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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평점 :
리뷰를 써도 그런데, 책을 써도 그런가보다. 좋아하는 작가나 좋았던 책에 대한 서평은 더 잘 써진다. 애정과 진심이 담기니까 저절로 잘 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오후 네 시의 루브르] 저자의 친절한 해설 중에서도 단연 고야에 대해 쓴 글이 좋았다. 책에서 저자는 고야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걸 말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795년 왕립 아카데미 원장, 1799년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에 오른 고야. 그는 명성과 성공에 집착했지만, 내심 상류층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P.93
이중성은 고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처세술이 능한 인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오래된 신분제도나 역사의 흐름을 홀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한 예술가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95
꼼꼼한 붓질을 구사하지도 않았기에 그림의 표면을 가까이에 보면, 서로 관계 없는 물감 덩어리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상자가 뒤로 물러날수록 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전체적 조화가 이루어지며 인물의 내면적 특성까지 화면에 담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96
프란시스코 고야의 <솔라나 후작부인의 초상>을 소개하며 고야에 대해 쓴 글 중 일부다. 특히 고야의 이중성에 대한 변명에서는 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잘 드러난다. 나 또한 고야를 위한 저자의 변명에 보태고 싶다.
예전부터 예술가들은 대부분 모순된 관념과 가치관을 드러내왔다.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작품이나 공식 석상에서의 태도가 실제 삶의 모습과는 다른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예술가들은 대개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때로는 그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거나 철저히 감춰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예술가들은 그러한 양극성의 충돌을 통해 내심 겪게 되는 괴로움을 작품으로 승화 혹은 합리화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쉽게 확신이나 확언이나 확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느껴지는 예술가들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하나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간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다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작품이 많지 않고 작품 이외에 대한 것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미치광이들의 배> 중 일부.
또한, 물은 단단한 뭍과는 달리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도 없는 까닭에 비이성적인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정결한 영혼이라기보다는 악마적 본능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혼자 힘으로 건너기 어려운 물을 건너게 해주는 배는 교회나 운명 공동체를 상징한다. P.107
나는 이 해설을 보기 전까진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굉장히 현실사회에 불만이 많고 체제전복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보스가 굉장히 도덕적인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나라면,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물을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보스가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저자는 그러한 비이성적인 상태를 악마적 본능과 미치광이로 연결시켜 보스의 관점을 말한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뒤집는 새로운 시각이다. 신선했다.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금세공 작업실의 성 엘리기우스> 속의) 이 볼록거울은 평면 그림에서 제삼의 공간을 창조하는 반 에이크의 선구적인 기법이었다. 감상자가 이차원 그림을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삼차원 공간을 공유하게 해주는 효과이다. 회화의 한계적 공간을 뛰어넘어 개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에서) 열린 뒷문 사이로 보이는 안뜰도 비슷한 구실을 하는 장치로서 이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미술이 창안해낸 특징적인 공간 구성이다. P.115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에 대한 설명 중 일부이다. 캥탱 마시의 이 그림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작품들 중 더욱 좋아하는 그림이다. 도박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훌륭했다.
[오후 네 시의 루브르]는 무척 부러운 작품이다. 칸트가 매일 오후 4시면 항상 같은 곳을 지나가 사람들이 시계 없이도 시간을 알았듯이, 루브르를 거의 매일같이 내 집처럼 드나들며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아왔기 때문에 나온 책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프랑스가 아닌 한국 땅에서, 매일 오후 10~11시면 잠들기 전에 멋진 작품 서너개씩 감상하고 잠들 수 있게 됐다.
그림 해설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일부에서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나도 다 아는 얘기’라고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막상 그렇게 잘 설명해보라면 못하듯이, 그림도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막상 혼자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은 소설처럼 단숨에 읽을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한 작품, 한 작품씩 찬찬히 보아야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