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백을 시작하기에도 그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을 것 같다. - P9
강력범죄수사1계 강력1팀 형사들이 정철희에 대해 험담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경찰청장에서부터 서울청장, 강수대장, 강수계장, 팀장까지 신나게 씹어대다가도 정철희 반장은 건너뛰고 다른 선배나 동료 형사의 흠을 잡는 것으로 넘어간다. 형사들은 정철희를 존경하는 것 같았고, 어느 정도는 분명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 P15
나는 내가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건 신이나 양심이나 내면의 목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멀어지는 사이렌 소리나 경찰 마크나 형사 한두명도 아니었다. 내가 상대해야하는 것은 이 사회의 형사사법시스템이었다. - P23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나쁜 형사에 취약해. 그러니까 이 시스템에 몸담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나쁜 부품이 되면 안 된다는 거야. 차라리 헐렁하고 게으른 게 나아. - P26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로 정의롭고 또 인간의 생명도 중시하는 편이지만, 정의와 인명이 전부인 것은 아니며 늘 그것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 P28
만약 내가 마침내 살인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개발한다면, 그 논리를 믿는다면, 그걸 입증하기 위해 반드시 두 번째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고 스타브로긴은 거듭 주장한다. - P56
"반장님은 이게 면식범 소행일 걸로 보세요?" 연지혜가 물었다. "아니." 정철희가 짧게 대답했다. "왜요?" 연지혜가 물었다. "면식범이면 잡았을 거야." - P75
"기록이 좀 허술하네요." 수사보고서를 한 시간 정도 검토한 뒤 연지혜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 P89
모순들은 모든 사건의 특징이다. 어떤 모순점은 범인이 잡히고 난 다음에도 해결되지 않는다. 범죄는 인간사이의 상호작용이고, 인간들의 활동은 무엇이건, 언제나, 앞뒤가 잘 안 맞는다. - P103
좋은 인간을 완성하는 것은 고난이다. 좋은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사상가와 작가들이 그린 유토피아에 대해 들으며 우리는 도리어 섬뜩함을느낀다. 그런 곳은 좋은 사회일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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