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여행 -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콧 펙 지음, 김영범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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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한 가지 기관일 뿐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을 감지해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경험론적인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인간이 감각 기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나 감각 기관의 능력을 확장한 장치를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 당연히 인간이 감지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과학이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어색한 면이 없을 수 없다. 심리학이라는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다소 관념론적이고 추상적이고 확실하지 않아 보일 때가 많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마음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이 심장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심장처럼 마음이 생명 현상과 밀접하고 중요한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한 심장을 갖기 위해서는 운동도 하고 몸에 좋은 음식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좀 더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대해 개인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 아는 것은 더 나은 삶, 더 활기찬 생명을 위해 필수적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계기가 되게 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스캇 펙이다. '끝나지 않은 여행'은 그의 책 '아직도 가야할 길'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가야할 길'도 훌륭한 저서였지만 이 책도 전작에 못지 않은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성장, 너 자신을 알라, 신을 찾아가는 여러 갈래 길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물론 최종적인 결론은 후반부에 있지만 부분 부분이 심리학적 지혜로 가득하다. 심리학적 지혜란 다시 말해서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의 문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용서하는 방법, 죽음의 의미, 인생의 신비로움에 대한 태도,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 신화의 역설적인 진실, 인간 영성의 발전 단계, 알코올 중독과 영적인 질환의 연관성, 삶에 있어서 종교의 의미, 과학과 종교의 분리로 인한 폐단, 뉴에이지, 성(性)과 신의 관계성 등 보통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 그리고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의 생각에 편견이나 환경적 영향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스캇 펙처럼 고정 관념 없이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스캇 펙이 이 책에서 자신이 기독교적 근본주의자에게는 이단으로 뉴에이지 종파에게는 보수적이라고 비난을 받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말은 지금도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적용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책이 너무 기독교적이라고 여길 것이고 어떤 이는 교묘한 이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사람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살게 해 주려는 것'이다. 이 책의 기독교적인 경향은 그의 의도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부합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고 일부 기독교의 교리에 의문에 다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저해될 것 같다는 그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 책을 읽고 느끼고 새롭게 알게 된 바가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이 책 안의 설문 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앞에 내용을 '자기애'라고 하고 뒤의 내용을 '자만심'이라고 구분한다. 당연히 연구 결과에 의해 스캇 펙은 '자기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이야기를 이어 간다. 이유는 자만심은 어려움이나 고통을 당했을 때 자신의 단점이나 극복해야할 상황에서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하고 '자기애'는 현실을 인정하고 괴로움을 견디고 도약하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데 세상과 현실이라는 험난한 곳에서 그 과정을 이어가기 위해선 '자기애'라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을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그러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지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싶은 경향으로 인해서이다. 나는 '자기애'라는 것을 '이기심'과 결부시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캇 펙으로 인해 내가 날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야 할 말 중 한 가지-나는 소중하다-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제와 답변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던 이유는 그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를 누군가가 고민해서 친절하게 작성해준 것도 있겠지만 답안을 보면서 이 문제의 출제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시험이라는 것은 괴롭게 마련이지만 그러면서도 정말 인생에 도움을 주는 시험도 있고, 단지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출제자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거나 성적을 차등화시키려는 목적의 시험도 있다. 인생이라는 복잡다단하고 절대로 설명이 끝나지 않을 이 문제는 결국은 학생들로 하여금 출제자의 수준과 같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출제자의 수준이란 인간이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삶...   그 이상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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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3-2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자신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치에 들긴 한데...그다지 성공한 것 같진 않지만요 ㅎㅎ 아무튼 인생에 도움을 주고싶어 하는 출제자가 낸 설문에 저도 동참하고 싶어 지는군요.

설박사 2005-03-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찬미님...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 증보판
제럴드 L. 싯처 지음, 윤종석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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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 동산에서 모두들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유가 바로 선악과 때문이었으니까.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그 후손인 인류 전체에게도 핵폭탄보다 위험스러운 '재수없는 선악과'가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을 창조하고 다시 멸망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미끼였던가?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을 만들지 말던지...... 선악과의 존재는 성경의 처음부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선악과를 좋아할 수 없다. 물론, 나도 선악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정성 들여 그린 예술 작품을 짓밟아버리는 괴팍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분명 선악과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학자들과 여러 서적들의 도움을 받아 고민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자유 의지'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좋아하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에게 선악과는 꼭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했고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뜻밖의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선악과를 파헤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분명 머리로는 선악과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하나님의 의도가 선하다고 여겼지만, 행동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다. 선악과는 옳았지만 나는 그 선악과를 없애기 위해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에덴 동산에서 영원히 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만 없으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선택을 말살시켜버리려 했다. 자유와 선택은 내게 불안의 요소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미래와 인생을 내 손아귀에 쥐려는 욕심이 더러운 침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본다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미리 결정해놓지 않으셨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와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직업 선택의 문제, 배우자의 문제, 이사의 문제 등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사람과 어디서 살 것인지에 대해 결정 내린 바가 없으시다. 즉, 미래에 우리가 꼭 그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발자국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과 살면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원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대표적인 문제인 '비전 찾기' 역시 우리 삶의 여정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실험하고 시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주신 비전, 혹은 소명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이자 예술이지 하나님의 깜짝 선물 혹은 비밀 임무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은 없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현재 지향적이다. 현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겠지만, 이 책은 '현재의 순간'에 '거룩함'의 옷을 입혔다. 바로 현재가 '거룩한 지금'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시간이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할 순간이다. 과거도 미래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바깥의 일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를 어쩔 수 없으니까 내팽개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실 것이고, 미래 또한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순간’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만큼의 지혜가 있으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이미 알고 있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해피 엔딩’이라는 마스터플랜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한다. 자유와 선택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진실인 '역설'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복잡한 인생이나 영적이고 신비한 영역이 아닌 아주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분야에서 그러한 '역설의 진리'가 드러나는 원리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묘한 일치감에 미소지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통계적으로 그 분포는 항상 일정하다는 물리학의 법칙과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자유 사이의 관계가 서로 비슷한 것 같다. 인간 개개인은 그의 의지에 따라서 자유롭게 선택을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안에 그 자유와 선택의 결과들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만 완전히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이 좋다. 완전히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나에게 격려와 안정감을 준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 아름다운 나라는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경계가 한없이 넓어짐을 느꼈다. 나는 위험스러운 결정과 바보 같은 선택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로 전력 질주할 수도 있다. 어느 날 진흙탕 속에서 뒹굴 수도 있고 벼랑 끝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나는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악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반전'이 분명히 있다.


나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는다. 때로는 성경이 나의 인격 수양과 정신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더럽고 추접스럽고 부족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이야기,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던 노아가 술마시고 벌거벗고 다닌 이야기, 요셉이 으스대며 형들에게 자신을 뽐내다가 노예로 팔려가는 이야기, 이집트의 왕자 모세가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 나실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이 함정에 빠져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뽑히는 이야기,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의 간음과 그 죄를 덥기 위한 더러운 살인 음모 이야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여종 앞에서 욕하면서 그를 부인하는 이야기, 율법과 구약 성경에 정통한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야기, 성경은 ‘성경(聖經)’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약점이 많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聖經)’으로 불리는 것은 그 모든 잘못된 선택과 후회스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심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해졌다. 나의 '지금'은 과거와 미래의 영역에 의해서 결코 침범 당해서는 안 될 거룩한 곳이다. 바로 지금 이곳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과 공간이다. '현재'는 단지 내가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거룩한 곳이며 신비가 존재하는 경이로운 곳이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천천히 살아갈 때에 심리학자 융이 말한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나 혹은 '하나님의 음성'에 좀 더 민감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지금'을 주시하지 않아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나는 '요셉의 꿈'을 꾸고서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솔로몬처럼 '무엇을 원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처럼 마게도냐인의 손짓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베드로처럼 보자기에 가증한 음식이 공중에서 왔다갔다하는 이상한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하고 집중할 때 일상이 기적처럼 내게 말을 걸고 나는 그 순간순간을 경이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라는 신비의 바다에 뛰어들려고 한다. 그리고 편하게 나의 몸을 맡기려고 한다. 천천히 손을 내밀고 발을 굴러 헤엄쳐 나갈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것이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 것이다. 엉뚱한 곳으로 가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해류를 타고 하나님께서 계획해놓으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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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 2006-11-2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읽다 보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담아갑니다.
 
인간과 상징
칼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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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무의식 세계의 개척자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는 사나운 용과 질퍽질퍽한 늪지대 표시가 대부분이다. 분명 의미가 있는 곳일지는 몰라도 별로 내키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융이 그려낸 무의식 세계의 지도인 이 책은 내게는 '보물 지도'처럼 보였다. 대개의 보물 지도가 그러하듯이 이 지도도 신비스러운 문자와 수수께끼로 뒤덮여 있다. 무의식 세계는 미지의 세계이며 극도로 위험하고 이해하기 힘든 곳이지만 그 위험과 고생의 경험을 한 방에 날려버릴만한 눈부신 보물의 존재를 융은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융은 프로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단지 융을 집단 무의식의 창시자로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이유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마 그의 책이 워낙 난해한 것이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몇 번 그를 이해해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단지 문자를 읽어내는데 만족했을뿐 그의 사상의 기반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 융을 읽는데 큰 실마리를 제공하였고 나는 이 비밀의 문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먼저, 집단 무의식의 논리적 근거를 알게 되었는데 그의 과학하는 방법이 놀랍고 대담하다고 느꼈다. 융은 인간 육체의 진화론적 관점을 인간의 정신의 영역으로 가지고 왔다. 인간의 정신 역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상의 형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천적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물의 본능과도 같은 선천적 의식이고 그것을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작은 곤충까지도 본능에 의한 이미 습득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인간만이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논리적 모순이라는 그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즉, 집단적 무의식이 혹은 선조들의 지식과 정신이 인간에게도 정신적인 본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할 '절박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종교를 현실에서 분리해냈지만 결론적으로 더 못한 결과를 이끌어 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어떤 것이든지 가능하다라고 생각하며 미지의 세계를 인간의 삶에서 분리해낸 결과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현대 사회처럼 인간의 소유물과 소비행위가 인간 자체를 규명하게 된 시대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미개인들이나 원시인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신에 불과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삶과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원시인들이 더 풍요롭고 가치있게 인생을 영위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존재적 의미 상실은 분명 생명 현상이 지니는 복잡한 속성을 무시해버린 태도에 기인한다. 


"융 박사가 생명 현상이 지니는 복잡한 속성을 존중한 것은 그러한 현상 자체가 그에게는 신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생명의 현상이라는 것은,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설명이 끝난> 현실은 결코 아니었다. " - p.311


프로이트에 의해서 무의식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책을 통해 나는 무의식을 존중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왜 수많은 신화가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한 개인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지 왜 화가들은 그토록 이상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심취하게 되는지 단서를 얻게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의 영역을 넓혀주거나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내적 성장에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성장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우리는 조각을 맞추어 나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건이나 사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하여 의미있는 삶을 이루기 위한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신중하게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융이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그의 무의식의 영향이었다. 아마도, 이 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면 많은 여행자들이 인간 무의식의 세계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무의식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이 복잡한 현실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 미지의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지도는 인생을 진지하고 가치있게 살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한 융의 무의식에 감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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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박사 2004-10-1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재미있는 책이었음.... Thanks for comment. ^^

심천 2006-11-2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비밀의 내용을 담은 것처럼 흥미를 끄는 책같아요. 담아갑니다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좋은씨앗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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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시는 질문맨이다. 수없이 질문한다. 얀시의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금기시되는 질문도 서슴없이 하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그는 마구마구 쏟아낸다. 그 모든 질문에 그가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정답을 써내려가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인터뷰도 하고 책도 읽고 사색도 한다. 그런, 노력의 과정들이 그의 책에 나와 있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아.. 시원하다'라는 느낌과 '아.. 그래그래.'라는 느낌이 든다. 수업시간에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 이거 질문했다가 무시당하거나 웃음거리 되는거 아냐?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라에 다른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바로 그 질문을 해 주면, 마음 속으로 엄청 고마운 느낌이 든다. 얀시는 내게 그런 고맙고도 용감한 친구이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시행 착오도 겪고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의 결론을 내어놓기도 한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아는 척하지 않으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책이 쉽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대상 독자는 신앙의 경계지대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다. 얀시는 기독교인이지만 이 책은 기독교를 선전하는 책이라기보다는 무신론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가 이야기하는대로 무신론자이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마 제목이 너무 기독교적이어서 이거 '기독교 서적'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원제는 'Rumors of Another World'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말 저자가 이 책을 읽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목도 아쉽다. 그냥 원제의 뜻을 살려 '또 다른 세계에 관한 소문'으로 했으면 더 좋았을 듯 하다. 기독교 출판사에서 기독교 서적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내놓으니 제목이 이렇게 정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얀시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이 세상을 어떻게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많은 예시와 질문들이 이어진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면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행동한 사람들이 결국 옳았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들도 열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존재합니다.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정신적이고 신념적인 견해에 대한 추상적인 설득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단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도 이 책을 읽고 모든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으로 자신의 견해를 바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또 다른 세계의 소문에 대하여 그 진위를 알아보고자 더 접근하려는 발걸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인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았다.  일단 제목에 속은 것이 크다. 그러나, 원제와 목차를 보고도 나는 계속 책을 읽어 내려 갔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를 알기 위한 일종의 스파이짓을 하고 싶어서였다. 얀시라면 분명히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탕자 체험'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부자 아빠를 둔 탕자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 곁을 떠나서 겪는 체험을 몸소 할 용기는 없고, 그렇게 했을 때 어떤 느낌과 어떤 해로움이 있는지 체험해보고 싶었다. 일종의 정신적인 가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얻은 유익 외에 이 책이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균형잡기 기술이다. 보이는 세계만을 살아가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현실 감각이 무너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인식하면서 보이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기술이지만 얀시 자신도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쉽고도 친절하게 그 방법을 제시한다.


얀시는 거의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늘 새로운 질문과 신선한 견해로 나의 머리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이다. 자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담무쌍한 그의 질문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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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사실 나는 이 위대한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리뷰를 쓰려고 며칠을 벼르고 별렀으나 어떤 말도 어떤 설명도 이 책의 가치를 알리기에 너무 부족했다. 이것은 마치 너무 멋진 광경을 보고 감탄사 외에는 할 말을 잃는 것과도 같고 너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어서 가슴이 찌릿찌릿할 뿐 그 감동을 설명해 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이 눈물나도록 나를 감동시킨 첫번째 이유는 저자인 스캇 펙 박사의 용기이다. 이 책은 정신적인 기행문과 같다. 여행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고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도전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여행이 어렵고 힘들수록 그 성장의 정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곳을 정복하는 사람을 우러러 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그 극한 어려움을 견딘 사람들로서도 존경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도전했다는 자체, 그 용기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이 책은 스캇 펙 박사의 정신적인 성장의 과정을 그린 자서전적인 기행문이다. 스캇 펙 자신의 이야기도 있고 그가 치료한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는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도 과감하게 발을 내딛었다. 그가 생각하지 않았던 결론을 얻을까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그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까봐 생각을 멈추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변명하지도 않았고 그가 기적적으로 구출받은 사실이 있을 때 솔직하게 시인했고 그것이 기적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용기있게 나아갔고, 솔직했고, 그가 얻는 모든 경험을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이해하고 분석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뭔가를 숨기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러한 스캇 펙 박사의 태도는 책의 처음부터 시작된다. "삶은 고해다" 인생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로 그는 글을 시작한다. 결코 아는 척하지도 않고 이미 많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제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토록 어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에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 - p.108 -


스캇 펙은 삶에 이와 같은 훈련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훈련에 사용될 힘으로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가 정의하는 사랑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 p.113  -


그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일종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성장을 하면서 자신이 믿었던 종교에서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멀리했던 종교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극적으로 그를 혹은 환자들을 도왔던 은총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이 그는 훈련, 사랑, 종교와 성장, 은총에 대해 모든 가능성과 사건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 나름대로의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의 두번째 가치는 이 책은 나를 착각과 환상 속에서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랑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 사랑에 빠지는 행동은 일종의 퇴행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와 하나가 되었던 기억과 같은 것이다. " - p.121  -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빠지는 것도 아니고, 빠지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이 퇴행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이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불륜이 아닌 이상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황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마치 세상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고 마법의 양탄자가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앉으면 날 수 있을 것도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서로의 자아의 영역이 무너지고 너와 나의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 사실은 퇴행이고 유아기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라니... 나는 스캇 펙이 사랑을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고 '이심이체'라는 말. '당신은 활이 되어 살아 있는 화살인 당신의 아이들을 미래로 날려보내야 한다'는 칼릴 지브란의 시 인용. 성장함에 따라 부부간의 결합은 서로가 분리된 개체라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 사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사랑을 통한 일치가 오히려 서로의 성장에는 해가 된다는 것인데... 수긍하기 힘들었다. 사랑은 모든 종교와 철학과 소설과 영화의 영원한 최고 가치가 아니던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과 같이 여기는 것이 사랑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사랑은 흡수를 하는 것도 흡수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나는 게걸스럽게 다른 사람을 흡수해버리려는 욕망이나 또는 정반대로 나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했는가? 흡수도 희생도 진정한 사람이 아닌데, 나는 두 가지를 통해 사랑을 하려고 했었고 그 두가지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내가 없어지는 것도 다른 이가 나를 의지하도록 만들어 그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는 것,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하며 스캇 펙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인생과 우주를 바라보는 태도로 인해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캇 펙의 정신적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고백한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p.413 -


"우리는 더 이상 우주의 길잃은 미아가 아니다." -p.452-


"오히려 은총의 실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 p .452


"우주라고 하는 이 도약대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뛰어넘어야 한다. " - p.452


그는 정신분석을 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과학자로서의 차가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그는 처음에는 지구라는 곳을 우주라는 곳을 차갑게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우주의 미아가 아니라고 하지만, 아마 이 정신적인 여행을 하기 전에는 우주의 미아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는 갈 곳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엄마, 아빠가 누군지 몰라 헤매는 어린 아이처럼 세상에 떨어뜨려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용기있는 방황을 통해 그는 길을 발견했고, 존재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다. 나는 아직 스캇 펙 박사와 같은 정신적인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에 정신 연령에 비하면 나는 이제 걸음마를 뗀 아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신적인 아기로서의 두려움이 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내가 가는 여행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절벽에 떨어지게나 되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뭔가 더 알면 거짓임이 밝혀질까봐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나로 하여금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아직도 여행은 남았다고 이야기하며 동참하라고 내게 손짓한다. 그가 보았던 세계,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이 여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용기있게 그를 따라나서려고 한다. 거짓과 착각 속에서 깨어나는 일이 힘들 수도 있고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 내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나 자신을 확대하고 그것을 위해 결정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때로는 내가 알 수 없는 은총이 나를 도울 것이다. 그는 아직도 가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계속 가야한다고... 그렇다. 나는 나의 여정이 끝나는 날이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날이 되도록 성장의 길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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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Wind 2010-07-22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북 리뷰를 상당히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 제약때문에 북리뷰를 통해서라도 책을 접하고 싶은 마음에서죠. 제가 아마 이 블로그의 리뷰들을 가장 꼼꼼히 읽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ㅋㅋ 책에 대한 내용도 재밌었지만, 책에 대한 관점과 생각의 표현들이 참신했어요. 읽고 조용히 사라질까 했지만, 그러면 설박사님의 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위의 책에 큰 영향을 받으신것 같아 이곳에 글을 답니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신나는 모험 계속 하시길... 신선한 바람 드림

설박사 2010-07-2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쿨윈드님^^ 진짜 오래간만에 북리뷰에 댓글이 달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북리뷰 쓴지 몇 년 된 것 같습니다. 요새는 통 못 쓰고 있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 책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 중에 한 권이고요... 에릭 프롬의 글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약간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