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세계문학의 숲 6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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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로, 문화별로 '공포의 대상'은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음란물 비디오-_-;가 아니고 목숨을 위협하던 바로 그 호환마마와 같은 전염병이나 산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생계를 위협하는 호랑이 같은 포식자 그리고 어디에나 있었을 탐관오리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바다 건너 왜구와 대륙의 오랑캐 등등이 현실적인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옆에 두고 '옛날 옛날에~'라고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도 공포의 대상은 존재해왔다. 가끔은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일단은 도깨비, 구미호와 같은 요괴가 대표적이고 한(恨)을 품고 죽은 수많은 귀신들이 바로 그들이다. 꼭 무덤을 뚫고 튀어나온 좀비일지 귀신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내 다리 내놔~'라며 살아있는 이들을 위협하고, 몇백년인지 몇천년인지를 묵은 구미호는 꼭 젊은 남자들의 간을 빼먹고선 사람의 탈을 쓰고 또 다시 사냥감을 노리곤 한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공포'에 대한 정서는 이랬던 것이다.

 

죽은 이에 대한 공포는 역시 한 사람이 죽고나서 주변 인물들은 고인(故人)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덕분에 구미호는 우리나라에만 있다손 치더라도 죽은 이의 혼령의 등장으로 살아있는 이들로 하여금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다른 이들은 지레 공포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고,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 그들은 '귀신' 혹은 '유령'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을 테마로 영국에서는 고딕 소설(Gothic Novel)이라는, 고성을 배경으로 호러와 로맨스를 그려낸 장르가 유행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고성(古城)에서 벌어지는 으스스한 이야기는 수많은 공포 영화의 주요한 테마가 되어왔다. 그 곳을 맴도는 존재는 유령일까? 그들은 어째서 그곳을 맴도는 것이고, 성에 거주하는 이들은 어째서 두려움에 떨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한 여성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남매의 가정교사로 저택을 방문한다. 사랑스러운 소년소녀들은 티없는 순수함으로 평온한 일상이 흘러가는 영국의 저택에서, 가정교사는 유령을 맞닥뜨리게 된다!

저택의 집안일에 총책임을 맡고 있는 그로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묘사한 유령들은 예전에 저택에 머물렀던 하인 피터 퀸트와 그녀의 전임자였던 가정교사 제슬 양으로 추정된다. 유령으로부터 제자를 지켜내야겠다는 결심을 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이들이 유령과 마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은 더욱 수상쩍기만 하다ㅡ.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은 고딕 소설의 보편적인 배경을 끌어오면서도 '독자의 사고마저 조종하는 교묘한 서술 기법(뒷표지)'으로 쓰여진 소설이란다.

교묘하고 천재적 '의식의 흐름' 기법의 원형을 만들어냄으로써 19세기 이후 영미권 작가에게 영향을 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는데, 솔직히 책의 처음 작가 서문에서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그러한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 악행이란 없었다.

그것은 수십 가지 다른 요소들에 따라 달라지며, 인식과 성찰과 상상력의 문제이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정확히 말해서 구경꾼, 비평가, 독자의 경험에 비추어 달라진다.

"오로지 악에 대한 독자의 전반적 환상을 강렬하게 만들어라."

-p.19, 작가 서문

 

작가 서문에서 '독자 스스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공포를 만들어내'도록 의도한 채 쓰여진 이야기라고 헨리 제임스 스스로가 선전포고를 했다. 어디 한 번 두고보자, 아니기만 해 봐라 하고 괜히 혼자 도전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가정교사의 의식과 그녀가 인식하는 유령의 존재. 유령이 뭐예요?라고 너무나도 해맑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웃음짓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그들의 존재를 감추려고 하는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질 않나, 서술자인 '가정교사'의 의식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면서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이 공포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처음 '유령'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 탑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던 한 남자의 모습과, 그 다음에 창밖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던 유령의 존재는 어찌나 섬뜩했는지!

 

하지만 그렇다한들 '고전적인' 공포 소설로서 수많은 작품들의 영감이 되어준 덕분에 분위기는 낯설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호함'이 도대체 무엇인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당췌 알 수가 없었다.

유령이 있고 그 존재를 가정교사가 눈치를 챘는데, 그녀의 제자들 역시 그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유령을 알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한테 들키면 안되기 때문에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선생님은 유령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지켜보고 있다. 선생님의 눈길을 돌려 그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 갈등에서 모호함이란 어디에 있는 걸까?

 

가정교사의 '의식의 흐름'을 함께 따라가면서 영국 시골의 한적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유령 소동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 분위기는 분명 모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헨리 제임스가 그리고 있는 밝은 듯 으스스하고 유령이 있는듯 없는듯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정말 유령을 보고 있는 걸까?', '가정교사는 정말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일까?', '유령은 정말 저택 안에서 존재하고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을법도 하건만, 나는 이미 그녀의 생각에 완전히 공감하고 몰입해버려 이런 모호함은 단 한 순간도 눈치채질 못했다.

그저 보여주기만 한 채 모호함을 그려내고 있다니, 내가 보기엔 그저 명백하기만 했던 것다. '유령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단서만 달고 있다면 유령의 존재를 눈치챈 가정교사의 공포심과 그 유령의 '악(惡)'에 제자들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필사의 노력일 뿐이었다. 오로지 작가가 그려낸 현실의 표면만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로서는 멋드러진 저택을 배경으로 한 완벽한 유령 이야기로만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아하, 이런 식으로 비슷한 배경의 영화나 소설의 바탕이 된 것이구나ㅡ하고.

 

그리고 비로소, 책의 마지막 '해설'을 읽고서야 그렇게 이야기하던 모호함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사의 회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유령이 실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퀸트와 제슬의 유령이 정말 아이들에게 나타났는가, 아니면 가정교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가?

(중략)

어느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달라지며, 상반되는 두 해석은 양립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p.239, 해설 「보여주되 설명하지 않는 모호함의 미학

 

그렇다. 헨리 제임스는 모호한 서술을 통해 유령이 가정교사 앞에서만 나타난다는 점, 다른 이들은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유령이 가정교사의 의식 혹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해석, 혹은 실제 유령의 존재를 그녀만이 인식하고 있다는 해석과 같이 전혀 다른 면모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가 선택한 문장 속에서는 결코 유령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확실치 않았다! 

 

그렇다한들 앞서 얘기했듯 나로서는 작가가 노렸을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서술로 그녀의 이야기에 의심을 품게 할 만한 점을 전혀 눈치채질 못했다. 오히려 완벽하게 그녀의 의식에 동조하여 함께 그 흐름을 따라갔을 뿐이다.

가정교사가 본 적도 없지만 예전에 머물렀던 저택의 고용인들과 상당히 흡사한 용모를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점, 그리고 아이들의 행동이 그저 가정교사의 시선 속에서 '뚜렷하게' 수상쩍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녀와 '공포 체험'을 함께 했던 것이다. 작가의 의도, 그 '모호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웠다.

 

현재의 정서로서는 이 <나사의 회전>이 그려내는 공포는 그다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하며 으스스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는 공포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않아 많은 '무서운 이야기'에 질색을 하는 나로서는 딱 맞는 분위기의 '공포 소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분명 이번처럼 가정교사에게 동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호함'을 알아차리고 말았으니. 하지만 그렇게 또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이야기를 만나보는 것도 상당히 재밌는 일이 될 것 같다.

 

다만, 헨리 제임스가 이 이야기에 왜 <나사의 회전>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풀리질 않았다. 물론 굳이 해석을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겠으나 제목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의미가 있긴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나사의 회전'인 것일까?

그럼에도 작가 스스로가 '의도한 바'를 명백하게 밝히고 그 의도를 정확히 나타낼 수 있도록 쓰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도'가 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였던 '모호함'과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난 것처럼, 소설의 방향이 모호함을 '나사의 회전'에 빗댄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 본다.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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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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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모두가 '아니오'라고 할 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 다른 사람의 시선과 눈치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할 용기.

그런 순간, 나는 과연 어떨까? 그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에벌린 카우치는 평생을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라는 생각에 순응하고 남들의 눈치만을 보며 살아온 중년의 여성이다. 자기를 무시하는 남편과의 생활, 그리고 매 주 일요일 시어머니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요양원을 '마지못해' 방문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고역일 뿐이다. 재빨리 자리를 피해 방문객 휴게실로 향한 에벌린은 만나자마자 대뜸 이야기를 풀어놓는 노부인을 만난다. 자신을 스레드굿이라 소개한 노부인의 이야기는 우울한 일상의 위로라고는 달콤한 사탕과 초콜릿뿐이었던 에벌린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어준다.

스레드굿 부인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앨라배마 주 휘슬스톱 카페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쾌하고 다정했던 스레드굿 가(家)의 사람들, 정의롭고 거침없으며 한없이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던 이지 스레드굿, 그녀가 사랑했던 여자 루스 제이미슨, 그리고 그들과 함께 휘슬스톱 카페를 지켰던 십시와 빅 조지와 온젤까지...

그들의 거침없고 다정하고 따뜻했던 삶은 에벌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리고 에벌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만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ㅡ.

 

증오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사랑 때문에 죽이는 편이 낫지 않아요?

-p.119, 이지가 루스에게

 

스레드굿가의 충만했던 삶, 이별, 사랑을 중심으로 '니니'가 에벌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아름답고 따스하다. 1920년대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에피소드가 어떨 땐 이지와 루스의 첫 만남으로, 어떨 땐 둘이서 운영하고 있는 휘슬스톱 카페의 에피소드로 혹은 이리저리 마을의 소식을 들려주는 휘슬스톱 주간 소식지 《윔스 통신》의 발행인이자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닷 윔스의 이야기로, 이리저리 날짜와는 상관없는 듯 신문을 늘어놓은 듯 펼쳐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모두, 편견에 맞서 거침없이 살아갔던 두 여자와 그들이 운영하던 휘슬스톱 카페의 온기와 그들만의 특별 메뉴였던 '풋토마토 튀김'으로 상처를 위로받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떠돌던 이들을 말 없이 받아주고, 흑인이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것은 커녕 그들에게 음식을 파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과는 상관없이 흑인들에게도 '공평하게' 음식을 판다거나, 팔을 잃었지만 그 아픔을 나름대로 극복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루스의 아들 '스텀프' 스레드굿과 이지의 우정 등, 휘슬스톱의 작은 마을에는 온정이 넘쳐난다. 스레드굿 가의 삶과 이별 그리고 사랑의 기록을 미국 남부의 마을 풍경과 함께 글 위로 옮겨놓은 것이다.

 

덕분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상당히 미국적인 소설이다.

이지와 루스가 운영했던 휘슬스톱 카페가 서 있는 곳은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州)에 위치한 마을이다. 어째서 하필이면 앨라배마 주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그리고 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작가인 패니 플래그의 고향이 바로 앨라배마 주 버밍햄이라고.

실제로 앨라배마 주는 전형적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곳이었고, 짐작할 수 있듯 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와 플랜테이션으로 이들을 재배하고 또 그대로 그 곳에 정착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과거 인종차별주의 단체였던 KKK단의 본부 및 활동지가 바로 앨라배마 주였다는데, 여전히 보수적인 분위기에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차별 문제가 남아있다고 한다.

 

덕분에 작가가 살아왔던 곳으로서만이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가기에 상당히 적절한 배경이 되어주었고 미국에서 가장 극심했을 '인종'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휘슬스톱 옆의 흑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 트라우트빌의 모습이나 휘슬스톱을 지나는 기차에서 흑인들을 위해 식량과 생필품을 던져주는 '범죄자'의 존재, 휘슬스톱 카페를 찾아오는 흑인들과 그들에게도 역시 공평하게 음식을 제공하는 이지라던가. 덕분에 휘슬스톱 카페에는 KKK단의 위협을 받기도, 흑인에게 음식을 판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내비치는 손님을 만난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니니'의 이야기 속 이지는 편견으로 가득찬 세상을 루스와 함께 거침없이, 하지만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정하게 맞서며 살아갔다. 팔이 없는 것에 처음으로 의기소침해진 스텀프를 위로하는 이지만의 방법이라거나, 사랑하지만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던 루스의 고통을 끝내 견뎌내지 못한 채 함께 맞서 싸웠던 일, 실종된 루스의 전 남편에 대한 행방에 대한 의심을 함께 떨쳐내는 마을 사람들의 활약 등은 마치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놀랍기도 하다.

당당함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왔던 그녀의 삶이, 에벌린으로 하여금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자 마음먹게 했다. 그리고, 남들의 눈치에 맞춰 순응하며 살아왔던 에벌린이 맞이한 새로운 삶은, 놀라운 변화를 맞게 된다ㅡ.

 

그리고 여전히 휘슬스톱 카페의 특선 메뉴 '풋토마토 튀김'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되어줄지도...

 

 

* 앨라배마 주 관련 정보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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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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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 상.

이번 <달과 게>로 드디어 미치오 슈스케가 나오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단 두 편 아니 한 편의 소설로 팬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괜히 내가 뿌듯해지고 즐거워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책을 덮은 뒤에는 미치오 슈스케답구나,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

 

원체 일본 소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이제는 거의 대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는 일본 미스터리 덕분에 '나오키 상'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웬만큼 인기를 끈 미스터리 작가들은 하나쯤은 '제 ㅇㅇ회 나오키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내 걸고 있고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문구 하나가 일본 소설을 고르는 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기준 혹은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대중문학에 대해 신인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라는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중견작가의 수상이 굉장히 주를 이루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미스터리 소설에서의 수상이 부쩍 늘어난 듯하다.

 

그렇다면 왜 <달과 게>가 <용의자 X의 헌신>과 오버랩되었느냐 하면, 그야말로 내 생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 두고보자!'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ㅡ라는 추측 덕분이다.

1989년 <방과 후>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그 뒤에 내놓는 작품 역시 많은 인기와 더불어 추리문학에 관련된 상은 거의 다 휩쓴 히가시노 게이고지만, 정작 나오키 상은 <용의자 X의 헌신>으로 2006년이 되어서야 수상하게 된 것은,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으로는 안 주고는 못 배기겠지!'라는 마음으로 미스터리에 사랑과 헌신을 녹여 그토록 사랑받는 책을 써내지 않았을까 뭐 그런 얘기다.

미치오 슈스케 역시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로 나오키 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번번히 비수상의 아픔을 곱씹어야 했던 그로서는 '이번만큼은 두고보자!'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마저도 설마 이번에는 안 주겠어...라고 생각했으니 뭐, 말 다 했다.

결국 그렇게 탄생한 나오키상 수상작 <달과 게>.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

 

 

소라게와 닮은 아이들.

아버지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소년 신이치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부모님에게 학대를 당하고 방치된 소년 하루야. 게다가 뒤늦게 전학을 온 바람에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한 채, 소년들은 자신들만의 장소에서 소라게의 껍질을 불로 지져 밖으로 나오곤 하는 소라게를 가지고 노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라게의 모양이 신을 닮았다 하여 소년들은 소라게를 고정시킨 채 불로 태우며 각자의 소원을 빌기 시작한다. 마음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들의 상처를 꺼내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슬픈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소라게는 우째서 소라껍데기 속에 드가 있겠노?"

"적에게 습격 받지 않기 위해서 아닐까?"

"마, 그렇겄제."
 

-p. 77

 

 

<달과 게> 속의 소년 소녀들은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위기에 놓여 있다. 물론 이들의 고민은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은,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겨두었던 '상처'다. 새로운 남자가 생긴 것을 알지마나 자신에게 빤한 거짓말을 하는 어머니, 학대하고 방치하는 아버지, 아직도 제대로 납득하지도 찾지도 못한 어머니의 죽음의 이유.

아이들의 상처는 '끝부분이 가느다랗고 날카로웠기 때문에 박혔을 때는 그렇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늘에 미늘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뽑을 때는 소리를 지를 정도로 아팠고, 뽑고 나서도 아픔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p.240)'는 낚싯바늘과 같았다. 그리고 그 상처를 꽁꽁 숨겨둔 채 소원을 비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소라게와 닮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새로운 만남을, 가난한 경제사정을, 어머니의 죽음을 되돌리거나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커다란 흐름에 불과하다. 자신을 괴롭히고 놀리는 익명의 급우라던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다른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역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 흐름에 놓여 있는 세 아이의 미묘한 감정과 심리를 그리고 있는 것. 휘말리지 않으려고, 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소년을 그린 것.

미치오 슈스케가 한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눈을 뗄 수가 없었을까?

 

초등학교, 혹은 중고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어떤 고민이 생기면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으로 끙끙거리며 고민했을지, 가끔은 정말 쓸데없는 상상에 힘을 다 뺐구나 싶어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올 때도 있다. 어째서 그랬을까 하고 과거의 실수와 어떤 시도에 의한 실패담은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부끄러울 때도, 이런일이 있었지~ 하고 웃어넘길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혹은 내가 그 때 그렇게도 듣기 싫었던 어머니의 잔소리를 요즘 곱씹어 생각해보면서 그 말에 상당히 공감을 하고 어느샌가 동생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참 재밌다. 분명히 그런 시절은 단 한 번 뿐이고 사람들의 고민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법이건만, 어느샌가 어른에 가까워져있어 그보다 더 철없던 시절을 생각해본다거나, 혹은 그 치열함 속에 놓여 있었을 '성장기'의 소년소녀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역시 누구나 고민하고, 시도하고,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한 걸음 씩 계단을 올라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미치오 슈스케는 한없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등장인물들을 몰아세웠(?)다. 부모의 죽음, 아동 학대와 같은 소재를 가져와 소년들의 미묘한 심리를 건드리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익명의 쪽지나 아이들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잔혹한 소원과 은밀한 행동을 그리며 오로지, 소년의 동선만을 따라가며 긴박감을 그려냈다. 또는 세 아이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통해 그 또래의 아이였던 시절 누구나 느껴봤을 두근거림과 안타까움으로 '나도 그랬었지...'라는 공감을. 이런 문장만으로 이전의 '미스터리'의 요소를 배제한 채 미치오 슈스케는 멋들어진 성장소설을 써낸 것이다.

 

 

소년.

한 작가가 쓰는 소설은 보통 이야기의 분위기나 스타일이 비슷한 법이건만, 미치오 슈스케만큼이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도 (개인적으로는) 드물다.

굉장히 음산하고 알 수 없는 심지어 기분이 나쁘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오묘한 매력을 가진 작품 세계로 미치오 슈스케를 처음 만났던 나로서는, 새로운 책을 읽을 때 마다 낯설게 다가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전 작품에 비해 이건 너무 달라진 것 아니야? 하고 전작과 비교가 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미스터리' 혹은 '호러'로서 미치오 슈스케의 모습을 기대했다면 이 <달과 게>는 '아니오'일지도(솔직히 세 권을 읽은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단 몇 작품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아버리는 작가가 있는데, 미치오 슈스케는 그 중 한명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매 번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 역시 그다지 싫지 않은, 아니 그래도 관대하게 읽고 넘어가는 것을 보면 그것은 미치오 슈스케의 능력이기도, 나의 작가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미치오 슈스케에게 있어 '소년'은 상당히 주요한 키워드라고 할까, 어쨌든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런 것이, 아직 <달과 게>를 포함해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은 세 편만 읽어보았지만, 세 편 모두에는 '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년을 둘러싼 세계가 변화해 가는 것을 그리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변화하는 세계에 따른 소년의 미묘한 심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탁월하다. 음산한 분위기의 미스터리로서도, 사건에 휘말려 든 와중의 성장에서도, 그리고 완전히 '성장소설' 속 소년으로서도.

 

오히려 세 작품을 차례로 읽고 있노라면 미치오 슈스케라는 작가의 성장을 한 눈에 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뚜렷한 변화가 드러나는데, 그 변화를 지켜보는 즐거움 역시 미치오 슈스케가 좋은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렇게 작품의 스타일을 변화시키다 이번 <달과 게>로 작가로서 미치오 슈스케의 정점일지, 혹은 잠깐의 준비일지 모르나 일단은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에 놓이게 한 것은 분명히 '성공'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믿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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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팻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표창원 감수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는 왓슨과 악수를 한 번 한 뒤, 왓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는 것을 순식간에 눈치채 버린다.

영국 드라마 <셜록>은 21세기를 배경으로 새로운 홈즈와 왓슨 콤비를 탄생시켰는데, 드라마를 보면 실제 셜록 홈즈 시리즈를 패러디한 대사가 상당히 많아 보는 즐거움을 쏠쏠하게 제공한다. 잠깐 서서 나눈 대화와 존이 빌려준 스마트폰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온 것에서부터 룸메이트가 될 테니 집을 같이 보러다니자ㅡ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드라마 속 셜록은 '추리의 과학(the science of deduction)'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레스트레이드 경감에게 까다로운 범죄에 대해 자문을 하기도 한다.

 

뜬금없이 셜록 이야기를 한 이유는, '프로파일러'의 역할에 대해 팻 브라운은 조금은 다르고 오히려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고, 나에게는 그 면모가 아무리 그래도 드라마 속 셜록이 이야기하는 '추리의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현실은 탐정이 사건현장을 휘저으며 단서를 수집해 '이러이러해서 범인은 ㅇㅇ이야!'라고 외치는 상황은, 절대 말이 되지 않는다.

형사를 비롯해 관련 전문가 팀들이 모여 협력을 이루며 단서를 모아 이 단서들을 바탕으로 추리를 해 범인의 윤곽을 잡아내는 것이다. 물론 전과가 있는 용의자가 떠오르는 경우, 그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지문이 등록되어 있으니 지문이라도 남았다간 웬만큼은 붙잡힌다고 보는게 맞다.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일부로 지문을 묻혀놨다.. 그런 건 넘어가기로 하자.

 

하지만 이런 수사 기법은 대부분 일반적인 법이고, 수많은 범죄 중에서도 연쇄살인의 경우에는 그러한 일반적인 수사 기법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리하여 투입되는 것이 프로파일러로, 용의자의 성격이나 행동 패턴 등을 분석해 도주 경로 등을 추정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마음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지라, 범행 현장에 남아있는 단서만으로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대신 '심리학'이 포함되는 이상 불확실성 역시 존재하기에 논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로파일러는 그러면, 철저하게 범죄심리학을 공부한 끝에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파악하고 범행 현장에 남겨진 살인범의 흔적을 바탕으로 '범인은 이러이러하게 생긴 이러이러한 성격의 살인범이야!'라고 단언할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러한 환상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FBI 소속이 아닌 민간 프로파일러가 된 팻 브라운은 단호히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프로파일러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팻 브라운은 왜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프로파일러가 되기로 결심했을까?

<프로파일러>에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로서 생활하던 팻 브라운이 어째서 프로파일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프로파일러로서 의뢰를 받은 사건에 대한 분석, 해결된 사건이든 미해결 사건이든 그녀가 생각하는 사건의 진실과 잡히지 않은 진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말 그야말로 평범하디 평범한, 주부로서는 완벽한 삶을 살아가던 팻 브라운은 어느 날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는 그 전부터, 자신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던 한 하숙인이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평소의 행동과 언변이 수상쩍었기 때문인데, 함부로 남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법인지라 그냥 넘어가려고 하던 찰나 범행의 결정적인 증거를 하숙인의 방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미 또 다른 남학생의 자살로 범인은 자살한 남학생이다, 라고 결론은 내려진 상태.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경찰서에 찾아가지만, 경찰들은 웬 할 일 없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그녀의 의견을 묵살해 버린다. 남편 역시 쓸데없는 상상이라며 그 하숙인을 쫓아낸 것에 분개한다.

 

그 현실에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 그녀는, 혼자서 프로파일링에 관한 지식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끝내 민간 프로파일러가 된다. 그리하여 지금 그녀는, 흉악 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이 자문을 구하고 언론에서도 앞다투어 그녀의 의견을 묻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 그녀의 삶과 함께 미결로 처리된 사건에 대한 의뢰 몇 건을 소개하고 있다. 대부분이 연쇄살인으로 당시 경찰들이 내린 결론과 가설과는 다른 측면으로 사건을 분석한 것.

그 결론은 대부분이 일반적인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리라 짐작한 가설과는 달리 '연쇄살인마'의 그늘이 드리워있는 사건들이 오싹하게 다가왔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서 순진한 소녀가 도살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가 그녀를 죽였는지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을 경우에는 항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나를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었을 때는 그것에 관해 잊어버리라는 말을 했다.

한 여자가 숲속에서 살해됐는데도 아무도 떠들어대지 않는다면 피해자가 살인사건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p.89

 

정의감으로 뭉친 이 아주머니는 그렇게 연쇄살인에 대한 통찰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각 주(州)의 관할서 사이에서의 원활하지 못한 정보 교환이라거나 너무 많은 사건과 업무량으로 인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여건조차 되지 않는 미국의 사건 수사 기반에 대해서 비판한다. 또는 특정한 사건에 대해 정치적인 압력 등이 가해졌던 사례를 들며 정치와 사법 시스템이 결코 유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역시 그녀의 정의(正義).

 

경찰에서 내린 결론에 대한 반박일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팻 브라운의 결론 역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죄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실제 사건이 벌어진 상황이 실제로 가능한 일일지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실험 그리고 단서에 대한 추적을 통해 '연역적으로 추리'를 하면서 내린 결론과 일에 쫓겨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 볼 틈도 없이 수사를 종결시키며 내린 결론 중,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고 정확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방치된 사이코패스가 어디선가 먹이를 노리고 있다면?

 

연쇄살인범과 사이코패스를 추적하며 지낸 팻 브라운의 인생, 그녀의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바라는 정의가 실현 되는 것도 기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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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더 리퍼 밀리언셀러 클럽 115
조시 베이젤 지음, 장용준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평소와는 달라 낯선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의 표지와 뭔가 방방 뜨는 듯한(?) Beat the Reaper,라는 제목이 솔직히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beat'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되지만 'reaper'의 뜻이 영어에 손을 놓은 지 오래 된 나로서는 짐작이 되지 않아 영어사전의 도움을 좀 빌렸다.

 

beat [bi:t]

1. (게임・시합에서) 이기다   2. 통제하다   3. (너무 어려워) 손들게 만들다

 

reaper [ri:pə(r)]

(농작물을) 수확하는 사람

 

으음.. 농작물을 수확하는 사람이라니, 도대체 수확하는 사람을 이겨서 뭘 하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reaper의 참고사항에 'the Grim Reaper'라는 단어가 있더라는 거다.

엄숙히 거두는 사람ㅡ저승사자란다.

 

그러고 보니 표지에 있는 도망치는 의사 뒤를 쫓고 있는 웬 사신의 모습이 납득이 된다. 그렇다. 이 책은 저승사자한테 이기느냐 지느냐, 즉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맨해튼 가톨릭 병원의 응급실 담당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피터 브라운'은 새벽 출근길부터 재수가 옴 붙는다. 웬 녀석이 의사라고 무시했는지 다짜고짜 총구를 들이대는 것이다.

흥이라고 해라. 이래뵈도 의사이자 신체의 구조를 완벽하게 꿰고 있으니, 한 방에 때려눕히고 오히려 권총 습득ㅡ속된 말로 득템ㅡ에 성공한다.

그런다고 뭐 나아지는 건 없다. 여전히 피터는 각성제 목스페인을 먹고 쉴새없이 정신을 차리며 끊임없이 신음하는 환자들을 돌봐야한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매번 탈출을 시도하는 환자, 쇄골 아래가 아픈데 제대로 진료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환자, 그리고ㅡ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에디 스퀼란티'와 딱 마주치고 만다! 자신의 과거, '베어클로(bearclaw)'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스퀼란티는 피터를 잡기 위해 미국을 이잡듯이 뒤지고 있는 조직원에게 '내가 죽으면 바로 정보가 넘어간다'며 무조건 자신을 낫게 해 달라는 협박을 한다. 큰일이다! 스퀼란티는 완치율이 극히 희박한 병에 걸렸고, 그럼에도 살기위해 피터는 그를 살려야만 한다. 피터는 과연 스퀼란티를 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어째서 피터는 정체불명의 조직원들에게 쫓기며 살고 있었던 것일까?

죽느냐 사느냐, 저승사자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와중에도 환자들을 살려야 하는 피터 브라운의 지독한 하루의 시작과 더불어, '피에트로 브라우나(Pietro Brnwa)'이자 킬러였던 과거의 고백이 시작되었다ㅡ.

 

세계 최강의 창과 방패,에서 비롯된 모순(矛盾)에 '의사'와 '킬러'라는 것 역시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킬러'였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분을 은폐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그래서 '의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의사로서의 하루는 철저하게 '현재진행형'으로, 그리고 부모님과 다름없었던 조부모님의 죽음과 복수, 이 과정에서 '친구 잘못만나' 킬러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연은 '과거형'으로 교차되어 진행된다. 하루의 끝과 회상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철저한 오락소설이다. 조부모님의 복수에서부터 들어선 것으로 시작된 킬러의 삶은, 나름대로 '정말 악질적인 놈들'만 죽이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시작하지만 마피아 조직의 간부 아들 스킨플릭은 얼빠진 짓을 하면서도 어찌나 악질적인지.. 지금에 와서도 시련은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행방을 결정지어줄 스퀼란티를 집도하겠다는 의사는 돌팔이에 덕분에 저승사자의 어둠의 손길은 점점 더 가까워질 뿐.

그리고 이 모든 전개가 속도감있게 진행되는데, 상당히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묘사로 이어진다. 굳이 영화로 만들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웬만큼 글자로 상상을 하는 데에선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피터 브라운의 최후의 싸움에서는 으윽,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ㅡ비위가 약하다면, 견디기 힘들 정도일지도 모른다. 사실 여태 잘 읽다가 제일 마지막 장면에 상당히 힘이 들어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을 정도였으니. 이거, 분명 나 같은 또 다른 이를 위해 '주의사항'으로 표시해줘야 할지도.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이 소설을 《타임》선정 올해의 소설 10선에 꼽히게 했고, 아마존과 《뉴욕 타임스》베스트셀러로 올려놓은 것일까?

그리고 싸랑해 마지않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화를 결정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빠른 전개와 속도감, 그리고 그 곳에 갖추어진 적절한 폭력과 자극적인 묘사는 분명 흥행 요소가 될 수 있다. 특히 영화의 측면에서는 헐리우드가 그렇게 좋아하는 소재가 아닌가.

영화를 보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소설은 충분히 재미를 안겨주는 법이다. 킬러로서 차갑고 냉혹하게 임무를 마치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소재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게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의 초반,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니, 응급실 레지던트가 잠도 제대로 안자고 목스페인을 먹으면서 하루종일 일을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무서워서 병원 가겠나...

첫 장에서 벌어지는 제약회사 직원의 '불편한' 영업, 감당할 수 없는 업무. 실제 의사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작가는 현실을 이런 식으로 꼬집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것.

덕분에 엉뚱한 진단을 받은 환자라던가, 제대로 되지 못한 감시망을 뚫고 빈번하게 병원을 탈출하는 환자라던가, 아무리 연락을 해도 자신들의 업무를 서로에게 떠넘기기 일쑤인 부서, 그리하여 어찌어찌 모였는데 덜렁거리는 바람에 알 수 없는 병원체를 의사의 몸에 주사. 이 모든 것이 피터가 일하는 맨해튼 가톨릭 병원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는 '경고'를 하고 있다. '경고'와 감사의 말과 헌정사를 뺀 모든 의학 정보와 제사(題詞)마저 픽션이라고. 의학 정보에 관한 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는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일지도 모른다. 종종 들려오는 병원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라던가 의료 체계의 실태를 듣다보면 '의사 레지던트'가 들려준 병원의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내가 너무 오버한 거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순순히 인정하건데, 딴 건 몰라도 나는 내 몸은 무지무지 아낀다.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심각한 병이나 부상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이는 것만은 틀림없다ㅡ.

킬러의 삶에서 의사가 된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의 일대기로서 즐겁게 오락소설을 읽고 마는 것도, 거기서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 보는 것도, 결국은 독자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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