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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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SF는 고사하고,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드문 예외들이 있지만 논외로 하면, 내가 소설을 읽는 경우는 거의 한 가지뿐이다.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읽지 않은 소설이 나왔을 때 나는 그 소설을 봐야 하겠구나 마음먹는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은 것을 실제 독서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독서를 시작했다 해도 마치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 죄와 벌이 대표적이다. 언제 차분히 신들의 계보를 비롯한 그리스-로마 신화, 단테의 신곡, 괴테를 읽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발자크, 카프카, 멜빌, 메켈라스의 단편들을 읽은 것은 소설이 그 자체로 재미있어 보여서가 아니라, 공들여 읽은 데리다, 피케티, 들뢰즈, 에나프의 책에서 이들의 작품이 소재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곧 책이 또 다른 책을 소개해준 경우이다. 르 귄을 읽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해러웨이가 소개해줬기 때문이다. 저자를 신뢰하고 그의 저작을 더 이해하기 위한 경우에만 소설을 읽는다. 따라서 나는 소설을, 소설을 읽는 법을 잘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에 소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전혀 불편하지도 아쉽지도 않다. 그러나 덕질 수준에 이르는 일방적 애정을 품게 된 경우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해러웨이를 읽기 위해서는 르 귄을 읽어야 했다.


1. 

이 책에는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르 귄이 발표한 판타지와 SF 단편 열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 단편 앞에 르 귄이 짧은 작품 해설을 붙여놓았는데, 사실 그 이야기가 소설만큼이나, 어쩌면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이 중에 <샘레이의 목걸이>, <겨울의 왕>, <해제의 주문>, <이름의 법칙>은 이후 그녀가 쓴 장편의 단초 역할을 하였고, <혁명 전날>은 장편 빼앗긴 사람들의 일부로 쓰여진 것이다(10). 르 귄의 SF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마블이나 DC코믹스의 히어로 액션 영화와 전혀 상관없다. 그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과 상대적으로 유사한데,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르 귄의 작품을 좋아했다 한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작품세계가 매우 밀접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현대 문명에 대한 생태주의적 비판이라는 주제에서는 겹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에서 과학자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르 귄의 단편들에서는 곤경에 처한 마법사 또는 과학자가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들의 심리적 갈등으로 이야기가 주로 전개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르 귄의 머나먼 바닷가<게드 전기: 어스시의 전설>로 제작하였으나, 르 귄은 이 작품을 혹평한 바 있다. 대현자인 마법사와 함께 하는 모험 이야기이지만 끝으로 갈수록 재미없었던 기억이 난다. 마블 히어로 무비와 달리, 르 귄의 SF는 액션물이기보다는 심리신화(psychomyth)이고, 기술이 발전한 미래뿐만 아니라, 과학이 이단으로 단죄되던 과거에서도 펼쳐진다. 르 귄은 존 톨킨이나 J. K. 롤링과 달리 마법보다는 과학이, 미야자키 하야오와 달리 테크놀로지보다는 과학 자체가 관심인 듯하다. 르 귄은 반인종주의를, 미야자키는 반전평화를 더 강조하는데, 모국이 처한 사회적 맥락의 차이가 저자의 작품 속으로 연장된 것으로 보인다. (SF 문외한의 이 빈약한 비교란...) 어쨌든 르귄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낯선 곳으로의 모험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내면 세계, 곧 마음의 이야기이다(306).


<명인들 The Masters>, <아홉 생명>,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땅속의 별들>, <시야>는 장편을 구성하지 않고 단편 자체로 완결되는데, 모두 과학자들이 주인공이다. <명인들><땅속의 별들>은 과학이 이단으로 탄압받던 과거의 이야기라면, <아홉 생명>,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시야>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지적 권위를 획득한 뒤에도 과학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역경과 경이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이 부족한, 아니 어쩌면 이제 나이들어 세속적인 바램 이외에는 꿈이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나는 어떤 곤경 속에서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이 과학자 이야기들이 좀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2. 과학과 예술, 가이아, ...

과학()에 대한 이 단편들이 더 좋았던 이유는 사실 나의 해러웨이 덕질, 또 그것의 일환으로 직전에 읽었던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때문이다. 마굴리스는 시카고대학교 학부생 시절에 받았던 과학교육을 오늘날의 기술중심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참교육으로 예찬한다(공생자 행성52-55). 교과서가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들이 직접 쓴 글을 읽게 한 그 과목을 통해 마굴리스는 과학을 통해서 중요한 철학적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회상한다. 그녀에게 과학은 교양 학문(liberal art), 하나의 사유 방식(a way of knowing)이었다.” 마찬가지로, 르 귄에게도 과학과 예술(art)은 동의어이다(364). [오늘날의 대학은 이런 교육을 하고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정작 학생들이 마굴리스처럼 생각할까? 누구의 잘못일까? 학생인가, 대학인가, 혹은 그들이 속해 있는 더 큰 시스템의 문제인가?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자면, 모두의 책임/응답-능력(response-ability)의 문제이다. 그러나 누가 더 책임이 있는가의 문제는 남는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마굴리스의 "가이아"와의 연관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 단편은 모든 생명 현상은 광합성이나 사물 기생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식물로만 존재하는 행성 탐사에 관한 이야기이다(321). 그러나 이 행성의 거대 식물 생태계는 탐사대를 타자로 인식하고 공포를 느끼며 경계한다(354). 생각하지는 않지만 느끼고 반응을 조절한다. 이는 바로 마굴리스와 러블록이 고유감각 체계(proprioceptive system)를 갖고 끊임없이 새 환경과 새 생물을 만들어내는, 조절이 이루어지는 행성 표면으로 개념화한 가이아의 정의(공생자 행성, 200, 212)에 상당히 들어맞는 묘사이다. 딱 들어맞지 않는다면, 이 행성의 거대한 식물 군체가 공포라는 인간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인데, 마굴리스는 가이아를 인간의 성질을 지닌 어떤 것으로 묘사하는 속류적 의인화에 질색을 하기 때문이다.

 

3. 소중한 타자, 부분적 연결, 진창 속에서 함께 세계 만들기, ...

가이아와 더불어 번번이 등장하는 타자와의 조우는 르 귄이 마굴리스, 해러웨이와 공유하는 테마이다. 식민화한 행성에 살고 있던 타자들을 분류하고 서열화하여 관리하는 것(<샘레이의 목걸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온 타자들이 각기 잘 어울리는 커플로 발전하는 이야기(<파리의 4>),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의 어려움(227), 아홉 명의 다른 자아와 늘 함께 살며 대화하다가 혼자 살아남은 클론이 타자들 속에서 진정한 외로움을 느끼는 장면(<아홉 생명>, 258), 고립 속에서 평화로이 살다가 새로 등장한 타자에 대해 느끼는 공포(354), 인간, , 자동차 등을 타자(the other)로 인식하는 나무의 이야기(<길의 방향>), 절대적 타자라 할 수 있는 희생양 아이의 존재(<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 이 단편집은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들과 맺는 다양한 방식의 관계들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의 완벽히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존도, 반대로 타자와 교류·소통하지 않는 완전한 단독자의 삶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 그리고 아마도 거의 모든 생명과 사물들도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언가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다. 악어와 악어새, 연리지처럼 금슬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지만 잡아먹고 잡아먹히기도 하고, 또 잡아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된 채 포식자의 몸의 필수적 일부를 구성하여 개체변이를 일으키기도 하고, 모두에게 총체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 부분적 연결의 매듭이 다시 맺어지고 시간이 지나 풀려지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간다. 시야를 인간 세계 바깥으로 훨씬 더 넓혀 보면 이 부분적 연결 방식에 규범적·정상적 양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점을 인간 세계만으로 좁힌다는 것이 이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철학, 인류학, 정치학, 사회학의 주요 연구대상이다.) 때로는 낯선 자들의 친밀성”(트러블과 함께하기, p. 109), 때로는 (음의 되먹임을 통한) 적대적 공생이, 또 때로는 준항구적 착취가 더 지배적일 수 있을 것이다.

 

더듬이, 촉수, , 혀를, 그리고 뭐든 뻗어 타자를 만지고, 간 보고,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찌르고, 쏘고, 때리면서 존재들은 엉킨다. 해러웨이는 진흙속에서 엉키는 우르보로스의 형상으로 촉수 있는 것들이 서로 얼키고 설키며 함께 만드는 세상을 표현한다(트러블과 함께하기59-64, 해러웨이 선언문345-346). 지금은 숨쉬고 먹고 배설하지만 우리는 죽어 퇴비가 되고 진흙이 되고, 다른 촉수 있는 것들의 몸에 흡수될 것이다. 그런데 이 진흙의 모티브도 르 귄에게서 취해진 것으로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듯당신이 사람이라면 그리고 가진 것이 진흙뿐이라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그러나 자신이 진흙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자들은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이제물은 저절로 수평을 찾아가고진흙진흙으로그리고 라이아는 더럽고 시끄러운 거리를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갔고라이아 세대의 추하고 약한 모든 존재는 고향에 와 있었다스프레이를 뿌려 멋을 내려 했지만 망가지고 찌그러진 머리를 한 졸린 눈의 창녀들야채를 사라고 기진맥진해 소리를 질러대는 외눈박이 여인손을 내저으며 파리를 쫓고 있는 반푼이 거지이들이 라이아의 고향 여인들이었다라이아와 비슷해 보였고 모든 슬프고역겹고비참하고 불쌍하고끔찍했다라이아의 자매들이고 라이아의 사람들이었다.” (494)


4. ... 그리고 SF

<스타트랙> 시리즈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는, 따라서 대중적인 SF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이는 마굴리스는 <스타트렉> 우주선 안에서 비인간 생명체, 특히 식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는다. 그녀는 먼 우주공간으로의 항해에는 폐기물을 식량으로 재순환할 인간 이외의 다양한 생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필수적임을 지적한다(공생자 행성, pp. 185-186). 르 귄이 이 글을 읽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마굴리스라면 르 귄의 SF를 좋아했을 것 같다. 르 귄이 1942년 열두살 때 처음으로 기고했다 퇴짜맞았던 단편의 주제는 지구 생명체 기원에 대한 것으로 SET 이론을 통해 진화를 설명하고자 했던 마굴리스의 기획과 큰 방향에서 일치한다(54). 그리고 나무는 르 귄에게 특별한 영감의 원천이다. 또 르 귄은 복잡한 기술은 지루해 하지만, 생물학과 심리학을 좋아하며, 천문학과 물리학의 사색의 결과(speculative ends)를 매우 좋아하는 SF 작가이다(80).

 

해러웨이는 마굴리스와 르 귄을 모두 사랑한다. 해러웨이의 중의적인 SF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사색적인 이야기 만들기(speculative fabulation), 실뜨기(string figures), 사색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 사실(science fact) 등 이 모든 것이다(트러블과 함께하기, 10). 마굴리스의 SF가 사색을 통해 과학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르 귄의 SF는 사색을 통해 과학 사실의 은유(metaphor)라 할 수 있는 과학 소설(허구)을 이야기로 창조해낸다. 해러웨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이들을 또 다른 영감의 원천들과 함께 실뜨기해낸다. (여기까지 쓰고 그 다음을 한참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지금은 내 말로 명확히 정리할 수 없는데, 과학자와 소설가를, factfiction을 실뜨기로 함께 엮는 해러웨이의 SF는 일련의 선언들을 통해 줄곧 강조한 기호학적 육신성, 물질적인 기호, 기호적 물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열쇠인 것 같다. [이 부분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는데, 미래의 나는 이에 대해 조금더 잘 알겠지. 그치? ^^ 아자! (이런 것이 정리하고자 했던 언어의 수행성인데, 말로 정리가 잘 안 되네...)].

 

5.

확실히 나는 글을 매우 천천히 읽고, 매우 천천히 쓴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을 소설답게 읽지 못한 탓일지 제대로 리뷰도 못 쓴 것 같다. 이 글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쉬운 글은 아니었다. 애초의 목적은 여행 중에 이것 말고 르 귄이 쓴 다른 책도 보고, 르 귄에 입덕할지 고민 좀 해보겠다는 거였는데, 공들여 읽고 리뷰 쓰느라 낑낑대다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르 귄 입덕 고민을 위한 독서는 좀 미루겠다. 해러웨이가 소개해준 다른 사람 책을 더 먼저 보아야 할 것 같다. , 그것도 당장은 못해서 좀 아쉽다. 8월 한 달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르 귄의 책을 다음에 읽는다면 먼저 봐야할 책들을 네 권만 꼽아 본다.

 

1) 해러웨이 세상에서 르 귄 세상으로의 킥

① 『세상 끝에서 춤추다: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②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최준영 옮김, 황금가지): 해러웨이 선언문348쪽에서 언급

 

2)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이 들어가 있는 장편

① 『로캐넌의 세계(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② 『빼앗긴 자들(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날씨가 너무 좋았던 섬에서 보낸 여름 휴가 일주일을 마치고, 여행 빨래하듯 리뷰로 정리한다. 빨래, 사진 정리, 리뷰, 일상으로의 복귀. 이렇게 7월이 흘러가버렸다.

이번 여행의 교훈: 1) 책은 한 권만 가져간다. 2) 혼자 있는 시간은 여행에서 더욱 소중하다. 3) 일상에 충실하자. 다음 여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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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31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22-08-01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열심히 읽는다고 다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닌데, 해러웨이는 정말 좋아 합니다. ㅎ
 
공생자 행성 -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5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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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린 마굴리스(1938-2011)는 세포, 그 중에서도 핵 바깥의 세포질을 연구한 미생물학자다. 미생물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4부에서 언급한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같은 사람인가 보다 했다. 세상의 다른 것들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이 연구하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 엄밀한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자. 니체의 말로는 하나만을 알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를 바라는, (그러나? 그러므로?) “정신의 양심을 가진 자(정동호 역, p. 403)이고, 사르트르의 표현대로라면, 지식인이 아닌 지식기사이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자신의 전문 분야가 충분히 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괄호친, 곧 관심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문제삼지 않는 자, 그 존재자들을 자신의 인식 지평 바깥에 둔 자이다. 이들은 자신의 앎의 지평 안에서는 무수한 물음표들을 만들어내고 대답을 제시하(려 노력하)지만, 그 바깥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이 제기되어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미덕이 있다면, 곧 그들이 정신의 양심을 가졌다면, 이 경계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겸손하다는 것이고, 단점이라면 그 밖의 문제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굴리스는 나의 이런 선입견에 멋지게 한 방 날렸다. 그녀는 미생물 연구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동물과 식물, 생명, 진화, 그리고 가이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들을 시도한다. 이와 더불어,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들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명시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미생물은 공간적으로 이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이 육지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도 미생물이 자신들의 막 안에 액체를 유지함으로써 일종의 초바다(hypersea)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고, 광합성을 통해 대기를 산소로 채운 것도 이 미생물이다(192-193). 시간적으로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있었고, 인간이 출현한 다음에는 인간과 함께 그들 안팎에서 존재하며, 인간이 소멸한 다음에도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미생물보다 큰 세상이란 우주밖에 없다. 그 순간 나의 인식 지평이란 참 초라해진다. 인간의 삶과 사유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의 역사가 모두 미생물 앞에서는 하찮아져 버린다. 오만을 반성하고, 그 앎의 상대성과 무지를 인식하게 되면, 쳐졌던 괄호는 풀리고 그 중 일부는 새로운 앎과 새로운 모름의 대상이 되어 인식 지평으로 편입되고, 괄호는 다시 쳐진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창세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신화, 나아가 오늘날의 SF의 위상과 동등한, 믿음직하지 않지만 재미는 있는 픽션이 된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 이후로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 생명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한). 생물은 좋아하는 과목였지만, 그것은 나와 생명체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살고 죽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공부였다. 이제 비로소 지금은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을 나를 알기 위해, 나와 같이 살면서 세계를 만들고 있는(worlding) 생명들을 알기 위해, 그리고 이 생명들이 다른 힘들과 함께 이루는 가이아를 알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그래도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정보의 조각들은 여전히 유용하다. 세포, , 세포질, 미토콘드리아, DNA, RNA, 염색체, 감수분열 등 이제는 내게 Inside Out빙봉과 같은 존재가 되어 기억 창고 속에 먼지가 가득 쌓였던 개념들이 다시 등장한다.

 

이 책은 단순한 생물 교양서가 아니다. 마굴리스는 연속 세포 내 공생이론(SET, serial endosymbiosis theory)”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비전공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이론을 확립한 미생물학자이다. 이 책에서 마굴리스는 이 SET과 가이아의 연관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마굴리스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렇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니까, 너도 어렵다고 중간에 책 덮으면 안 돼. 독자 너도 필자 나만큼은 노력해야지. 읽는 게 쓰는 것보다 어렵겠니?” 그런데 읽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 정리해보자.

 

1. SET: 공생자 행성의 공생자들

1967년 마굴리스는 SET을 세상에 선보인다. 간단히 요약하면, SET역사와 능력이 각기 다른 세포들의 융합, 곧 하나됨의 이론이다(67).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세포는 공생하는 별개의 세포(박테리아)가 합쳐져서 새로 만들어진 개체이다. 이제 공생은 개체간 공생이 아니라, 개체내 공생이 되며, 완전히 새로운 성질을 지닌 개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진화가 일어났음을, 곧 공생발생(symbiogenesis)을 통해 진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포 수준뿐만 아니라, 더 큰 동식물 개체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이 융합은 순서대로(serial) 일어난다. 진핵세포 안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대사 과정은 세포 내로 들어온 호열산세균에서 유래한 것(1단계)이고, 그 다음에는 정자 꼬리 같은 것을 가진 유영 세균이 결합(2단계)하였고, 산소호흡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또한 세균 공생자가 진화한 것(3단계)이고, 조류와 식물의 엽록체와 색소체는 이전에는 독립생활을 하던 광합성 시아노박테리아가 합체(4단계)된 결과이다. 마굴리스에 따르면, 각 단계는 가설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2단계를 제외한 세 단계에 대한 검증이 완료되었으며, 2단계에 대한 가설도 곧 검증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한다(78-80).

 

이는 단지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된 것, 곧 비어있던 자리가 새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지식과 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싸움에서 이겼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포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 순차적으로 합체한 결과이며, 진화가 이를 통해 발생했다는 공생발생의 기본적인 통찰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러시아 생물학자 콘스탄틴 메레슈코프스키(1855~1921)와 컬럼비아대 교수였던 아이번 월린(1883~1969) 등이 이미 공생발생의 주장을 편 바 있다(22-23, 56-57, 67, 77-78, 101).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의 이론을 검증할 도구들이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주류에 의해 무시당했다. 마굴리스는 자신의 핵심적 기여는 이 이론의 세부 사항들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면서, 한때 배척당했던 이 이론이 정설로 되어가리라는 점을 확신한다(75). [해러웨이는 마굴리스가 이들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자현미경, 핵산서열 분석기 같은 20세기말의 강력한 사이보그 도구들덕분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트러블과 함께하기, p. 114).]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SET 역시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마굴리스도 결코 응전을 회피하지 않는다. 경합의 파트너들은 상대방의 논리를 잘 파악하고 있고, 자신의 이론이 옳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상대방뿐만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검증을 계속한다(81-92).

 

경합이 발생하고 해소되는 방식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다르다. 입장 차이와 경합은 종교에서 억압 또는 회피되지만, 그것들은 과학의 존재방식 자체이다. 그것이 해소되는 방식도 다른 것 같다. 설명 대상인 존재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과학의 입장이다. 그 존재에 대해 물음표를 끊임없이 던지며, 그 물음에 대한 답들은 언제나 인식가능한 실재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종교는 대상의 초월성을 가정하므로, 보편적 인식 가능성에 기반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설과 검증이라는 진리 테스트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는 도덕을 구성할 수는 있어도 상식을 구성할 수 없다.

 

2. 25계 분류 체계: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경합에서의 승리는 연쇄적이고 확장적이다. 공생발생의 진화 이론은 기존의 진화 이론에 입각하여 고안된 분류체계, 곧 생명을 이름 붙이고 분류하는 방식도 새롭게 다시 쓴다. 우리는 막연히 유기체는 동물과 식물 두 가지가 있다고, 또는 여기에 병원균을 더하여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교육받고 그것을 상식이라 생각하지만, SET에서 발전된 25계 분류(two-tiered five kingdom classification) 체계는 이 상식을 뒤엎는다.

 

분류학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 300년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5백여 종의 동물을 분류했지만 눈에 보이는 동물만을 분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생물은 아예 들어 있지도 않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당시까지 보고된 모든 생물들의 목록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유니콘, 인어 등도 들어 있었다(108). 칼 폰 린네(1707~1778)는 생물의 속(genus)과 종(species)二名法[: Homo() sapiens()]을 창안하였고, 1만 종의 생물을 분류하였지만, 신의 창조를 믿었던 그는 진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린네까지는 생물을 크게 동식물 두 종류로, 파스퇴르 이후에는 여기에 세균을 추가하여 세 종류로 구분하게 된다. 분류학에서 진화를 최초로 고려한 사람은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인데, 그는 동물과 식물의 공통 조상은 둘 중 하나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물계와 식물계에 원생생물계를 추가하였다. 생물 분류체계는 이후 허버트 코플런드(1956)와 로버트 휘태커(1969)를 거치면서 더욱 세련화되었다.

 

마굴리스는 칼린 슈워츠와 함께 이를 종합하여 1998년에 25계 분류를 발표한다. 이들은 먼저 1) (핵이 없고 공생발생을 거치지 않은 세균, 곧 박테리아인) 원핵생물과 (핵이 있고 공생발생을 통해 진화한) 진핵생물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진핵생물을 다시 2) 원생생물, 3) 균류, 4) 식물, 5) 동물로 구분한다(99-100, 106-107). 마굴리스(와 칼 세이건)의 큰아들 도리언 세이건은 각 생명군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그려냈다(그림 4, 100).



 

마굴리스는 이 25계 분류가 최종적 지식, 완성된 진리가 아님을 시인한다. 곧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을 연구한 결과를 반영하여 계속 수정되어야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계 분류는 생물을 두 종류, 세 종류로 분류하는 기존의 상식이 허위임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상대적 진리임은 분명하다. 인상적인 것은 마굴리스가 기존의 분류법을 비판하면서 더 타당한 분류법을 고안하고자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명명과 범주화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한다. 그런데 그 중에는 잘못된 분류법에 기반해서 잘못 붙여진 이름들이 많다. ‘남조류’, ‘원생동물’, ‘고등동물’, ‘하등식물등이 대표적이다.

 

마굴리스는 언어가 존재와 사태를 명확히 정리하기보다는 혼란을 유발하고 속일 수 있다고 말한다(104).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로 정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이름과 잘못된 분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명명과 분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더라도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올바른 분류 체계를 마련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린 캐리 울프와의 대화”(황희선 역, p. 308, 325)에서 언급된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유명한 말이 인용된다. (유명하다는데 나는 처음 봤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98). 곧 공생발생하는 생명들이 실제의 땅이라면, 분류법은 그것을 종이에 옮겨놓은 지도이고,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라벨링, 서랍에 넣고 정리(하고 안심)하기는 그 존재를 왜곡한다. 그러나 생물학자의 지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땅에서 사는 생명들은 계속 살아나간다. 이름 붙이려면 제대로 붙이는 것, 그게 인간에게는 최선이다. 하지만 지도 밖의 생명이 마굴리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내게 붙인 이름 또는 부여한 속성이 나의 존재를 다 파악한 것은 아니라고. 이쯤에서 자연스레 해러웨이가 연상이 되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하자. (“반려종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p. 123)

 

3. 가이아

마굴리스는 머리말에서 자신은 애초에 SET과 가이아 개념이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음을 밝히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바뀌었고, 이 책의 주요 목적은 양자간의 연관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이아에 대해 논하는 마지막 8장이 제일 인상적이다. 섹스와 감수분열의 기원(6)과 초바다를 통해 생물권이 육지로 확대되면서 지구가 공생자 행성이 된 이력(7)도 흥미롭다. (20227월 초 현재 서울 서북부지역은 이른바 사랑벌레때문에 고생이라는데, 원서 6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벌레(love bugs) 이야기가 나오는데, 184쪽의 번역에는 누락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가 마지막의 가이아 논의로 모아진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공생발생 논의가 요약되고, 이 논의가 가이아 이론으로 이행하는 연결부 역할을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도, 생명은 훨씬 더 폭넓은 계(system)를 이룬다. 우리 피부 바깥(그리고 안쪽)에 있는 수백만 종들은 물질과 에너지 측면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다. 지구의 이 이질적인 존재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우리의 조상이자, 우리의 일부다. 그들은 우리의 물질을 순환시키고, 우리에게 물과 양분을 준다. ‘(the other)’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을 통해 공생하고, 상호 작용하고, 상호 의존하던 과거와 연결된다.” (196-197)

 

마굴리스는 가이아에 대한 논의를 고유감각(proprioception)”이라는 의학적 개념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곧 몸의 상태에 대한 몸의 느낌이다. 눈을 깜박인다는 것,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 속이 불편해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들 같은 것까지 다 고유감각이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이 없지만, 이러한 생리적으로 조절되는고유감각 체계(proprioceptive system)를 갖고 있다. 제임스 러블록은 이 행성의 조절 체계가 지구의 생명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 초 어느날 그는 이 지구 대기의 화학적 이상을 감지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인공두뇌 시스템의 작명을 파리대왕의 저자인 윌리엄 골딩에게 부탁한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가이아이다. 러블록과 마굴리스는 가이아 연구 초기부터 서로 의견 교환을 하면서 그것의 개념적 내실을 다져왔다. 가이아는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활동하는 천만 종 이상의 생물들,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 에너지원인 태양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출현(창발)한 전 행성적 체계이다(210-211). 그것은 끊임없이 새 환경과 새 생물을 만들어내는 조절이 이루어지는 행성 표면을 가리킨다(212).

 

가이아 이론은 과학적인, 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생리학적인 가설로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지구의 생명 집합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몸의 속성들을 보여준다”(218).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나 J. Kirchner 같은 이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가이아 이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러블록과 마굴리스는 생명 전체가 자신이 이용하는 환경을 최적화한다(optimize)애초의 개념화에 내재되어 있던 목적론적뉘앙스를 제거하면서, 가이아 개념 자체의 정당성을 끝까지 고수한다(203, 219-220). 왜냐하면 생물의 다면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지구의 기온과 대기의 구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일관된 입장에는 가이아 이론이 유용한 과학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다.

 

마굴리스는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의 비판보다는 가이아 개념이 대중화되면서 생긴 비과학적 활용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다. 곧 가이아를 신통기의 서술대로 대지의 여신같은 어떤 개체적 생명체로 인식을 한다든가, 이러한 인격화에 기반하여 지구를 강간의 위험에 노출된 여성으로 비유하는 페미니스트 담론에 내재되어 있는 왜곡 가능성을 경계한다(211). 종교, 언론 등에 의해 조장되는 이러한 대중적 곡해에 반대하면서, 마굴리스는 가이아가 인간에게 악의를 드러내지도 인간을 따로 돌보지도 않으며, ”기온, 산성-알칼리성, 기체 조성 조절 같은 지구 규모의 현상의 약칭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212).

 

4. 홀로바이온트의 함께-세계 만들기와 가이아의 두꺼운 현재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해러웨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트러블과 함께 하기의 여러 곳에서 자신이 마굴리스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았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울프와의 대담”(324-5)에서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구성하는 여러 갈래들로 1) 하이데거-아감벤의 생명정치, 2) 푸코의 생명정치, 3) 페미니즘, 4) 마굴리스로부터 영향받은 시스템에 관한 생물학적 사유를 지목하는데, 이 중 마굴리스의 영향이 가장 두터운 갈래라고 말한다. 트러블과 함께 하기는 마굴리스의 공생발생(symbiogenesis) 개념을 공동제작(sympoiesis, -)” 또는 함께-세계 만들기(worlding-with)”, 그리고 하나도 아니고 개체도 아닌 채로 서로 얽혀 있는 실체를 홀로바이온트로 변용한다(61-63, 107-114). 또 해러웨이는 르 귄, 라투르, 스탕제르 등의 논의를 조합하여 마굴리스가 고안하고자 했던 가이아의 비의인화된 형상의 모습을 툴루세와 카밀 이야기를 통해 재현하고자 한다(73-81).


<세포내 공생: 린 마굴리스에 대한 오마쥬> (트러블과 함께 하기』, p. 108)

 

가이아 안에서 우리는 물질대사를 하며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을 흡수하여 몸을 키우며 살다 죽는다. 그 후에는 분해되어 퇴비(compost)가 되어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것들의 물질대사를 통해 그들의 몸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지금 물질대사를 하는 생명체이지만, 그렇게 지금 나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과거에 나 아닌 타자를 구성하였고, 내가 죽은 후 미래에는 또 다른 타자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위의 인용구(196-197)에서 마굴리스가 이야기했던 바가 개체들이 살다 죽으면서 전체를 구성하는 가이아의 시간대, 곧 툴루세인 것인다. 이 두꺼운 현재(thick now)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친밀한 타자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되면서 살다 죽고, 분해되어 흡수되고, 자기 아닌 다른 것의 일부를 형성한다.

 

마굴리스는 인간의 오만을 질타한다


인간은 자연을 끝장낼 수 없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자연은 불협화음과 화음을 적절히 섞어 가면서 계속 노래부를 것이다”(226-227).

자연으로 먼저 들어간 마굴리스를 대신해 해러웨이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해러웨이는 더 많은 사람들, 반려종들, 사이보그와 함께 킨이 되어 실뜨기와 존재론적 안무를 하며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5. 나가며

마굴리스는 미생물학자이지만,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그 아주 작은 것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모든 것에는 무관심한 학자가 아니다. 거머리 뇌 학자는 아주 큰 세계에 무관심하지만, 마굴리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가이아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으로 확장시킨다. 그녀가 연구하는 미생물은 공간적으로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는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존재해온 위대한 존재, 인간보다 더 큰 세계이다. 이 작은 미생물에 대한 앎이 인간보다 더 큰 가이아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틀리다고 믿는 것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사실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앎도 믿음도 바뀔 수 있지만 현재의 그것들이 기초하고 있는 탄탄한 근거들보다 더 강한 증거가 있어야만 바뀔 수 있다. 영토의 변화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지도는 폐기되어야 하고 다시 그려져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린 지도에 대한 믿음보다 그 지도가 그리고자 했던 저 바깥에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야 가능할 것이다. 나이들수록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텐데 존경스럽다. 닮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 있으려면 인간-비인간 타자에 대한 관심, 그들과의 부분적 연결,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그의 호의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학자로서의 야심과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같이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인데, 마굴리스도 해러웨이도 이 둘 모두를 갖춘 훌륭한 여성, 존경스러운 지식인이다.

 

: 번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는 번역이다. 딱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읽다가 글의 맥락이 이상해서 원서를 확인해보고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77쪽 마지막 줄부터 787행까지의 부분(공생 발생은 러시아의 ~ 특성들을 많이 잃었다)703행과 4행 사이에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엉뚱한 곳에 번역이 되어 있다. 원래 영어 책의 43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3장의 첫째 문단 다음에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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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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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끝자락, 나는 비가 참 많이 오던 제주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 처음 읽는 해러웨이였고, 문제투성이 번역과 겹쳐 무척 힘든 책읽기 경험였다.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재미있었고, 해러웨이에게 매료되었다. 그 때의 경험이 예방주사였을까? 결코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그녀에게 설득되었다. 이 책은 상이한 시점에 작성된 세 글 사이보그 선언”(1985), “반려종 선언”(2003), 그리고 캐리 울프와의 대담(2014) - 로 구성되어 있고,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함께 2016년에 출판되었다.

 

리뷰를 쓰면서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일단 해러웨이가 명확하게(manifestly) 드러나도록 서술하려면 그녀의 지적 정체성(identity)을 실정적으로(positively) 재현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는 생물학(리처드 르원틴, 린 마굴리스, 에벌린 허친슨, 그레고리 베이트슨), 페미니즘(첼라 샌도벌, 케이티 킹,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모니크 위티그 등), 정치경제학(리처드 고든), SF(오드리 로드, 어슐러 르귄, 옥타비아 버틀러), 부정신학, 인류학(애나 칭, 매릴린 스트래선), 철학(화이트헤드, 푸코, 에스포지토, 데리다), 카톨릭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실천과 결부된 과학철학(라투르, 스텡거스), 그리고 반려견 훈련에 대한 저작들까지 해러웨이가 섭렵한 지식들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해러웨이 말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또 세계를 진행 중인 세계(the world ongoing; worlding)로 바라보면서 불변의 동일성을 지닌 고정된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해러웨이에게 어떤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잠정적으로는 가능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178, 327-333)은 어떤 현재진행형의 넘침(ongoing exceedingness)”이라는 양태에서 기인하는 무한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지만, 해러웨이는 유한한 필멸의 존재이다. 우리 같은. 그러나 우리와 다른 엄청 똑똑하고 해박한 인간이면서도 그 도저한 사유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겸손함을 갖고 있는 SF 리얼리스트이다. 그녀만큼 똑똑하지 않다면, 적어도 그녀만큼은, 아니 그녀보다 훨씬 더 겸손하기라도 해야 한다. 정성들여 읽었는데, 미래의 나를 위해 쓰자.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의 어떤 희망을 위해.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던 때 내가 1년도 채 못 되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설득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과거는 현재 속에서 되살아난다. 어쩌면 미래에도.

 

1. 사이보그 선언 (1985)

1985년에 쓰여진 글이니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망하기 전이다. 두 해 전인 1983년 레이건 정부는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하였고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이 큰 히트를 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이 첫 선언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의 진지한 신성모독, 곧 이의제기이다. 무엇에 대한? 직접적으로는 맑스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 “여성의 본질적 통일성은 없으니까!(30, 38) 그런 것을 말하는 우리백인 페미니스트의 여성범주가 순수하고 결백한 것이 아니니까(36). “소외이건 성적 대상화건 핵심 기제를 추상적으로 특권화하여 총체화시킴으로써 (인종처럼) 다른 중요한 적대의 문제에 침묵하니까(41). 또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비판대상과 거울 이미지이기 때문에! 비판대상이란? 맑스주의/정신분석학을 포함하여 총체성을 전제하는 전체론(holism)!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현재를 원죄 이전의 태초라는 과거와 묵시론적 종말이라는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가정하고, 이 역사(History)의 전개는 세계의 총체성의 발원이자 귀결인 모순(contradiction)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추동자로 자기동일성/정체성(identity)을 지닌 주체(Subject)를 상정하기 때문에! 이 주류 페미니즘들이 가정하는 여성 주체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 하나의 주체로 동화불가능한 여러 목소리를 지닌(polyvocal) 여성들의 근본적 차이를 삭제해 버리기 때문에(40)! 이렇게 정리하고 만다면, 사이보그 선언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포스트모던사상의 맑스주의에 대한 배교행위와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선언의 뛰어난 점은 그 와중에 세계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고, 가능한 실천양식들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진지하고 겸손하게, 냉소하지 않으며.

 

해러웨이가 보기에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본원적 통일성을 가정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의해 본의 아니게 오염되어 있다. 스타워즈 상황에서 탄생한 사이보그는 총체성이 아니라 부분성, 모순이 아니라 아이러니,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라 혼종성(결연과 연대), 전체론이 아니라 부분적 연결, 전위정당이 아니라 통일전선의 정치를 추구한다(20-22, 31). 사이보그는 아이러니를 통해 전자가 가정하고 있는 이원론적 경계를 붕괴시킨다. 1) 인간과 동물, 곧 문화와 자연의 경계, 2)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 3)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견고했던 경계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이보그 앞에서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23-26). 하이브리디즘의 이원론 비판이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보다 앞서 이 <사이보그 선언>에서 선보인다. 라투르보다 훨씬 더 역사적이고, 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난 라투르보다 해러웨이가 더 좋다.

 

새로운 산업 혁명의 신기술은 사이보그뿐 아니라, (당연히 여성이 포함된) 세계 노동계급을 재형성하며(53), 해러웨이는 이를 가사경제(homework economy)와 연동시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 젠더, 페미니즘의 이념형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56-57).

 

<> 해러웨이의 역사 구분

자본주의 단계

지배양식

미학

가족 형태

젠더 / 페미니즘

상업/초기산업 자본주의

민족주의

리얼리즘

가부장제적 핵가족

19세기 앵글로-아메리칸 부르주아 페미니즘

독점 자본주의

제국주의

모더니즘

근대 가족

-페미니즘적 이성애주의의 만개

다국적 자본주의

다국적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가사경제의 가족

여성 가장 가정, 페미니즘의 다양화, 젠더의 강화와 붕괴


해러웨이가 수용하는 가사경제라는 시대 진단은 빈곤의 여성화(55), 3세계 여성 노동자의 증가(56), 구조적 실업(57), 기아(58), 민영화(58), 여성 과학기술자의 증가(61) 현상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네트워킹, 집적 회로 속의 여성들로 표상된다. 그녀는 가정, 시장, 직장, 국가, 학교, 병원, 교회 등 여러 구분되는 영역을 관통하는 통합된 여성의 정체성 또는 가부장제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63-68). 만약 그것을 꿈꾸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그/녀 역시 전체론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의 언어가 여성 정체성/동일성 확립, 전위당, 순수성, 어머니라는 표상에 집착한다면, 진짜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타자화하게 된다. 마치 인간(남성)주의적 신화가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을 타자화하였듯(76).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집착, 곧 하나(One)가 되고자 함은 자율성을 갖는 것, 힘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가 아니라 타자(the other)가 되라고 말한다(77). 곧 다양해지라고, 변치 않는 경계를 꿈꾸지 말라고, 너의 실체를 고집하지 말라고, 물렁물렁해지라고! 젠더는 보편적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84).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무의식을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라고. 총체화하지 말라고. 경계를 구성하되 다시 해체하라고. 기술을 악마화하지 말라고.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재구성하라고. 공통언어로 말해지는 단결투쟁의 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각자의 언어로 터져나오는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꿈꾸라고. 이것이 그녀가 발휘하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86).

 

2. 반려종 선언 (2003)

<사이보그 선언>의 이면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면, <반려종 선언>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271). 전자가 기술과학(technoscience) 속에서 타자(여성)의 타자들(유색인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들과의 부분적 연결 가능성을 모색했다면, 후자는 자연문화(natureculture) 안에서 함께 살과 침을 섞으며 면역을 갖추고,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어 공진화해나가는 이종간의 러브 스토리이다(“지저분한 발달성 감염”, 117).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해러웨이 할머니는 음란마귀 농담을 좋아하신다. <반려종 선언>의 시작과 끝은 소프트 포르노로 되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가 잘 설명했던 뽀뽀가 아닌 키스로 시작해서 15금 영화 수준에서는 최고로 찐한 러브씬으로 끝난다. 엄청 똑똑한 할머니가 하는 음란농담 - “생명력 넘치는 존재론적 안무”, “메타플라즘”- 은 너무 지적이어서 전혀 야하지 않다.

 

글의 구성은 참 어지러운데, 그 와중에도 일관된 스토리가 제시된다. <반려종 선언>은 로마 숫자가 붙은 다섯 개의 절 - 자연문화의 창발, 진화 이야기, 사랑 이야기, 훈련 이야기, 품종 이야기 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러웨이 자신의 메모라 할 수 있는 스포츠 기자 딸의 기록이 군데군데 네 번 삽입되고, 편지들도 끼어든다. (, 진짜 정리하기 힘들다. 한줄한줄 읽을 때에는 어떤 영감들이 떠오르는 듯했는데, 정리하자니 참 난감하다. 그래도 해야지.)

 

I) 자연문화의 창발

동거하는 인간과 개 간의 반려관계는 서로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 곧 소중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이라는 종()횡단적 사회성을 형성하고, 더 긴 시간 스케일에서는 양자의 공진화를 가능케 한다(121). 실재(reality)를 역동적 과정, 곧 능동태 동사로 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요약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이 공유하고 있는 헤겔-마르크스 계보의 총체성 가정에 대한 비판의 이론적 근거이자, 또한 최근에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개념화한 촉수사유의 전제로 보인다(124-125). 존재는 관계맺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123). 이질적인 존재 간의 관계맺음, 곧 어떤 우연한 기초위에서 맺는 부분적 연결에서 출현(창발)하는 새로운 의미들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의미를 갖는 소중한 타자로 만들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서로를 공구성한다(125-126, 130).

 

관계를 맺는 반려들은 살/육신(flesh)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이들을 서로에게 의미(significance)를 갖는 소중한(significant) 타자로 묶는 매개체는 말(word)과 같은 기호(sign)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물질적(material)·신체적(corporeal/physical)일 뿐만 아니라, 기호학적(semiotic)이다. 해러웨이는 개인적 출신배경 아버지가 스포츠신문 기자인 가톨릭 집안 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138)은 언제나 함께 묶여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이 둘은 근대적 과학이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절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사 중에 이 빵은 나의 몸이라는 신부의 이 밀떡을 성()로 변화시키는 신비(化體說, transsubstantiation)를 믿으며, 마감시간을 앞두고 야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다음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하는 아버지를 보아온 도나에게 둘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Cf. 345). 심지어 그녀가 자리잡은 또 다른 구체적 상황인 과학의 영역에서도 이야기(story)가 필연적이었음을 주장한다. 이제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141-142).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II절부터 V절까지의 제목에 이야기(stories)”가 붙는 이유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몸, 관계, 세계,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한들 기호로 바뀌어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곧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의아함 팩트와 픽션의 분리불가능성 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었다.

 

II) 진화 이야기

최초의 가축인 개가 어떻게 종 간 사회화(152)를 통해 인간과 공진화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개 길들이기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상호적 과정이며, 인간과 개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물체의 몸을 왔다갔다 하며 양자의 면역체계를 상호구성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행위자로 참여하는 자연사이다.

 

III) 사랑 이야기

개에게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반려견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이 해러웨이는 좀 못 마땅하다. 사람을 공격한 적이 있는 개는 죽여야 하고, 그래야만 개와 인간은 서로에게 책임/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갖고 함께 살 수 있다. 사람은 개에 대해 사랑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며, 개는 맡은 일을 해야 한다(164).

 

IV) 훈련 이야기

도나, 마르코(도나의 대자), 카옌(도나의 반려견이자 마르코의 대견)은 함께 훈련하는 킨(kin) 집단이다. 이들 간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은 결코 평등이 아니고 소중한 타자성인데 그것은 그들이 함께 추는 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168). 훈련하는 개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사이보그 트럭이 아니고, 조련자는 개에게 사부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개와의 놀이를 진정 즐기지 않는다면 개 역시 눈치를 채고 만다는 것이다. 이종 간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소통하는 것, 이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에 적합한 이름은 존중”(177)이며, 그 존중이 타자를 의미를 지닌 존재, 곧 소중한 타자로 만든다(179). 인간과 개의 대화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기호가 필요하다는 통찰이 나오는데, (dog)와 신(God)으로 말장난하는 부분은 재미있다(177).

 

V) 품종 이야기

시간스케일의 중층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해러웨이의 독특한 시간관이 드러나는 절이라 할 수 있다(193, 235). (1) 지구와 자연의 시간대인 가장 긴 진화적(evolutionary) 시간 스케일, (2) 대면 관계를 맺는 타자들과 의미를 생산하는 가장 짧은 개인적(personal) 시간 스케일, 그리고 (3) 그 중간의 역사적(historical) 시간 스케일. 이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시간의 층들이 바로 우리의 "두터운 현재(thick now)"를 이룬다(27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원한 현재가 없듯, 영원한 과거도 없다. 여기에서 해러웨이는 앞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시간 스케일을 두 가지 견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추정되는 실제(?)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실뜨기해낸다. [역자는 scale"척도"로 번역하였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스케일"로 그냥 음차하든가, 정 번역하고 싶었다면 "규모"로 직역하거나, "길이"로 의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 나오는 "툴루세" 이야기를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자본세/툴루세 이야기는 캐리 울프와 함께한 반려자들의 대화에서 소개되고 있다(292-299, 363-366).

 

3. 반려자들의 대화

독자 겸손하게 만드는 나쁜 인터뷰다. 앞에 실린 두 선언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독자라면 당황할 법하다. 이 책은 2016트러블과 함께하기와 같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2014년에 이뤄진 해러웨이와 울프의 이 대화는 두 선언의 연관성보다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배경 소개 차원에서 두 선언이 다뤄진다. 따라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으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부분은 활자들일 뿐, 기호로서 다가가기 힘들다. 또 영문과 교수인 울프가 데리다를 너무 좋아해서인지, 데리다 문외한인 나는 바보스러움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문외한인 것이 데리다뿐이랴.

 

하지만 해러웨이는 그런 독자에게도 좋은 개념을 제시해주었다. “상황적 지식부분적 연결이라는. 내 상황에서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부분적으로라도 연결이 된다면, 곧 나의 어떤 맥락 안으로 이 지식을 자리매김해서, 이후의 공부 계획에 영향을 끼친다면 좋은 책이다. 부분적 연결은 또 다른 부분과 연결이 되고, 나와 다른 상황을 알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일반화로, 어떤 총체성 부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황당함에 비하면, 나는 해러웨이와 더 친해지고 더 많이 안다. 그러면 됐다.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그래도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다.

 

4. 생명의 정치와 죽음의 정치

이것저것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두 가지만이라도 거칠게나마 정리하고 싶다. 하나는 해러웨이와 푸코의 생명권력과의 연관성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국역서는 생명정치와 연관된 장을 누락, 출판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때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울프와 식육용 가축 사육의 문제를 논하는 부분(285-288)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면서 죽임과 죽게 만듦을 통해... 그리고 살게 강요하는 것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수를 죽이려고 살게 만드는자본주의에 대해 말한다. 이 부분에서 해러웨이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153-157)에서 과거의 군주권력과는 다른 생명권력의 등장을 말하는 부분을 인간의 생명에서 생명 일반으로 확장한 사유를 선보인다. 푸코는 죽이거나 살게 놔두는(let live)” 군주권력이 19세기에 생명을 양육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해친 이들의) 생명 보전을 허용하지 않는생명권력으로 이행했다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이 문제의식을 연장하여 이윤을 위한 대량살육, 그리고 이를 위한 대량사육을 문제 삼고 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의 식용육 생산 과정이 생명정치의 시야에서 고찰된다. 이 강요된 삶과 강요된 죽음은 생명정치(biopolitics)를 죽음의 정치(thanatopolitics)로 전화시킨다(279).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긍정의 생명정치[affirmative biopolitics, 여기서 affirmative긍정으로 번역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의 문제의식이 논의되는데, 에스포지토를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또 생명정치와 생태정치를 교차시키겠다는 해러웨이의 지향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반성이지만, 고기를 마지못해 먹는 것이 아니라 좋아라 하는 나는....

 

5. 촉수사유: 화이트헤드와 우로보로스

<반려자들의 대화>가 이해가 쉽지 않은 와중에도 미덕이 있다면 해러웨이의 선언들이 내세우는 형상(figure)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이보그(와 집적회로 속의 여성들, 그리고 나선형의 춤), (“육신이 된 말씀”, 소중한 타자와의 부분적 연결, 그리고) 생식과는 무관한 이종간 또는 비인간 동종-동성애의 형상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는 크툴루라는 촉수를 지닌 지하 또는 수중 생명체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는데, <반려자들의 대화>에서는 진창 속에 존재하는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띤다. 해러웨이는 육신이 된 말씀이라는 기독교적 은유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하여 이 새로운 형상의 은유를 채택한다(345). 해러웨이에게 촉수는 단지 감각, 감응, 소통, 공격하는 기관만은 아닌 것 같다. 두족류의 다리뿐만 아니라, 뱀의 형상을 한 것(우로보로스, 메두사, 고르곤), 곧 무언가 휘감을 수 있고 엉킬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364). <사이보그 선언>에서의 사이보그처럼, <반려종 선언>에서 나온 화이트헤드의 개념이라는 포착의 합생”(122), “운동 중인 매듭”(123)처럼 우로보로스와 크툴루는 전체론(holism), 총체성, 정체성/동일성, 이원론들, 그리고 해방의 전망을 부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365-366). 


우리의 몸은 생명체들로 구성되어 있고내 몸은 다른 존재들의 몸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휘감긴다그리고 퇴비(compost)가 되어 또 다른 촉수달린 존재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것이다내 촉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진흙, 유기체, 퇴비... 시간의 중층성과 시간적 비동시성(297)...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 사실과 픽션의 공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영감으로 가득찬 통찰들... 가까운 미래의 나는 이를 좀더 잘 정리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해러웨이의 다음 선언은 어떤 것일까, 그 선언에서 제시되는 새로운 형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점을 같이 갖게 한다.

 

6. 번역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나는 이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역자는 한국말 감각이 뛰어난 분 같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299)는 표현이 나와서 원서에 뭐라고 되어 있나 보니까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린다는 것을 이렇게 번역했다.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구중계를 보는 분 같지는 않다. 덴버 베어스 경기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정확한 번역이지만 주자 만루, 투아웃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2사 만루라고 한다. 몇 가지 의문들이 있는데, 하나만 얘기하면 worlding세계화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세계-되기

다음은 나의 읽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

원서 쪽

황희선 옮김 (책세상)

대안적 번역 제안

20: 13-15

8

노동을 비롯하여 ~ 않는다.

노동, 또는 모든 부분들의 힘을 하나의 더 높은 통일성으로 가공하는 최종적 전유라는 유기적 전체성(wholeness)에의 유혹과 상대하지 않는다.

27: 1-2

13

반면 인간은 ~ 없다. 사이보그는

인간은 어디서든 물질이며 불투명하기 때문에 유동적일 수가 없다. 반면 사이보그는

27: 9-10

13

방어 작업을 ~ 거리 투쟁보다

방위산업에서의 일자리를 요구하는, 종래의 전투적 노동운동의 남성주의적 정치보다

44: 3-6

28

종래의 안락한 ~ 볼 수 있다.

편안하고 오래된 위계적 지배에서 무섭고 새로운 지배의 정보과학으로의 이행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데, 이 이분법은 다음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51: 1

35

현실의

실재의

63: 20 64: 1

47

유토피아적 공동체 ~ 냉소적 이론들

유토피아 이론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적 이론들

65: 1

48

자본주의적인

자본가의

67: 2

50

개혁과

재형성과

67: 3

50

남성의 산업노조에서는

남성 중심 산별노조에서는

67: 11

50

허위의식 또는

허위의식처럼 보이거나 또는

73: 4

55

종말을

묵시록을

73: 9

56

소통과 통신을

통신(소통)과 첩보(지능)

75: 11

58

정초한다.

좌초시킨다(ground).

75: 18

58

좌초해왔다.

묶여 있었다.

76: 17

59

자율성에 덜 좌우된다고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77: 15 22

 

지배되지 않는 주체 the One이며 ~ 사라지는 것이다.

자아는 지배받지 않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타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로 인해 그 사실을 안다. 타자는 미래를 부여잡고 있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자아의 자율성이 거짓임을 알려준 지배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안다.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되고, 강력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며, 타자와 함께 묵시록의 변증법에 연루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해져서 올들이 드러난 소매 끝처럼 분명한 경계가 없고 하나의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 곧 여럿이 되는 것이다.

86: 9

68

갇혀

묶여

133: 18

106

범주가 생물학적

범주가 실제적인[real, 누락!!] 생물학적

138: 19

110

세례 요한의

요한 복음의

138: 20 - 22

110

베어스가 ~ 않을까?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40: 2-3

111

팩트는 논문이 ~ 설정해왔다.

팩트들이 다음날 신문에 실리기 위해서는 마감을 지켜야 한다.

140: 14, 15, 17

141: 1

112

수사

비유(trope)

140: 15

112

문형figure of speech

비유()

141: 5

112

방향이

의도가

141: 13

112

취향도

흥미(관심)

150: 3-9

119

인본주의적 기술 ~ 수립했다.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152: 6

120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이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wolf-wannabe-dogs)

178: 2

141

방식으로 아는

방식으로 신을[누락!!] 아는 것

179: 6

142

연결-속의-타자성에

연결-속의-소중한 타자성에

181: 15-16

144

개를 ~ 솔직하게 배우기란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184: 1

146

걸린 듯 뚫어지게

걸린 듯 그 던지는 사람을 뚫어지게

194: 21 이후

155

척도

스케일

209: 7

167

설문조사에서

조사에서 / 서베이에서

218: 14

175

개의 이빨이 달린

송곳니(canine teeth)가 있는

223: 2 이후

178

개 전체

완전한 개(whole dog)” / 만능 개 / 엄친개 ?

225: 17 226: 1

180

이 둘 모두에서 ~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 둘 모두는 나를 근대화라고 점잖게 부르는 것의 자연문화로 딱 이끌었다.

227: 10

181

약재 시장

마약 판매 지역 (drug sale zone)

231: 22

185

이데올로기적 개선

개선이데올로기들

236: 5-6

189

통해 백인 중산층적 ~ 세계의 사람들은,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253: 1

204

인종주의적 구성체

인종 공동체들

274: 8

221

둘 다/또한의

둘 다 맞는 상반된 이야기의

280: 18

227

확립된

공유된

281: 10

227

생명-우선

생명존중/낙태(임신중지)반대(pro-Life)

281: 15

227

-생명-우선

-낙태반대

286: 15-16

232

지속을 분절하는

살아있는 섬유를 칼로 자르는

295: 11

239

단위가

사물이

300: 2

243

자본주의자

자본가

308: 11

250

확장되면서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342: 4

277

유형적인 인지를 실제로 실행시키는

신체의 인지적 실천을 실행하는

 

 

7. 맺으며

언제나 재미있는 책은 정리를 해도 쓰고 싶은 말들이 남아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읽은, 그러나 여러 번 읽고 또 읽은 해러웨이의 책, 기대 이상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는데, 해러웨이의 다른 글들도 좀 보고, 여기에서 인용되는 다른 이들의 책들도 보고 싶다. 재미있는 책은 읽고 나면 누구랑 같이 얘기도 좀 하고 해야 하는데... 훗날의 대화를 위해 정리해둔다.

 

읽고 싶은 저작들 (우선순)

1) 해러웨이의 글: “상황적 지식”(1988)과 하나의 세계로서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글들

2) 인류학적 저작들: 특히 스트래선

3) 생물학, 생태학 관련 저작: 마굴리스

4) SF 소설들

5)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볼 수 있을까? 읽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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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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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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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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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C. P. 스노가 말한 두 문화 (two cultures)의 노예이다. 대부분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교육을 받고, 언젠가부터 같은 문과인이 아니면 대화의 주제와 소재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을 경험상 체득하며 살아 왔다. 음식을 편식하듯, 책도 편독할 수밖에 없다. 젊은 날 드물게 몇 번, 스티븐 호킹이나 일리야 프리고진의 책에 호기롭게 도전해본 적도 있지만, 역시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었고, 이러한 좌절의 경험은 나의 편독 생활을 부정적으로 강화하였다. 편독이 딱히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은 더구나 아니고 하여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았는데, 생태주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생물과 지구과학에 대한 관심들이 다시 일고 있다. “인류세만을 다룬 책은 처음 읽었는데, 역시 공부를 하면 그 전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은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에 몰랐던 것은 새로 알게 되고, 또 새로운 질문들이 생긴다. 좋은 책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지구과학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지구 시스템 과학의 기본적 논의들을 역사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하기 수월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사회, 철학, 경제, 예술 텍스트가 그것이 자리잡은 역사적 컨텍스트와 접목될 때에야 비로소 그 텍스트에 대한 자기화가 가능해지는 것 같다.


1. 가이아의 부활: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

이 책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처음부터 인류세 이야기를 바로 다루지 않고, 새로운 시대적 정의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주제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이아(지구)가 無로부터 등장하여 신과 인간을 창조하지만,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서는 신이 우주, 지구, 인간을 창조한다. 전자에서 인간은 조연일 뿐이지만, 후자에서 인간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따 만든 특권적 존재이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부터 19세기의 다윈까지 이 히브리적 인간관을 다시 전도시켜 인간을 주연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지만, 인간은 이러한 과학 지식에 기반하여 자신을 거대한 자연의 힘을 발휘하여 지구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변모시킨다.


화석 증거들을 통해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수립을 도왔던 지질학(23-25)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시스템과학의 기틀을 마련한다. 1926년 베르나츠키는 지구 시스템을 태양 에너지를 전체 동력으로 삼으면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하부 권역들 암석권, 대기권, 수권, 생물권, 인류권 의 복잡한 체계로 정의한다(37-39). 그러나 당시에는 이 위대한 소련 학자의 통찰력이 나라 밖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칼 세이건, 제임스 러브록, 린 마굴리스 등의 연구는 지구시스템과학과의 연결 속에서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를 부활시킨다(40-43). 곧 완전한 無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구가 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에서 생명권을 형성시키고 대기의 기후를 40억 년 동안 안정화시키면서 하부 권역들 간의 물질과 에너지 흐름에 의해 작동하는 자기조절적 시스템으로 작동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이다. 이 지구 시스템 과학의 연구 성과 중 부정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이제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2).


2. 쟁점1: 황금못을 어디에 박을 것인가?

층서학은 지질시대를 累代(eon), (era), (period), (epoch)로 구분한다. 우리는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홀로세(Holocene)는 약 117백년 전에 시작되었다. 가장 오랜 지질시대는 선캄브리아 시대의 명왕누대(Hadean)인데 지구가 생긴 46억년 전부터 40억년 전까지의 시기이다. 인간의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야 기원 전 몇 세기이니, 지구의 역사는 시간 단위 자체가 달라진다. 층서학자들은 세와 세 사이를 구분하는 표시를 황금못(Golden Spike)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홀로세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곧 인간이 지구 시스템에 거대한 힘을 발휘하여 지층에도 흔적을 남겼다면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홀로세와 인류세를 구분하는 황금못을 어디에 박아야 하는가? 제안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는 홀로세 시작 직후인 1 1천년 전이고, 가장 최근의 시기는 1945-64년이다. 여기에 대한 여러 증거 제안들이 제시된다. 표로 더 유력한 일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연대기: 인류세의 잠재적인 시작점 및 제안된 GSSP 표지

사건

시점

층서학적 표지

제안자 (페이지)

집약적 농업

기원전

11천년에서 6천년

빙하 코어에 나타난 8천년 전 이산화탄소 최소치 표지

 William Ruddiman (90, 150), Bruce Smith & Melinda Zeder (143)

쌀 생산,

반추동물이 배출하는 메탄

기원전

6천년에서 3천년

빙하코어에 나타난 5020년 전 메탄 최소치 표지

상동 (148), Dorian Fuller (152)

생물 동질화 (동질세)

기원전

5천년에서 5백년

꽃가루, 식물암, 동물 뼈

Gordon Orians (159)

인위적 토양 변형

기원전

3000년에서 500

토양 유기물, 인 축적, 동위원소 비율, 꽃가루

(148)

자본주의

(자본세)

1450

Jason W. Moore (224), Donna Haraway (231)

콜럼버스 교환 (오르비스 못)

1492년에서 1610

빙하 코어에 나타난 1610년 이산화탄소 최소치 표지, 꽃가루, 식물암, ,

Simon Lewis &

Mark Maslin (158-62)

산업혁명

(탄소세)

1760년에서 1800

석탄 연소에서 나오는 비산회, 탄소 및 질소 동위원소 비율, 호수의 규조 구성비, 빙하 속 이산화탄소

Paul Crutzen & Eugene Stormer (90)

거대한 가속

1945년에서 1964

방사성 핵종 (1964년 탄소 14와 플루토늄 239 정점), 블랙카본, 플라스틱, 오염물질, 기타 동위원소들

Will Steffen (90)


이 황금못 후보들 중에서 루이스와 매슬린의 오르비스 못이 제일 흥미로웠는데, 그것은 단지 나의 의견일 뿐, 2016 8월 인류세실무단은 여러 과학적 증거들을 비교 평가하여 20세기 중반의 거대한 가속에 황금못을 박기로 한 상태이다(126, 241). 흥미로운 점은 투표단 35명 중 4명이 소수의견으로 통시적시작점에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빅뱅을 통해 우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138억년 전이고 지구의 나이는 45 6천만 년이다(27). 그 중 선캄브리아대가 40 6천만년이고, 그 이후의 현생누대는 5억 년의 시간이 누적된 것이다. 포유류의 역사가 2억 년,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30만년쯤이라면, 자본주의의 역사 500년은 매우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칼 세이건의 우주력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보았을 때, 컬럼버스의 신대륙 정복은 그 해 12 31 23 59 59초에 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27).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의 시각에서 자본주의 5백년의 역사는 충분히 긴 시간대이지만, 우주나 지구의 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말 눈깜빡할 사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황금못을 1610년에 박을지, 1940-60년에 박을지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지구에 끼친 인간의 힘이 누적적임이 분명하다면 인류세가 통시적 시작점을 갖는 것이라고 보는 소수 의견이 타당해 보이고, 지구의 나이라는 긴 시간대에서 바라보면 그것 역시 등시성이라는 층서 결정기준(81)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3. 쟁점2: “인류세라는 명칭은 온당한가?

인류세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과 달리,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인류세를 안트로포스라는 종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지구상 모든 인간을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218-9). 저자인 엘리스도 이 견해에 명시적으로 동의한다(222). 부유한 국가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더 많이 배출한다. 미국, 중국, 인도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비교해보면, 중국은 미국의 절반에, 인도는 미국의 1/10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에게 지구 변화의 책임을 묻는 인류세라는 이름이 타당한가? 아마 층서학자들을 포함한 자연과학자들은 이 질문에 민감하지 못한 것 같다. 우주와 지구라는 커다란 문제계에 비해 인간 내부의 차이는 너무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이슨 무어를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도나 해러웨이처럼 두 문화의 경계를 부지런히 뛰어넘으며 횡단하는 이들도 예외적으로 이 문제제기에 동참하고 있다.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가 온당한 명칭이라는 이들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인류세실무단의 단원인 저자 엘리스가 이들의 문제제기를 경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224-7). 지난 여름 읽느라 꽤 고생했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4장에서 나온 툴루세(Chthulucene)의 논의도 다뤄진다. 툴루세는 인류세에 체현된 인간중심 사고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비인간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복잡한 사회적생태적 과정의 그물 속으로 인간을 연계시킴으로써 탈중심화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231). 툴루세는 인간이 다양한 종의 집합체가 상호의존하고 있는 더 넓은 세계 속에 얽혀 있다는 상상, 곧 과학적 우화(scientific fabulation)인 것이다. 엘리스는 해러웨이가 의도적으로 과학적 언어와 거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지구 시스템 과학의 체계적 사고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곧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가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및 에너지 흐름을 통해 기능적으로 연결되고, 비생물적 환경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해러웨이와 지구 시스템 과학이 공유하는 요소이다. 해러웨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보니 현재진행형의 두터운 시간성으로서 툴루세의 의미가 보다 잘 이해되었다.


인류세실무단이 인류세라는 이름이 잘못되었으니 이제부터 자본세를 쓰자고 투표할 일은 없겠지만, 자본세라는 명명은 지구를 망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를 떠날 수 있게 된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용하면서도 가치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어의 자본세 논의가 지구 파괴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해러웨이의 인류세 비판과 자본세/대농장세/툴루세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4. 맺으며: 과학적 사실의 발명과 경합하는 해법들, 그리고 약간의 반성

인류세가 올바른 명칭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인류세 논의는 하나의 과학적 사실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준다. 곧 인간의 힘이 지구에 영구적 흔적을 남길 정도로 강해졌고, 이것을 방치한다면 지구 시스템은 티핑 포인트를 지나서 인류의 역사가 알고 있는 생명권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이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가짜 뉴스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truth)이다. 하지만 그 진실은 인간성이 배제된 과학이 그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발명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익과 정치가 개입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또 인류세 개념은 위기의식과 함께 어떤 집합적 행동을 촉발한다. 여기에는 성층권에 빛을 반사하는 미세한 황산염 에어로졸 입자를 주입하자는 크뤼천의 지구공학적 제안부터 나오미 클라인을 비롯한 반자본주의적 기후정의운동까지, 스타벅스의 리필 용기 이벤트부터 쓰레기 만들지 않기, 차 없이 살기, 채식, 귀촌 같은 라이프스타일 변화까지, 수퍼리치들의 뉴스페이스 같은 우주여행 민영화부터 <인터스텔라>, <설국열차>, <돈룩업>의 디스토피아까지, 경합하는 대안들을 산출시킨다.


나쁜 자본세를 좋은 인류세로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질문이며,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답을 하는 과정에서 경합하는 힘들이 대립할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사실의 형성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렇게 형성된 진실은 정치와 경합의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지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내 꼬락서니가 참 한심하다. 내가 건강하면서 지구의 열을 좀 낮출 수 있는 방법들은 참 많은 것 같은데 실천하기 힘들다. 좀 덜 먹을 수 있을까? 고기를 안 먹을 수 있을까? 차 없이 살 수 있을까? 시골에 가서 살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못해도 남은 인생 동안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이 르 면   내년   ‘인류세 ’ 지정…새   지질시대   증거  후보는   플루토늄

내년 ‘ 인류세’  선언 예정... “1950년부터  인류가 자연 압도”


https://youtu.be/GPvyK8dBYqg




[추기: 2024. 3. 19.]

“인류세는 죽었다. 인류세 만세” [오철우의 과학풍경] (hani.co.kr)


Ditching ‘Anthropocene’: why ecologists say the term still matters (nature.com)


15년의 논의 끝에 지질학계는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의 공식명칭으로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저자 엘리스는 1950년을 인류세의 시점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단지 명칭만이 아니라, 시점까지도 채택 여부를 따지는 논의의 쟁점였다는 말이다. 이 논의를 새로 투표에 붙이려면 10년이라는 냉각기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 동안 지구 온도는 또 얼마나 올라갈 것이며, 여전히 한반도에도 사과가 재배되고 있을까? 우리 인간은 좀 바뀌려나? 화석 자본주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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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격 -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진리와 돈의 인류학
마르셀 에나프 지음, 김혁 옮김 / 눌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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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받고 주기, 받았기 때문에 줘야함으로 시작해서 받지 않았음에도 줌으로 끝나는 책이라고 하면 될까? 넉달 동안 조금씩 읽고 나서 리뷰를 쓰려니 머릿속에는 몇 가지 파편들만 떠돌고 있고 하나의 이야기로 엮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속독하며 정리하고 리뷰를 쓰려 했다. 그런데 속독 정리가 불가능해서 저 밑에까지 쓰다가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ㅠㅠ... 좋은 책이다. 독자의 관심이 무엇이건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유명한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의 논의들이 대가의 안목으로 독특하게 직조되며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전망을 여는 책이라고 느꼈다.

 

저자 에나프는 철학, 인류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문학을 넘나들며 정말 많은 저자들의 작업을 역사적·지적 맥락 안에 자리매김함으로써, 또 그들에 대한 자신의 찬반논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내가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맥락적 지식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이 역사적 맥락 안에 자리매김되고, 인류학적 연구가 이론적 맥락 안에 자리잡는다. 보통 별 관계를 생각하기 힘든 주제들 소피스트의 경제활동, 의례적 선물교환, 희생, 부채, 은총, 저작권, 정신분석가의 급료, 그리고 인정 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들이 재료로 활용되어 이 위대한 인류학자/철학자를 통해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바울, 아퀴나스, 몽테스키외, 디드로, 루소, 칸트, 스미스, 맑스, 니체, 베버, 짐멜, 프로이트, 말리노브스키, 모스, 폴라니, 벵베니스트, 코제브, 고들리에, 르포르, 세르, 왈저, 호네트, 레비나스, 그리고 처음 들어본 프랑스 학자의 논의들이 각 장마다 비중이 바뀌며 등장한다. 어떤 장의 주연이 다른 장에서는 훌륭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지속된다. 논의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등장인물의 배치가 달라지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음 배치로의 이동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점층적 논술형식 때문일지 논의를 기승전결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중간을 딱 떼어내고 앞뒤만 말하자면, “진리의 가치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타자에 대한 인정이라는 출구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나오는 앎과 돈을 동시에 잴 수 있는 공통의 잣대는 없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긴 하지만(23, 170, 502, 530, 541), 책 제목인 진리의 가격”은 사실 입구에 대한 이야기일 뿐, 책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간의 여정이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어렵다. 다음은 내맘대로 요약이다. 2부에서 비중있게 다뤄진 의례적 선물교환, 희생제의, 은총에 관한 인류학적·신학적 논의는 제외했다.

 

2. 화폐

화폐에 관한 논의는 1장 이전의 서문(36, 53-54)3(8-10)에서 주로 다뤄지고, 모스, 아리스토텔레스, 짐멜, 세르의 논의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모스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은 시장교환에서 사용되는 현대 화폐가 미개화폐(archaic money) 또는 야생(savage)화폐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보는데, 에나프는 이에 반대한다. 양자는 공존했지만, 엄밀히 다른 영역에서 쓰였다. 물론 화폐가 통용되려면 그것이 귀중한 것임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의례적 교환에서 쓰이는 것들과 동일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례적 교환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대상의 등가성이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바이므로, 엄격한 등가성이 추구되지는 않는다. 반면, 유용품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여야 하는데, 이는 화폐가 사회의 정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화폐를 필요를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이고 정당한 수단으로서 교환에서의 정의를 보장하는 것으로 본다(495-8). 여기에서 교환은 시민간의 교환이지 시장상인이 매개하는 교환은 아니다. 에나프는 모스의 해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대질시키면서, 의례적 교환에서 상품교환으로의 이행을 가정하는 모스의 계보학은 허구라고 비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수정보완한다. 곧 물물교환 또는 척도사물이 매개하는 교환에서 주조화폐를 사용하는 상업적 교환으로의 이행은 정치적 조직과 사회적 분업의 출현과 병행하여 이뤄진다(480). 이는 씨족 집단 간의 보복적 정의로부터 법이 규정하는 중재적 정의로의 이행을 수반한다(491). 이제 유용한 재화의 교환은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근본적 측면이며,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결합된다. 의례적 교환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던 교환되는 사물 자체의 등가성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화폐를 정의의 수단으로 보지만, 정치학은 그것의 역효과, 곧 상인의 화식술(貨殖術, chrematistics)을 경계하였고, 이는 루소와 맑스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화폐가 두 사물 간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이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앞문장에서 화폐는 필요의 측정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뒷문장에서 화폐는 이제 화폐에 대한 욕망 자체를 측정한다(149). 이 화폐는 필요의 충족이라는 목적으로부터 단절된, 따라서 한계가 없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 스스로 목적이 되면서, 애초의 도구로서의 본성과 대립하게 된다. 이제 돈이 돈을 낳고, 돈은 상품이 된다. 맑스는 이를 C-M-C에서 M-C-M으로의 이행, 곧 자본으로서 화폐의 출현으로 이해한다(151). 전자에서 화폐는 중간항, 메존, 메소테스, 초연한 판관이지만, 후자에서 화폐는 그 자체로 이윤(ΔM = M‘ - M)을 얻기 위한 하나의 재화가 되며, 이 이윤은 시간으로부터 초연했던 화폐의 성격을 훼손한다. 곧 이윤이 화폐를 도구에서 행위자로 만들고, 이로 인해 시민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도시는 멸망의 위험에 처한다(152).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맑스로 이어지는 이 전통과 단절한 것이 짐멜의 돈의 철학(1900)이다. 화폐는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507)로서, 화폐경제가 도래함으로써 특정 장소나 사물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510). 짐멜은 해방의 수단이 억압의 도구로 바뀔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전자를 중요시한다(513). 임금이라는 화폐의 매개는 막 시작된 자율성의 보증으로서,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더는 인격적으로 종속되지 않음을 뜻하였다(515). 화폐 유통이 현대사회에서 상호교류와 행동의 근본조건이 됨에 따라, 화폐는 사회화의 조건이 되었다. 짐멜은 화폐를 한편으로는 주체의 자율성 획득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의 실행을 위한 틀로 기능하는 객관 세계의 구성이라는 양 측면을 지닌 한 과정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520). 화폐는 통화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 증대에 있어서 상수이자, 구시대의 신분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열쇠였던 것이다(528-9, 588-9).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를 시민들 간의 필요를 정당하게 매개하는 정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반면, 짐멜은 근대의 역사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기술변동과 끝없는 확장 운동의 틀 안에 화폐를 자리매김하고 자유의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화폐의 긍정적 힘, 곧 정의와 자유를 분석하였다.

 

시장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는 이윤을 얻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나타난다(467-8). 여기에서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곧 화폐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들은 모두 똑같이 취급되고, 화폐 앞에 거의 무한한 선택지가 펼쳐진다. 현금에 내재한 이 개방성에서 자유의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504). 에나프는 여기에서 미셸 세르의 논의에 의존한다. 세르는 현찰로서의 화폐를 조커혹은 비어 있는 요소라고 칭한다(506). 일반등가물로서 화폐는 텅 빈 매개체이자 완전히 가상적인 매개체로서, 아무리 큰 가치라도 표현할 수 있고, 어떤 욕망이나 정열도 포획하여 표현할 수 있다. 화폐는 어떤 종류의 가능성도 나타낼 수 있는 추상이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인 유일한 재화이다(588). 바로 이 무한한 번역 가능성 때문에 화폐는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그 욕망을 무한하게 만들고, 이로부터 권력과 부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번역 가능성은 맑스로 하여금 화폐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비판하게 하였지만, 짐멜로 하여금 자유의 근원으로서 화폐를 찬양하게 한 것이다.

 

3. 부채

부채는 3장 뒷부분(142-163)부터 다뤄져서, 4장 일부분(243)에 잠시 나왔다가 주로 6장에서 논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 돈이 돈을 낳는 것을 부를 얻는 방식 중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며, 이를 자연에 어긋나는 생식이라고 비판한다(145). 이 관점은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에게서도 조금은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지적하지 않은 주제, 곧 빚이 빚을 낳는 것이 문제시된다. 고리대금업 비판은 4세기 카이사레아의 성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되고, 중세(13세기경)에 이르러서 고리대금업은 대죄(mortal sin) 중 하나인 탐욕의 한 형태로 규정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156-8). 고리대금업자들은 시간을 판다. 곧 시간에 값을 매긴다. 서두에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의 자리에 앎, 지식, 진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슬며시 이 시간이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간은 신(초밤의 토마스) 또는 모든 피조물(오세르의 기욤)에게 속하는 것이므로, 고리대금업자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도둑질해 파는 것이다. 곧 그들은 신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준 우주적 선물인 시간의 전유를 통해 돈을 버는 자들이다. 공짜로 선물받은 것을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 증여관계를 상업관계로 변형하는 고리대금은 상호 대갚음의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사슬 전체를 깨뜨리고, 상호의존과 인정의 관계를 지배와 착취의 관계로 바꾸는 결과를 낳고, 자연 전체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시간과 세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자들의 관점은 상이하지만, 양자는 모두 고리대금업을 포함한 이윤추구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쇠퇴한다. 18세기 초의 정치경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도시를 해체할 위험으로 간주했던 것을 시장 메커니즘의 해방을 위한 계기이자 새로운 기회로 상정한다. 고리대금업에 대한 신학적 저주도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고, 종교개혁 이후 칼뱅주의는 계약적인 교환의 확장과 완전히 도구화된 투자의 시간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등식, 시간=을 제시한다(163). 시간과 세계에 대한 재개념화는 이처럼 역사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에나프는 자본주의 시대의 부채에 대해서 바로 말하지 않는 대신, 2부에서 여러 받고 주기에 대한 인류학적·철학적 논의들을 살펴본다. 이 중 부채는 선물, 희생, 은총 등에 공통분모(common denominator) 역할을 한다. “부채의 세계는 희생제의의 실천과 더불어 출현한다”(243, 253, 295, 298, 314-5, 6). 곧 부채는 신이 준 큰 선물, 곧 은총과 함께 등장한다.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채무자가 되고, 신 또는 조상에게 채무를 갚기 위한 노력이 희생 제의의 형태를 띤다(295, 298). 모스가 관심을 기울였던 선물 주기 역시 받았기 때문에 줘야 하고, 줌으로써만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무, 죄의식, 양심의 가책이 모두 부채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 니체의 통찰은 훌륭하다. 그러나 에나프가 훌륭한 점은 니체의 이 통찰이 유대-그리스도교 바깥의 전통으로까지 확장될 수 없음을 인류학적·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다(319-323). 그리고 그는 니체가 선물과 답례 영역의 호혜성의 상징적 의무와 상업적 교환 영역에서 빌린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법적 의무 양자를 혼동하였다고 지적한다. 또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관행은 없었기 때문에 니체가 빚과 죄의 뜻이 함께 있다고 지적한 독일어 Schuld 역시 중세 초기에나 출현하였음을 분명히 힌다(322). 이로부터 에나프는 부채라는 용어를 상업적 교환과 계약에만 국한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금융적 부채보다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상징적 부채가 존재함을 주장한다. 또 금융적 부채도 상징적 차원을 지닐 수 있고, 이것이 니체를 매혹시켰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반대로 피해에 대한 경제적 보상처럼 금융적 부채가 상징적 부채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상업적 교환에 의한 선물교환 관계의 주변화와 부채 감정의 감소가 수반되고 있다.

 

에나프는 상징적 부채를 응대(reply)의 빚, 예속(dependence)의 빚, 감사(gratitude)의 빚, 이렇게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응대의 빚은 선물교환 관계처럼 증여와 답례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빚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속의 빚은 채권자에게는 이익을, 채무자에게는 손해를 지속적으로 축적시킴으로써 채무를 갚을 수 없을 때에는 노에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다. 감사의 빚은 사실상 응대이지만 그것은 어떤 제약도 없는 응대로서, 오직 받는 기쁨과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표현되는 상황이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행복해하므로 기쁘다. 그 외의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일방적인 증여의 지속은 가장 교활한 형태의 빚으로 악화될 수 있다(325-330). 이러한 상징적 부채들은 무엇보다 어떤 불균형 상태의 현시이다. 채워져야 할 결여이며, 바로잡아야 하는 어떤 부족함이다. 그것은 회복되어야 할 피해라기보다는 바로잡아야 할 무질서의 표현이다. 따라서 부채는 세계의 질서와 연관되어 있다(353).

 

그러나 현대에서는 화폐가 부채를 없애는 보편적 도구가 됨에 따라 이 상징적 부채들은 점차 소멸되는 경향을 띤다(330). 현대에서는 빚으로 생활하다가 다시 빚을 얻어 빚을 갚을 수 있고, 빚을 내서 투자하기도 한다. 에나프는 이를 자본의 시간성이라고 부른다(368). 자본의 시간성의 등장은 위에서 살펴본 화폐의 자본화에 대한 맑스와 짐멜의 상반된 두 통찰과 포개진다. 이제 이전의 상징적 부채들에서 중요시되었던 균형의 회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 부채는 안정된 우주를 전제하였고, 그것이 청산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전체의 균형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투자되는 부채는 항구적 운동 상태의 우주를 전제한다. 이러한 우주에서는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끝없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369).

 

에나프는 모더니티가 야기한 세 수준의 변화를 부채의 변화의 맥락으로 제시한다(371-2). 첫째, 평형 모델은 이제 항상성이 아니라, 신용과 금융부채의 동학이 창출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볼 수 있듯 운동의 속성을 전제한다. 시간 자체가 판돈이 되는 것이다. 둘째, 화폐가 상징적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던 여러 재물과 재화들을 대체하였다. 모든 활동과 평가가 시장으로 편입됨에 따라, 돈이 고통, 생명, 범죄를 보상하는 일반적 대체물로 기능한다. 셋째, 모더니티는 이전의 형식적으로 평등한 개인들의 공동체 내에서의 의무와 연합을 무력화시키게 되었다.

 

4. 인정

책 전체에서 에나프는 의례화폐와 상업화폐, 선물교환과 유용품 교환, 상징적 부채와 금융적 부채가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양자를 진화 과정의 선후 국면으로 이해한 학자들을 비판한다. 자본의 시간성 안에 존재한 해석자들은 그 바깥에 존재하는 부적, 귀중품, 선물을 화폐와 상품의 조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모스도 선물교환이 상업적 교환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526). 양자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상업적 교환에서 중요한 것은 등가적인 사물이지만, 선물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남겨져 있는 증여자의 어떤 인격성이다. “선물을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다”(205). 이 선물은 바로 유대를 강화시키는 재화”(231)이다. 시장은 친구와 낯선이를 차별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참여자들 간에 사회적 유대를 창출하지 않는다(237, 592). 법은 시민을 공적으로 인정하지만, 타인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이끌지는 못한다. 에나프는 우리 사회에는 한 쪽에는 법과 시장질서가 다른 한 쪽에는 상호인격적인 선물교환 간의 분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 이 양자의 점이지대가 상당히 넓게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 집단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 처음부터 인정이 보장된 유대 바깥에 있는 타자, 우리의 일상 공간 안에 들어온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에나프는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제기한 문제와 답을 수용한다.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는 순수한 사건이다. 그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예기치 않게, 불시에 온다. “절대적인 새로움, 그것이 타자이다”(595). 타자의 출현 자체로 나는 채무자가 된다. 타자가 나에게 무조건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만큼, 윤리적인 요구는 타자로부터 연원한다.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적 관계는 도덕적 증여, 타자를 향한 친절이 아니라, 타자를 그의 절대적 타자성 속에서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자본의 시간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환대의 공간에서 인정받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 이것이야말로 삶 그 자체이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책의 결말에서 에나프는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에 나오는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 분위기를 전한다. 일상의 삶의 비루함을 잊게 해주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존엄성을 되찾는다.

 

5. 감상

이질적인 재료들을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내는 저자의 관점의 독특성은 무엇일까? 저자 에나프는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사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쓴 철학사를 읽다 보면, 보통 두 가지 감정이 든다. [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철학사를 본인의 관심에 따라 정리했겠지만, 여기서 그 철학사를 쓴 철학자들로 염두에 둔 이들은 들뢰즈, 하버마스, 라투르(?)이다.] 첫째, 철학에 대해 과문한 탓이겠지만, 그들이 다루는 철학의 선배들은 이름을 들어보았어도 또는 읽어본 적이 있어도 내가 아는 내용과는 괴리가 있으며, 내가 안다 생각한 것은 기껏해야 새발의 피일 뿐이었다는 무지의 자각이다. 둘째, 그들의 철학사는 끊임없이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이동할 뿐, 텍스트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이한 역사적 맥락을 주변화함으로써 철학 비전공자들에게 일종의 진입장벽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난점 때문에 그 철학사를 쓴 저자의 논의에 대해서도 역시 무지함을 깨닫는다. 무지의 자각이 겸손과 알고 싶다는 오기라는 효과를 가져오면 좋으련만, 보통의 경우는 그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 그 어려운 말해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스스로 멀리하게 된다. 그 저자의 작업 말고도 우리는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기 때문이고, 그 책들도 죽을 때까지 다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 철학사 독서 경험을 넘어서게 해주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 진리의 척도 문제로부터 시작한 그의 연구는 스승에게는 선물로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전기로 예기치 않게 증여라는 인류학적 주제로 넘어가서, 그 증여 안에는 집단 간, 개인 간 인정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6-8). 그리고 이 책은 출판 이후 엄청난 각광을 받게 되고, 여러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논쟁을 담은 책으로는 악셀 호네트 등이 참여한 베스텐트 한국판 2012가 번역되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 폴 리쾨르, 아마르티아 센 등과의 논쟁들, 그리고 저자가 의지하고 있는 미셸 세르의 주요 저작들도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좋은 책을 읽었는데, 정리하기 정말 힘들었다. 이 책의 끝맺음은 무척 감동적이다. 내게도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 같은 곳이 있다. 옷매무새를 고칠 정성은 없지만, 오늘은 거기 가서 한 잔 해야 하겠다.

 

6. 번역

번역은 별로 좋지 않다. 불어를 못하므로 제대로 평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저자의 학제횡단적 연구를 역자의 실력으로 따라잡기 힘들었던 것 같다. 역자 후기를 보면, 한국말은 잘 하시는데, 번역 실력은 별로 같다. 똑같은 개념이 서로 다른 한국말로 번역되고(: archaic money), “단편으로 번역되어야 할 fragment입자로 번역되고, 수식어를 엉뚱한 데다 갖다 붙이고, 불필요하게 끊은 문장과 불필요하게 붙인 문장들이 너무 많다.

 

 

더 읽고 싶은 책

악셀 호네트 외. 베스텐트 한국판 2012(문성훈 외 옮김, 사월의책)

카슨 매컬러스. 슬픈 카페의 노래(장영희 옮김,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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