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JC는 인생에 대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육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만큼 늙었지만 깊은 통찰력으로 국가의 기원, 아나키즘, 민주주의, 마키아밸리즘 등 강력한 정치적 견해들을 속삭인다. 참으로 노인네다운 잔소리같고 지루한 글은 그렇게 시작된다.

마키아밸리에 따르면 이렇다. 통치자인 당신의 모든 행동이 도덕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그런 도덕적 시험이 안중에도 없는 적한테 틀림없이 지게 될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속임수와 배반의 기술을 터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는 그것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25쪽)

하지만 책은 상하로 나누어 져서 하단에 전혀 다른 느낌의 경쾌한 속삭임이 시작된다.
어느 날, 동네 세탁실에서 엉덩이가 너무도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보고 푹 빠져버린 로망의 노망!

"하느님, 제가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소서."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이라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철회했다. (16쪽)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이름을 알아 가고, 요새 놀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에세이를 입력하는 일을 좋은 보수로 제안하기에 이르는 작가 JC는 때때로 그녀에게 실망도 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하나둘 씩 알아간다. 

위층에 사는 안야는 순수하고 단순한 타이피스트로서는 조금 실망스럽다. 그녀는 자신의 할당량은 해낸다. 그것은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내가 기대했던 의기상투,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에 대한 센스는 없다. 때때로 그녀가 건네준 원고를 보면 당황스럽다. 가령 이런식이다. 대니얼 디포에 따르면, 진짜 영국인은 'papers and papery'를 싫어한다. 브레즈네프의 장군들은 'somewhere in the urinals'에 앉아 있다. (35쪽)


독일 젊은이들은 항의한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를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살인자라고 무시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이렇다. "당신들이 불행하게도 당신네 조부모의 손자니까. 그리고 당신들에게는 저주가 붙어 있으니까." (61쪽)


그 운명적인 파티 다음 날 아침, 나는 마지막으로 안야를 보았다. 그녀는 사과를 하러 왔다. 그녀는 그날 저녁을 자기들 두 사람이 망쳐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앨런이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표현했다.) 일단 지옥으로 만들면 그를 제지할 방법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지옥으로 만든게 앨런이라면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이 아니라 앨런이 아닌가 싶군요. 의미론적으로 말해서, 사과할 마음 상태가 아닌 사람을 대신해 제대로 사과를 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예요."
내가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나한테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당신에게도 사과하지 않을 그 남자와 같이 살 건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앨런과 나는 서로 떨어져 살려고 해요. 시험적으로 떨어져 보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는 타운스빌에 가서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려고요. 모든 게 잠잠해지면 내 기분이 어떤지 보고 돌아올지 말지 결정할 거예요. 오늘 오후에 비행기로 떠나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군요."
"네, 맞아요.' (187~192쪽)



앨런이 말했다. "그녀는 애원했죠. 그리고 나는 그 애원을 들어줬고요.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비밀을 발설해 버렸네요. 나는 단념하고 그 애원을 들어줬어요.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후안, 내가 그 사람이었어요. 당신을 강탈하려고 했던 문제의 악당이 나란 말이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있는 나의 애인 때문이지요. 달콤하고 달콤한 컨트(cunt)를 가진 나의 귀여운 애인 때문이지요." (194쪽)


"나는 자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아. 자위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거야. 자위는 악기를 연습하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야. 프로이트를 읽은 자네가 어떻게 그처럼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사용하는가? 내가 얘기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랑이며 시적인 사랑이지만 관능적인 차원에서일세. 자네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그는 나를 잘못 판단했다. 내게는 그런 관능적인 차원에서의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일컫는 이 현상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199쪽)



그녀가 천천히 몸을 빼더니 생각에 잠긴 눈으로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를 안고 싶어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말했다. "내가 떠나면 우리가 서로를 다시 보지 못할지 모르니까 나를 껴안고 싶으냐고요? 그래서 내가 어떠했는지를 나중에 잊지 않도록 말이죠." 그녀는 나를 향해 팔을 완전히 뻗지 않고 옆구리에서 반쯤만 들어 올렸다. 그래서 그 팔에 안기려면 한 발짝 떼야 했다. (209쪽)



처음에 그녀(엉덩이)에게 빠진 것은 노인 JC 였으나 차츰 그 노인의 매력에 빠져 가는 안야의 이야기...
20대 안야와 사랑하며 동거하지만 80대 노인에게 질투하고 통제력을 잃어 가는 40대의 앨런...

읽을수록 흥미진진한 그의 견해, 그의 독백,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
3단의 소설로, 모든 독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읽어가게 될 흥미로운 편집...
세로로 길쭉한 판형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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