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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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원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분명 소설은 다른 종류의 책에 비해서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어차피 소설은 '픽션'이고 '허구'이기 대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얻은 감동은 시간이 지날때마다 희미해져서 계속 다른 소설을 읽어서 감정을 깨우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을 뿐더러 요새 2MB가 그렇게 강조하는 '실용'이란 측면에서도 소설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현대는 하루가 다르게 지식이 발전하고 수많은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본인의 경우 학생이란 신분으로 최대한 책을 많이 읽어도 1년에 100권 정도인데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전도 읽어야 하고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신간도 꾸준히 읽어야 하는데 연간 100권의 독서량으로도 부족함을 느긴다. 그렇다면 어차피 1년에 읽을 수 있는 책의 수에 한계가 있다면 인문/사회 과학이나 자연과학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소설을 읽는 것보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일부러 소설 책을 찾아서 읽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영화로 제작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글쓴이로 유명한 공지영의 산문집인데 내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하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멘토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또한 계속된 인문/사회 과학, 자연 과학 책 읽기에 지쳐가고 있었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책의 분량이 적었기 때문에 공부하다가 지칠 때마다 꺼내서 읽게 되었다.

 솔직히 책 초반에는 공지영의 삶에서 체득한 여러 가지 교훈을 딸에게 전하는 편지글 형태로 풀어내는 공지영의 글솜씨에 빠져서 흥미있게 읽었다. 특히 <잘 헤어질 남자를 만나라><그게 사랑인 줄 알았던 거야>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점점 읽어갈수록 자꾸 공지영의 이중적인 모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해 딸 위녕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었으나 '어떤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런 모순을 느낄 수 있었다.

 즉 공지영 자신도 이 책에서 말하듯이 "꿈꾸던 딸은 늘 전교에서 1등을 해야 하고, 선생님들에게 칭찬은 도맡아 받고, 키는 크고 얼굴은 예쁘고(네 아빠와 엄마가 네게 물려준 유전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몸매는 미인대회에 나갈 정도지만 그런 대회에는 결코 나갈 생각이 없이 늘 세계 명작을 읽고 있는 데다가, 영어는 기본으로 잘하고 거기에다가 약간의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하며(중국어도 괜찮아), 집에서는 동생들을 잘 돌보는 누나이고 엄마에게는 늘 대견하며 아빠에게는 애굣덩어리인…"(p.254) 딸을 원하면서도 이 책의 제목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이다. 결국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성실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하라'는 말인데 한 꺼풀 벗겨내면 결국 '열공해라' 아닌가? 이런 모순때문에 공지영의 말이 딸에게도 잔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지영의 충고에 "나는 이미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살고 있으니 당신이나 이중적인 모습을 버리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쓰면 분명 공지영은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으로 상처받는다"(p.29)라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어차피 독자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도 이 책을 통해 생긴 것이니 이런 것이 싫다면 오해와 편견이 없도록 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스스로 글을 쓰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p.219)라고 이야기하면서 창작 작업으로 폼 잡는 사람이 꼴불견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책을 내가 먹고 살기 위한 작업을 통해 번 돈으로 산 것이니 나의 생각을 떳떳이 밝힐 자격이 있는 것이다.

 혹시 공지영 작가가 이런 리뷰 글로 상처를 입는다면 글을 쓰는 일을 멈추기 바란다. 상처 받는 것이 두렵고 힘들면 글을 안 쓰면 되는 것이지 글을 쓰고 발표하고 책으로 출판해서 다른 사람이 많이 사서 읽기를 바라면서 남이 칭찬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제 공지영 작가도 스스로의 "오해와 편견"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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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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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본인의 생일에 <e-멋진 책세계>의 돌레인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이다. 원래 11월 정기 모임에서 "서경식"선생님을 읽기로 했기 때문에 책을 중앙도서관에서 빌릴까 생각해 보았지만 서경식 선생님의 책은 전집으로 모으기로 결심했었으므로 내 생일을 기회로 서경식 선생님의 책을 모으게 되었다. 역시 돌레인님께서는 책 안에 간단한 메세지를 적어서 주셨는데 이렇게 책을 선물로 받을 때 표지를 넘겨서 과연 어떤 글이 써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나를 즐겁게 한다. 돌레인님께서 나에게 주신 책에 쓰신 대로 되기 위해서는 계속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히 내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하는 선배가 서경식 선생님의 책 중에서도 강력히 추천한 것이라서 굉장히 기대를 하고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별 5개 만점에 3개를 준 것을 알면 보나마나 눈을 휘둥그레 뜰 선배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지만 분명히 나의 기대보다는 별로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작이라는데 흠… 수필이라고 하면 뭔가 감동적인 것을 기대하는데 별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책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침략자의 나라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간 서경식 교수의 독서 편력영혼의 성장기를 묶어서 낸 책이다. 사실 일반적인 독서기는 너무 개인적인 감상으로 흐르거나 단지 '나는 이렇게 어려운 책을 어려서부터 읽었다'는 자기 자랑에 치우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반적인 독서기와 뭔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주로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한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런 책을 통해 자신이 재일조선인 2세로서 일본에서 겪어야 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주 내용을 이룬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사실 재일조선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재일조선인은 조선과 일본 양 쪽에서 버림받고 차별받는 2등 국민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재일조선인의 귀국 또한 남한, 북한, 일본 간의 묘한 역학관계 때문에 쉽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과연 내가 중학교 때 어떤 책을 읽었는지 돌이켜 보면 정말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본인의 경우 중학교 시절에 <드래곤 라자>, <영웅문>, <소오강호> 등 판타지와 무협 소설을 밤새는 줄 모르고 읽었는데 이에 비하면 서경식 선생님이 읽은 책은 현재 내가 봐도 읽거나 심지어 들어본 책도 아니다.

 그리고 서경식 선생님은 "얄미운 녀석은 다름 아닌 나 자신"(p.120)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 '대사'를 위해, 혹은 다른 무엇을 위한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지만,

   결국 '엘리트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한 것은 아닐까?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라는 서경식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이른바 386운동권이 이를 바탕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후에는 쉽게 '변절'하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으며 졸업할 때만 되면 그렇게 비판하던 기득권층에 스스로의 학벌을 바탕으로 이에 들어가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모습 또한 흔하다. 나도 과연 현실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을까?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계속된 독서와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 보인다. 오직 초심을 잃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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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남자를 모른다
김용전 지음 / 바우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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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제목은 굉장히 도발적이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라니… 솔직히 말하면 남자가 남자를 모르면 여자가 남자를 잘 알겠는가? 그리고 나 자신도 '남자'로서 이런 도전적인 책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사실 요새 서점에는 남자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은 심리학자가 쓴 책이 주로 많기 때문에 왠지 좀 딱딱하고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오히려 헷갈리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책은 기존 남자에 대한 책과 달리 글쓴이가 솔직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쉽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일단 먼저 '통 크게, 화끈하게, 남자답게'란 문장 속에 들어 있는 남자의 심리를 파헤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이런 단어가 남자다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긍정적인 표현 방식으로 생각해 왔으나 글쓴이는 여기에 큰 맹점이 있으며 이런 점이 오히려 불확실성에 몸을 던져버리는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막상 이 책을 읽고보니 글쓴이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이성을 앞세울 때가 있으면 감정을 앞세울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통 크게, 화끈하게, 남자답게'란 문장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할 것이다.

 

 이어서 남자의 결혼관사랑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읽으면서 조금 불편하긴 했다. 아직 대학생이기도 하고 여자 손도 안 잡아 볼 정도로 성직자 수준을 넘어서 이른바 '마법'를 쓸 단계에 이르렸지만 가끔 회사에 다니는 선배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남자란 동물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이미 결혼하신 분이 이른바 회식 자리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정말 당혹스러울 때가 많으며 술 마시면서 남자들끼리 이야기 할 때는 절반은 군대 이야기고 나머지 절반은 음담패설인 경우가 많다. 이런 이야기도 이 책에서 정말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뭐 글쓴이는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 책을 여성분이 읽다가는 노처녀, 노총각의 비율이 갈수록 늘어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어서 남자를 이야기 할 때 빼먹을 수 없는 '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특히 '낸들 좋아서 마시는 줄 알아?'라고 남자가 휘두루는 전가의 보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이른바 '남자답게 화끈하게' 즐긴 후 아내 얼굴 쳐다보기 미안하지 않던가라며 남자의 밤 문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고 있으며  남자는 흔히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장님과 사장님하고 마셨다고 거짓말한다는 것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특히 사실 부장님하고 사장님하고 술 마셨다면 아내는 보통 아랫사람이 끌려간 줄 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님을 고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글쓴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히 '남자'의 모든 것을 속된 말로 까발리고 있다. 같은 남자 입장에서도 읽기 거북했는데 여자 입장에서는 오죽할까… 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좀 더 '남자'라는 동물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여 체면과 허세라는 가면을 벗고 이 책과 함께 진정한 '남자'를 마주 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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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나의 고전 읽기 1
손택수 지음, 정약전 원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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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어렸을 때 백과사전을 보면서 수많은 이름 모를 물고기를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은 없는가? 본인의 경우 백과사전에서 화려한 물고기의 사진을 보면서 부모님께 하나 하나 물어봤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이른바 머리가 커지면서 백과사전 속의 물고기와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날이 계속되던 중에 국사 시간에 조선시대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자산어보>라는 바다 백과사전을 집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업이 그렇듯이 그냥 <자산어보>=정약전이 쓴 바다생물 백과사전이라고 외우고 지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다시 <자산어보>를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과거 화려한 사진으로 치장된 백과사전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실학자인 정약전이 썼더라도 1800년대의 책이라면 읽어도 썩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원전으로 현대적으로 다시 쓴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나의 이런 선입견을 무너지고 잊어버렸던 "바다"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였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바다가 굉장히 친숙했었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서 여수에 살았었는데 그곳에서는 조그마한 산에만 올라가면 바로 남해 바다가 눈 앞에 보이고 곳곳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의 유적지가 있었던 곳이었다. 산에 올라가 남해 바다를 바라보면 왠지 기분이 좋고 바다를 보면서 바다 같이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서울 노원구로 이사오면서 나의 시선은 이제는 을 향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노원에는 고층 건물이나 아파트가 없었다. 그래서 하교길에 산을 바라보면 노을이 지면서 산의 웅장한 모습이 나를 매혹시켰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함으로써 하교시간이 한 밤 중으로 바뀌고 점점 고층 건물이 들어서게 되면서 산을 향하던 나의 시선도 점점 교과서를 향하게 되었다. 이런 잊어버린 기억이 이 책을 통해서 되살아 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있어서 <바다>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일단 이 책을 펼치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수윤(秀潤)이란 단어(p.9)이다. '더욱 갈고 닦아 빛내라는 뜻'으로 요새는 한방 화장품의 이름으로 더욱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고 바다로 가는 뗏목인 [자산어보]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지구(地球)라는 말이 얼마나 육지 중심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p.20)과 같이 표면적의 72%가 바다이니 만큼 해구(海球)라고 불리는 것이 어울릴텐데 우리는 육지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정약전은 고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은 학자였다. 이런 점은 정창대라는 한 섬 소년의 이름을 책 맨 앞에 똑똑히 밝혀 두는 점이나(p.49) 가숭어를 숭어로 바꿔 부른 것(p.77)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고정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를 통해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특히 과학자에게 있어서 [고정된 중심]을 치명적이다. 토마스 쿤의 유명학 저작인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런 고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은 젊은 학자나 다른 분야의 학자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글쓴이가 시인이니 만큼 곳곳에서 훌륭한 자연묘사가 숨겨져 있다. 특히 하늘을 나는 물고기 날치 부분에서 글쓴이가 보여준 상상력과 묘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p.88~89) 역시 똑같은 것을 봐도 아는 것 만큼 보이고 느끼는 것 만큼 알 수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못 보는 것을 글쓴이는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묘한 질투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언제부터 나는 이런 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이 책에서는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여러가지 물고기도 등장한다. 가장 먼저 흑산도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홍어(p.106)가 등장하는데 썩기 직전의 홍어가 이렇게 좋은 음식이 된다는 점이 굉장히 역설적이다. 글쓴이는  "두엄과 같은 지긋지긋한 세상 속에서 인생도 슬픔을 삭이고 삭여서 성숙한다"고 묘사하던데… 이어서 정말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는 복어(p.111)가 등장한다. 이 장에서는 이형기 시인의 [복어]라는 시가 소개되고 있는데 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독'을 품고 살아가게 만드는 세상이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인지 물음을 던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과학적 관점에서 '독(毒)''약(藥)'은 다르지 않다. 다만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실제로 수많은 독이 관점을 바꾸자 훌륭한 약이 되어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구한 경우도 많다. 여기서 나오는 복어독도 "보톡스"라고 주름살을 개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물론 조만간에 FDA에서 부적격 판정이 나올 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예상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슬픈 가마우지의 노래](p.188)도 감동적이다. 이 시에서 소개되는 대로 우리는 가마우지처럼 주인이 만족할 때까지 소득 없는 슬픈 노동을 계속해야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 구이린 지방에서 가마우지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주인과 함께 술을 나누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금치 못했다. 가난한 어부를 위해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을 받아들인 가마우지의 삶은 마지막에 주인과 술을 나누면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마지막에 극적으로 화해한다고 해도 그런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런 딱딱해 보이는 <자산어보>를 이렇게 훌륭한 솜씨로 현대에 되살려낸 글쓴이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특히 곳곳에 삽입된 삽화도 서양화가, 동양화가를 졸업한 2명의 노력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으며 책 내용과도 훌륭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오래되어서, 그리고 군대에서 고생하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바다>를 나에게 되찾아준 책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지막 여름 방학이 될 지 모르는 이번 여름에 이 책과 함께 바다를 찾아갈 생각이다. 혹시 바다 내음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잊어버린 바다를 되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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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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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본인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글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 소로우의 대표작인 <월든>을 전부 읽었으며 이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인 <시민의 불복종>이란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이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 선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요근래 <촛불시위>를 통해 과연 '시민의 불복종'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굉장히 궁금하였다.
 

 이 책은 시민의 불복종, 돼지 잡아들이기, 가을의 빛깔들, 한 소나무의 죽음, 계절 속의 삶, 야생사과 이렇게 총 6개의 다른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 중 첫번째 <시민의 불복종>은 최초 출판되었을 때는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였으나 <시민의 불복종>이란 이름으로 더욱 더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고 주장하며 모든 정부가 때로는 불편한 존재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정의'인 정부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내가 허용해 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며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주장한 것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의 편에 투표하는 것도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며 투표는 일종의 도박이므로 불의의 법들이 존재하면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라고 독자에게 묻고 있다. 이에 대한 글쓴이의 답은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하나의 방법으로 글쓴이가 취한 것과 같이 불의의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세금을 내지 않는 것 등이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기득권자들은 스스로 법을 만드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불의의 법을 지키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설사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단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양심과 생각이 지시하는데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말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현재 <촛불 시위>도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며 과거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는 전부 '테러리스트'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요새 어떤 국회의원이 집시법을 강화하는 법률을 국회에 상정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지켜볼 문제이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는 세금이 '이라크 전쟁'을 뒷받침하는데 쓰인다는 점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외 글쓴이의 글들은 자연에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일종의 [노장 사상]을 느낄 수도 있었는데 글쓴이가 공자에 대해 박식한 점을 가만하면 어느정도는 '노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소로우 특유의 위트있는 문체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은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다.

 

 결국 '요새 시절이 하 수상'하고 촛불시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시민의 불복종>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과거 멕시코 전쟁을 통해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글쓴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나름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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