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부부간의 증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증오에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죠. 난 부부 사이에서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뿐이에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에요. 가장 끔찍한 건, 그런 살해욕을 느끼고 나서 또 금세 새로 구입할 자동차의 색깔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다투고, 함께 잠을 자고, 뭐 먹고 싶냐고 묻고 하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일관성 없는 생각과 행동, 그건 정말 못 참겠어요. 정말 끔찍해요."

영화 <파니핑크>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도리스 되리의 소설 <나 이뻐?>에 실린 단편들 중 <꿀>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을 만큼 화들짝 놀랐다. 얼마전에 남편과 다툰 후에 들었던 생각이 책에 고스란히 옮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해 욕구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감정의 끝을 아무렇게나, 타의에 의해 마무리지어야 하는 그 무책임한 상황에 몹시 절망했었다. 사람 사이, 어느 관계가 맺고 끊기 쉬운 게 있으랴만은 부부 사이만큼 얽히고 설켜 그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관계도 또 없으리라. 결혼이란 이런 것인가, 한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건 이런 고통스런 절망감을 뱃속에 담고 얼기설기 봉합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절망감이 매시간을 지배하기에는 감각은 너무나도 쉽사리 마비되고 망각은 편리한 도구가 돼주었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이렇게 같은 모양새의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이 화해를 하는 건 더이상 그 사람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죠."

<나 이뻐?>라는 경쾌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제목을 단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단편들은, 그러나 제목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무더위 속에 발가벗고 앉아 있는 듯한 숨막히는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초파우에서 온 착한 카르마>의 어리숙한 베이비 시터 아니타는 <트리니다드>에서 떠나버린 남편 때문에 삶은 가재처럼 돼 버린 고용주를 너그럽게 보듬어주고, <신부>에서 자신의 차를 들이받은 여자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장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던 엘케는 <저 세상>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연인이 저 세상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듣기 위해 250마르크를 마련해서 점쟁이를 찾아간다. 침대 위 벽에 날개를 붙이고 잠이 들던 '나'는 저 이야기에서 룸펜이 돼버린 옛 연인을 찾아가 그를 위해 '월요일의 호밀빵'을 굽는 '그녀'가 된다. 그들은 일상에서, 연애에서, 결혼생활에서 다투고 화해하고 위로하다 지치고 지쳐 요양원으로 숨어들고 달디단 꿀을 스푼 한 가득 퍼먹으며 감각을 마비시킨다.

어느새 나는 노파와 나를 찍은 비디오가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맨 잘생긴 저널리스트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장애인 할머니를 차에 태웠다가 나중에 패스트푸드점에 갖다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처럼 우유부단하고 허약하고 아무런 비전도 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않는 건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친구 크리스와 함께 살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아직도 그렇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학에서 학업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세요?>의 한 장면에서 보듯이 지금과는 '다른 삶'을 동경하는 그녀들은, 그러나 단순하게 머리모양을 바꾸거나 새로운 연애를 하거나 플로리다에 집을 얻는 것처럼 욕망하는 대상을 얻는 것으로 채워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동경은 손 안에 쥘 수 없으므로 동경이 되고 소유하는 순간 허망한 일상이 되어 동시에 다른 하나의 동경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고 밝은 단편을 기대한 독자에게 이 열일곱 편의 단편들은 장맛비가 오는 요즘 출근길 다리를 휘감는 젖은 바지처럼 난감하다. 그 난감함은 이내 절망과 허망함을 이끌고 온다. 삶은 이런 것일까, 암퇘지가 찾아낸 트뤼플 버섯은 결코 암퇘지가 먹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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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5-06-3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나약하고 나태해서.

치니 2005-06-3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도 하고, 보관함에도 담았어요.

superfrog 2005-06-3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icare님, 당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마지막 문장이 쿡쿡 몸을 찌르더군요. 나약하고 나태한 건 비겁한 걸까요..? 여러 꼴로 나타난 중년의 여자들이 다 제얘기 같아서 장마 틈새로 잠깐 비추던 해 아래에서 읽었는데도 비가 들이치는 처마밑 같더군요..
치니님, 사람마다 주파수가 맞아지는 책이 있잖아요, 저 책이 그랬답니다. 님도 분명 많이 공감하실 거에요.^^

미완성 2005-06-3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가 부끄러워지는 리뷰입니다.
잠시 암퇘지를 위해 묵념을..

플레져 2005-07-0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정말, 몹시, 엄청 좋아하는 소설집이에요. 다시 쓰고 싶은 리뷰가 있다면 이거에요. 리뷰를 잘 쓸 줄 몰랐던 무렵이라, 너무나 흥분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쓴 리뷰라 늘 미련이 남아요. 이제 안 써도 되겠다 싶습니다. 님의 이 리뷰를 보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쓰셨어요. "꿀"에 나오는 저 대사는 살아갈수록 깊이 공감해요. 그죠? ^^

superfrog 2005-07-04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님, 암퇘지를 위해 묵념..-.-
플레져님, ^^ 저도 이 책 참 맘에 들어요. 재밌게 잘 봤구요. 제가 어떤 단편을 제일 먼저 봤을까요..? 당연 '금붕어'지요..ㅋㅋ '꿀'이 아마도 가장 인상깊었지 않나 싶습니다.^^

울보 2005-07-1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물장구 치는 금붕어님 다른 님들 서재에서 님을 뵈었지만 이렇게 인사는 처음이던가요,,,
참 글을 잘 쓰시는군요,,,,,,,,
저도 보관함에 넣어야지요,,
축하축하,,

superfrog 2005-07-1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ㅎㅎ 저도 다른분 서재에서 많이 뵈었는데 첨 인사드립니다.^^
ㅋㅋ 별일이 다 있네요. 착오가 두 번 생기기도 하나봐요..ㅎㅎ
비도 와서 꿀꿀한데 좋은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책 읽어보세요. 많이 공감하시면서 읽으실 거에요..^^
류랑 님이랑 남편님이랑 행복한 여름날 보내시길..!

어룸 2005-07-1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오오오!!!!!!! 네네네, 다시 읽어도 역시 잘 쓰셨습니다!!!!!!!!!! >ㅂ<)b 진짜진짜진짜 축하드려요옹~!!!!!!

superfrog 2005-07-1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헤.. 감사합니다요!!

2005-07-13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7-13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곰왔습니다..!ㅋㅋㅋ
속닥님, 있잖아요.. 님이 재미난 말씀을 하심 저는 간간히 보여주신 사진 속 님의 우아한 모습이 떠올라서 더 재미나요.ㅎㅎ 어디 그럼 뻗어나가볼까요..ㅋㅋㅋ
아, 그거요.. 그럼 조정할까요? 음냐..^^;; 독일 소설이라 약간 낯선 느낌이 들어서 그랬나봐요.ㅎㅎ

비연 2005-07-1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축하드리구요~ 퍼갈께요...

superfrog 2005-07-1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연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이 반갑구요..ㅎㅎ

로즈마리 2005-07-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저도 보관함으로...^^;;

superfrog 2005-07-1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님 서재로도 놀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