기를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 미친여자 대신에 뭐라고 해야 했을까를 어제 고민하는데, '이상한 수녀님'이라고 했어야 했나... 아아 ㅠㅠ



아이를 위한 데이터가 부족하구나, 라고 내심 자책하는 오후였다. 그래도 귀 쫑긋하고 이야기 듣는 조카를 보는 건 너무 좋았어!



그리고 밤.



제부와 조카들은 집에 돌아가고 여동생만 남았다. 다음날 서울 일정 때문에 그리했는데, 다른 방에서 따로 자겠다던 여동생은 자기 전에 내 방에 왔다.


"그냥 여기서 자."

"그럴까?"

"응."

"베개 가지고 와야 되는데. 핸드폰이랑."

"가져와."

"니가 가져와."


이러면서 여동생은 나를 발로 밀어버렸고...나는 저놈의 지지배가...... 궁시렁거리면서 여동생의 핸펀과 베개를 얌전히 가져왔다. 그렇게 나란히 누웠는데, 아아, 이게 얼마만의 자매만의 잠인가. 여동생이 결혼전에는 이런 밤들만 숱하게 지나갔는데, 여동생 결혼후에는 이런 밤이 처음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당연하게도 우리는 깊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여동생이 직장생활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 때 겪었던 고민들, 스트레스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그 때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건 이런 것 같아' 하고는 내가 아는 영화들과 책들을 가져와서는 얘기해주었다. 이 영화에서 그 때 이런 대사가 나오거든, 이 책에서 그걸 이렇게 말했었어, 그거 같아, 라면서 얘기하는데 여동생은 '아 그래?' 하고 고개 끄덕이면서 우리는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얘기했다. 나는 동생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고생 많았네, 고생 많았어, 아이고, 여기까지 정말 잘해왔네' 했는데, 그 때 여동생은 내게 말했다.



"언니, 그게 척추야."

"어 알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우리 둘이 같이 싸우나에 갔다가 내가 여동생의 드러난 척추를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야, 이게 뭐야!"

"이게 척추지!"

"야, 나는 없는데?"

"이게 없으면 언니가 어떻게 서고 앉냐. 안보이는 거지. 살 때문에."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생각나면서 또 빵터져서 우리는 진지한 얘기를 하다가 시끄럽게 깔깔대다가 했다. 내가 하도 깔깔대니까 여동생은 '조용히해, 아빠 엄마 깨' 이러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좋은 밤이었어.



여동생과 대화중에 책과 영화를 빌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해줄 수 있어서 좋았다. 데이터가 많으면 이용할 수 있는게 많구나. 더 많은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야겠다, 고 생각하다가 동시에, '아아, 그러나 아이를 위한 데이터가 철저하게 부족하다, 미리미리준비를 해둬야지' 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야 나중에 타미가 '이야기해줘' 하면 뭔가 척- 하고 꺼내 이야기해줄 수 있을테니까.



"누구랑 이렇게 사이좋게 밤 수다 떨면서 나란히 누운 거 너무 오랜만이네."


직장과 여자로 사는 것, 앞으로의 삶에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사랑으로 이야기가 넘어갔고, 여동생은 내게 물었다.



"언니, 언니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지금의 행동이 그사람 다워?"

"응. 그래서 야속하지."



좋은 밤이 자꾸 깊어갔고 나는 자꾸 아쉬웠다.





데이터를 더 부지런히 축적해놓아야지. 훗.




어제 내가 하루종일 조카와 여동생과 이야기하며 소환한 책과 영화들은 이것들.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 책을 사자! 이런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3월이 될 때까지 꾹 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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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2-25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니 동생 사이에서 가능한, 특별한 교감의 시간 같아요.
엄마와도 좀 그렇고, 친구에게는 이해시키려면 동생에게보다 더 긴 설명이 필요하고, 남편에게는? 실망하실까봐 노 코멘트~^^

다락방 2019-02-25 17:53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인님. 엄마보다 친구보다 더 내밀한 말을 할 수 있는 사이가 자매사이 같아요. 엄마한테 못하는 말을 여동생에게는 할 수 있죠. 친구에게 못하는 말도 동생에게는 할 수 있고요. 물론 모든 걸 다 말할 순 없겠지만 긴 말 하지 않아도 온전히 나를 나로 보아주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
아주 좋은 밤이었어요. 아주 좋은 잠자리 토크였고요.
:)

blanca 2019-03-0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뛰지 마.‘는 그냥 달고 살아요. 이게 뭔가 싶은데. 사실 우리 어릴 때 생각하면 참 미안해지는 요즘이에요. 다락방님 여동생이 부러워집니다. 저도 무언가를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면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해 주는 다락방님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네가 먼저 그런 존재가 되어라,라고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지만요.^^;;

다락방 2019-03-04 12:07   좋아요 0 | URL
저도 제가 뛰지마, 소리지르지 마 같은 걸 말하는 어른이 될 줄은 몰랐는데, 조카들에게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공원에 나가면 너무 좋아요.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말이죠.
아, 또 있어요. 누워서 텔레비젼 보지 말라는 거요. 어릴 때 그 말을 엄청 많이 들었는데, 제가 그 말을 조카들에게 하고 있더라고요. 아아..어른이란 무엇입니까, 블랑카님... ㅠㅠ
저는 다정하고 사랑많은 이모로 기억되고 싶은데 잔소리 이모로 기억될까봐 걱정이에요. 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