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꽃 창비시선 307
최두석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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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과 무덤


비질이 잘된 융건릉 숲길에
나뭇잎 요람이 깔려 있다
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상수리잎으로 말아
바닥에 떨군 것이다
나는 이 정성들여 만든 요람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까 저어하여
주워서 숲속에 넣어주며 가다가
그냥 발에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다
나뭇잎 요람이 너무 지천인 탓이요.
나의 가벼운 적선을 보는
상수리나무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서이다.
왕릉 지키는 숲을 헤치는 해충을
무엄하게 동정하는 죄를 저지르다니!
무덤 속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해서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의 묘를 쓰기 위해
수원성을 옮긴 정조의
공과를 묻는 나의 상념은 부질없이
숲길을 따라 돌며 칡넝쿨처럼 뻗어가는데
산책이 끝날 즈음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거위벌레도 엄연히
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12쪽

강 건너 산철쭉


이 땅에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강이 어디 있나
이 땅에 이토록 정갈하게
아름다운 풍광이 어디 있나
거듭 감탄하게 하는
영월 동강 어라연에 봄빛 찬란한 날
붉은 물그림자 어른대는
강 건너 산철쭉 바라보며 손을 씻는데
바람결에 쓸리는 물살이
손등을 간질이며 묻는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강 건너에만
산철쭉 꽃이 피는 사정과
이편 아닌 저편이 늘 아름다운 연유를.-52쪽

게와 개


꽃게 농게 밤게 집게 칠게
새만금 개펄과 바다에
얼마나 많은 게들이 살고 있는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지만

제방을 막고 나면
게 대신 개가 들어와 산다는 건
지나가는 도요새도 안다
아마도 꽃게 수천 마리가
물살을 헤집고 가르며 유영하는 대신
푸들 한 마리가
머리에 리본을 달고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 것이다.-90쪽

고니


호수 위에 고요하게 떠서
곧잘 우아한 선율의 주인공이 되어온 고니
하지만 수면 밑 물갈퀴 발은 쉴 새 없다고 한다
그래야 평화롭게 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아름다운 곡조를 내기 위해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활을 켜야 하는 예인처럼

고니는 늘 혼탁한 목청으로 울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의 마지막 울음은
구름 너머로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배우의 고별무대를
화가의 최후의 그림을
고니의 노래라 칭한다고 한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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