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것이 몇 년만인가?

지난 2010년 6월 22일.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글을 올리고서 무려 4년이 흘렀다.

게으른 탓이고, 알고보면 부족한 공력탓이고, 따지고 보면 재미없던 탓이다.

 

부족한 공력을 다시 쌓아보고, 지루한 일상에서 재미를 다시 찾아보고자,

게으른 내가 14기 신간 평가단을 다시 신청했다.

예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었더랬는데, 억지로 읽는 듯한 책읽기가 영~~~

아무튼 이렇게라도 게으른 나를 깨워 다시금 시작이다.

 

첫번째 과제가 '주목할 만한 신간' 리스트 작성이다.

내가 맡은 분야는 다음과 같다.

 

<인문/사회/과학/예술 해당 분야>

1. 고전 (문학 작품 제외) - 고전에서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짓기가 쉽지 않은데.

2. 과학 - 내 취약 분야가 과학인데.

3. 사회과학 - 이것도 과학일까?

4. 역사 - 역사를 비틀어보고 싶은 나.

5. 인문학 - 대충 정리하면 인문학 묶음이다.

6. 예술/대중문화 - 참 많기도 하다.

7. 만화 > 교양만화 - 이건 패스다.

 

자! 이제 내 분야를 알아봤으니 리스트를 찾아본다.

 

1. 눈에 확 띈 건 <젤롯>이란 책이다.(3월 중순에 출간된 책인데, 신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사이비 기독교 신자다. 교회 안 나가는 기독교 신자다. 신자는 아니고 그냥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럴싸하게 말하면 비판적 크리스찬이다. 예수에 대한 이런 저런 논의들 가운데 하나. 혁명가적 예수의 모습을 찾고 있는 책이란다. 정치적 혁명가였던 예수! 그 모습을 성서와 사료 등을 토대로 추적하고 있을까?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를 신으로 인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에 누가 나는 신이다라고 떠벌이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참으로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멋지고 고귀한들, 신이라고 인정하고 따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2000여년 전의 사람들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았을 것임에, 많은 이들은 그를 정치적 혁명가,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구원자로 여기지 않았을까? 거기에 조금더 진실과 가까운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눈에 띄는 이유다.

 

 

2. 다음으로 레이디 가가에서 온 말일 테지? <가가 페미니즘>

 

나는 사이비 기독교인이면서 사이비 페미니스트다. 예수도 페미니스트였음이 분명하다고 나는 말한다. 오! 마리아. 사이비란 글자를 떼어내려면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스트란 어떤 사람일까? 여자를 좋아하면 페미니스트? 그렇다면 난 페미니스트다. 이 책은 아마도 최근의 페미니즘적 경향과 행동을 담은 책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주목한다. 단순히 여자만 좋아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 책을 읽어보아야 겠는데.... 책이 비싼가?

 

 

 

3. 난 종북이냐? <경기동부>

 

나의 정치적 성향은 진보좌파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겉으로 뽐내고 다니는게 그렇다. 속으로는 알 수 없다. 보수적 사고방식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자본주의적 사회에 최상으로 적응하고 이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이비 진보좌파다. 최근 종북논란. 아니 오래된 최근이다. 이석기 사태(사태란 말이 맞나?) 등이 터지면서, '경기동부'가 주목받고 있다. 관심을 갖자기보다는 이 책을 통해서 좀 똑바로 알자가 목적이다. 종북 논란도 지겹고, 그게 먹히는 사회도 뭐같고. 종북이면 또 어떻고.

 

 

 

 

 

4. 그리스로마에만 신화가 있을 턱이 있나! <살아 있는 한국 신화>

 

증보판인듯 싶다, 아 개정판인가? 나는 12000원인가 하는 옛날 책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삼 만원인가? 비싸졌다. 비싸질만한 가치가 더 추가된 것일터.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신화는 주몽과 단군만 있는게 아니란걸 이책은 알려준다. 그런데 우리 신화는 신화같지 않은 친근함과 아기자기함, 즐거움이 있다. 동화같은 느낌의 신화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이야기성과 스펙터클함이 떨어지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만의 신화 이야기가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개정판을 다시 보아야할 이유이다. 명색이 국어선생인데, 우리 신화에 대해 잘 알아야하지 싶다. 그러니 아직 사이비 국어선생이다.ㅋㅋ

 

 

 

 

 

5. 이건 덤이다. <삼국유사>

 

고려대출판부에서 나온 3권짜리 삼국유사 번역본이다. 잘 팔리지도 않을 책을 무려 3권으로 출간(예정인듯)할 고려대출판부의 결정에 찬사를 표하면서, 이 책 한 부씩 사두시면 좋으시겠다. 사이비 영업 사원이 된 듯한 기분이다. 



 
 
가넷 2014-04-03 11:04   댓글달기 | URL
살아있는 한국신화는 괘나 분량이 두툼해져서 개정판이 나왔네요. 솔직히 한국신화는 그리 재미가 있지는 않더라구요. 삼국유사는 역주본 답지 않게 너무 알록달록하네요.ㅎㅎ

멜기세덱 2014-04-04 08:16   URL
나는 정감이 가고 아기자기한게 재미있던뎅...제주도에 할망인가, 오누인가들도 그렇고.... 삼국유사의 내면도 나름 알록달록하니 그런게 아닐듯 싶어요...ㅎㅎ

하늘바람 2014-04-03 11:57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에요 반가워요

멜기세덱 2014-04-04 08:17   URL
반갑습니다.

순오기 2014-04-04 03:31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게 누구십니까?@@
컴백알라딘~~~~~~~ 환영합니다!!^^

멜기세덱 2014-04-04 08:17   URL
ㅎㅎㅎ. 여전하시죠?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이다. 즐겁게 시청하고 있던 차에, 얼마전 아르헨티나전 참패 후 한 네티즌의 정확한 예측이 주목받은 적이 있다. 뭐, 나도 심심하던 차에, 주목받지 못하겠지만 행복하게나마 예측 겸 상상해보자. 내 예측의 대상은 16강 이후부터다. 

16강 진출팀 예상  

A조에서 1위 멕시코, 2위 우루과이가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팀이 전력상 비등해보고 조1위를 두고 용호상박 다툴것으로 예상되는데, 아무래도 더 절실한 멕시코가 이기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가 남아공을 크게 이기지 않는한, 두 팀의 진출이 유력하다. 

B조는 아르헨티나가 1위, 한국이 2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할 것이다. 반드시. 

C조는 미국이 1위를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1위가 슬로베니아이지만 마지막 상대가 영국이다. 영국이 강팀으로서의 자존심 회복의 기회가 있는 만큼 승리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약체인 알제리를 만난다. 미국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영국과 승점이 같은 상황에서 다득점에 앞선 미국에 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위는 영국 진출 예상.

D조는 독일이 1위, 세르비아가 2위를 차지하여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가나가 맞붙는 마지막 경기에서 위기에 몰린 독일이 강팀의 면모를 보여줄 것이 확실하다. 세르비아는 호주와 상대하기때문에 가나보다 유리한 입장이다. 

E조는 네덜란드의 1위가 거의 확정적인 가운데 덴마크가 일본을 누를 것으로 예상한다. 

F조는 파라과이의 1위가 확실시된다. 마지막 상대가 뉴질랜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슬로바키아를 만난다. 이탈리아의 승리를 조심스레 점친다. 이탈리아가 2위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G조는 북한이 이미 죽음의 수렁에 빠진 가운데, 브라질이 1위, 포르투갈이 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E조는 스페인의 우승후보다운 면모를 다시 세우기 위해 칠레가 희생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경우 스위스가 2위로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6강이 모두 가려지게 되면 이제부터 결승토너먼트다. 이렇게만 되면 한국이 4강 신화를 다시 재현하는데도 유리한 대진이 완성된다. ㅎㅎ 

우선 16강의 한 쪽 테이블에서의 결과를 예상해보자. 

16강-1경기 멕시코 對 한국 : 한국이 멕시코를 만만하게 생각하는데, 최근 전적도 괜찮다. 8강을 노려볼만 하다. 한국 8강 진출 

16강-2경기 미국 對 세르비아 : 미국이 16강을 진출하지만 세르비아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한다. 힘겹게 세르비아가 이기지 않을까 예상한다. 세르비아 8강 진출 

16강-3경기 파라과이 對 덴마크 : 파라과이이 쉽진 않겠지만 넉넉히 이길 것으로 예상된다. 파라과이 8강 진출 

16강-4경기 스페인 對 포르투갈 : 스페인이 토너먼트에 들어서면서는 힘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포르투갈이 분위기를 타긴 했지만 선수들 면면이 스페인에는 무리이지 싶다. 스페인 8강 진출 

이렇게 8강이 가려지만 8강 대진도 한국이 해 볼만하다. 

8강-1경기 한국 對 세르비아 : 세르비아와는 평가전에서 한 번 이긴 적이 있다. 8강전 상대로는 약팀이기 때문에 아주 해볼만하다. 이렇게 해서 4강 신화가 재현된다. 한국 4강 진출 

8강-2경기 파라과이 對 스페인 : 스페인의 승리 예상. 스페인 4강 진출 

한국과 스페인의 4강. 스페인이 유리하지만 한국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은 상태이기 때문에 쉽게 결판은 나지 않을 것이다. 2002년의 좋은 기억이 있지만, 재현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다른 16강 테이블은 간단한 예상만 하자. 

16강-5경기 우루과이 對 아르헨티나 : 아르헨티나 8강 진출 

16강-6경기 영국 對 독일 : 우승후보끼리 일찍 만났지만 독일의 승리를 점쳐본다. 독일 8강 진출 

16강-7경기 네덜란드 對 이탈리아 : 네덜란드 8강 진출

16강-8경기 브라질 對 칠레 : 브라질 8강 진출. 

8강-3경기 아르헨티나 對 독일 : 아르헨티나 4강 진출

8강-4경기 네덜란드 對 브라질 : 브라질 4강 진출

준결승에서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만날 것으로 예상된다. 아르헨티나의 상승세일까? 안정적인 브라질일까?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리나라가 다시만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브라질이 결승에서 스페인과 격돌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결승 스페인 對 브라질 : 스페인 우승. 스페인이 우승의 한을 한번 풀어보라고....인심썼음. 




 
 
마늘빵 2010-06-22 16:52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군요! 저는 브라질이 우승 한 표! ^^ 아르헨티나랑 브라질이 붙지 않을까 싶은데.

멜기세덱 2010-06-22 17:00   URL
그렇군요. 오랜만이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조1위를 하는 이상 4강에서 만날 확률이 높은데요. 브라질이 포르투갈한테 지지 않는 이상 조1위가 거의 확실해서리.

전호인 2010-06-22 17:09   댓글달기 | URL
뭐 우리가 브라질 누르고 결승가서 아르헨티나 설욕한번 할까요? ㅋㅋ
간만에 뵙는 듯...

고고씽휘모리 2010-06-22 17:37   댓글달기 | URL
멜기님 모처럼 뵙습니다.
뵙고 싶어요 ^^

순오기 2010-06-22 18:13   댓글달기 | URL
오오~ 멜기님이닷! 반가워서 덥석~~~~~ ^^
나는 한국 16강 진출, 일본은 16강 좌절을 기원하는 심뽀에요.ㅋㅋ
우승은 어디가 될까...점쳐보는 재미도 좋을 거 같아요.^^

멜기세덱 2010-06-22 18:14   URL
기원이 아니고, 예상이에요...객관적으로다가....ㅋㅋ
 

예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썼던 글인데, 여차저차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가상의 공간에 쳐박혀 미아가 되었던 글을 다시 불러내본다. 글이 좀 긴데, 보관차원에서 올리는 것인만큼 스크롤 압박을 좀 견뎌야 할 것 같다. 

 

이상 ‘인간’ 현상 ― 결혼의 노후화

이상 ‘인간’ 현상

  현재 전 지구적 문제로 거론되는 것은 무엇보다 이상 기후 현상이다.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에 따라 엄청난 재앙들이 연이어지고 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환경의 변화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런 이상 기후 현상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산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환경파괴다. 개발과 성장의 논리 아래 최근 1~2세기 동안에 자연은 무참히 파헤쳐져 왔다. 누군가 ‘환경의 역습’이라고 했던가? 최근의 이런 기후 이상으로 인한 재앙들은 말하자면 지구 공멸의 전초전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소름끼치는 재앙의 징조들에 누구나 문제의식을 느끼긴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실태조사와 원인 분석, 그에 대한 구체적 대안들을 찾는 작업은 이미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임에 틀림없다.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가들에 의한 이런 활동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일련의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한 대처에서 소외된 또 하나의 ‘이상 기후’ 현상이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기후를 우리가 폭넓게 해석한다면 이런 기후의 이상은 자연의 전반적 변화, 즉 자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생태계 전반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들이 포함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상 인간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상 현상 또한 우리가 직면한 또 하나의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 해수면 상승 ― 결혼의 노후화

  이상 기후 현상에서 대표적인 것이 지구 온난화 문제다. 이런 문제들의 모든 현상들이 모두 맞물리는 것이긴 하지만 지구 온난화는 그 중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인데, 이것으로 인해 지구의 육지란 육지는 자칫 물로 뒤덮여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수면 상승은 이상 기후 현상의 바로미터(barometer)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상 인간 현상의 바로미터는 무엇일까? 언뜻 꼽자면 출산율 저하나 노후화 현상 등등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의 근원에는 우리가 문제시하지 못했던 척도가 있으니, 바로 평균 결혼 연령의 급상승이 그것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조사한 2006년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가 30.9세, 여자가 27.8세다. 1990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가 27.8세, 여자가 24.8세였고, 2000년에는 남자 29.3세, 여자 26.5세였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남자의 평균 초혼 연령은 2.5세 상승했고, 여자는 2.3세 상승했다. 통계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90년부터로, 최근 16년간 남녀의 평균 초혼 연령은 각각 연평균 0.19세와 0.18세다. 그러니까 대략 남녀 공히 연간 약 0.2년씩 결혼 연령이 늦어진 셈이다. 이를 월로 환산하면 매년 두 달하고도 열흘씩 초혼 연령이 늦어졌다는 얘기다. 직접적인 수치의 비교는 어렵겠지만, 이것은 해수면 상승의 수치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결혼 연령의 급상승을 결코 시답잖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것은 이상 기후 현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회 ․ 경제적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인류의 생물학적 성장과정 상에도 반하는 현상으로 이는 갖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엉성하긴 하지만 예전의 결혼 연령대를 짐작해 볼 수 있거나 결혼에 담긴 사회 ․ 경제적 의미와 그 매커니즘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영화나 문헌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결혼 연령의 상승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며,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름의 주장을 펴보고자 한다.  


‘춘향이와 이몽룡’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2000년 개봉한 거장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영화 <춘향뎐>, 감독 : 임권택, 주연 : 조승우 ․ 이효정, 2000.)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편제>를 비롯해 우리나라 영화계의 거봉인 임권택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 춘향과 이몽룡을 맡은 주연 배우의 실제 나이다. 특히 여주인공 춘향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는 1983년생의 이효정이란 여고생이었다. 촬영 당시 나이가 16살이었으니, “이팔 꽃나이” 딱 춘향이의 나이다. 이몽룡 역을 맡은 조승우도 당시 스무 살이 안 됐을 때였으니, 원판 성춘향과 이몽룡의 실제 나이와 거반 비슷하게 캐스팅한 셈이다.

  춘향 역을 맡은 여배우의 실제나이가 무에 그리 화제가 될 법 한가 의아스럽겠지만, <춘향뎐>이 조선 후기 연행되어 전해오던 판소리 <춘향가>를 리얼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과 겹쳐질 때 이는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문제 삼기를 “이 영화에서 미성년자인, 춘향역의 여배우의 가슴이 노출되는 등의 장면이 ‘영리 또는 흥행의 목적으로 청소년에게 음란한 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를 금지한 청소년보호법 26조 2항에 위배될 소지가 있어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이래저래 논란이 되었지만, 창작의 자유를 앞세운 영화계의 반발이 거세,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유감표명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논란의 연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21세기 초엽에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자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춘향전의 대표적 판본으로 전하는 󰡔열녀춘향수절가󰡕의 배경 “숙종 대왕 즉위 초”(조령출, 󰡔열녀춘향수절가󰡕, 보리, 2007, p.225. 이하 이 글에서 󰡔열녀춘향수절가󰡕의 원문 및 번역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함.) 그러니까 17세기 말에서부터 이후 판소리로 연행되었던 조선후기까지 이 춘향이와 이몽룡을 두고 어떤 논란이 있었을까를 궁금해 하면 어떨까? 춘향전이 읽히고, 판소리로 연행되면서 사람들은 혹시 이팔청춘 춘향이와 열여덟의 몽룡이를 두고 21세기적 논란으로 설전을 벌였을까? 비슷하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다.

  당시 󰡔열녀춘향수절가󰡕는 대단한 음서였다. 현대식으로 하면 ‘빨간 책’ 말이다. 그래서 이걸 읽자면 몰래몰래 숨어서나 가능했다. 간혹 읽다가 걸리면 경을 치기 딱 알맞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봐도 야하기는 무지 야하다. 솔직히 어디 가서 당당히 낭송하기에는 겸연쩍다. 판소리로 연행될 때는 ‘눈대목’이라고 하는 클라이막스 몇 부분만을 주로 했겠지만, 판에 따라서는 재미로 야한 대목들을 능글맞게 뽑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데에 재미를 갖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법 하니 말이다. 이야기가 약간 삼천포로 빠진 감이 없지 않은데, 다시 논지로 돌아오자면, 조선후기, 아니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이 음란물의 주인공의 나이가 열여섯, 열여덟인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시대에서, 아무리 이야기 속의 일이라고 해도, 열여섯, 열여덟의 ‘어린 것’들이 벌이는 이런 ‘음탕’한 짓이 별반 문제되지 않았을까? 반면, 자유와 개성과 인권을 최고의 선으로 내세우는 21세기에서는 왜 이와 비슷한 것이 논란이 될까? 이쯤해서는 이만한 아이러니가 없겠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사회의식도 자연스레 변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조선시대에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었던 데에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21세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겠다. 즉, 조선시대에는 그 나이 또래라면 말 그대로 ‘과년(瓜年)’한 나이인 것이다. ‘과년’은 “결혼하기 적당한 여자의 나이”를 가리킨다. 즉 결혼할 때가 된 나이의 남녀가 벌이는 정사는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글로, 판소리로 유포시키는 즐기는 것에 혀를 차고, 경을 칠 뿐인 것이다.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이 논란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하자면 이제는 이 나이가 ‘과년’한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엄마, 나 그사람하고 ‘동거’하기로 했어.”

한국의 16세 소녀가 이렇게 선언했다고 가정해보자. 조용했던 집안의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집안 망신’에서 ‘미친 년’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단어들이 난무하고, 가족 간 갈등이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의 소녀가 또래의 어떤 소년을 사랑하고,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 역사의 긴 흐름을 생각해볼 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벌어질 수도 없고,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다. 즉, 우리나라에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우석훈, 󰡔88만원세대󰡕, 레디앙, 2007, pp.25~26.) 


  상상해 보자. 아니, 상상이랄 것도 없다. 오늘날 학교에 다니는 열여덟의 남학생과 열여섯의 여학생이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하겠다고 춘향이와 이몽룡처럼 ‘난리부르스’를 떤다면 어떨까? 일단 열이면 열, 모든 부모는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우선 “너희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아니”라며 설득하는 척이나 하면 다행이다. 거두절미하고 열의 아홉은 가위부터 찾아들고 머리끄댕이를 잘라 놓고 말리라고 덤벼들 것이다. 이 아이들은 아직 “결혼 할 나이”, 즉 과년한 나이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인간들 속에 내재한 의식이다.

  잠깐 여기서 우리의 눈을 서양으로 돌려보자. 서양판 춘향이와 이몽룡이 있으니, 다름 아닌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얘들의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춘향이와 이몽룡보다 어리단다. 그들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줄리엣이 두 주 후 열네 살이 된다는 대목을 통해 그녀가 열세 살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로미오는 줄리엣보다 몇 살 많았을 것이다.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의 시대배경은 대략 15~16세기로 추정된다. 춘향이와 이몽룡보다 한 세기 가량 앞선 세대인 것이다. 줄리엣의 시대를 조금 늦추어 춘향이와 동시대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17세기의 줄리엣은 아마도 열여섯의 춘향이와 비슷한 또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당시 동서양 모두 ‘과년한 나이’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동서양은? 현시대에 있어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초혼 연령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동서양 공히 비슷한 추세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근 200년 사이에 결혼 연령이 대략 2배 가까이 늦어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과년한 나이’를 말해왔지만, 엄밀히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초혼 연령이 곧 ‘과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과년’에는 변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결혼이 가능한 나이에 어지간하면 결혼을 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결혼이 가능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훌쩍 넘기어 꽤나 늦게 결혼을 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왜 ‘과년’을 대략 두 번 지낼 나이를 보낼 때까지 이렇게 늦게 결혼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사회가 변했으니까”라고 얼버무리기에는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물론 사회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대답은 맞는데,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고, 그 변화 속에서 어떤 매커니즘을 통해 이처럼 결혼 연령을 거반 한 세대에 가깝게 늦춰 버렸는가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극단적으로 알아보자. 


결혼의 매커니즘 ― 󰡔봄 ․ 봄󰡕 혹은 조혼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자칫 장황해질 우려가 있다. 필자가 ‘극단적으로’ 알아보겠다고 한 것은 그런 우려 때문이다. 그러니까 극히 부분적 예들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무조건적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이 글의 전체적 논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는 ‘장황’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이 글에서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우선 그 근원부터 추려보아야 하겠으나, 필자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일반적 재능의 소유자라면 대략 본능을 내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성적 본능이나 번식의 욕구 등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하고 적절하다. 그러나 부족하다. 이는 같은 본능을 공유하는 범 동물류에 적용해 볼 때 그 부족함이 바로 드러난다. 범 동물적으로는 성적 본능이나 번식의 욕구를 가졌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결혼은 인간만의 독특한 체제 혹은 제도이다.

  이러한 설명을 결혼에 대한 본능 가설쯤으로 부른다면, 여기서 좀 더 발전된 적절한 설명은 ‘생존의 욕구’를 가져오는 것이다. 안정적 ‘먹이’의 제공, 위협적 대상에 대한 경계 및 방어 등의 필요에 의해 결혼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어보인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결혼과는 매우 달랐을 테지만, 그렇게 결혼의 초기 형태가 정착되어 갔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형식이 무리, 부족의 형태로 확장되면서 오늘날의 사회, 국가로 발전되어 갔다고 설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본 교양이다.

  일단 이것은 엉성한 형태의 결혼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이 보다 근대적 결혼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면서부터다. 인류가 무리와 부족의 형태를 이루면서 적에 대한 방어 체제는 보다 효율적이 되었다. 이제 남는 것은 안정적 먹이의 제공이다. 여기에 ‘농업 혁명’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정착에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정착하여 살면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제공되는 노동력 확보가 주요해지는 것이다. 결혼은 이런 노동력 확보에 있어 가장 최상의 효율적 방법으로서의 창작품이다.

  다소간 장황했다. 수 만년의 역사를 훑는 데 있어 장황은 필요악임에 어쩔 수 없다. 자, 이제는 역사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자.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산업혁명까지 별난 변화가 없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산업혁명을 맛보기 전에, 재미난 소설을 잠깐 살펴보자.  


우리 장인님이 딸이 셋이 있는데 맛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것이 아니라 그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살때부터 열아홉 즉 십년동안 데릴사위를 갈아 드리기를, 동리에선 사위부자라고 이름이 낫지마는 열네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때가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누라고 연팡 바꿔드렸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재 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담으로 네번째 놈이 들어올것을 내가 일두 참 잘하구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룩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안는다. 셋재 딸이 인제여섯살, 적어두 열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테므로 그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좀채리고 장가를 드려달라구 떼를쓰고 나자뻐저라, 이것이다.(김유정, 「봄 ․ 봄」, 전신재 편, 󰡔원본 김유정 전집󰡕, 강, 2007, p.164.) 


  이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김유정의 소설 「봄 ․ 봄」의 한 대목이다. 김유정의 소설은 일제강점기 당시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소시민적 삶을 해학적으로 형상화한 명작들로 유명하다. 특히 위에 인용된 작품은 거반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일까? 아무튼, 이 작품을 인용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작품이 결혼이 가진 근대적 매커니즘을 아주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는 점순이와의 결혼을 빌미로 장인인 동네의 마름 ‘봉필’에게 그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공교롭게도 점순이의 나이는 춘향이와 같은 열여섯이다. 반면 주인공 ‘나’는 26살임에도 불구하고 ‘성례’도 못치르고 장인에 의해 3년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점순이는 ‘과년’한 나이였다. 결혼할 때가 된 것이고, 당연히 결혼을 시킬 때였던 것이다. ‘봉필’은 단순히 아직 키가 자라지 않아서 결혼을 못 시키는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 이것은 당시의 특수한 우스갯소리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욱 가관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좀 뒤에서 알게될 것이다.

  자, 그럼 산업혁명을 얘기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푸코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일말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섹스가 억압되었다는 그러한 담론은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아마 취급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담론은 진지한 역사적, 정치적 보증에 의해 보호되고, 수백 년에 걸친 대담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시기에 뒤이어 17세기에 억압의 시대가 출현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일치되기에 이른다. 즉, 그것은 부르주아 질서와 일체가 되었던 것 같다. …… 섹스가 그토록 엄격하게 억압당하는 것은 섹스가 전반적이고 집약적 노동력의 동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설명의 원칙이 점점 뚜렷이 드러난다. 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시대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으로 한정된 쾌락 이외의 다른 쾌락 때문에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1990, p.29.)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성의 억압이 다만 노동력의 착취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결혼에서는 ‘노동력 착취’의 매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제국주의 시기에 영국에서는 남성 초혼 연령이 갑작스럽게 30대 이후로 상승한 예가 있다고 한다. 제국의 식민지 사업에 동원될 군대와 노동력은 그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부와 명예라는 허울 속에 가려, 그들은 때 지난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결혼이 ‘과년’한 나이를 훌쩍 넘기게 된 것은 분명히 산업혁명 이후의 이런 매커니즘 때문이었다.

  이쯤해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냐고.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과년’을 넘기게 한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나는 단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 산업화에 의한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은 전반적 사회 의식과 구조를 변화시켰고, 이런 변화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간혹 억압적으로 결혼은 늦추어졌다. 인간이 그리 단순한가? 성적 본능이나 욕구가 그렇게 간단하게 타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혼은 다른 영역이다. 그것이 사회 변화를 얼마나 철저하게 반영하는지를 우리는 지금까지 얘기한 ‘만혼’과는 달리 ‘조혼’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조혼’ 풍속이 대단히 많았다. 이것은 너무나도 잦았던 수난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대표적인 조혼의 예로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와 민며느리 제도에까지 올라가지만, 보다 특수했던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조혼 풍속이 거세게 자리잡았던 첫경험은 고려시대 때 “원나라에 공녀를 보내면서부터였다.”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를 정도의 공녀를 차출하여 원나라에 보내야 했으니, “부득불 전국의 과부와 처녀까지도 공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는 “딸의 나이 8~9세가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짝지을 남아를 물색하여 서둘러 혼례”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의 공녀 차출이 없었다. 그런데 간혹 조혼이 붐을 이룰 때가 있었는데, 언제고 하니, 바로 왕비 간택을 위한 ‘금혼령’이 내려졌을 때이다. 왕비 후보자의 연령이 13~18세 였으니, 간택할 쯤 되어서는 일찌감치 혼처를 정해 보내버렸던 것이다. 조혼은 이후 일제시대에서도 성행했다. 굳이 그 이유를 세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어땠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자.  


조혼은 개화기 이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어 1921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10년간 당시 법정연령인 남자 17세, 여자 15세에 이르지 않는 수가 남자는 7.1%, 여자는 6.2%나 되었다. 그리고 15세 이상 20세 미만에 한 결혼이 전체 결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3나 되었다.

세밀히 따지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1911년의 국세조사에서 결혼한 사람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세 미만에 결혼한 사람이 남자 10명, 여자 18명이었다. 그리고 5세~10세에 결혼한 사람은 남자 48명, 여자 132명, 10세에서 15세까지는 남자 159명, 여자 488명이었다. 말하자면 1천 명당 나맞는 217명, 여자는 638명이 15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이미 결혼한 유부녀 ․ 유부남이었다.(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pp.56~57. 이 글에서 우리나라의 조혼 풍속에 대한 설명은 모두 이 책을 참조하였다.)
 

  이런 조혼은 당대의 사회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음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겠다. 원나라의 처녀 공출 요구, 조선시대의 금혼령, 일제강점기의 시대상황 등에 의한 조혼의 성행이 그 예인 것이다. 지금의 만혼은 더욱 그러한 혐의가 짙다. 근 200년간 근대화, 산업화의 요구에 의해 결혼은 부쩍부쩍 늦어져 간 것이다. 급기야 “결혼은 미친 짓”이 돼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사회의 요구, 즉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결혼은 ‘미친 짓’으로까지 만들어 왔는지를 인상을 쓰고 살펴보자.  


이제 결혼은 ‘미친 짓’인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도발적으로 선언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2002년 개봉되었다. 결혼이 뭔 죄가 있기에 ‘미친 짓’이라고까지 할까? 그러나 이 영화를 조곤조곤 들여다보면 괜히 그러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연희 : 평생 이렇게 데이트나 하면서…… 달콤한 말이나 실컷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

준영 : 네가 맞선에서 찾는 건 어떤 남자가 아니잖아? 어떤 조건이잖아……. 내 말 틀렸어?(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감독 : 유하, 주연 : 감우성 ․ 엄정화, 2002.) 中에서; 오영수, 󰡔경제학 갤러리󰡕, 사계절, 2008, p.13.에서 재인용.)
 

  이 영화의 도발적 주인공 연희는 이 시대의 양면적 연애관 혹은 결혼관을 잘 보여준다. 위에 인용된 준영의 말에서처럼 연희에게 결혼은 ‘조건’이 좋은 남자를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준영은 연희의 결혼 상대가 못 된다. 다만, 연애 상대일 뿐이다. 이런 결혼에 대한 인식이 비단 영화 속의 연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현대인들의 “현실적이고 냉정한 결혼관”(http://movie.naver.com/movie/bi/mi/detail.nhn?code=31893&mb=c#01)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연희는 조건이 무척 좋은 의사와 결혼을 하고, 더불어 준영과는 딴살림을 차려 연애를 계속한다. 이런 연희의 행동이 진정 “현실적이고 냉정한” 찬찬히 따져볼 문제지만, 결혼에 대한 오늘날 현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그것은 보편적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설문조사가 있어 흥미롭다. 국내의 모 결혼정보회사가 회원 1만 7천여 명을 대상으로 배우자의 조건에 관해 물었는데, 인상(외모), 학력, 수입 등을 조건에 따라, “세 조건 모두 비슷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계층화가 두드러졌”다. 그 중에 가장 계층화가 심한 것은 학력으로 나타났다. “학력이 비슷하지 않은 남녀의 결혼은 거의 성립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성은 자기보다 학력이 높은 남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재밌는 것은 여성의 경우, 돈 많은 남편과 결혼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조건이 바로 외모라는 점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미모가 최상급인 여성은 최하급인 여성에 비해 연봉이 1,300만원 더 많은 남성과 결혼했다.” 이 조사는 전체적으로 결혼이라는 것이 외모나 학력, 수입 등의 조건에 의해 심각하게 좌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외모에 의해 남성의 연봉에 차등이 생긴다는 점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에 강한 우려를 표하게 만든다.(이상의 설문조사 내용은 오영수, 위의 책, pp.24~26. 참조.)

  이런 결혼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이 올곧이 반영된 것이 바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다. 솔직히 결혼에 있어서 이러한 조건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일 따름이지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때, 이 영화가 ‘당돌히’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 되는 것이다. 곧, 그것을 조장하는 이 사회가 미친 것이 아닐까?

  조건을 따지는 결혼, 그것을 조장하는 사회가 빚어낸 결론이 바로 ‘결혼의 노후화’, 곧 필자가 ‘이상 인간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년’을 곱절로 보내야 겨우 결혼이 가능한 이 사회에서 그 기간 동안은 결혼하기 위한 ‘조건’을 채우기 위해 허비된다. 우리는 다음에서 그 기간이 어떻게 허비되는지 눈 크게 뜨고 파헤칠 것이다.   


영화 <청춘>과 󰡔88만원세대󰡕

  현행법상, 결혼이 가능한 나이는 남자 만 18세, 여자 만 16세 이상이다. 다만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긴 하다. 오늘날 과년한 나이를 그쯤으로 보는 셈이다. 춘향이만 보더라도 16살, 즉 만 15세였던데 비해 여자의 경우 1살 많아진 셈이고, 󰡔경국대전󰡕에 “남자 15세, 여자 14세가 되면 혼인을 하는 것을 허락한다”라는 규정과 비교하면 3살이나 많아졌다.(노대환,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p. 참조.) 뭐 그 정도는 눈감아 줄만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균 초혼 연령이 근 30세에 달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그러나 춘향이와 이몽룡을 비롯한 조선시대 대부분의 남녀가 대개 오늘날의 법적 결혼 가능 나이쯤에 시집, 장가를 간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 법이 정한 결혼 가능 나이가 애써 부모 동의 받아가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알기로는 ‘거의 없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아직 어리다.” 아니 “아직 어리다”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결혼하기 위한 ‘조건’들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분명 그들은 ‘과년’한 나이지만, 그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가 요구하는 결혼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그 나이를 훌쩍 지나 거반 서른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10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이 갖추어야 할 결혼의 조건들이란 무엇일까?

  우선 고등학교를 마쳐야 할 터이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을 해야 한다. 남자라면 한 2년간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어림잡아 남자는 6년 이상, 여자는 4년 이상을 대학에서 허비하고, 평균 혼인 연령에 이를 때까지 3~4년을 다른 조건들을 채우기 위해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조건들이라는 것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우선은 직장을 갖는 것이다. 직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몇 년간은 돈을 모아야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에 ‘손질’을 가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허비되는 시간들 동안 그들은 ‘조건’을 채우기 위해 여념이 없다. 이것은 단지 개개인들의 필요에 따른 것일 뿐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또한 ‘88만원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우석훈의 생각이기도 하다. 우석훈은 󰡔88만원세대󰡕란 책의 도입에서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를 이야기한다. 우석훈에 의하면 “적어도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16세 이후의 청소년들이 동거권의 형태로 별도의 가족을 꾸릴 수 있는 권리들은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확보되어 있다.” 심지어 일본도 우리나라보다는 낫다. “동거를 하나의 권리로 생각한다면, OECD 국가 중에서 18세에서 20세의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동거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석훈은 이것을 “크게 보면 경제 시스템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조금 더 본격적으로 얘기를 짚어보자면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의 하나”라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자연만이 아니라 10대들에게 가야할 것들을 너무 많이 당겨쓰고 있는 일종의 세대 착취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10대들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회를 기성세대가 독점하고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독특한 경제 구조의 문제이면서, 10대들의 당연한 권리에 대한 일종의 억압이고 착취라는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착취 구조를 조직적으로 형성한다. 그것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대학, 군대, 사회 경제 구조를 통해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우석훈이 ‘88만원세대’라고 부르는 현재의 20대들에게 이것은 결혼까지도 “상상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우석훈, 앞의 책, pp.25~72. 참조.)

  이것은 청소년들의 왜곡된 성의식을 형성하는 큰 문제을 낳는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 <청춘>(영화 <청춘>, 감독 : 곽지균, 주연 : 김래원 ․ 김정현, 2000.)이다. 성에 대한 자연스런 호기심이 억압된 구조 속에서 주인공들은 남몰래 첫경험을 하고, 내내 부끄러워 한다. 그들의 첫경험은 이 사회에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급기야 여주인공의 자살로 이어진다. 이것은 남자주인공의 오랜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사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 방황하게 된다. 이것이 비록 청소년들의 성의식이 어긋나고 왜곡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형성하고 구조화 한 것은 우석훈이 말하는 사회 ․ 경제 구조의 억압과 착취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조건을 갖추고 준비하는 시간이 단지 허송세월만은 아니겠지만, 그 기간을 보내면서 애써 조건이란 것을 갖추고 뒤늦은 결혼을 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구조는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영화 <청춘>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 문제들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결혼이 노후화되면서 필자가 “이상 인간 현상”이라고까지 규정할 만큼 인류 공멸의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과언일까?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 ‘춘향이와 이몽룡’을 위하여

  결혼의 노후화는 지금까지 살펴 본 다양한 사회의 매커니즘에 의해 조장되어 온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시초로 전 지구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는 그러한 매커니즘의 근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화 정밀화 되면서 그에 맞는 노동력 확보가 절실해 진다. 이는 고학력 전문 인력을 이 사회가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은 이것을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자연히 그 조건들을 갖추어 가기 위해 결혼은 ‘과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늦추어진다. 그것이 그리 대수로운 문제인가? 사회가 변화에 따라 결혼 연령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게 무슨 문제될 것이 이겠는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것이 정말 “대수로운 문제”인 것을. 결혼의 노후화가 가져오는 문제는 사실 이 사회가 가지는 모든 문제들과 관계된다. 다만 어느 것이 닭이고, 달걀이냐의 물음이 있을 따름이다.

  우선, 결혼의 노후화는 인간의 성장 과정에 있어,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방해한다. ‘과년’한 나이는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성장 과정에 가장 적합하게 정해진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이 열여섯이 되면 월경을 하고, 아이를 낳기에 충분하며, 성적 호기심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것을 근 10년을 넘게 유예한다.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 자연스런 본능의 권리를 기성세대가 착취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등의 가장 직접적 원인이 바로 결혼의 노후화다. 예전에는 한 세대의 간격이 20년을 넘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30년을 훌쩍 넘는다. 남자가 평균 서른 살에 결혼을 하는 사회에서, 결혼을 하고 다음 세대를 낳기까지는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한 것이니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10년의 세월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출산의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고, 출산률이 저하되는 만큼 고령화는 촉진된다.

  이것은 꼬리를 물고, 이 사회의 반윤리, 부도덕, 비인간화 현상을 야기한다. 근대 산업화를 원인으로 꼽는 핵가족화 현상은, 그 사이에 결혼의 노후화를 매개로 가진다. 3세대가 함께 살 수 있던 예전의 사회에서 2세대도 공존하기 힘들어진 것은 서른이 넘어 결혼이 가능한 오늘날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자연스럽게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이어지고, 이것은 비인간적 행태들을 유도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정상적 성관계 및 성매매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홍두승이 경북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전북대, 한림대 등 6개 대학교수팀과 함께 2006년 6월 이들 대학의 학생 554명을 상대로 실시한 ‘2006년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은 31.2%”로 나타났다. 1994년에 비해 17%이상 상승한 수치다. 이들의 성관계 대상자는 남학생의 경우 애인이 70.4%, 성매매 종사자가 31.6%로 나타났다.(강준만, 󰡔한국 생활문화 사전󰡕, 인물과사상사, 2006, p.314.)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성매매의 문제점이다. 이 조사가 대학생들에 국한된 것이지만, 이것을 결혼하지 않고 있는 20대 전반에 확대 적용해보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성매매 종사자를 대상으로 그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는 남자의 수치는 높아질 것이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결혼의 노후화는 성매매를 조장하고 있다고 하면 정말 헛소리일까? 한편, 애인을 대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경우에도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면 성적 에너지의 낭비인 셈이다. 애인과의 성관계가 보다 발전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이것은 또한 무분별한 낙태나 성적 문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 외에도,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 문제들과 결혼의 노후화는 유기적으로 관련된다. 아직도 이것이 ‘과언’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쯤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적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다. 결혼의 노후화를 이대로 두어서는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보다도 먼저 이것으로 인류가 공멸을 자초할 지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두렵다.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금 ‘과년’의 나이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방법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화제가 된 인물은 대통령 당선자만이 아니었다. 이름하여 ‘허본좌’. 이색적이고 허무맹랑한 공약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최근 구속된 허경영이다. 여기서 그를 언급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이색 공약 중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은 대목 때문이다. 그는 결혼을 하면 남녀 각각 5,000만원씩 1억을 주고 출산을 하면 3,000만원을 준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사람들은 이 공약이 실현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쏠깃해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그다지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보진 않는다.

  허경영의 이 공약은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결혼 노후화의 대책으로 적절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공약처럼 결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를 주는 것보다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 우석훈이 󰡔88만원세대󰡕에서 말하는 유럽 선진국들의 지원책들을 배워오는 것도 좋겠다. 우석훈의 말대로 우리의 10대, 20대는 세대 간 착취로 인해 너무 가난하지 않은가? 그들이 결혼을 꿈꾸기에는 말이다.

  이러한 경제적 지원 외에 더욱 필요한 것은, 결혼에 대한 사회의 인식 전반을 뜯어 고치는 것이다. 경제적 논리, 자본주의의 악질 매커니즘으로 형성된 왜곡된 결혼관이 전제된 상태에서 아무리 지원을 해봐도 결혼 노후화를 막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이니까. 아무튼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한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또한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의 노후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이 시대에 ‘춘향이와 이몽룡’ 커플은 축복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가 문제다. 이 문제는 계속 말하지만, 이상 기후 현상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시급하고도 심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도면밀하지 못하고, 체계와 두서없이, 말 그대로 엉성하게나마 살펴본 것은 그 때문이다. 2006년 평균 초혼 연령 남자 30.9세, 여자 27.8세의 수치를 차츰차츰이 아닌 시급하게 낮추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이 결혼의 노후화, 즉 이상 인간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이 시대 ‘춘향이와 이몽룡’을 위하여 이 글을 바친다.




 
 
마늘빵 2009-12-11 16:00   댓글달기 | URL
결론. 멜기님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

순오기 2010-03-21 17:06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안부가 궁금한 봄이다~
혹시 청첩이라도 올라 올까 싶어 기웃거리는 봄!^^

근황이 궁금한 팬심을 외면한 멜기님은 반성하라!!

멜기세덱 2010-03-22 09:37   URL
곧, 좋은 소식으로 전함이 옳겠으나....요원한지라....ㅎㅎ

순오기 2010-03-24 00:21   URL
무소식이 희소식...^^
 
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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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군생활 당시(2001~2003)에도 잘 부르지 않았던 군가 중에 '진짜 사나이'란 노래가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대중 군가'라고나 할까? 가슴아프게도 '사나이'는 할 일이 많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고 부모형제를 지키는 사나이가 바로 '진짜 사나이'라는 것인데, 이는 총과 칼로 적과 싸워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경제를 지키고 부모 자식을 먹여 살려 지키는 것까지를 포괄한다. 재미삼아 몇 절을 더 불러보자. 

   
  입으로만 큰소리 쳐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겨레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 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 고향에 돌아갈 땐 농군의 용사다.

겉으로만 잘난 체 해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진짜 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 있는 군복 입고 휴가 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 생활 알리고 오리라.
 
   

2절과 3절이다. 이게 언제적 노래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농군의 용사"란 노랫말을 봤을때 한참 전에 지어진 노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산업의 용사"쯤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다. 다를 건 없다는 뜻이다. 군 생활이 암만 새로워져도 그게 부럽다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3절은 처량하다. 아직도 휴가 간다고 군복에 세 줄 잡고, 전투화에 불광내는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여하간 '진짜 사나이'가 나라 지키고 부모 형제 지키는 나라의 일꾼이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진짜 사나이들이 너무 많아져서인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우리는 '멋진 사나이'가 되고자 한다. 역시 출처는 군대일까? 특히 해병대에서는 '멋진 사나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사랑은 뜨겁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명령에는 호랑이 대화는 정답게 (대화는 정답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적에 맞서 싸움을 잘하고 2번을 강력하게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로 여인에 대한 사랑은 '뜨겁게'하는 사나이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멋진 사나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여기서의 '싸움'은 적과의 싸움, 나아가 나라 경제의 최전선에서 벌이는 산업 전쟁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간혹 이를 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지들이 천하무적인 줄 알고 빨간 옷 입고 설치는 이들이 문제가 되기는 한다. 

군대에서도 시대의 발전상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운데, 우렁찬 목소리가 상징인 '진짜 사나이'는 그것도 때와 장소와 상대(특히 뜨겁게 사랑해야할 여인)를 가려 정다움을 내보여야 '멋진 사나이'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나이라야 '남성 넘버원'이다. 

다들 한 물 간 사나이 타령이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재된 사나이스러움이다. 나라 경제의 대들보로서 사나이, 곧 남성은 전투력을 배가시켜야 하고, 이는 나라를 지키고 내 부모와 처 자식을 지키는 원칙이다. 곧 경제력 있는 남성이 '진짜 사나이'고 여기서 좀 더 부드럽게 그러나 사랑은 뜨겁게 하는 남성이 '멋진 사나이'라는 사실, 이는 진리 아니면 자연접칙이다. 

대세는 꽃미남이라고? 짐승 아이돌이 꽃미남 얼굴에 근육질을 자랑하며 설쳐대지만, 얘네들한테서 돈을 빼놓으면 그냥 루저일 따름이다. 얼굴 파먹고 사는 것 아니고, 근육 뜯어먹고 사는 것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은가? 요즘 대부분의 매체들이 연예인들을 내세워 근육질 꽃미남을 남성의 이상형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지극히 상업적 노림의 일환일 뿐이다. 교묘한 경제력의 다른 이름이라고나 할까? 노골적으로 "돈 있냐"를 물어보기는 쑥스러우니, 우회하고 있을 뿐이다. 꽃미남은 타고나는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근육질은 솔찮이 돈을 들여야 하니 말이다. 

각설하고, 박노자 교수의 근간 중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책 한 권을 소개해야 하겠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란 책이다.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1890~190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이상적 남성성'을 추적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와 문헌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을 통해서 근대와 함께 어떠한 남성성이 요구되어지고 만들어졌는지를 끄집어낸다. 이를 통해 현대에 이어지는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계보 캐내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남성성-남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이상'을 "생물학적인 남성다움을 둘러싼 사회적 구성물, 복잡한 권력관계의 망에 의해 지탱되고 지배적인 문화의 틀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하면서 '남성다움의 담론'의 역사를 추적한다. 

1890~1900년대 세계 제국 열강의 위협과 왕조의 존망의 위기 앞에서 서구 근대적 남성성에 대한 지향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었는지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전 시기의 유교주의에 입각했던 지배계층의 전통적 이상적 남성성, 이와는 다른 측면을 보이는 일반 서민의 이상적 남성성과 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근대화와 함께 형성된 이상적 남성성은 국가에 대한 자기희생적 정신을 바탕으로한 정신적인 힘(전장에서 죽을 태세)과 신체적인 힘(무쇠골격, 팔다리 민활)을 모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부국강병을 위한 남성성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0~1900년대 이루어진 이상적 남성성의 민족주의적 재구축은, 대체로 이 같은 가치들을 차용하여 왕조국가를 "민족/국민"으로 재정의하고 이전에 효라는 관념이 차지했던 최상의 지위를 "민족/국민"에 부여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손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접목을 통해 이상적 남성성 이데올로기의 성립을 예리하고 밝혀내고 있다. 

이는 꾸준히 그 논리와 수사를 변용하면서 지속되는데, 나라 존망의 위기에서 대두되었던 강인한 체력의 훈련된 민족 전사라는 이상형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산업 전사로서 모습만을 바꾸게 된다. 조금씩의 변화는 있지만, 앞서 살폈던 대중군가(?)에서 보이듯이 오늘날의 진짜 사나이, 멋진 사나이, 스러움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상적 남성성의 요구는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 한국의 남성성 '경제화'된 남성성으로 규정한다. "학력 자본의 소유자"와 "경제 능력의 소유자"가 이상적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학력과 경제력은 오늘날 거의 등가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선 이는 곧 '경제력'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할 때, 역시나 오늘날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경제력에 다름 아닌 게 되었다. 경제력 하에서 꽃미남도 되고 근육질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뿐이다. 

씁슬한 현실이다. 박노자 교수는 미래의 이상적 남성성으로 다소 엉뚱한 제안을 내놓는다. "바람직한 씩씩한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돌봄을 할 줄 아는 남성"이어야 한다는데, 나는 다소간 뚱~하다가도, 이내 수긍이 간다. "적극적인 배려의 생활은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정기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배려는 과거의 근대적 이상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발전적 계승이다."라며 자기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군. 이를 내식대로 해석하면 이상적 남성성도 이상적 여성성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이상적 인간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여성만큼이나 남성도 피곤하고 힘겹다. 학력과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경제력자 천하지대본은 이 시대의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잖은가? 이 시대의 진정한 루저는 180이 안되는 키의 남성이 아니라,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지 못하는 남성이다. 그녀는 다만 돌려 말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상적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남성들이여 인간이 되자. ㅎㅎ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고한 이래, 혹자는 '문학의 위기'를 경솔한듯 한 누군가는 '문학의 죽음'을 말하며 애통해했다. 어쩌면 21세기는 모든 것의 '종언'을 고하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종언을 기점으로 이런저런 종언과 죽음에 대한 선언이 늘어간 것 같다. 그것은 사멸을 의미하기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학의 죽음은 문학의 사멸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것인가? 

오늘날 문학이 죽었다고 운운하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문학이 죽었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혹여 오늘날 문학이라는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자신들이 죽게 생겨서 흔히 즐기는 문학적 기교로서의 표현이 아닐까? 어떤이는 거창해야할 문학이 심심풀이 땅콩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현실을 애통해하며,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이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뚝딱하고 생기지 않은 이상에, '문학'이라고 하는 실체는 변해온 것이 사실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같은 문학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선 시대에서 김시습의 조선 최초의 한문소설은 '문학'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문학이지 못한 다종다양의 잡다한 글들이 그 시기에는 문학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문학의 범주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듯 문학의 변해만 가는 것인데, 변하는 것에도 죽음은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 내 서가에 꽂혀있는 그 문학'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은 살아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글자가 남아있는 한,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표기형식이 남아 있는한 문학은 그 말의 표면적 의미가 가지는 그대로 여전히 변화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