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의 대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5
엘리오 비토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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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편지가 베네치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버지는 세상에 흩어진 우리 다섯 아들 모두에게 똑같이 정확한 말로 편지를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특이한 일이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읽었으며, 아버지의 얼굴, 목소리, 파란 눈, 몸짓을 확인했다. 잠시 동안 나는 아버지가 어느 작은 기차역의 대합실에서, 산카탈로에서 라칼무토까지 선로의 모든 철도원을 위해 '맥베스'를 공연하는 동안, 박수를 치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갔다.-12쪽

"왜 수프가 없어요?"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가 오는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니?"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에요. 어머니는 수프를 해서 드시지 않아요?"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나는 내 생애에서 거의 수프를 먹어본 적이 없다······. 나는 너희들과 너희 아버지를 위해 요리했지만, 내가 먹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겨울에는 청어, 여름에는 구운 고추, 올리브기름, 빵······."
"언제나 그랬어요?"
"물론, 언제나 그랬지. 때로는 올리브 열매, 그리고 돼지고기, 소시지도 먹었지. 돼지를 길렀을 때는 말이다······."-68쪽

"그래, 그랬단다······. 아기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얼굴이 파랗게 변하더구나. 아주 멋진 아기였어. 나는 아기가 질식할까 두려웠지······."
"그때 누군가가 도착했겠군요."
"천만에! 그때는 밤 2시였고, 아무도 오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침대 탁자 위에 있던 물병을 잡았지. 난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고, 그 물병을 네 아버지 머리에 던졌어······."
"맞추었어요?"
"물론, 나는 정확히 맞추지! 나는 정확하게 맞추었고, 그때서야 그 사람은 나를 도와주기로 작정했어. 그래서 나를 도왔고, 아기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밖으로 끄집어냈어. 마치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남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사람이 끄집어 냈다기 보다, 내가 밖으로 밀어낸 편이었지. 그 사람 얼굴은 완전히 피하고 땀 투성이였어······." -81~82쪽

"하나였어! 하나였다고! 왜냐하면 다른 한 번은 실수였고 중요하지 않으니까."
"실수였다고요? 어떻게 실수죠?"
"우리가 메시나에 있을 때, 어느 동료와의 일이었어. 지진이 있었던 다음에······. 간단히 말해 혼란스러운 일이었어. 나는 아주 젊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럴 수가! 그러면 다른 사람하고는요?"
"오! 다른 사람하고는 우연이었어!"-106쪽

"정말로 네 식욕을 돋우었니?"
"왜, 안되나요?"
"오!" 어머니는 소리쳤고 웃었다.
"너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여자야!"
그리고 덧붙였다. "과부도 네 입맛을 돋우었니?"
"물론이지요! 오히려 더······."
"오!" 어머니는 소리쳤다.
어머니는 웃었고 말했다. "네가 그걸 알았더라면, 보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157쪽

"그러니까 자네 친구는, 모욕당한 세상의 고통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군."
"알고 있지." 칼갈이가 말했다.
에제키엘레라는 사내는 간략하게 요약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크고 아름답지만, 많은 모욕을 당했어요. 모두들 각자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모욕당한 세상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세상은 계속해서 모욕을 당하고 있지요."
그는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조그마한 눈은 슬픔 속에 닫혔다가, 생생해지더니 칼갈이를 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친구에게 말했나? 내가 모욕당한 세상의 고통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184쪽

남자는 내 말에도, 어머니의 말에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새하얗고, 무척이나 늙었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깊이 생각에 잠겨 있거나 아니면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자고 있어요?"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니야. 울고 있어. 멍청이."
그리고 덧붙였다. "언제나 그랬단다. 내가 해산할 때 울고 있었지. 그리고 지금도 울고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는 외쳤다. "아니, 어떻게? 그럼 아버지예요?"-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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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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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JC는 인생에 대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육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만큼 늙었지만 깊은 통찰력으로 국가의 기원, 아나키즘, 민주주의, 마키아밸리즘 등 강력한 정치적 견해들을 속삭인다. 참으로 노인네다운 잔소리같고 지루한 글은 그렇게 시작된다.

마키아밸리에 따르면 이렇다. 통치자인 당신의 모든 행동이 도덕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그런 도덕적 시험이 안중에도 없는 적한테 틀림없이 지게 될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속임수와 배반의 기술을 터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는 그것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25쪽)

하지만 책은 상하로 나누어 져서 하단에 전혀 다른 느낌의 경쾌한 속삭임이 시작된다.
어느 날, 동네 세탁실에서 엉덩이가 너무도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보고 푹 빠져버린 로망의 노망!

"하느님, 제가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소서."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이라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철회했다. (16쪽)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이름을 알아 가고, 요새 놀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에세이를 입력하는 일을 좋은 보수로 제안하기에 이르는 작가 JC는 때때로 그녀에게 실망도 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하나둘 씩 알아간다. 

위층에 사는 안야는 순수하고 단순한 타이피스트로서는 조금 실망스럽다. 그녀는 자신의 할당량은 해낸다. 그것은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내가 기대했던 의기상투,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에 대한 센스는 없다. 때때로 그녀가 건네준 원고를 보면 당황스럽다. 가령 이런식이다. 대니얼 디포에 따르면, 진짜 영국인은 'papers and papery'를 싫어한다. 브레즈네프의 장군들은 'somewhere in the urinals'에 앉아 있다. (35쪽)


독일 젊은이들은 항의한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를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살인자라고 무시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이렇다. "당신들이 불행하게도 당신네 조부모의 손자니까. 그리고 당신들에게는 저주가 붙어 있으니까." (61쪽)


그 운명적인 파티 다음 날 아침, 나는 마지막으로 안야를 보았다. 그녀는 사과를 하러 왔다. 그녀는 그날 저녁을 자기들 두 사람이 망쳐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앨런이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표현했다.) 일단 지옥으로 만들면 그를 제지할 방법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지옥으로 만든게 앨런이라면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이 아니라 앨런이 아닌가 싶군요. 의미론적으로 말해서, 사과할 마음 상태가 아닌 사람을 대신해 제대로 사과를 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예요."
내가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나한테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당신에게도 사과하지 않을 그 남자와 같이 살 건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앨런과 나는 서로 떨어져 살려고 해요. 시험적으로 떨어져 보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는 타운스빌에 가서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려고요. 모든 게 잠잠해지면 내 기분이 어떤지 보고 돌아올지 말지 결정할 거예요. 오늘 오후에 비행기로 떠나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군요."
"네, 맞아요.' (187~192쪽)



앨런이 말했다. "그녀는 애원했죠. 그리고 나는 그 애원을 들어줬고요.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비밀을 발설해 버렸네요. 나는 단념하고 그 애원을 들어줬어요.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후안, 내가 그 사람이었어요. 당신을 강탈하려고 했던 문제의 악당이 나란 말이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있는 나의 애인 때문이지요. 달콤하고 달콤한 컨트(cunt)를 가진 나의 귀여운 애인 때문이지요." (194쪽)


"나는 자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아. 자위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거야. 자위는 악기를 연습하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야. 프로이트를 읽은 자네가 어떻게 그처럼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사용하는가? 내가 얘기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랑이며 시적인 사랑이지만 관능적인 차원에서일세. 자네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그는 나를 잘못 판단했다. 내게는 그런 관능적인 차원에서의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일컫는 이 현상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199쪽)



그녀가 천천히 몸을 빼더니 생각에 잠긴 눈으로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를 안고 싶어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말했다. "내가 떠나면 우리가 서로를 다시 보지 못할지 모르니까 나를 껴안고 싶으냐고요? 그래서 내가 어떠했는지를 나중에 잊지 않도록 말이죠." 그녀는 나를 향해 팔을 완전히 뻗지 않고 옆구리에서 반쯤만 들어 올렸다. 그래서 그 팔에 안기려면 한 발짝 떼야 했다. (209쪽)



처음에 그녀(엉덩이)에게 빠진 것은 노인 JC 였으나 차츰 그 노인의 매력에 빠져 가는 안야의 이야기...
20대 안야와 사랑하며 동거하지만 80대 노인에게 질투하고 통제력을 잃어 가는 40대의 앨런...

읽을수록 흥미진진한 그의 견해, 그의 독백,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
3단의 소설로, 모든 독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읽어가게 될 흥미로운 편집...
세로로 길쭉한 판형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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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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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쯤은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을 독특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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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꽃 창비시선 307
최두석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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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과 무덤


비질이 잘된 융건릉 숲길에
나뭇잎 요람이 깔려 있다
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상수리잎으로 말아
바닥에 떨군 것이다
나는 이 정성들여 만든 요람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까 저어하여
주워서 숲속에 넣어주며 가다가
그냥 발에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다
나뭇잎 요람이 너무 지천인 탓이요.
나의 가벼운 적선을 보는
상수리나무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서이다.
왕릉 지키는 숲을 헤치는 해충을
무엄하게 동정하는 죄를 저지르다니!
무덤 속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해서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의 묘를 쓰기 위해
수원성을 옮긴 정조의
공과를 묻는 나의 상념은 부질없이
숲길을 따라 돌며 칡넝쿨처럼 뻗어가는데
산책이 끝날 즈음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거위벌레도 엄연히
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12쪽

강 건너 산철쭉


이 땅에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강이 어디 있나
이 땅에 이토록 정갈하게
아름다운 풍광이 어디 있나
거듭 감탄하게 하는
영월 동강 어라연에 봄빛 찬란한 날
붉은 물그림자 어른대는
강 건너 산철쭉 바라보며 손을 씻는데
바람결에 쓸리는 물살이
손등을 간질이며 묻는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강 건너에만
산철쭉 꽃이 피는 사정과
이편 아닌 저편이 늘 아름다운 연유를.-52쪽

게와 개


꽃게 농게 밤게 집게 칠게
새만금 개펄과 바다에
얼마나 많은 게들이 살고 있는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지만

제방을 막고 나면
게 대신 개가 들어와 산다는 건
지나가는 도요새도 안다
아마도 꽃게 수천 마리가
물살을 헤집고 가르며 유영하는 대신
푸들 한 마리가
머리에 리본을 달고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 것이다.-90쪽

고니


호수 위에 고요하게 떠서
곧잘 우아한 선율의 주인공이 되어온 고니
하지만 수면 밑 물갈퀴 발은 쉴 새 없다고 한다
그래야 평화롭게 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아름다운 곡조를 내기 위해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활을 켜야 하는 예인처럼

고니는 늘 혼탁한 목청으로 울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의 마지막 울음은
구름 너머로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배우의 고별무대를
화가의 최후의 그림을
고니의 노래라 칭한다고 한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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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꽃 창비시선 307
최두석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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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노래하는 시인 마음, 지천명에 빛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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