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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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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저자와 논쟁하고 또 논쟁했다. 그 논쟁은 초반보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좀 더 길고 복잡해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10명이다.

 

책 뒷면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자면,

 

로댕의 그늘에 가려져 결국 정신요양원에서 생을 마친 카미유 클로델

천상으로 가는 여정을 세 발의 탄환으로 앞당긴 반 고흐

아들과 손자의 전사 통지서를 손에 쥐어야 했던 케테 콜비츠

소아마비, 교통사고, 서른두 번의 수술, 바람둥이 남편에 시달린 프리다 칼로

조국의 냉대와 지독한 외로움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권진규

세계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으로 살다 간 백남준

세 아들과의 원치 않는 이별로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던 이성자

불안감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마크 로스코

가난하고 못생기고 초라한 진짜 자신을 숨기기에 바빴던 앤디 워홀

낙서화로 스타가 되었지만 결국 거리의 부랑아로 세상을 떠난 바스키아

 

돌이켜보니 논쟁이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딱 절반을 넘어서서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는 순서였던 백남준 편부터였던 것 같다. 세간의 평들이 저자의 관점처럼 그저 새롭다는 측면에만 너무 몰두해서 많은 부분 과대포장 돼있고 왜곡돼 있으며 그로 인해 또 많은 부분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은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비교적 명확하다. 따라서 심상용의 많은 따끔한 지적들은 분명 다소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문화가 잉태되고 소비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분명 큰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런 전복적인 관점들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거기다 그런 자신의 관점들을 상당히 단호하게, 마치 비겁한 자본주의자들과 그들에게 속아넘어간 무지한 대중들을 꾸짖는 듯해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저자가 굉장히 일관된 기준을 갖고 저술을 했기에 나 역시 크게 2가지 부분에서 일관된 반론이 생겼는데, 첫 번째는 백남준이 선두에 있는 현대미술의 특징, 그러니까 기존의 가치관이나 대중의 기대를 전복시키는 것 자체로 충격을 주고, 예술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었던 많은 흥미로운 퍼포먼스들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본조차 연마하지 않고 특정한 사물에 그럴 듯한 개념만 부여한다고 그것이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데에는 예술에 대한 특권의식이나 권위의식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읽혔다.

 

물론, 어떤 분야에서든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그 고민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한 기술을 숙련시키는 사람은 존경 받고 인정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 ‘Pop’ 하고 튀어나온 생각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무엇보다 소위 개념미술이나 ‘Pop 아트라는 것은 그 속성 상 웬만큼 대단한 개념이 부여되지 않거나, 웬만큼 Pop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평론가에게든, 대중에게든,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그 후에 다른 사람이 비슷하게 해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제일 처음 했다면, ~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던져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때에는 변기를 떼어다 놓고 그것을 이라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더러운 똥을 가득 담은 깡통을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파는 식의 파격들이 시도되면서 이것이 예술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을 낳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 비슷한 행동들이나 개념부여만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이나 피에르 만조니의 경우에는, 심상용 씨와 비슷한 관점에서 현대예술과 현대예술에 가치를 인위적으로 부여하는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소위 예술을 좀 한다/안다 자부하며 그것을 뭔가 특권처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함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앤디 워홀과 역시 백남준 편에서 두드러지게 그가 주장했던 생각에 관한 것인데, 그 인물이 본래 타고난 성정이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게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져있던 상황에 대한 도피,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함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추앙할 필요가 없다며 까발려 놓은 앤디 워홀과 백남준의 성장배경(?)에 관한 얘기들이 참으로 보기 거북했다.

 

앤디 워홀의 본명이 원래는 워홀라라는 촌스러운 이름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고자 예술을 이용했다는 일관된 지적, 그래서 우리는 앤디 워홀의 작품을 통해서 사실은 워홀라였던 워홀의 껍데기만을 보고 있다는 식의 해석은 좀 그랬다.

 

물론,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면 그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에 불만을 품고 숨기고 싶어했다고 해서 단순히 그것을 비난할 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앤디 워홀이 본래의 자아를 벗어 던지고 싶어서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 역시도 앤디 워홀이 대단한 지략가였으며 현실에 밝아 예술가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의 면모가 많이 두드러졌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스러운 워홀라가 사실은 앤디 워홀의 진짜 모습이라는 시각은 불쾌했다.

 

지금 글로는 모두 정리하기 힘든 저자와의 대화 혹은 나 혼자만의 상상 토론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데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 리뷰를 쓰기까지도 그랬다.

 

저자의 관점들은 때로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줬고 일침을 가했으며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반박하고 싶게 만들었다. 위에서는 주로 반박하고 싶었던 부분에 대해서 썼지만 실제로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나 자신까지도 돌아보게 만드는 고마운 부분이 더욱 많았다는 점은 꼭 밝혀두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줄을 많이 쳤고 그것을 모두 옮겨 적었다. 밑줄의 의미는 놀라움, 새로운 정보, 공감, 깨달음과 함께 반발심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 포함한다.

 

카미유는 연이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교회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고, (연인으로부터) 배신당했고, (가족에 의해) 유기되었으며, (작가로서는) 과소평가되었고, (정신질환자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P.50

 

평생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며 살고자 했던 그의 계획은 오래가지 않아 큰 시련에 봉착했다. 사태는 지역의 위원회가 반 고흐의 설교의 웅변술이 목사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복음 사역자의 활동을 중단할 것을 통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P.65

 

고통을 받을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기 어려운 법칙이지만, 최고의 법칙이다." (알프레드 드 뮈세 Alfred de Musset)

P.78

 

이는 고스란히 콜비츠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1914 10, 그녀는 막내아들 페터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1942년에는 히틀러가 시작한 전쟁에서 사랑하는 손자가 사망했다.

P.94

 

예술이 자의식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사적 탐닉, 욕망과 상실을 둘러싼 저급한 영성이 벌이는 모노드라마가 되는 것은 일찍이 예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기몰이를 하는 주제가 자기도취, 자조, 자기 상처 핥기 같은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관계가 무너졌을 때 가장 우선적인 희생자는 바로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P.103

 

그녀에게 그리기는 비워 내고 대상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마음에 거하는 폭군의 흔적들, 곧 자아의 핵심을 향해 짖어 대는 개들을 길들이고, 노예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하는 방법이었다.

P.125

 

트라우마는 비가역적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상처의 인식도 치유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제아무리 첨예한 인식도 그 자체로 치유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고통과 깊게 팬 상처에 필요한 것은 치유이지, 인식이 아니다.

P.134

 

만연한 실존주의 맥락 안에서는 고작 출구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최대 용기다. 각성된 자아로 부조리를 견뎌내는 게 유일한 최선이다.

P.134

 

결국 인생이란 출구도 해결책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우연이 유일한 주관자일뿐인 '더러운 여행dirty trip'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P.134

 

권진규가 유독 그랬다. 유독 실존의 추위를 타고, 고통을 감지하고, 더 많이 앓고 아파했다. 희망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P.170

 

노예처럼 매매되고 소유되고 세금이 부과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불명예스러운 재산 목록 중 일부로 환원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부응해 다른 사물들과 동등하게 변화하소 소멸되고 사라지는 덧없는 예술을 훨씬 더 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P.182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백남준은 관례를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데 동참했던 것 이상으로, 파괴나 해체의 관례화된 흐름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P.185

 

이에 대해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나는 6•25 때 북한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난 뒤부터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P.188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가 말하는 이방인은 '새로 온 사람new comer', 즉 고국을 떠나온 사람으로서 "장차 문화적 잡종이나 주변인으로 계속 남을지 아니면, 자신의 특성과 이방인의 어려움을 다 떨치고 완전히 동화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P.193

 

'백남준 예찬'의 이면에는 '이번엔 우리의 것'이라는 식의 천한 민족주의적 욕망이 혼합되어 있다. 그의 명성을 교두보 삼아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거저 입증하려 드는 꿈틀거리는 욕망 말이다.

P.203

 

그래서 더욱 그림에 매달렸어요. 내가 붓질 한 번 더하는 것이 아이들 옷 입혀 학교 보내는 것이고, 밥 한 술 떠먹이는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죠.

P.214

 

악취가 진동하는 문명의 우물을 퍼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여지를 찾기 어려운 시대의 난감한 보고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와 판단은 어리석게도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허우적거림과 그것에서 빠져 나오려는 발버둥을 혼돈한다.

P.223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작품만 못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작품보다 낫다. 그런데 찰스 윌리엄스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책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P.229

 

그 믿음을 버리기로 작정한 시대의 허공으로 이내 산화되어 버리고 말지라도, 이성자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예술이 존재의 왜소함을 넘어서는 유력한 길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P.230

 

마크 로스코 자신이 적대시하던 속성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으로써,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 회피해야 할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신과의 대면은 곧 적과 마주하는 것이므로, 그 고조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회피하는 '방어적인 주의 산만' 외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P.250

 

바스키아의 낙서 형식의 특성은 무정부적인 태도로부터 연유한다. 낙서는 문명과 사회에 대한 반동과 전복의 상징적 언어다. 뉴욕이 유럽의 전위미술을 탐미하는 동안 표현의 무대라고는 음습한 뒷골목과 기차역밖에 가진 것이 없었던 소외 계층의 반항아들에게서 자생된 언어였다. 그 언어는 당연히 제도권 예술의 전통적 표현을 거부한다. 그들의 공간에서 진지함과 숙련된 기술은 실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거칠고 찰나적인 실현만이 가능하며, 언어는 화풀이 수단이 될 때 유효하다. P.307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의 성취는 반평생에 가까운 학습과 숙련의 결과지만, 요즘에는 어느 날 극적으로 전향을 시도한 패션 모델이나 스포츠 선수가 작가가 된다. 이 시대의 언어는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치들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P.312

 

분별의 정신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질서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정신적 요인들을 모호한 뒤섞임 가운데서 구분해내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P.313

 

진리는 속삭이는 반면, 거짓이 큰소리로 고함을 쳐대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P.318

 

사람들은 내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 가공할 유혹, 곧 자신은 결코 약자가 아니며 권좌를 차지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사력을 다해 매달림으로써 패배자가 되고 만다.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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