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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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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 일상의 삶과 무관하게 저 하늘의 별만을 보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지적하듯 철학은 한가한 일이나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떠받드는 현실 감각 역시 그들 자신을 빈민으로 양산하는 현실에 대한 추인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노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거창한 물음에 역시나 거창하게 혹은 선문답처럼 대답을 내어놓을 이들은 역시나 철학자들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처럼 분위기 잡고 썰을 풀어나가면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이 물음.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플라톤이 어쩌고, 공자, 맹자, 노자 타령을 늘어놓아야 왠지 있어보이는 듯한 느낌. 어느 순간에 우리는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욕 아닌 욕을 듣게 마련이다. '철학하고 앉아 있네' 이것은 과연 욕인가? 역시나 여기에 담긴 의미는 쓸데없는 헛소리를 짓거리는 이들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나름 문학에 종사하는 나에게 문학 또한 이 철학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가 어쩌고 소설이 어쩌고, 시를 쓰고 자빠졌고, 소설쓰고 자빠졌네는 욕에 다름 아닌 현실. 결국 여기에는 '불필요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 일상과는 저멀리 떨어져있어 하등의 쓸모를 갖지 못하는 현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미개하고 무식하여 그 쓸모를 알지 못하고 멀리하고 있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무식한 우리들의 탓일까?

 

고병권은 이 책에서 이런 물음에 답하려 한 듯 하다. 무식의 하녀만의 탓이 아니라는 다정한 대답이 나온다. 일종의 양비론을 펴고 있다. 일상을 저버리 철학과 철학자도 나쁘고, 철학을 버리고 사는 일상의 하녀도 나쁘다. 일상과 철학의 조화를 바라고 추구하는 듯하다. 그래! 좋게 보면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일상의 철학, 이름하여 실용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고병권의 의견에 일부분 반대한다. 어찌 하녀를 탓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철학자를 탓해야 옳다. 그들이 남겨놓은, 고병권의 말대로 일상을 저버린 철학을 탓해야한다. 그들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쓸모 없음으로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에게 인식되었고, 괜한 소리를 짓거리면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수모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일상을 포용한 철학, 일상을 변화시키는 철학을 철학자들이 먼저 내어놓는다면,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은 어느 순간에 모두다 이 철학을 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왜? 이 철학이 우리 삶에 이렇게 필요하니 말이다.

 

고병권은 <철학자와 하녀>에서 이러한 일상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일상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의 장소에서 발견한 철학, 저 높은 곳에서의 고담준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짧게나마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짧막한 글에서 느끼는 바가 많다. 내 머리속에 명쾌함을 심어주는 표현도, 금과옥조같인 메모해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글귀도 많다.

 

그러나 고병권의 이 글은 우리 일상에 복무하는 철학일까? 과연 실용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무지의 하녀들이 이 글을 읽고 철학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보는 일상은, 그가 겪은 경험은, 그가 돌아본 세계는 아마도 대다수의 하녀들이 보지 못한 곳, 가지 못한 곳, 겪지 못한 경험일 뿐이다. 더 낮은 세계로 임해야 하지 싶다. 별은 3개 반 정도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반개는 없어서 인심쓰고 4개를 준다. 그가 낮은 세계의 철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별 반개를 더한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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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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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야 할 것은 따져 물어야 한다.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신과 반목과 거짓의 병폐가 넘치지 않은가? 흔히 우리에게 독일은 달랐다. 독일은 아무래도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물었다고 알았다. 하지만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을 보면 여전히 제대로 묻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단호히 따져 묻기 어려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라는 것이 그런 종류의 문제다.

 

이본 셰라트는 히틀러의 범죄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추적하여 아직 그들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 중점에 하이데거와 슈미트가 있다. 이본 셰라트는 이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듯 하다. 하이데거가 히틀러 정권에 부역했다는 의심은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혐의가 어느 정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하이데거가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본 셰라트는 하이데거의 과오가 큰데 반해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었는가를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이본 셰라트가 들고 있는 하이데거의 부역의 증거들은 그의 편지들, 그의 글들, 그의 침묵들(히틀러의 반인권적 반학문적 반철학적 박해들에 대한)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철학이 어떻게 히틀러 정권에 이용되었는지를 묻고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하이데거의 과오에 대한 처벌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부관참시라도 해야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본 셰라트가 오늘날 이 히틀러의 부역자 하이데거가 얻은 철학적 지성으로서의 전세계적 명성이 못마땅해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남긴 그의 철학사상을 폐기해야 할까?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적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또한 히틀러의 방법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본 셰라트가 더 정확히 따져 물어야 했다고 본다. 이 책의 부제처럼 말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히틀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고, 이용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져서 밝혀야 했다고 본다.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 그의 철학은 자연스레 폐기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철학은 철학대로 두어야만 했다. 이본 셰라트가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오점은 그의 철학이 아니라 처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의 슈퍼맨'이란 칭호가 하이데거에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해켈은 범유럽 차원의 '일원론자 동맹(Monist League)을 결성하고 인간이 생물학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강연했다. 인종의 순수성에 대한 해켈의 집착은 갈수록 커졌으며 아리안 인종의 힘을 보호하기 우해 우생학을 제시했다. 생물학을 따르지 않는 사회는 약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해켈은 역설했다. 그는 아픈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을 쓰는 것은 자연선택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층민, 병자, 장애인, 걸인, 부랑자, 범죄자에게는 현대의학과 번식할 권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들 약자는 인간을 오염시키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따라서 해켈은 대량 안락사를 주장했다.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고통 없고 효과 빠른 독약에 의해 완수되어야 한다."(96~7쪽)

 

해켈의 이 말도 안되는 우생학은 "훗날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전제"가 되었다. 오늘날 이 우생학은 폐기되었다. 해켈의 사상은 히틀러의 인종청소, 유대인 박해에 핵심 전제가 되고 그것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켈과 그의 사상의 히틀러와 함께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가의 사상 또한 그러한가? 그것에 대한, 즉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문제점을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지는 못한 듯 하다.

 

이 책에서 읽은 만한 대목은 차라리 제2부에 묶인 '히틀러의 적들'이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등 오늘날 그 이름도 찬란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오히려 더 빠져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앞부분을 제외하고 '히틀러의 적들'이란 제목으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자료를 보강하여 펴내는 것이 더욱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들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이 아닐까? 반어적, 역설적 의미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강만준이 생각났다. 강만준의 책만큼이나 주가 많이 달려있다. 다양한 자료를 찾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달리말하면 이본 셰라트가 하이데가 등의 철학적 문제, 즉 그의 철학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논박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히틀러의 적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돋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다큐로서 의미가 있다. TV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지면 더욱 좋았을 뻔 했다. 소설적 묘사도 제1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제2부와 어울려 보다 감동적으로 읽히게 만들 뿐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더욱 아쉬운 것은, 아니 부러운 것은 독일의 문제에서 아직 제대로 따져 묻지 못한 것이 철학의 문제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욱 한심해 보이기만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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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7월이다. 더워 죽는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번 여름에는 어딘가로 꼭 놀러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마음이 무뎌졌는지, '누구와'를 크게 고려치 않는다. 고려하다 못 가느니, 혼자라도 가자! 혼자가 점점 체질이 되어가는가 보다. 심각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올 여름 무더위 또한 혼자 보내야 할 터이니, 준비를 해야지!

 

7월의 관심 꾸러미를 챙겨보자. 6월 출간 책들을 살펴보니, 날이 더워 그런지 새로 나오는 책들도 좀 줄어든 듯 하다.

 

인문>에세이

우에노 지즈코, <독신의 오후>

 

이제 나도 그 오후를 준비해야할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한낮이라고 믿는다. 독신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까? 괜찮을 수도 있고, 안 괜찮을 수도 있다. 결국엔 돈이 중요하게 작용할지 모른다. 이 책은 어차저차 독신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들이 찌질하지 않게 살려면 어케해야 하는지를 조언하는 책인가보다. 미리미리 읽어 두어야 할까?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여자라는 점이다. 독신 남성의 체험담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일 줄 알았는데, 감히 여자라니? 생각해보면, 여성의 조언이 더욱 절실한 때가 독신의 오후쯤이 아닐까 싶다. 정말! 미리미리 준비해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확확 들기도 한다.

 

 

과학>생명과학

서민 외, <기생>

 

우리시대 기생충의 대가! 서민 교수. 이분 덕이 이제 이 더럽기만한 기생충의 공론의 장에 당당히 나서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다! 이 기생충만도 못한 인간들아! 독신남이란 정말이지 기생충 취급을 받기 일수였는데, 기생충의 참모습처럼 멋진 독신남이 되어야지! 서민 교수는 그간 기생충과 관련한 책들을 많이 쏟아냈는데, 이 책에도 참여한 듯 싶다. 이래저래 알게된 분이라 티비에서 볼 수록 정감이 가고, 기생충에 관심도 늘고, 워낙에 평소 이 사회에 기생하는 편이라, 제대로 기생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있겠다.

 

 

 

역사>문화사

데이비드 골드블라트, <축구의 세계사>

 

월드컵이 한창이다. 1무 2패의 치욕적인 성적 탓에 엿사탕 세계를 받은 우리 국가대표팀이 안쓰럽다. 스페인도 이탈리아도 포르투갈도 잉글랜드도 떨어진 마당이 우리가 떨어진게 그닥 이상할 게 없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이 이상한 거? 근데, 역시나 우리팀은 실력이 모자랐다. 그래도 요새 수준 높은 16강전을 보며 밤잠을 설치고 있다. 독신이라 가능한거? 불가능할 건 없지만 독신이 아니라면 그리 자유롭게 보고싶은 축구경기를 본다는 건 어려울 것이다. 독신을 위한 스포츠! 축구! 그래서 축구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알고본다면 더욱 재밌지 않겠나? 축구의 역사를 파헤쳐봄이 어떠한가? 근데! 가격이 ㅎㄷㄷ하다.

 

과학>과학사

에드워드 J. 라슨, <신들을 위한 여름>

 

남자는 결혼을 위해 진화해 왔는지 모른다. 사회적 진화가 성립한다면 일단 사회적으로는 완벽히 진화했다. 그러나 난 아직 진화가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 독신의 오후로 들어가기 전에 완벽한 독신남으로 진화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은 그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책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법정 논쟁을 소설처럼 들려주고 있다. 오늘날에는 진화론이 자명하게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여전히 똘아이들은 있는 법이다. 어찌하였든, 난 진화를 믿는다. 그래서 오늘부터 독신남으로 진화해볼까나? 흠흠! 일단 더위 안타는 인간동물로 먼저 진화좀 해보자...아구 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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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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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 왠지 이 이름은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의 직업과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 관련 책들을 얼핏얼핏보면서 이 이름을 들어서일 수도 있고, 고생물학자들은 아무래도 어느 굴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만 같아서 일수도 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그의 책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거대한 저작이다. 무려 800쪽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다.(이쯤되면 양장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견을 난 가지고 있다.) 내용도 나로서는 참 거대하게 느껴진다. 어느 작은 생물에서부터 공룡, 저 멀리 우주에까지 이른다.(고백하건대, 나는 이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시간도 없긴 했지만 그리 열심히 읽지도 않았다. 중반 이후부터는 선별적으로 읽긴 했지만, 그래도 3/4은 읽은 듯 하다. 점 하나까지 다 읽어야 리뷰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사실에 그다지 불편해 하시지들은 않길...) 그러나 굴드는 이 책을 대중적이라고 역설한다.(내가 분명 대중 가운데 하나라면 이 책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굴드의 대중에는 아마도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영광스러운 지적 전통인 알기 쉬운 과학을 되살리는 작업에 매진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 규칙은 간단하다. 절대 개념적 풍부함을 손상기키지 않을 것. 모호하거나 모르는 부분을 건너뛰지 않을 것. 물론 전문용어를 쓰지 않되, 그렇다고 필요한 개념을 생략하지 않을 것(개념적 복잡성이 일상 언어로 전달될 수 있도록). 현재 미국에서 이런 양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는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고 누가 아닌지 식별해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프란체스코와 갈릴레이의 인문학적 전통을 꿋꿋이 주장해나가야 하며, 핵심 요약이나 연출 사진과 같은 작금의 설득 이데올로기에, 즉 미국의 또 하나의 낡은 전통(반지성주의의 어두운 면, 파시즘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려 없는 감성주의에 대한 호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12~!#쪽)

 

이렇게 과학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쓰기를 천명한 저자는 책을 읽고야 알게 되었지만, 십수년간을 그것을 실천하고 실행해 왔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는 세계적인 명사의 반열에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스스로 제시한 규칙을 이 책이 준수하고 있다고 판단할 능력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이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중을 대상으로한 대중적 글이라고 보여지는데, 미국의 대중에 해당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의 규칙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준수되었는지를 가늠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그 규칙들이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와 비슷한 분야에 관해 읽은, 나에게 있어 가장 대중적인 책은 전중환이 쓴 <오래된 연장통>이란 책이라고 생각한다.(절대 굴드보다 전중환이 위대하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좀더 확장하면 굴드의 책보다 전중환의 책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는 더욱 대중적일 터이다. 나에게 굴드의 책(한국어 본역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이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해서 굴드를 탓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한, 번역자와 출판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원서를 읽을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나이지만, 이 책이 정확한 번역일 수는 있어도 한국어로써의 잘된 번역은 아닐 듯 싶다.(내 생각일 뿐이다.)

 

무작위로 이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다시 말해서, 키위의 알은 결코 비정상적으로 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집이 줄어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장은 전혀 같지 않다. 오래된 농담과 달리, 우리는 뚱뚱한 사람이 몸무게 때문에 키가 작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162쪽)

 

여기서 '오래된 농담'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 오래된 농담을 공유하지 못했기에 이 대목에서 조금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과학적 지식의 부족함도 원인이겠지만, 굴드의 대중적 글쓰기가 나에게는 공유하지 못한 문화적 한계 때문에 전혀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간극을 번역자 또는 편집자가 채워넣어야 하지 않았을까? 번역에 있어서 대부분 직역한 부분이 많은 것 같고, 비문에 해당되는 문장들도 있는 듯 해서 가독성이 많이 떨어졌다. 첫 에세이부터 읽어가면서 나는 굴드의 비유와 예들을 거의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나에게는 이 책이 담고있는 진화생물학적, 고생물학적 지식의 설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겠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굴드의 논법은 미국인들에게 꽤나 대중적이었을 듯 싶다. 흥미로운 것은 골드가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방법들이다. 잡다한 이야기,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소재들을 가져와 이런저런,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내가 공유하지 못하는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골드는 꽤나 출중한 작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N. S. 셰일러와 윌리엄 제임스에 대한 21번 에세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21번 에세이를 읽어야 햇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이 에세이가 도입부분 만큼은 아주 탁월하다고 느꼈다. 아이들 문화에서 오는 어휘의 변천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그로부터 한참을 흘러 본연의 주제로 들어가는 굴드식 어법이 흥미있었다. 거기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 중에서도 <7부 지적 전기 - 생물학자>에 실린 21~23번 에세이와 <8부 진화와 창조>에 담긴 에세이들, 그리고 <9부 숫자와 확률>에서 야구와 연관된 엣세이를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논쟁은 승리자가 뻔한 싸움임에도 논쟁의 과정은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 오래된 역사를 전해주는 굴드의 이야기에 빠져 단숨에 읽어나갔다.(위에서 언급했던 불편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 굴드는 일관되게 필연이 아니라 우연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자신들의 역할만을 다 하면 된다는 점, 진화론이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런 점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의의가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내 능력의 부족함일터이다. 브론토사우루스를 응원하는 스티븐 제이 굴드와 더불어 브론토사우루스가 제 이름을 수성 혹은 되찾기를 바란다. 내가 이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첵임만은 아니니, 힘내자 메르키세데크스!!(내 아이디 멜기세덱을 펼쳐읽으면 비슷해질 듯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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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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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치고, 아니 배웠다는 사람치고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이순신 등등의 급은 아닐지 몰라도 그 아래 등급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인 중의 한 분이 터이다. 정약용에 대한 서적들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이 잔뜩 있다. 나는 정민 선생이 쓴 <다산성생 지식경영법>이란 책과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보유하고 있고, <목민심서>란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유명하신 분의 '평전'이 아직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다산은 학문 분야가 넓고 광범위했을 뿐만 아니라 해박하고 정밀하며 전문성이 높고 치밀하여 그에 대해 정확하게 정리하고 분석하여 평가를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 것도 사실이다. 다산 서세 178년이 지났고, <여유당전서>가 간행된 지 76년이 되었는데, 본격적인 다산의 평전이 출간되지 못했음은 역시 이 나라 학계가 지적받을 사안의 하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느 누구도 선뜻 착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14쪽)

그렇다.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감히 누가 평가하겠는가? 단군 평전을 못봤고, 이성계나 이순신, 세종대왕 평전이 견문이 적은 탓으로 보질 못했다. 단군은 자료가 부족할 탓을 테고, 다른 분들은 너무 뛰어나서 평가의 칼을 들이대기 겁이 나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설프게 들이댔다가는 본전도 못찾고 욕만 잔뜻 먹기 딱 좋다. 대단한 각오와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고, 적확하게 평가할 능력 또한 갖추어야 하기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평전을 쓰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해도 평전이 하나 없는건 그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우리 무지대중들에 대한 애민정신의 부족일 수도 있는 일이라, 우리 학계는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을 박석무가 맡았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전을 쓰려면 잘 써야 했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 쓰기, 쉬운 작업이 아닌, 지난한 일이다. '평전'의 사전적 의미는 '평론을 곁들인 전기'이다. 어떤 인물의 인생과 학문에 대한 일대기인 전기에 가치 판단인 '평론'을 곁들이는 일은 누구의 경우에도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인물이고 탁월한 학자인 데다 삶 또한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하여 그 일생을 정리해 내고 평가를 내리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어서 '지난'한 일이라고 했다.(13쪽)

평가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평전을 쓰면서 평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과연 정약용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리려 하기에 이렇게 거듭 엄살을 부리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일단의 저자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리라-생각했다.

 

서문격인 '들어가면서'로 책을 시작하는데 서문에 정약용의 일생과 저술 등을 일목요연 잘 정리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서는 정약용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고자 순행적 구성이 아닌 역순행적 구성, 그러니까 시간적 재구성을 통해 약간의 시간적 변화를 주어 정약용의 젊은 시기 암행어사로서의 활약상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 흥미있는 구성 전략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흥미롭게 읽어가면서, 정약용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부분을 재확인하기도 하고, 잘 몰랐던 세세한 일화들에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터에, 불현듯 정약용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언제 나올까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평가에 주목하면서 이 평전을 읽어가는데, 요약하자면, 아니 요약할 필요도 없이, 책 표지에 있는 그대로 뿐이었다.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이 외의 어떤 평가를 찾아 볼 수 있었는지 다른 분들께 물어보고 싶다.

 

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먼저 선행연구를 정리하는 것이 기본인데, 저자도 서문에서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칭찬의 평가만 많아 비판한 내용을 많이 찾지 못하는 아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비판점을 찾아 제시했어야 했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만의 긍정적 평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만 재삼재사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다산 이전이나 이후의 오랜 시가 동안 고을의 수령인 목민관은 고을의 주인이고 권력자로 여겨져 수령의 다른 호칭으로 '성주'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니, 그런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한 번쯤 되짚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다산 또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논리로 실제 행정을 폈으면서도, 역사의 발전 주체를 국민이 아닌 국왕에게 두고 국왕이 선정을 펼쳐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다산도 인간적 한계를 보였으며 시대적 제약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234쪽)

 

저자가 제시한 정약용의 한계, 과연 타당한가?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당대를 평가한 것이고, 그 시대 모두에게 적용될 한계일 터이다. 정약용을 이 시대 민주주의의 선각자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인데, 민주주의의 잣대를 정약용에게 적용해서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평가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정약용의 민본은 현대의 민주와 그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에 대한 아쉬움과 애석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산은 몇백 년 전에 이미 순수한 우리 한글로 그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조를 남겨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여실히 증명했는데 고산의 6대 외손이던 다산은 훨씬 뒤의 인물임에도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는 까닭이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보다 훨씬 뒤의 후손으로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계승하지 않은 점은 유교주의자의 한계로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 다산의 한문시들이 내용 면에서야 송강이나 고산에 뒤지지 않은 점이 많지만, 표현의 수단으로 한자만을 사용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시대로 보면 훨씬 진보적이어야 하건만, 후진적인 점은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이 없다. 문학가와 사상가의 차이로도 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 다산의 한계는 숨길 수가 없다.(436쪽)

 

이게 말이 되는가? 다산이 한글 작품을 짓지 않은 것이 후진적이라니? 고산의 자손이니 한문이 아닌 한글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건 무슨 논리인지, 고산이나 송강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려면 강호자연을 노래하거나 임금님 찬양을 노래하는 가사나 시조를 정약용이 지었어야 했다는 말인가? 한자만 쓴 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더 연구했어야 했고, 한글을 써야 문학가고 한문을 쓰면 사상가라고 규정할 바에야 아에 규정을 말았어야 했다.

 

다산의 한글을 쓰건 한문을 쓰건 그건 다산의 자유이면서, 도산이나 송강이 한글을 쓴 건 노래로 읊기에 유리하면서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글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에도 사상이 담긴 말은 죄다 한자인걸 모르나? 정약용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내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그런 사회 비판을 통해 백성들의 참상을 위정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핍진하게 시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글보다도 당시에는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해던 것이 아닐까?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당시의 귀한 우리말 표현을 최대한 살려낸 점을 칭찬할 일이지, 한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진적이고 한다면, 이런 어불성설이 또한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법을 전공한 학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 간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대학에서 석좌, 석좌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는 프로필에 나와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은 게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문학적 평가에는 매우 부족한 능력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한글, 한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붙인 해설과 평가는 그저 일반적 수준에 불과하고, '그냥 좋다'식의 평가 뿐이다.

 

다산의 나이 50세이던 1811년에는 평안도 정주 지방에서 지역 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홍경래가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기하였다. 다산은 귀양지에서 이런 소식을 듣고서 민란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전라도민에게 고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했다. 왕조 정권 아래의 백성 입장이던 다산은 그 일에 대해 대처하지 않았어도 크게 탓할 일이 아니었는데, 왕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임을 나타내려는 뜻에서 그런 글을 지었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민중 사관으로 보면 다산 개인의 한계이자 시대적 한계를 드러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는 좋은 집안의 출신인 기득권자였고 상당한 지위의 관료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80쪽)

 

다산이 <창의통문>을 지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해설을 보면, 다산이 백성 입장이었다는 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당시의 다산이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러한 다산의 행위를 설명하고 평가하려면 다산의 저술을 분석하고 다산이 <창의통문>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내야 했다. 민중 사관으로 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저자 말대로라면 홍경래의 난을 보고도 다산은 입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가? 정약용도 양반이고 관리출신이니까 그랬을 거야? 정권에 잘 보여서 유배나 빨리 풀자고? 아니면 잠깐 정신이 나가서?

 

나는 박석무의 이 책이 정약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유일한 책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좀더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 뿐이다. 평전이라고 해서 인물을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탐구, 사상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탐구와 그에 대한 저자의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제대로된 평전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추신

1. 정약용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천주교와의 관련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긴 한데,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 그리하여 천주교에서 벗어난 것은 저자의 판단에 동의하지만, 한번이면 족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러곳에서 천주교 얘기를 하면서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좀 과한 느낌.

2. 평전에서 평가의 내용을 주로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여 채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책 말미에 참고문헌으로 정리는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3.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언제부터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했는지, 왜 그런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책에는 별반 내용이 없어 아쉬웠음.

4. 그외 아쉬움 점은 생략.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하늘바람 2014-06-16 13:27   댓글달기 | URL
아웅 깨갱이어요 덕분에 저도 정약용 공부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