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인간은 날 수 있을까?

'인간이 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할까?

어떤 이는 '바보같은 소리..'라고 할 지도 모르겠고, 어떤 이는 비행기를 가리키며 '그것을 타면 날 수 있잖아.' 라고 할 지 모르겠고, 최근 황우석 박사의 결과에서 비약적인 상상을 하는 어떤 이들은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에게 날개를 달 수도 있을 것이며, 날개를 움직일 수 있도록 새의 가슴살과 같은 날기 위한 근육 강화가 같이 이루어진다면 기계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은 날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한가지 질문에 대한 여러가지 대답...

그러나, 그 대답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대답은 아마도 요즘처럼 비행기가 발달된 시대에서는 '비행기를 타라'라는 말일테지..그러나, 예전 비행기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가장 현실적이고 쓸때없는 질문에 시간낭비를 하지 않는 대답은 '바보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라.' 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어떤 시점에는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대답이 달라질 지 모른다. 이미 우리가 역사를 통해 경험했듯이 말이다.

2. 마이너리티의 무기는 자존심과 상상력.

주류와 비주류. 메이저와 마이너. 이와 같은 이분적인 구분이 말로서야 쉽게 이루어지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그 차이를 구분하기는 어쩌면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발언의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둘을 구분하는 일이 쉬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평범한 우리들이 주류로 들어가기 위해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하는 것도 그 무시무시한 영향력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존전략. 주류가 되어야만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그 믿음 하나가 온 나라를 부동산과 재태크와 사교육이 범람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 무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제대로 된 주류가 되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제대로 된 주류가 되면 세상살기 편하기는 한걸까? 이런 의심을 품는자는 아직 주류가 되지 못한 사람이리라. 그러나, 어쩌지? 공부도 못하고 평범하기 그지 없는데도 즐거울 수 있다니..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잰다고? 흥~ 그렇게 호락호락 날 잴 수 있을 거 같아? 라고 말하는 발찍하기 그지 없는 녀석들의 이야기가 있으니 녀석들은 뭘 믿고 그러는 것인지 궁금하지?

삼류 꼴통 고등학교의 고등학생인 녀석들의 썰을 잠시 인용하자면,

"우리는 시험문제를 잘 풀지 못한다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쭉정이 취급을 당해요. 우리가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죠. 간단히 시험을 쳐서 그 결과로 인간을 분류하고 레테르를 붙이고 알기 쉽게 한 곳에 모아서 관리하려는 게 기분 나빠요."

"우리는,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 우리를 관리하는 놈들이라든지, 미래에 우리를 관리하려는 놈들에게."

녀석들은 스스로를 믿고 있다. 세상은 남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대로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녀석들은 세상과 부조화를 이루고 그들에게 내려지는 레테르는 '삼류 꼴통 고등학교의 문제아' 들이다. 녀석들에겐 일류 여자 고등학교 학예전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 없다. 그럼 어떻게??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라고 했고 녀석들에게는 모르는 단어다. 인간이 무서운 존재가 된 것은 모여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각 개인의 두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녀석들도 또한 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일류 여자 고등학교의 담을 넘으려다 잡힐 뻔한다. 1회의 실패..아니 한번 성공을 위한 과정하나를 넘었을 뿐이다.

그들의 이와 같은 성공과정은 신문지상에선 '삼류 꼴통 고등학교 문제아들이 담을 넘어..'라는 형식으로 쓰여서 문제가 된다고 혀를 차고 있고, 앞으로 주인공이 될 평범한 샐러리맨 '스즈끼'씨조차 자신의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딸을 폭행한 것은 잘 나가는 부모를 뒷배경으로 가진, 일류 고등학교의 고등학생 신분의 권투선수였다. 폭행사실마져도 유야무야 덮어주는 교사들과 위로금으로 던지는 돈의 위력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마져도 자신의 손으로 지키지 못하는 평범을 가장한 비주류였음을 그는 딸의 폭행사건을 겪으면서 알게 된다.

빽도 없고 평범한 중류가정의 가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관리도 하지 않다보니 체력도 없고.... 뭐하나 믿을 구석이 없는 그는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는 신세일 뿐이다. 그러나, 무너진 체면과 가족의 신뢰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나? 약하기만 한 그는 '식칼'을 이용해서 녀석을 없애버리겠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마져도 포기하고 그저 복수하나만 생각하고 작렬히 산화하겠다는 일본의 의식세계가 보이는 대목이면서 약자가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워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뒤 재지 않고 칼을 들고 달려든 그는 학교를 잘못 찾아 들어가 삼류 꼴통 고등학교의 '그' 문제아들과 부딪히게 된다. 자존심마져 팽개쳐버린 마이너 중년 아저씨 대 문제아 녀석들...현실에서 일어났었더라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겠지만 소설이라 그런지 녀석들이 어리버리한 중년 아저씨를 제압하고 '마이너의 싸움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냐..'라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듯 녀석들은 유쾌한 복수극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권투선수인 상대편을 제압하는 방법은 권투선수가 링에서  경기를 하듯 관중들 앞에서 주먹으로 이길 것!! 그러기 위해서 체력을 만들고 권투선수들의 틀에 박힌 공격이 아니라 선수가 아닌자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연함으로 공격하라!!!

녀석들이 만들어낸 유쾌한 복수극의 주인공으로 다시 서기 위해  스스로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문제일텐데  녀석들과 손잡고 뼈를 깎는 복수극을 위한 연습의 시간을 보낸다. 녀석들 중 재일한국인이기에 생명부지를 위해 하루하루 싸우며 살아야 했던 박순신의 트레이닝 코치를 받으면서.그의 하루하루가 날짜별로 긴박하게 돌아가면 갈수록 '스즈키'의 변화상도 눈부시다.

9월 1일 결전의 날, 녀석들은 '가을축제의 예행연습(스즈키씨의 딸이 있는 일류 여자 고등학교로 난입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예행연습이라 녀석들은 생각한 것 같다.)' 이라며 카드를 넣어야만 문이 열리는 일류고등학교의 담을 넘어 '스즈키'와 함께 복수극의 화려한 막을 연다. 고등학교 조회시간에 난립한 녀석들은 선생들을 먼저 제압하고 그들의 몸으로 둥근 링을 만들고 '스즈키'와 스즈키의 딸을 폭행했던 '권투선수'를 링 중앙에다 세운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고, 상대 '권투선수'또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주먹싸움에 이력이 난 '권투선수'를 상대로 주먹싸움을 할 거란 생각조차 아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땅 중년 아저씨가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더욱 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빈틈을 만들어내는 마이너 녀석들의 상상력은 현실이 되어 빛을 발하고, '주먹으로 승한 자는 주먹으로 망할 것이다.'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진리를 상대 권투선수에게도, 그의 주위를 둘러쌓던 많은 일류 고등학생들과 난입해 들어간 녀석들에게 보여준 '스즈키'씨는 마이너리티의 승리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심과 어느덧 틀에 박혀버린 주류의 빈곤한 상상력을 과감히 박살내며 틈입하는 발찍하기 그지 없는 상상력만이 녀석들의 무기였는데, 그 무기는 제대로 통했고 그 과정을 바라보는 내내 난 무척이나 유쾌했었다.

3. 즐거운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질 그날까지..

이 소설을 보며 느꼈던 유쾌함은 신문을 펼치자마자 반감된다. 유가가 오르고, 그와 동반된 여러 산업들의 영향력을 분석해 놓은 기사들, 주식선이 오르고 내리는 일들, 금리가 오르게 될 거라는 이야기.. 여기저기 긴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 이야기와 퉁퉁거리는 사설을 보고 있노라니 재미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답답하다.

체 게바라는 '불가능한 꿈을 꿔라. 그러나 리얼리스트가 돼라.'라고 말했었다.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기에 그의 앞에 놓였던 수많은 자리들과 영광을 뒤로 한 채 볼리비아의 숲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그러나, 현실의 틀 속에서 '이건 아니야!!' 라고 하며 다른 것을 꿈꿀 줄 아는 이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바뀌어 왔다.

댓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없음을 알만큼 늙어버린 나이가 되어버렸고, 즐거운 상상만으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어버렸고, 노력하기 보다는 포기하고 순응하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꿈'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현실'이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럼, 나의 선택은??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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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오스님!!
오랜만이라 더욱 반갑고 유쾌한 리뷰로 더욱 좋아요^^
멋져요. 멋져!!!
꿈과 리얼리스트를 융합하라고 말한 게바라보다 전 님의 생생한 글자들이 좋답니다

클레어 2005-08-1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도 잘 지내셨죠? 이젠 자주 알라딘에서 얼쩡거릴 것이랍니다.
^^

딸기 2005-10-1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에오스의 독후감, 이제야 발견!

베지밀 2006-01-2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고 싶어요. 이번에 영화로 만들어진다죠. (사실 그래서 알게 되었음^^)

나탈리 2006-02-0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어요~.
 
쌍브르 - 1,2권 합본 (양장) 비앤비 유럽만화 컬렉션 3
발락 지음, 이슬레르 그림, 이재형 옮김 / 비앤비(B&B)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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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슬레르'와 프랑스 만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 만화의 겉표지는 붉은 색이다. 붉은 색.. 불꽃의 색.. 보기도 전에 그 뜨거움이 어떨지 온몸이 떨려왔다. 19세기 프랑스 혁명 직전의 자유와 혁명에 대한 열망, 시골귀족 쌍브르와 집시 여인 쥴리의 사랑, 그리고 예술의 광기와 정열이 책 표지의 붉은 색을 타고 넘실거린다.

이야기는 쌍브르의 아버지 위고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쌍브르의 아버지는 <눈의 전쟁>이라는 소설을 쓰다 결국 미쳐 자살을 하고 만 시골귀족이다. 그는 <눈의 전쟁>이란 소설 속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놓았다.

-눈이 빨간 인간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불행이 닥치리라. 왜냐면 그 자는 평생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할지니..-

그러나, 사랑은 왜 운명의 덫에 걸린 연인들을 만들어내는가? 쌍브르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빨간눈의 집시소녀 쥴리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모두들 금기시 여기는 그 빨간 눈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쌍브르에게 쥴리는 삶이 아닌 죽음을 같이 해줄 수 있느냐? 라고 묻고 머뭇거리는 쌍브르의 왼손 생명선을 철핀으로 긁어서 끊어놓는다.

"지금은 피를 나눈 쌍둥이들 손금처럼 똑같아졌어..자..이젠 네 말을 믿을게. 쌍브르"

이렇게 그들의 운명은 이어졌다. 그들의 운명,삶도 죽음도 함께 하도록...

뇌조직 중 뇌에서 발생해서 유일하게 외부로 노출되어 있는 기관이 눈이다. 눈동자의 색...만화 속에서는 뜨거운 피, 정열, 머리속의 생각이 다른 색에 가리워지지 않은 채 노출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테지만 19세기 프랑스 왕정의 말기, 아직까지는 그와 같은 자유의 색, 정열의 색은 숨겨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눈동자 가득히 이를 드러내고 있는 쥴리를 사랑하게 된 쌍브르는 그의 아버지의 예언과도 같은 <눈의 전쟁>의 이야기처럼 점점 불행의 나락으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들여놓게 된다. 그의 불행은 위선적인 귀족사회를 대표하는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필적을 따르며 <눈의 전쟁>이란 글을 책으로 내고자 했던 누이 사라가 실명하게 된 것이었다. 몰락해 가는 귀족사회의 붕괴에다 더욱 기름을 부어대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자유와 열망을 경고한 아버지의 글을 세상에다 내놓으려고 했던 사라의 실명또한 더 이상 혁명시대의 열기를 막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나약하기 그지없는 귀족 소년 쌍브르에게 갑자기 불어닥친 불행과 사랑의 열정.. 그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만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었다.  쌍브르는 이름뿐인 귀족생활에 늘어난 빚 때문에 파리의 집을 팔아야 했고, 모든 불행에서 벗어날 출구로 파리행을 생각하게 된다. 파리로 올라온 가난한 귀족에게 주어진 것은 허물어져가는 아버지의 파리별장과 우연히 참석하게 된 파티에서 시골냄새가 난다는 등의 멸시와 조롱 뿐이었고, 그것에 저항하던 그는 결투 신청을 받게 된다.

발디유 : "결투다! 증인을 선택해!!"

쌍브르 : "(왼손바닥에 흐르는 피를 보며)...."

발디유 : "싸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그건 비겁함을 넘어서 치욕이요, 불명예라구! 겁쟁이 주제에!!"

쌍브르 : "미안합니다만, 그 반댑니다. 난 결투를 할 수가 없어요...난...난..내 죽음을 어떤 여자에게 바치기로 맹세했거든요."

이 장면에서 그는 이 모든 불행을 가져왔고, 그의 왼손 생명선을 긁어내 죽음을 같이 하자고 했던 붉은 눈의 쥴리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겁하고 겁쟁이라고 불러도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살기로 한 쌍브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3권에서 이어진다고 한다. -_-;;; (모두 다 읽고 리뷰를 쓸걸 그랬나? 그러나 아직도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으니 다 읽고 리뷰를 쓰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 않는가? )

극적인 전개 뿐 아니라 눈동자가 지닌 시대적인 상징성,  시처럼 아름다운 대사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어서  읽는 내내 꼼꼼히 다시 음미를 해야했지만   피의 색, 붉은 색 눈동자, 자유의 색, 불꽃의 색, 정열의 색으로 뜨겁기 그지없는 이 만화를 보면서 겉표지를 보면서 떨렸던 느낌이 만족감으로 다가왔음을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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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7-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다가 말았어. 다시 보고싶은데.
저 책, 너무 강렬하지 않니? 붉은 눈동자랑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을 묘하게 겹쳐놓고, 퇴폐와 낭만을 섞어서~~

2005-07-08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레어 2005-07-12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언니/ 언니 말대로 붉은 눈동자가 상징하는 자유라는 것을 예술적인 광기와 결합해서 보여주는 강렬한 작품입니다. 쥴리라는 매력적인 여주인공, 그녀의 삶 자체가 예술, 사랑, 혁명을 한데 뭉뚱그려 보여주고 있는 듯해서 3편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더군요. :)

속닥님/ 흐흐~ 그만한 일로 감탄하시다니.. 더 감탄할 것을 쏟아내어 보여드리면 어쩌실려구..;;;
 
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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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치바나 다카시. 이 사람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에 읽은 '사색기행'과 '우주로부터의 귀환' 두 권 뿐이었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두권의 책('사색기행'의 경우는 대부분 예전 자신이 잡지에 실었던 글 중 여행관련글을 모은 것이었고 '우주로부터의 귀환'의 경우에는 지구를 떠나봤던 우주비행사들의 삶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모은 글인데 전자의 경우에는 다카시의 사회, 문화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방대한 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었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우주비행과 관련된 과학적인 지식과 우주여행 전, 후 인간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라는 호기심을 빛내는 타카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을 한 사람이 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이 인간에게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적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인간이면서도 그 지식이 꼭 필요한 현장감을 중시하는... '그래, 그는 기자였어.'라는 한가지 깨달음이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색기행'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행(4장에 나오는 '유럽으로 반핵 무전여행을 떠나다'는 그가 대학교 2학년 때 '핵군축 회의' 초대장을 받아 '반전영화'상영을 목표로 떠난 여행이었으므로)을 제외하고는 모두 취재여행이었고 취재여행의 성과물로 나온 각각의 글들은 잡지의 칼럼에 연재되었던 것인만큼 내용들은 다양하면서도 흥미를 유발할만한 것이었다.

 

잠시 살펴보자면, 무인도에서 문명의 혜택없이 6일을 보낸 경험이라던지 몽골로 '개기 일식'체험을 떠난 것이라던지 하는 것은 일반인이라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인 만큼 그의 경험은 대리만족을 충족시켜주는 면이 있다. '만약 내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이라는 가설에 대해 직접 문명의 이기들을 버리고 자신을 실험하기 위해 무인도로 가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어리버리한 체험기마져도 흥미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개기일식'도 그렇다. 책 속에서는 '태양이 사라진다면 태양에게서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극단적인 상상력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개기일식'을 쫓아다니는 개기일식 마니아들을 인터뷰하고 자신도 흐린 날 몽골에서 일어났던 '개기일식'의 짧은 순간의 느낌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개기일식이 그런 의미였어?'라는 생각만으로도 태양계 속의 3번째 행성에 불과한 지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독자들에게 생각의 전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두 체험은 그의 지식이나 글솜씨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소재가 좋아서 독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가르강튀아풍'의 폭음폭식 여행과 기독교 예술 여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 즉 먹고 마시고, 좋은 거 구경하는 여행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에 다가가기가 더욱 쉽다. 요즘 웰빙 붐을 타고 점차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좋은 와인이 어떤 것이며 와인의 종류를 결정하는 땅에 대한 이야기, 와인의 라벨을 보는 법을 상세히 알려주고 여행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곁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정보와 재미를 얻을 수 있다. 치즈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여러 종류의 치즈와 그 제작공정, 맛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두었을 때 나쁘지 않은 상식이기 때문에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기독교 음악과 '미션'이라는 영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기독교 예술 여행이라는 컨셉도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들으니 더 좋더라. 왜 그런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지 가서 직접 그들의 삶을 살펴보니 이해가 되더라.'라는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이야기를 해주어서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그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여행의 깊은 맛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나마 나에게 '진짜 여행기 같다'라는 느낌을 주었던 것은 '4장 유럽으로 반핵 무전여행을 떠나다.'라는 부분이었다. 다른 장들과는 달리 인터뷰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다 젊은 시절 다카시의 여행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여행전 어떤 식으로 준비를 했고, 핵군축 회의에 초청되는 기회를 잡고 반핵영화를 유럽에다 틀면서 여행하는 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 속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젊은 다카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서문에서 이야기 했던 '육체를 이동시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라는 말이 4장에 이르러서야 나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5장, 6장의 팔레스타인 보고와 뉴욕 연구는  팔레스타인과 뉴욕을 각각 여행을 하며 쓴 글로  단순 여행기가 아니다.  각각 팔레스타인과 뉴욕이라는 객관적 장소에 대해 일반인의 시각과는 차별화된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움이 보이는 글로써 각각의 공간이 현 시대에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해 내고 있다.  다카시 정도라면 이정도 수위의 글은 써줘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야 그의 글을 읽는 맛이 났다.  중동에 대해 이스라엘을 통해 듣는 것 이외에는 일본인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현지에 가서야 자각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인과 아랍인들을 직접 만나며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재구성한다. 뉴욕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심장,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을 여행하며 그가 살펴본 것은 마몬(부와 황금의 신)의 신전인 뉴욕의 빛과 그림자였다. 비즈니스, 돈의 중심지이면서도 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한 슬럼, 마약과 폭력, 범행, 그리고 에이즈환자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의 치부를 유감없이 내보이고 있는 도시로 다카시는 뉴욕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내용은 이러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집어내려면 집어낼 수 있는 수준의 글들이다. 좀 오래된 글들은 친절하게도 각주에다가 변화된 양상까지 기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명성만 믿고 책을 기획해서 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행기를 읽는 목적이야 사람들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이처럼 여행의 목적이 중구난방식으로 된 책은 처음보는 것 같다. 여행의 길라잡이도 아니고, 여행을 통한 깊은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책도 아니고.. 여행지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이렇게 달라서야 혼란스럽지 아니한가 말이다.

 

여행이란 게 원래 그런거고 다치바나 다카시란 흥미로운 인간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인간이라서 그런 여행기가 나온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환경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며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인간 다치바나 다카시의 모습을 보기를 바랬고, 나또한 그의 여행경로를 좇았을 때 그와 같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 란 대입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와 함께한 사색기행은 영 어중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냥 배낭 훌쩍 둘러매고 떠나보는 편이 그의 말대로  제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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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말괄량이 삐삐''개구장이 에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독한 말썽꾸러기 녀석들을 탄생시킨이 스웨덴의 여류 작가에게 어린 시절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린드그렌이 말썽꾸러기의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스웨덴의 동화는 얌전하고 착한 어린이라든가 '사가(saga)'라는 전설 속의 영웅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삐삐'의 이야기가 출판되고 나서도 어린이들을 개구장이로 만들지 않을까 하고 꽤나 걱정하던 학자들의 노파심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린드그렌은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딱딱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이것저것 참견하고 뭔가를 시키려고 드는 어른들의 틈에서 짓눌리고 구겨지기 십상인 아이들의 마음을 펴주는 것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봐주고 '그 시기가 아니면 해보지 못하는 상상과 모험의 세계'를 긍정적인 눈으로 봐주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걱정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어른들과는 다른 눈높이(신체적인 눈높이 조차도 어른들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너무나도 다른 아이들의 눈높이)를 가진 아이들을 어른들의 편리함의 잣대에 맞춘 '작은 어른'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대한 틀에 처음 접하면서 나름의 생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말썽과 모험, 고난, 즐거움 등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


이제는 어린 개구장이 시절로 돌아갈수도, 똑같은 말썽을 피울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린드그렌의 어린이관처럼 그것은 어린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에.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린드그렌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는 것은 아이들의 흥미진진한 삶을 어떻게 긍정해주고 어떠한 눈높이로 봐주어야 하는지를 어른들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작은 씨앗하나가 제 힘으로 지구의 중력을 이기며 줄기를 돋우고 잎을 틔우고 꽃을 맺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이 자라는 모든 과정에 필요한 것은 위험에서 보호해 줄 수 있는 따뜻한 관심이지 몇 센티를 자라야 하고, 어떤 색 꽃을 피워야 하고,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란 점을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이야기 하고자 했는데 옆길로 너무 많이 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동화책 중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었다. 여태껏 린드그렌이 보여주었던 말썽장이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주인공과 세계의 모습. 그 뿐 아니라 작가가 살았던, 미-소 냉전 시대, 이데올로기로 격앙되어 있었던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정치의식과 풍자정신이 동화 속에서 어떻게 보여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책이었고, 간결하고 멋진 삽화들이 있어 상황들을 눈으로도 볼 수 있었지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계속 할 정도였다.

 

 

모험 소설은 얼마나 생생하게 주인공과 읽는 독자가 일체감을 느끼느냐에 따라 그 흥미와 재미가 따라오게 된다. 분량이 꽤 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 고 3 때도 정시에 자고 정시에 일어나던 내가, 대학교 시험기간동안에도 잠은 꼭 자던 내가 왜? 이유는 재미있으니까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은 손에서 놓으려면 꼭 아쉬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 주인공들과 함께 모험을 했으며 모험이 끝나고 희뿌연 아침햇살이 창가를 밝히는 것을 보면서 왠지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는 ‘나’, 즉 동생 ‘카알 레욘(사자라는 뜻)’이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된다. 나는 기침으로 언제나 부엌 옆 낡은 소파에 누워 있어야 하는 병약한 아이이고, 바다에 나갔다가 영영 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의 바느질 가게 손님들조차도 ‘나’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처지에 있다. 그에 비해 형 ‘요나탄 레욘’은 왕자님과 같은 멋진 용모에, 공부도 1등이고 힘도 학교에서 가장 세고, 거기다 친절하기까지 하다.

 

 

잘난 형 '요나탄'이 주인공이 아니고 왜 골골거리며 죽음이 얼마남지 않은 '카알'이 주인공일까란 생각을 잠시 하게 되는데, 동물의 세계에서는 골골거리며 병약한 어린 것들에게는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인간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도움과 보살핌이 없이는 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이들은 사회속에서 시들어가다가  죽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 또한 '나'라는 '카알'의 작은 몸에 감정이 이입되어서 처음에는 죽음이 두렵고 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힘 쎄고 용감한 형 '요나탄'이 주인공이었으면 어쩌면 이야기가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작고 초라한 '내'가 주인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바뀔지를 계속 따라가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형 '요나탄'은 형제이면서도 선생이고 조력자이며 동료이다. 그리고, 현실 속의 '요나탄'은 병약한 '나'를 돌봐 주고 '낭기열라'라고 하는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급기야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현실 속에서는 불타는 집안으로 뛰어들어 '나'를 업은 채 2층에서 뛰어내려 죽게 된다.  이렇게 그는 죽음으로써 '낭기열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작고 여리고 겁도 많은데다 병약하기까지하다. 그러나, 형 '요나탄'이 말해준 '낭기열라'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현실 속에서는 죽었지만 '낭기열라'에서 '나'를 기다릴 '요나탄'이 무척 그리워졌다. 아이들이 겪게 되는 첫번째 통과의례의 원동력. 그것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어리고 나약한 존재로 남아있기 보다는 사랑하는 이의 바램대로 성장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고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게 된다. 현실 속의 '나'는 죽게 되지만 그 허물을 벗고 성장한 '나''낭기열라'로 가 있게 된다.  물론, 인간정신의 성장이 메뚜기 탈피하듯 그렇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아이가 집에 있다면 관찰해보시는 것은 어떠실지...

새로 태어난 세상이 두려워 울기만 하던 아기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의 음성을 알아듣고 미소짓고, 부모의 음성을 배우고 따라하는 것은 아이들이 나름의 통과의례를 부모를 위해 겪었기 때문이다. (자폐아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이다. 한 단계를 넘지 못하니 다음단계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다. 어른들만큼 아이들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름의 과정을 밟고 있음을 잊지 말자.)

 

 

'요나탄'은 약속대로 '낭기열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낭기열라에 온 '나'는 예전의 병약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고 형과 함께 사냥도 하고 작은 토끼도 돌보고 이웃 아주머니 꽃밭을 가꾸며 먹을 것을 구하게 될 정도로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듯 보이는 '낭기열라'

그러나, '낭기열라'도 그저 평화로운 곳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것은 '나'의 세상을 보는 눈이 예전과 다르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낭기열라''텡일'이란 독재자가 '들장미 골짜기'를 장악함으로써 행복한 '벚나무 골짜기''텡일'의 지배속에 핍박을 받는 '들장미 골짜기'로 나눠지게 되었다. 형과 '벚나무 골짜기'의 아름다운 오두막집에서 살던 나는 수탉 주점이라는 어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까지 진출하게 되고 형으로부터 '텡일'의 무서운 독재속에서 신음하는 '들장미 골짜기'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눈이 넓어진만큼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고, 세상은 아름다운 '벚나무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들장미 골짜기'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작고 어리기만 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요나탄''들장미 골짜기'에서 '텡일'에게 저항하던 지도자 '오르바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구하기 위해 '들장미 골짜기'로 떠나게 된다. 나는 또다시 기로에 서게 됐다. '벚나무 골짜기'에 마을 아주머니랑 남아있으면 안전하게 지낼 수는 있겠지만 형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나는 먼저 떠난 형을 찾아서 '들장미 골짜기'로 혼자 떠나게 된다. 혼자서 산 속에서 지내고 가파른 골짜기 돌길을 걷다가 '벚나무 골짜기'의 배신자가 '텡일'의 군사들에게 정보를 넘기는 것을 엿듣게 된 나는 잘못해서 '텡일'의 군사들에게 들켜 잡혀 버렸다.  이제 형도 없고 나를 지킬 수 밖에 없는 것은 오직 나뿐인 막막함.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꼬마일 뿐인 나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것도 꼬마 얼간이인데다 원래 '들장미 골짜기'에 살던 아이처럼 행동하고 거짓말로 그들을 설득시켜 '들장미 골짜기'까지 그들의 안내를 받아 가게 된 것이다. 기적처럼 '벚나무 골짜기''들장미 골짜기'의 연락책을 맡으며 '오르바르'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집에서 그리운 형도 만나게 되고.

 

 

'들장미 골짜기'에서 '요나탄'은 그들을 '텡일'에게서 해방시켜줄 '사자왕'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여전히 나에게는 영웅과도 같은 형.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들장미 골짜기'에 온 덕분에 '텡일'의 무기인 '캬틀라(불을 뿜는 용으로 불길에 닿은 사람은 모두 독에 중독되어 죽거나 평생 마비된 채 살아야 한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내가 알게된 중요한 정보도 형에게 건네주었으며, 형과 함께 '오르바르'를 구출하기까지 한다. '벚나무 골짜기'에서만 해도 형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이젠 형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서 형과 함께 말을 달리고 있다. 

 

 

'벚나무 골짜기''들장미 골짜기'의 연합이 '오르바르'의 구출로 이루어짐으로써, '텡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형 '요나탄'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서는 텡일과의 전쟁도, 사람을 죽이는 것도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오르바르'와의 대립에 결국 지고말아 '요나탄'은 지켜보겠다고 한다. '캬틀라'를 조정하는 나팔을 불며 '텡일'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보다 못한 '요나탄'은 나팔을 뺏어서 '캬틀라'를 조정함으로써 '텡일'들을 섬멸하게 된다.

 

 

전쟁은 끝났으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인 '요나탄'은 끝내 '캬틀라'의 불길에 맞아서 온몸이 마비된 채 조금씩 죽어가게 된다. 나는 또다시 버림받게 되는 것인가? '낭기열라'의 평화, 지긋지긋한 투쟁과 노력으로 얻어낸 것인데 형이 없는 곳에서 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형 '요나탄'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에게 '낭길리마'의 이야기를 해준다. 또다른 죽음에 대한 이야기, 아니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나탄은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젠 내가 형을 업고 '낭길리마'의 문을 열기로 마음먹는다. 형을 업고 뛰어내린 낭떠러지에는 '낭길리마'로 가는 빛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두번째 통과의례를 방금 뛰어넘었다. 영웅과도 같은 '요나탄'을 뛰어넘으며, 그를 살리기 위해 내 한계를 뛰어넘으며 또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첫번째 통과의례 후의 세상과는 달리 두번째 통과의례 후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통과의례를 지난 사람들이 그만큼 별로 없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맡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와 용기를 갖추게 된 아이들에게 '다른 이를 업고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내리는' 이와 같은 통과의례를 의식하게 하고 통과하도록 할 수 있을까?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꼼꼼히 재독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나탄' 형은 린드그렌 여사의 화신(化身)이었다. 나약한 나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며 나의 스승이 되고 길라잡이가 되었던 그였지만, 그 또한 전쟁이라는 거대한 괴물앞에서는 고민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 '요나탄'이 전쟁전에는 물에 휩쓸려가는 '텡일'의 부하를 살려주면서 "그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어쨌든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인데, 만일 그걸 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하잘 것없는 사람이 되는거야." 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텡일'을 죽여서 평화를 얻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이 '요나탄'이었으므로. 아마도 그와 같은 고민이 '낭기열라'의 평화 후 '요나탄'을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린드그렌 여사는 죽어가는 '요나탄'의 몸이 되어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치열한 냉전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으로써 인간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독재자를 몰아내는 폭력의 정당성을 함께 고려하고 있는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제 도덕성은 이런 모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이여! 내 세대에서 만약 전쟁이 끝나게 된다면 그대들은 자신 속에 갖혀 있지말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든 이들, 죽어가는 이들, 아픈 이들을 업고 뛰어주지 않으렵니까? 물론 선택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겠지만, 아직까지 보지 못한 빛을, 새로운 세상을 보는 방법은 오직 그것 뿐이랍니다." 라고.

 

 

'소설 속의 나'는 흔쾌히 넘었던 통과의례였는데 '현실의 나'는 아직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멀뚱히 두번째 통과의례 앞에 서 있다.  두번째 통과의례의 원동력이 뭔지 아직 알지 못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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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자왕 형제의 모험
    from 바삭바삭한 그 날의 기억 2008-08-07 18:49 
    어릴 때 읽었던 창비아동문구나 에이브등에는 참 인상적인 동화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읽고 싶은 책이 바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 이다. 나중에 기억이 나면 구매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검색해서 나온 글을 트랙백해 놓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의 트랙백을 열면 나오는 알라딘에서 판매중인 책은 내가
 
 
바삭바삭 2008-08-0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이라 추천도 하고 제 블로그에 트랙백도 해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꿈을 빌려드립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하늘연못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케스는 문학과 현실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카리브해는 신대륙 발견 이전의 주요 신앙 속에 존재하던 본래 요소와 마술적 믿음이 그 이후에 도착한 여러 상이하고 광범위한 문화와 혼합되어 '마술적 혼합주의'라는 이름으로 성립된 곳이다. 그래서 이런 카리브해에 대한 예술적 관심과 예술은 고갈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다 .아프리카 문화는 강제로 부과된 치욕적인 문화였지만 나름대로 적절한 것이었다. 이 아프리카 신앙은 세상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던 상황에서 끝없는 자유의 의미를 개척했으며, 하느님도 없고 법도 없는 현실을 만들면서 어떤 종류의 한계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아마 현실보다 더 가공할 만한 것을 떠올릴 수도 없었고, 또 그런 현실을 뛰어넘는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멀리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시적 영감을 갖고 그런 현실을 문학작품 속에 이식한 것이다. (중략) 종합해서 말하자면, 중남미와 카리브해의 작가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현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영광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운명은 겸손하게 그런 현실을 모방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런 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최고의 작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P210-213)

마르케스의 소설, <꿈을 빌려드립니다.>를 읽으면서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 구수한 이야기구나. '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나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여름철 모깃불을 피워놓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북두칠성이 된 7형제 이야기' ,' 못에 빠져 죽은 처녀 귀신 이야기' 등등 이 바로 이 소설과 쌍둥이 형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믿을 수 없어서 "에이~ 거짓말~~!!" 하면서도 할머니가  이야기를 꺼내시기만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되는 환상적인 전설들과 이야기들. 

그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이와 같은 맛은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자연의 변화가 빈번히 출몰하는 중남미의 자연과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 그리고, 그들의 삶을 '구어체'로 표현함으로써 할머니의 구수한 입담과 같은 느낌을 잘 살렸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마르케스는 동화와 같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중남미의 현실을 독특한 시각으로 담아낼 수 있었고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던 서구 문학계에 [소설의 소생]이라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꿈을 빌려드립니다.>에서는 9편의 중단편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마르께스의 소설을 옮긴 송병선 씨에 따르면 <물에 빠져 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사랑도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잃어버린 시간의 바다><기적을 파는 착한 사람 블라카만>은 1960년대 쓰여진 작품이고, <포르베스 부인의 행복한 여름><눈 속에 흘린 피의 흔적><로마에서의 기적><난 전화를 걸려고 온 것뿐이예요.><꿈을 빌려드립니다.>는 1980년대 쓰여졌다고 한다. 1960년대에 쓰여진 글들은 중남미의 자연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그 속을 살아가는 소박한 남미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면 1980년대 쓰여진 글들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로 남미의 기적과도 같은 믿음들이 유럽 속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는지, 유럽인들의 모습은 남미인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지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만나서는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를 볼 수가 있는데, 눈으로 뻔히 보이는 썩지 않는 시체의 기적조차도(<로마에서의 기적>) 유럽인의 이성적인 원리, 원칙에 막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럽인의 모습이라던지, 진실을 아무리 말해도(<난 전화를 걸려고 온 것 뿐이예요.>)믿어주지 않고 그들의 편의대로 기도원겸 정신병원에 수용시켜버리는 모습들을 통해 마르케스는 중남미를 바라보는 현재 유럽의 시각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읽으면서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었던 단편은 오히려 1960년대쪽이었고, 그 중<잃어버린 시간의 바다>는 내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1월의 거친 바다, 쓰레기와 시체들이 출렁거리던 바다가 3월이 되면서 잠잠해지고 3월초순 갑자기 장미 향기를 뿜어내게 되는 카리브해의 정경. 꽃을 전혀 볼 수 없는 작은 어촌마을에 왠 난데없는 장미향??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죽은 자를 바다로 던지는 풍습이 있는 마을에서 꽃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옆마을에서 꽃을 사와서 시체와 함께 꽃을 바다에 뿌리는 장례식 때 뿐이다. 그런데, 장미향을 뿜어대는 바다....이는 그 향기를 맡은  누군가는 결국 죽는다는 의미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장미향이 바다에서 나게 되면 누가 죽을까? 마을은 숙연해지는데 토비아스라는 마을의 한 젊은이는 며칠동안 밤잠을 안자고 바다를 감시한다. 그리고는 장미향을 처음 맡게된 새벽, 온 마을 사람들을 깨워 장미향을 맡게 한 후, 골아 떨어지게 된다.  덕분에 마을사람 전체가 싸그리 죽을리는 없지 않은가? 란 생각을 사람들은 하게 되고, '죽음'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장미향이 나는 바다로 달려나와 1년중 한 때뿐인 그 향기를 맡기 위해 축음기를 켜놓고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고, 사랑을 나누며 '신의 축복'이라 이야기를 한다. ('죽음'의 의미가 한순간에 '축제'로 돌변하는 이 곳, 카리브해는 이상한 곳이긴 하다.  마치 징벌처럼 한 개인에게 다가오는 죽음.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죽을 운명에 놓여 있음을 이처럼 극적으로 자각하게 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르께스는 '사는 동안 그들의 삶은 축제가 될거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날, 장미향으로 진동하는 어촌마을로 카톨릭의 신부도 들어오고 외지의 미국인 부자도 들어온다. 그러나,  신부가 말하는 교리(축제금지, 해변가에서 자는 것 금지 등)는 들은척 만척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지을 성금마련이 어렵자, 신부는 공중부양까지 선보이는데도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축복의 땅'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신부는 다시는 장미향이 나지 않을 거라며 악담을 퍼붓고는 그곳을 떠난다. 한편,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고 축제를 언제나 열 수 있는 건물을 짓겠다고 찾아온 미국인 부자도 마을사람들에게 가장 잘하는 일이 뭔지를 평가해서 돈을 주었지만, 자연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하되 필요한 만큼만 구하는 그들에게 미국인이 준 돈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돈 벌게 해준다더니 마을 영감의 체스내기에서 판판이 이겨서는 영감의 집을 차지하고 오랜 잠을 자는 미국인. 수개월을 자고 난 후, 먹을 것이 떨어진 마을에서 배고프다며 토비아스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거북을 잡아먹자고 제안을 한 것도 미국인이었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모습이 신부와 미국인으로 변화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온다. 종교의 안락과 천국에 대한 약속,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할 거라는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의 꿈들이 이곳에서는 영 맥을 못추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교리로 작용하거나 각기 다른 사람들을 물질적인 돈으로 환산해서 평가하거나 심지어는 재산을 빼앗는 모습을 보여준다. ) 

바다거북을 잡기 위해 뛰어든 바다.. 수많은 시체들이 떠도는 바다였지만, 모든 죽은 자들은 젊어지고 아름다워져 있었고  세계를 여행한 듯 온몸에 각종 꽃들을 가득 안은 채 카리브해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즉, 3월의 카리브해 바다에서 나는 장미향은 죽은 자들이 몰아온 꽃향기였던 것이다. (이 환상적인 장면은 죽었으나 여전히 향기높은 문화를 건네주고 있는 남미인들의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면이며 그들의 문화가 전세계를 떠돌며 더욱 젊어지고 생명력을 가진 채 후세에 의해 다시 재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이를 본 토비아스와 미국인은 바다 속에서 나와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미국인은 자신이 본 것을 못 본 걸로 하겠으며 다른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돈을 쓰기 위해 떠날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도  다시는 이 고장에서 꽃향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악담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토비아스는 돌아와 그 아름다운 바다속 정경을 아내에게 속삭이며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꽃을 모아 오는 수고를 해주고 있기에 언제나 기적과도 같은 장미향이 나는 바다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죽음', '축제', '신의 축복','사랑', '죽은 자들이 더욱 젊어지고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장미꽃향기마져 전해주는  바다' 가 함께 섞여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운 곳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환상과도 같은 현실을 믿는 소박한 남미인들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마르께스의 자부심은 이 글을 읽는 내내 날 부럽게 만들었다.

'꿈을 빌려드립니다.'

온 인류가 꿈꾸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남미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남미의 현실을 문학이란 형태로 옮겨 당신들의 잃어버린 꿈을 빌려주겠다는 마르께스의 생각이 너무나도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미 속에서 꾸는 꿈을 발판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남미를 보고 있노라면 문학은 미래를 이야기 하는 예언적이고도 환상적인 인간의 의지의 결과물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들의 꿈은 어떤것인가?' 란 대답없는 질문을 해본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는 날, 우리 스스로도 '꿈을 빌려드립니다.'라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대답이 쉽게 우리들에게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기다리는 어리석음.  그러나, 우직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세상을 바꿔 갔었다는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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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4-2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병선 교수님의 수려한 번역도 한 몫했지요? 가장 좋아하는 단편집중 하나입니다.

클레어 2005-04-2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술술 읽히더군요. 네루다와 마르께스를 접하고 나니 남미 작가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또 수려한 번역이 있는 남미작가의 책을 찾아봐야겠어요.

하이드 2005-04-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병선교수님의 책을 추천합니다. ^^ 보르헤스 전집의 번역을 보고 나서야, 잘 된 번역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지요. 아니면,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남미문학들도 좋구요. 남미작가 좋아하는 분 뵈니, 반갑습니다.

클레어 2005-04-2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송교수님 책을 찾아봐야겠군요. ^^

파란여우 2005-04-2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습니다.
미스 하이드님과 지안님이 권하신 관계로...^^

클레어 2005-04-2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지네요. 마르께스가 파란여우님의 분석에 혀를 내두르게 될 리뷰를 기다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