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 창비교양문고 20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04. 1. 4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작과비평사,
1992년 4월 초판 발행, 2000년 12월 12쇄 발행

저는 초판본(컬러 도판은 책 앞에 4쪽 있고 책 사이사이에,
그리고 책 뒤에 부록으로 흑백 도판이 있는 문고판)을 샀는데,
2002년 2월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책 속의 그림과 사진을 모두 컬러로 바꾸어 양장본으로 낸 모양입니다.
개정판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초판본을 보면서 그림 자료가 아쉬웠는데,
그걸 보강한 개정판이 나왔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원제는 私の西洋美術巡禮.
재일교포인 서경식 선생이 일본어로 써서 일본에서 발표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 책을 산 것은 2002년 1월입니다.
작가나 여행가들이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보고,
서양 미술을 소개하는 책은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 공부하시는 어떤 분에게서,
그런 “비전문가를 위해 미술책” 붐이 일기 전,
서경식 선생이 쓴 바로 이 책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작은 문고판으로 나온 책이라,
요즘처럼 그림 자료를 다양하게 수록하고 화려하게 편집한 책과는
외양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리고 서양미술 전문가가 쓴 책도 아니지만,
과연 이 책은 그 동안 제가 본 미술관 여행기, 미술 입문서
그 어느 것보다도 독특했습니다.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림을,
어느 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제게 알려주신 그분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아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바로 서승, 서준식 형제의 막냇동생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서승, 서준식 형제는,
조국을 배우고, 독재정권 아래 조국이 나아갈 길을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잠시 북한에 다녀온 일 때문에 간첩 혐의를 받고 옥에 갇힙니다.
그때부터 일본에 있던 그들 가족은 오로지
두 형제를 구해내는 데에 생활을 바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서준식 선생은 1988년 5월 17년 만에 세상에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인권운동가로서 살고 계십니다.
19년 동안 옥중에서 생활한 서승 선생은,
취조실에서 고문에 못 이겨 시뻘겋게 달아오른 난로를 껴안고
죽으려 하다가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1990년 2월말 출소한 서승 선생은 지금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신다 합니다.

이런 와중에 무슨 미술 이야기냐고요?
197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 한국으로 먼 옥바라지 길을 다니던
이들 형제의 어머니가 1980년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뒤,
서경식 선생은 누이와 함께 1983년 10월 난생 처음 유럽 여행을 떠납니다.
"부모를 잇따라 잃고 허탈해진 누이에게 기분전환 한번 시켜주자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 "기묘하게 경건한 심경"으로.

그리고 "헤엄치듯이, 떠밀리듯이, 단지 관광지를 돌아다닐 뿐"이었던 그는,
벨기에 브뤼헤(브뤼주)에서 그 그림(그게 무엇인지는 책에서 보십시오)을 보고는,
그만 순례를 시작하게 됩니다.
아픔과 피, 절규와 고뇌로 얼룩진, 서양미술 속의 인간사를 찾아서.
그것들을 보며 서경식 선생은 그 아픔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달래고, 스스로를 단련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이 매우 어둡기만 한 듯 여기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아름다운 그림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흐도 이야기합니다.
고흐 이야기는 워낙 많은 책에 소개되었지만,
서경식 선생은 다른 것을 느낍니다.
고흐와 테오 사이에 '창조하는 인간'과 '그것을 감상하는 인간'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단절이 있다지만,
서경식 선생은 역사 앞에서 자신을 채찍질한 두 형과 자신 사이의
단절을 그렇게 간단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여행하면서 이런 경험도 합니다.
피레네 산맥에 걸쳐 있는 바스크 지방은 프랑스와도, 에스파냐와도 다른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지닌 바스크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곳을 차지하고자 오래 경쟁을 벌여온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1659년 바스크 사람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맘대로 이 지방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바스크 지방은 피레네 산맥 양쪽으로
프랑스령과 에스파냐령으로 갈리어 있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이런 바스크 지방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스파냐를 여행하다가 바스크의 국경 마을인 안다유로 갑니다.
안다유 기차역의 승강장에 바로 국경선이 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프랑스로 가는 승객들은
기차에서 내려, 에스파냐 출국검사소를 거쳐 프랑스 입국검사소를 통과한 뒤
프랑스 쪽 기차로 갈아타야 합니다. 

에스파냐 출국검사소를 지키던 경찰관은
국적이 "Republic of Korea"라 적힌 서경식 선생의 여권을 보고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슥 자르는 시늉을 하더니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가 아래로 뒤집어 보이며
"남이요? 북이요?" 하고 묻습니다.
'남'이라면 상관없지만 '북'이라면 쉽사리 국경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서경식 선생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아래쪽으로 돌려 보였다 합니다.
'남'이란 뜻으로요.

"그래, 여기서는 조선이란 무엇보다도 분단국가로서 알려져 있을 테지.
어느 민족의 분단이 그 민족을 식별하는(identify) 지표가 되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뭔가? ......
게다가 나는 방금, 분단된 자기 민족의 어느 한쪽 나라에 자기가
소속한다는 뜻을, 이국의 관헌 앞에서 승인한 것이다. 이 승강장 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저편에 기다리고 있는 기차를 타겠다는,
단지 그것뿐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면, 본시 이곳에 살고 있는 바스끄인들 자신부터가
자기네 땅의 이쪽 저쪽을 왕래하는 데 일일이 두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변을 오가는 바스끄인 누군가를 붙들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당신네 나라는 스페인인가 프랑스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쁘라도 미술관에서 지겹게 스페인의 독기를
쐰 뒤에 바스끄 땅에 서 있는 내가 무척 과민해져 있는 탓이리라."-95쪽

참고 삼아 적자면, 이 책의 73쪽에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선 서경식 선생이
"아까의 그 차마르틴 역에서 본 일본인 샘통이 여기에도 왔을까,
왔다면 도대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우리말로 "쌤통"이라 하면
"남이 낭패 본 것을 고소해하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샘통"이란 말은 그 뜻으로 쓰이진 않은 듯해서,
원래 서경식 선생이 쓴 단어가 무엇인지 창작과비평사 홈페이지에 문의했더니,
아래와 같은 답글이 달렸습니다.

"지적하신 대목은 원저의 ふくれっ面이라는 말을 의역한 표현입니다만,
역자 박이엽 선생님께서 작고하셔서 직접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ふくれっ面'는 '(불만에 가득 차) 뽀로통한 얼굴'이란 뜻이므로
중쇄작업을 진행하면서
원문의 뜻을 독자분들이 명확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바로잡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샘통 대신 "심통"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다음 쇄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제가 가진 초판 12쇄본에는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140쪽에 얀 반 아이크의 생몰 연도를 1380~1425년으로 적고는,
144쪽에는
"로베르트 캄핀의 출생년에 대해서는 1375년에서 80년까지
여러 설이 있는 모양이나 사망연도는 1444년이 분명하다.
얀 반 아이크보다 2, 3년 일찍 태어나, 3년 더 살았다는 이야기다."고 했습니다.

로베르트 캄핀이 얀 반 아이크보다 3년 더 살았다면
얀 반 아이크가 사망한 해는 1425년이 아니라 1441년이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천리안과 엠파스로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얀 반 아이크 생몰 연도를 1395?~1441로 해놨더군요.

얀 반 아이크가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사망한 해는 이 책 본문의 문맥이나 백과사전 자료에서나
1441년이 맞는 듯합니다.
개정판에는 생몰 연도 표시를 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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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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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5. 14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범우사


아웃사이더, 주변인, 뭐 이런 말은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윤리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아웃사이더The Outsider>(1956)란 이 책, 콜린 윌슨Colin Wilson이란
영국 아저씨(1931년생이라는데, 아직 살아서 활동하는 모양입니다)가
쓴 이 책을 전 처음에 소설인 줄 알았어요.
프랜시스 코폴라라는 미국 영화감독이 만든 <아웃사이더The Outsiders>(1983)란
영화의 원작 소설인 줄 알았다니까요.

코폴라 감독의 영화를 다 해진 비디오(정말 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
였지요. 등장하는 배우들 얼굴도 제대로 구별이 안 됐어요)로 본 것도
이 책을 읽은 1998년이었는데,
그 영화가 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알고 있었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어릴 적에 이쁜 얼굴로 날렸던 배우들이
모두 그 영화로 뜨기 시작했다고 들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잡지를 보면 맷 딜런이니 로브 로, 랠프 마치오,
톰 크루즈 , 다이안 레인 등등이 나올 때마다
저 영화 제목이 꼭 등장했답니다.

음, 그런데 이 책은... 독특하더군요.
비평서라고 해야 할까,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고
그것을 비평하는 형태이니 우선 평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지은이가 후기에 적었듯이 '신실존주의'라는 철학을 창안한
철학 책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웃사이더'는 주류에 끼지 못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다수 대중에게서 스스로를 구별하는 철인(哲人)입니다.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응시하는 사람.
그러나 응시하다가 저 혼자 신이 되는 사람이랄까.

불교의 수행법도 결국 스스로를 응시하다가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본래의 자신,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일부, 생명의 하나로 보는 겸손한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인간' '거인'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니체의 철학을 모르지만,
왠지 이것이 극단으로 나아가면 절대 권력자를 숭앙하는
파시즘으로 가리라는... 나치즘의 백색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구절 한 구절 뜯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진작 이 책을 알지 못했을까...
읽으면서 안타까워했어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것.
그리고 콜린 윌슨이라는 사람, 겨우 25세에 이런 책을 썼단 말이지,
하고... 놀랐지요.

이 책을 읽고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영화의 실존 주인공,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란 사람도 알았습니다.
대한극장이 지금처럼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직전에
70mm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했을 때 가서 봤는데,
이 책을 읽은 뒤라서 느낌이 달랐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범우사에서 1974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4년 2판 7쇄를 찍은 범우사상신서 19권 <아웃사이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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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04. 4. 21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 045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박규태 지음, 2001년 8월 초판 1쇄 발행

 

책세상 출판사에서 2000년 봄에 펴내기 시작한
우리시대 문고는 우리 출판계의 새로운 실험이란 점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1980년대 이후 문고판이 독자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것도 다 소설이었지요.
소설이 아니라 해도 대개 고전을 번역해놓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책세상문고의 우리시대 시리즈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소장 인문학자들이
새로이 쓰는 인문교양 문고라는 점에서,
한국 출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 1권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을 읽고,
생각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좀 낯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정체성이란 게 대체 뭔가 하는 궁금증으로 이 책을 사 보았는데,

책의 내용은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다,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은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정체성이란 게 뭔가 하는 것이더군요.
독자에게 "이런 이런 과정과 방식으로 생각해라" 하는
사유의 교본이랄까요.

이른바 "한국적"이라고 하면
흔히 현대의 우리 모습이 아니라 왠지 옛것, 전통 문화만을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다, 한국의 정체는 현대를 살아가는,
뭔가 뒤죽박죽인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인 듯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시대 시리즈 45권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을
산 건 아마 신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를
제가 아주 좋아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어찌 일본인의 마음을 다 알겠습니까.
다만 일본 사람들은, 일본 문화는 예로부터 "몸"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전에 <세계의 유사 신화>란 책에서 일본의 창세 신화를 읽었을 때도
이렇게 에로틱한 신화는 더 없을 거야... 생각했더랬지요.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에는 그 에로틱한 창세 신화
(일본 땅이 생겨난 내력을 이야기하는 신화)가 좀더 자세히 나옵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신이 관계해서 일본 땅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지요.
일본의 성(性)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니 문란하니 말이 많은데,
어찌 보면 인간, 자기 자신의 몸을
자연 그대로 긍정하는 데서 나온 문화는 아닌지...
우리는 유교 전통 속에서 몸을 꽁꽁 숨기고 가리고,
억압했다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인간의 몸을 중시했다는 건 현실 긍정으로도 이어지나요.
일본의 종교는, 심지어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세계적 종교도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현실, 현세, 실존하는 세계를 긍정하는 경향이랄까요.
우리나라의 종교들이, 결국 현세의 복을 구하면서도
이승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궁극적 목표를 극락왕생, 죽은 뒤 천국 가는 데 두는 것과는 대조됩니다.

일본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와 일본의 전통 문학, 사상 등등은 모두
사물과 자연의 정조를 느끼는 것을 가장 높은 덕으로 친다고 합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른바 "사물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것",
그걸 "모노노아하레(物哀)"라고 한다는데,
문득 한국의 민간 신앙, 샤머니즘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을 부를 때 호토케(佛 : ほとけ)라 한대요.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가리켜 "고인"이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 말이 "부처님"이란 뜻이라니,
모든 사람이 곧 부처라는, 현세의 모순투성이 인간 하나하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심성이 여기서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고 이 책의 지은이께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또 매년 7월 13일(지역에 따라서는 8월 13일이나 음력 7월 13일)은
오봉(お盆)날이라 하여 우리의 추석 때처럼 국민적 대이동이 일어나는데,
오봉날은 원래 우란분(盂蘭盆), 곧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며
예불을 올리는 불교의 명절에서 왔다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날 타계(주로 산)에 있던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찾아온다 하여, 이날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간다고 합니다.
모든 현세의 존재를 신성시하기에
죽은 우리 자신들(조상이나 죽은 원혼)에 대해서도 삼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현세와 존재 자체를 긍정하다 보니 선악의 엄격한 구별도 모호해,
18세기에 일본 국학을 완성했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모노노아하레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선악의 중요한 관건"으로
본다는군요. 선악의 기준이 윤리적이라기보단 미학적인 셈이지요.

그런가 하면 외부에서 전래된 신앙이고 사상이고 간에
온갖 것이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전통적인 것과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변증법적인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냥 "정신적인 잡거성"(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을 이룬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책의 본문을 조금 옮겨보겠습니다.

"일본인은 어떤 새로운 것(타자, 다시 말해 불교)을 수용할 때,
그것을 끊임없이 이전의 것(자기, 다시 말해 신도)과 동화시키고 현재화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형성된 '현재'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냥 계속 첨가되어 축적된다. ...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처럼 자기와 다른 타자를 일단 무한정 포용하여
그것을 자기 안에 평화 공존시키는 일본인의 사상적 관용성을
'정신적 잡거성'이라고 비판했다."(49쪽)

그렇다고 해도 역시 한 나라 사람들, 한 민족의 마음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 유학해 불도를 닦고 와서
아주 독특한 종파를 창시한 중세 일본불교의 창시자들은,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절망 끝에 나온 결론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오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입니다.
고백하건대 유물론자였던 제가 모자라나마
자연과 세상 만물에 대해 삼가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게 된 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들 덕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노노케 히메>는 최대, 최고 걸작이지요.

책제목에 나오는 아마테라스는 태양신인데,
지금은 보통 여신으로 보지만 고대에는 남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듯... 고대 일본 신도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신이랍니다.

책 끄트머리에 "더 읽어야 할 자료들"이라 해서
일본의 신화나 종교,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책만 있는 게 아니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1990)도 있습니다.
묘하게도, 지금(4월 16일부터 25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을 합니다.
어제 <7인의 사무라이>를 보고 왔는데,
사실 요즘 시간도 여의치 않아
그냥 오랫동안 벼르던 <7인의 사무라이>만 보고 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으며 "더 읽어야 할 자료들"에
이 책의 지은이가

"거장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로는 <라쇼몬>(1950)이라든가
<칠인의 사무라이>(1954)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내게는 <살아가기>(1952)라든가 <붉은 수염>(1965)을 보면서
밤새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꿈>은 여덟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인데,
그 중 제1화 <여우비>, 제2화 <복숭아밭>, 제5화 <까마귀>,
제8화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쓴 부분을
본 것입니다.

<살아가기>는 <이키루生きる>인 것 같고,
<이키루>와 <붉은 수염>, <꿈>까지 다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합니다.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보러 가야겠습니다.
이 책을 산 건 2001년 9월이고,
올 3월 초부터 계속 읽으려고 갖고 다니다가,
하필이면 지금에야 다 읽었습니다.
진작에 읽었으면 지은이가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했던 것도 다 까먹었을 텐데.
무슨 인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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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98. 11. 8

우리 시대의 문화 : 호모심볼리쿰 18
<게으를 수 있는 권리 Le droit a la paresse>
                              - -> 위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삐침 있음
폴 라파르그(Poul Lafarge)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1997)



그냥 폴 라파르그라고 하면 누군데?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사
람도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라고 하면 마치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일 것이다. 그 폴 라파르그가 1880년 [평등 L'Egalit]이란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에 이 글을 썼고, 이 글은 1883년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소책자로 출판됐다.

새물결 출판사에서는 미국어판을 그대로 번역한 듯 영어판 서문을 앞
에 싣고 뒤에는 프레드 톰슨이란 사람이 쓴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를 묶어 182쪽짜리 책으로 만들었다("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글 자체의 길이는 80쪽 정도다). 그리고 영 팔리지 않을 것
같았는지 보통 단행본보다 두꺼운 종이에 인쇄하고 양장본으로 만들
어 7500원이란 값을 떡 매겨 버렸다.

못마땅한 일이지만 몇 년 전 한겨레신문에서 이 책에 관한 글을 읽고
언제 우리 말 번역판이 나오나 고대하던 나 같은 소수 독자나 사 줄
책인 모양이니 별수 있으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글 자체는 논쟁적인 정치 팜플렛인지라 학술
논리로 글을 이끌기보다는 일 중독증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기를 인정사
정 없이 공격하는 말투로 시종일관한다. 그러니 가끔 고대 노예제 사
회의 시민을 찬양한다든가 이성애 남성 중심적인 표현을 쓰는 건 너그
럽게 건너뛸 필요가 있다.(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다. ^^;)

사실 노동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이다. 지나친 노동은
인간의 몸을 약하게, 또는 다치게 하고 자연 환경을 파괴하며 인간의
정신을 일정한 틀에 얽어매 버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보다 일 그 자체에 종속되어 버린 듯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삶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일하지 않으면 바로 죽어 버릴 듯이 일 그 자체에 매
달렸다. 몇 년 전에 한창 유행한 "프로는 아름답다"는 글귀를 보라.

폴 라파르그는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일하라고 말하는지 폭로한다.
"기독교적인 순종을 내세운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인 타운센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일하라, 일하라, 밤낮으로 일하라. 일하면 더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법의 힘으로 일을 강요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
주리라.' 법의 힘을 빌린 노동의 강요는 '너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너무 많은 폭력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소음을 만들어 낸다. 이와 반
대로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끊임없는 압력일 뿐만 아니라, 일과
산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이고, 또한 가장 강력한 노력을 불러일으
키기도 한다."(59-60쪽)

곧 "장사를 선교하려는 자들the missionaries of trade과 종교를 팔아
먹으려는 자들the traders of religion이 기독교 신앙과 매독 그리고
노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등, 온갖 것으로도 아직 타락시키지 못한
고결한 미개인을 보라. 그리고 나서 비참하게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버
린 현대인을 보라."(45쪽)

현대의 과잉 노동에 따른 과잉 생산은 산업의 위기를 부르고, 생산물
을 다 팔 수 없는 기업은 일자리를 줄이고, 따라서 돈을 벌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배고파서 오직 일자리 찾기에만 매달리게 되고("우리에
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는 일할 권리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아닌가), 그나마 직장에서 떨려 나지 않은 사람들은 짤리지 않
기 위해 더욱 일에 파묻힌다. 더 낮은 임금과 더 많은 노동 시간을
감수하고.

"낮이 끝나면 반드시 밤이 오듯이 지나친 노동 뒤에는 공황이 오는 것
을 피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집단 해고와 가난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산업 또한 어쩔 수 없이 파산하게 될 것이다."(62쪽)

하지만 그러기 전에 "제조업자들은 쌓이고 있는 상품들의 시장을 찾아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닌다. 그들은 면화 제품의 배출구(시장)를 찾기
위해 콩고를 병합하고, 통퀸을 점령하고, 대포로 만리장성을 공격하라
고 정부를 몰아붙인다. ... 상품 뿐만 아니라 자본에도 잉여분이 있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그것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면
이들은 담배를 피우며 태양 아래서 한가하게 빈둥대고 있는 행복한
나라를 찾아내 기차 선로를 놓고 공장을 세워 그 저주받을 노동을 수
입한다."(64쪽) 그리고 그러한 산업 식민지에서 이 모든 과정이 되풀
이된다.(우리 나라 기업들이 외국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근면'만을
강요하며 노조를 탄압하는 추태가 생각난다.)

인간의 기술력과 기계가 이 노동의 족쇄를 풀어 줄까? 그러나 "노동에
대한 맹목적이고 완강하며 가히 살인적인 열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
줄 기계를 자유로운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기계로 변질시켜 버렸
다. 이리하여 기계가 많이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만큼 인간은 궁핍해
지게 되었다."(67쪽) 왜냐하면 기계가 일을 대신해 주는 만큼 노동자
들이 노동 시간을 줄이고 휴일을 더 많이 가지게 되기는커녕, 자본가
들은 기계 수를 늘리는 대신 노동자 수를 줄이고, 남은 노동자들은 기
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노동 강도를 더욱 높이고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시간만큼 노동 시간을 늘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람
들은 말한다. "신성한 노동,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일이 가장 즐
거운 나는 아름다운 프로!"

노동이 신성시되는 반면 소비는 죄악시된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재
화와 용역은 누군가 소비해야만 돈이 되는데, 노동자들은 그것들의 소
비 현장에 들어갈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 "분수에 어긋나는 소비는
경제의 적!" 분수에 어긋나는 소비라. 그놈의 분수란 누가 정해 놓은
기준이란 말인가?

그런데 "과잉 생산으로 죽어 가고 금욕주의 때문에 메말라 가는 노동
자의 이중적 광기에 직면하게 된 자본주의 생산의 커다란 문제는, 더
이상 생산자를 찾거나 생산력을 배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발
견하고 이들의 식욕을 자극해 허구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데 있다."(7
7쪽) 그래서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았다는 말이 자랑이 된다.

그래서 라파르그는 주장한다.
"왜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
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
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뺏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81쪽) - 이게 바로 IMF 시대 우리
나라가 부닥친 문제의 해답 아닐까?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고 노동 시간을 줄이면 자본가들
이 기를 쓰고 기계의 생산성을 높일 테니 결국 인간은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으리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노동 시간을 줄여
생산 과잉을 해소하면 원자재도 적게 소모될 테고, 따라서 환경도 그
파괴 속도를 늦출 테고, 사람들이 환경 보호에 투자하는 시간도 늘어
날 테고, 자연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심신을 맑게 할 여유도 늘어나
리라고. 생산이 줄어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면 될 일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중에 다음과 같이 게으름을 설교했다. '저 꽃들이 어
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는 못하였다'(공동번역성서 루가 12:27 - 역자).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의 본보기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48쪽)

그러면 인간은 왜 게을러야 하나? 라파르그는 글 끄트머리에 이렇게
게으름을 칭송한다.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95쪽)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
는 게으름은 이기적인 소유욕의 반대말이며 부지런히 돈만 좇게 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적이다.

폴 라파르그가 하루 노동 시간 12시간인 시대에 이 글을 썼다면, 프레
드 톰슨은 하루 노동 시간 8시간인 시대(1989년쯤)에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를 썼다. 노동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리
고 노동자들이 소비와 여가에 신경쓸 수도 있게 되었지만, 진정 게으
를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지는 않았다. '여가'가 산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동화 인간Homo automobilis'은 지출 경비, 산업 재해 그리고 환경
파괴 면에서 '도덕적으로 볼 때 전쟁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을 자행
하고 있다. 열악한 보수를 받는 날품팔이꾼인 우리로서는 '계약금도
없이 외상으로 우리의 족쇄가 될 자동 레저 기구를 사들여서', 돈을
갚기 위해 야근이나 부업을 하고 그래서 줄어든 여가를 더욱 더 광란
적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 가며 소비하게 된다."(155쪽)

곧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그만큼 이에 상응하여 여가 시간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자동 기계와 그 연관 산업이 기술적-경
제적-문화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 산업은 해롭다고 여겨지
는 분야에까지 서비스 산업을 확장해 이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
었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그리고 정부 정책에 따라 우리는 한 장소에
서 일하고 수 마일 떨어진 다른 곳에서 수면을 취하고 또 다시 다른
곳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은 이런 결
과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술수를 부리지만, 실제로 이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재화를 모두 빨아먹는다. 우리의 문화
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다니고, 우리를 지배
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삶의 양식을 자유라
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158쪽)

그래서 프레드 톰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이 동료와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160쪽)

좋은 말이다. 찬성한다. 하지만 프레드 톰슨 역시, 무작정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게으르게 보내는 시간에 뭔가를 채워 넣으려는 강박 관념
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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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이거 제가 쓸려고 와봤더니 숨은 아이님이 이미 너무 잘 써주셨네요. 저도 이거 처음 나왔을 때 샀는데...추천 제가 했어요. 흐흐.

숨은아이 2005-03-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오래 전에 쓴 것인데, 너무 잘 쓰기는요. 쓸데없이 길기만 하구만요. --a 바람구두님 리뷰 써주세요! 보고 싶어요! ^^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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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4. 1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지음, 송은경 옮김.
오래 전에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를 읽고 천리안의 애서동에
글을 쓰면서, 다음에 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고 글을 올리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인지 몰라. ^^;

그 뒤에 이 책을 읽긴 읽었는데,
요 3년간 정말 사생활이 거의 없이 살았거든요.
그러다 올해 들어 내 시간은 내가 챙겨야 한다고 생각,
감히 다시 글을 올리기 시작했죠.

'게으름'이란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잇따라 산 걸 보면
그 무렵 '근면'이란 가치관에 회의를 품게 되었나 봅니다.
전에는 일이 재미없을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죠.
내 마음에 드는 책, 나를 자극하는 책을 만드는 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별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라도,
엉망진창인 원고 상태를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는 먹게끔 뜯어고쳐 말끔히 수리해냈을 때,
정복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일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날것과 같은 재료를 가지고 책을 만드는 재창조 과정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사생활도 없이 한 1년을 그 '재미있는 일'에
모조리 바치고 나니, 여유 시간이 나자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바쁜 일 사이의 짬,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도 많이 있습니다.
전시회나 공연, 그리고 그 동안 자주 못 만난 사람들...
나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고...
일말고도 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야근에 저녁 시간을 온통 바쳐야 할 시기가 옵니다.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일에 묶여 있을 때는
이 일만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나면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일의 족쇄에 팔다리가 묶여서야 안도감이 든단 말입니다.

노예, 일의 노예.

한 3년 전부터 계속 되풀이되는 일입니다.
이제는 좀 여유를 찾았지만,
그래도 여전한 것은 일을 많이 할수록
할 일이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프랑스의 공산주의자인 폴 라파르그가
노동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일 자체는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 팜플렛입니다.

19세기 말에 그는 이미 6시간 노동제를 주창하면서,
열 사람이 하루에 열두 시간 걸려서 할 일을
스무 사람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하면,
스무 사람이 모두 먹고 살 수 있고, 또 스무 사람이 모두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현대의 신자유주의 시장에서는 스무 사람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일하는 데가 있었다 해도, 열 명은 자르고 나머지 열 명에게
그 일을 다 하라고 강요하죠.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면 남은 열 명은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을
빼앗깁니다. 쫓겨난 열 명은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은 있지만 생존을 위협받죠.
먹고 살 수단이 없는 마당에 문화를 어떻게 향유한단
말입니까.

열 사람의 근면, 그 반대편에는 열 사람의 빈곤이 있는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였던
영국의 철학자 러셀(1872-1970)의 정치 칼럼
혹은 문명 비평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1935년에
영국에서 책으로 묶여 나왔고, 제가 읽은 책은 사회평론에서
1997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8년에 3쇄를 찍었습니다.

재미있는 글이 많지만, 표제작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주장은
폴 라파르그의 이야기와 상통합니다. 근면이란 노예의 도덕이며,
노동은 인간 생활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란 이야기이죠.

그들이 19세기 말에, 그리고 1930년대에 이미 한 이야기를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야 되새긴다니.
하긴, 그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어도
자본주의의 바퀴는 미쳐서 돌아갔지요.

이제는 사이버자본주의의 시대, 그러나
기계가 발전할수록 인간이 더 편해지는 게 아니라,
노동 시간이 더 늘고 노동 강도가 더 세어지는 건
어딜 봐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세 사람이 나누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사흘 걸려 할 일을,기계가 좋아지니
한 사람이 열두 시간에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잘리지요.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하루에 열두 시간 일해 일을 다 해냅니다.
나머지 이틀은 쉬냐구요? 아니지요.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으니
일거리가 계속 늘어납니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이라는 글에서 러셀은
실용주의적인 지식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비판하지요.
실용주의적인 지식이란 바로 생산, 곧 돈벌이에 직결되는 지식일
테지요. 러셀은 '무용한 지식'이 얼마나 유익한지 말해줍니다.

<인간 대 곤충>, <혜성의 비밀>의 통찰력과 유머를 비롯해,
이 책에 실린 나머지 그리 길지 않은 글에서
신선한 충격을 맛보는 기분은 꽤 좋습니다.
뭐 물론, 그가 서구 문명에 속한 사람이라는 한계는
은연중 드러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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