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인간화되어 세상을 말하다
[오마이뉴스 박형준 기자] 올해 2006년 병술년은 개의 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는 인간의 친구였다. 물론 서양은 약간은 다른 생각으로 개를 대했지만, 가족이자 친구로 대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다. 개를 포함한 동물도 때때로 영화나 만화,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우리나라 문학에서도 신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에, 동물들이 인간을 비판한다는 형식으로 시대상을 비판하던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이 발간되기도 했다.

올해가 '개의 해'인만큼 인간의 영원한 친구인 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만화들을 소개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만화 마니아라면 한번씩 봤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보지 못하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견신>, 말하는 개와 인간의 우정을 그리다


 
▲ 만화 <견신>, 호카조노 마사야 작. 전 14권
ⓒ2006 서울문화사
당신의 눈 앞에 말할 줄 아는 개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견신>의 주인공 '23'은 말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지식도 얻을 수 있으며, 판단력도 뛰어난 개다. '23'은 우연히 시인을 꿈꾸는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고등학생 '후미키'를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된다.

<견신>은 '23'과 '후미키'의 우정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또다른 세계에 관심이 많은 정계의 실력자 '기리유'가 '23'의 동족인 '0'을 포섭하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후미키'에 의해 인간과의 우정에 눈을 뜬 '23'과는 달리 '0'은 '기리유'에게 포섭돼 인간을 학살하며, '23'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이렇듯 <견신>은 개는 누가 기르냐에 따라 인간의 친구, 아니면 인간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플란더스의 개>의 '파트라슈'처럼 충직한 개를 생각하는 독자라면, 인간을 학살하며 심판자를 자처하는 '0'에게 놀라게 될 지도 모른다.

게다가 '0'의 '심판(?)'은 주로 현대문명의 본산인 대도시에서 벌어진다. 백주대낮에 대도시에서 인간이 엽기적으로 살해당하는 만화 속의 장면은 호러 마니아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도 있지만, 끔찍하다. 개를 함부로 버리거나 괴롭혔던 사람이라면 찝찝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희망'은 존재한다. 예민한 감수성도 있지만,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후미키'와의 우정을 계기로 '후미키'를 지키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의 본분을 지키는 '23'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만화 <견신>은 자연의 법칙을 지나치게 거스르는 인간에 대한 경고와 함께 '개는 주인(사람) 하기 나름'이라는, 당연하지만 지켜지기 힘든 상식을 강조한다.

<은아전설 위드>, 개에게도 냉혹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1980년대 말에 유행했던 <명견 실버(은아 흐르는 별 실버)>라는 추억의 만화를 기억하는 편이 좋다. <은아전설 위드>는 <명견 실버>의 후속편이기 때문이다. <은아전설 위드>의 주인공인 '위드'는 그 전설의 명견인 '실버'의 아들이다.

이 만화는 개를 의인화해 그들의 세계를 인간의 세계처럼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개들의 낙원 '오우'의 힘이 예전만 못하면서 개들의 세계는 '난세'를 맞이하게 된다. 이 만화는 어느날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오우'를 건설한 지도자 '실버'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게 된 '위드'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친구들을 모아 개들의 '거악(巨惡)'인 '호겐'과 일대 전투를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 <은아전설 위드>는 <명견 실버>에 이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방영하고 있다. 전 36권이며 외전도 있다. 다카하시 요시히로 작
ⓒ2006 일본 스카바
먼저 이 개들은 인간에 의해 길러지는 '사육견'을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시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한마디로 사육견들은 '온실 속의 화초'라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충직'의 화신답게 의리를 위해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동양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충신이나 의사(義士)를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우'가 무너지면서 그들이 겪는 준엄한 약육강식의 시대상이나 시대에 맞춰 부하를 거느리며 자신의 구역을 지키는 '군웅'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나 중국의 잇따른 혼란기, 일본의 전국시대처럼 보인다. 인간의 역사를 은유한 것이다.

만화의 특성상 <은아전설 위드>는 많은 개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외모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하지만 '위드'가 다소 전형적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작가가 이야기에 지나치게 개입해 때때로 몰입을 방해한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아쉽게 느껴진다.

동물을 기르는데도 '이해'가 필요하다

<은아전설 위드>에서는 개들을 오해한 인간이 개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개들의 대화 속에 등장한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본의 아니게 혹독한 결과를 가져올 때도 많은 것이다. 실제로 동물을 많이 길러본 사람은 동물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다. 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개들은 다소 과장되게 그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미처 보지 못했던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개, 그리고 동물을 기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이해'인 것이다. 인간이 서로 친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이해'가 동물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하다. 개를 주제로 한 만화의 주인공들은 '이해'와 '정'으로 동물과 우정을 쌓는다. <견신>의 '후미키'와 <은아전설 위드>에서 유일하게 비중있게 등장하는 인간 '태성'도 그렇게 개들과 정을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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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호감 캐릭터 하나오 `하드보일드의 감동`

만화 <하나오>(애니북스. 2006)의 그림은 ‘전혀’ 예쁘지 않다. 온갖 투박한 인상과 불만을 머금고 있는 소년 시게오와, 입크기와 안면근육을 별로 ‘보기 좋지 않게’ 늘렸다 줄이는 철없는 아버지 하나오의 얼굴은 솔직히 ‘비호감’ 이다.

그러나 ‘진화되지 않은 아버지와 진화 중인 아들’ 이 간격을 좁혀 가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나이 서른을 갓 넘겼지만 여전히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못하다. 이유는, 꿈을 이루겠다는 목표 때문에 어머니와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지만 늘 성적우등을 달리는 시게오는 아버지를 ‘미치광이’ 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한다.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꼭 틀린 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본문 중)

자신과는 철학이 다르다며 아버지와 여름방학을 같이 보내길 거부하는 시게오에게 들려주는 충고다. 그래도 “여전히 꿈을 쫓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할수없이`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좋은 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해요!.” 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어린 아들 앞에서 히죽히죽 웃기만 하는 아버지. 누가 아들이고 아버지인지 구분이 가질 않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상황은 역전된다.

일본 잡지 ‘코믹 링크’ 특집호에서 독차 5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 ‘일본만화사상 가장 훌륭한 만화 50편’에 <핑퐁>와 <철근 콘크리트>를 올려놓은 실력파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의 역작으로, 전 작품에 걸쳐 ‘성장’이라는 주제를 논해 온 작가의 진정성이 유감없이 빛난다. 주인공 하나오의 모교인 ‘가타세 고교’는 또 다른 작품 <핑퐁>의 무대와 일치한다. ‘연속성’이라는 내용의 특성 때문이다.

하드보일드 해, 하드보일드”라는 시게오의 말처럼, 만화는 비정하고 황량한 부자관계에서 출발하지만 이야기 사이로 흐르는 혈육의 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만들어 내는 감동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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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57.村上春樹)의 단편소설집 '렉싱턴의 유령'(문학사상사)이 번역돼 나왔다.

소설집은 1991년 이후 5년여 동안 쓴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다. 수록작 가운데 '토니 다키타니'는 영화로 제작돼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등을 받았다.

작가는 장편을 쓰기 위한 '도움닫기'의 방편으로 단편을 쓴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수록작들은 장편 '태엽감는 새'에서 잘 담아내지 못했던 영감 등을 '환상'과 '신비'의 요소를 도입해 단편으로 풀어냈다.

표제작은 렉싱턴의 고저택에서 유령과 만나게 된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그렸고, '녹색의 짐승'은 전업주부 앞에 뜬금없이 나타난 녹색짐승의 비극적 사랑 고백을 펼쳐보이고, '침묵'은 학창시절 급우들에게 따돌림 당한 남자가 전하는 무시무시한 독백을 담았다.

얼음사나이와 결혼한 여자의 고독한 체험담을 들려주는 '얼음사나이', 731벌의 옷만 남긴 채 죽은 부인의 자취를 찾는 남자를 다룬 '토니 다키타니', 일생동안 끔찍한 기억의 노예로 살아온 사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일곱 번째 남자', 잊혀지지 않는 어느 여자의 괴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은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가 실렸다. 임홍빈 옮김. 272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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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레드(로렌 슬레이터 지음)=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저자 로렌 슬레이터의 신작. 동화 ‘백설공주’를 왕비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한 ‘루비레드’를 시작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15편의 심리동화가 펼쳐진다. 에코의 서재·9500원

▲다이아몬드 딜레마(타릭 후세인 지음)=1997년 한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외환위기를 정확히 예측한 ‘한국보고서’ 집필진 중 한사람인 저자가 한국의 미래를 파헤치고 있다. 랜덤하우스중앙·1만3000원

▲교양으로 읽는 세계의 종교(아르놀프 지텔만 지음)=‘성스러운 무신론자’로 자처하길 서슴지 않는 저자의 재미있는 종교에세이. 저자는 세계의 종교를 경건한 문화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잔잔히 풀어간다. 예담·1만3800원

▲고종석의 영어이야기(고종석 지음)=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영어단어를 그것의 어원과 함께 단어가 탄생된 문화적인 배경까지 설명하고 있어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수많은 단어를 익히게 된다. 마음산책·9900원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김진송 지음)=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함께 기거하는 집을 중심으로 ‘기억’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담담하게 적었다. 세미콜론·1만2000원

▲경매야 놀자(강은현 지음)=공인중개사도 경매를 대리하는 경매대중화 시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정보만 숙지하고 있다면, 그 어떤 경매전문가 못지않게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매일경제신문사·1만8000원

▲그래, 떠나보거라(혜안 지음)=저자의 에세이 한편마다 삶의 지표가 되는 법문을 덧붙여 깊이 있는 마음공부를 추구했다. 열린박물관·9000원

▲성공을 꿈꾸는 한국인이 사는 법(LG경제연구원 지음)=글로벌화와 IT혁명, 고령화등의 파고를 어떻게 대비하느냐가 미래의 관건이라고 경고하면서 한국기업의 생존전략 54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청림출판·1만2000원

▲사와카미 장기투자(사와카미 아쓰토 지음)=일본의 10년 불황을 이겨냈으며 미래 10년의 투자 황금기를 예견한 저자가 경제 여건 성숙기에 맞춰 자신의 투자철학인 장기투자를 추천하고 있다. 이콘·1만1000원

▲엉터리 재무제표 뒤집어보기(김건·박병권 지음)=이 책은 대우그룹을 비롯해 5개 재벌 그룹의 10여개 계열사에서 재무관리를 담당했던 실무자등이 분식회계 근절을 위한 처방전을 제시하고 있다. 더난출판·1만2000원

▲헤겔에서 니체로(카를 뢰비트 지음)=19세기 철학과 사상사 및 19세기 철학과 문화사가 20세기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하는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전. 민음사·2만7000원

▲고대그리스(게르하르트 핑크 글·페터 클라우케 그림)=고대 그리스인들은 유럽문화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민족이다. 이책은 다양하고 재미있는 그림으로 고대 그리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다. 정담·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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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교도관의 '사형수 구하기'
[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 <13계단> 책표지
ⓒ2006 황금가지
사형수 이름 사카키바라 료. 언제 저승사자가 올지 몰라 숨을 죽인다. 두 명을 살해한 죄로 붙잡힌 그에게 죽음은 일말의 재고도 없어 보인다. 사형, 그것이 그의 인생에 기정사실처럼 정해졌다. 그는 죽기 싫어서 다시 한번 재판을 해보려 한다. 더욱이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사건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기억 상실'에 걸린 그로서는 자신의 죄가 원죄(억울한 죄)라고 생각하기에 어떻게든지 사형을 취소하게 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은 확고부동하다. 차라리 잘못했다고 빌면 무기징역이라도 될지 모르겠지만 료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니 괘씸죄가 적용되는 비운이 생긴 것이다. 사형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아침을 눈을 뜨고 초조한 하루를 보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칠뿐이다. 그러다 문득, 사형수는 장면을 기억해낸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계단에 오르던 자신의 모습을.

료와 달리 미카미 준이치는 가석방이 되어 사회로 나간다. 상해 치사 전과자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몇 달 전에 사회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가석방이 된 준이치는 설레는 기분으로 사회 공기를 들이마시지만 그 기쁨도 잠시다. 고의는 아닐지라도 자신과의 싸움 때문에 죽은 피해자에게 물어줘야 하는 엄청난 금액에 가족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과자로 낙인찍힌 자신을 사회에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것을 오래지 않아 깨닫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준이치. 그때 교도관이었던 난고가 나타난다.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자신의 일을 도와보라는 것이었다. 일이라는 것은 바로 료의 무죄를 증명하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료가 기억해낸 장면의 계단을 찾아야 했다. 준이치는 사정을 듣고 의아해 한다. 많은 이들을 놔두고 이제 갓 가석방한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난고는 갱생 차원이라고 한다. 더욱이 성공 보수도 든든하니 좋은 일 해보는 셈치고 하자고 말하고 돈 욕심 때문에라도 준이치는 거절하지 않는다.

사형수의 무죄를 증명한다는 <13계단>의 겉모습은 세계 3대 소설 중 하나로 뽑히는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빼닮았다. 우연한 계기로 주인공들이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형수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사건에 투입된다는 것이나 그것과 별도로 작품 중간 중간 사형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다가가는 죽음의 시계를 묘사해 독자들을 초조하게 한다는 것이 그렇다. 때문에 겉모습은 새롭지 않다. 친숙하다고 할 정도로 외모가 낯익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하는 건 실례다. <13계단>의 겉모습은 익숙해 보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면 낯선 장면들이 이어진다. 먼저 사건에 참여한 주인공의 신분이 그렇다. 살인자라는 딱지를 달고 있는 가석방 죄수와 범죄자들을 갱생시켜야 하는 의무와 함께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 교도관이 등장한 건 심상치 않다.

추리소설에서 추리하는 이들이 신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일임을 상기해본다면 살인자와 교도관이라는 신분이 <13계단>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제껏 추리소설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아무리 포장을 바꾼다 한들 결국에는 악한 범인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핵심이자 진리였다. 때문에 살인자가 사형을 받는 건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졌고 그것이 해피엔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형수와 교도관이 주인공으로 나선 <13계단>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곁들어 그 같은 생각을 비틀어버린다. 해피엔드로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숙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깊숙한 것 중 하나를 꺼내보자. 준이치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징역이 2년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쁜 놈'이라고 말할 그런 살인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사회에 나오면 딱지 하나로 죄인이 된다. 사회는 갱생을 운운하지만 동시에 대놓고 죄인 취급을 한다. 이럴 때 준이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범죄자들이 다시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이분의 일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을 그들만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13계단>은 추상적인 '사형 찬반론'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범죄자를 양산해내는 것이 사회라고도 탓하지 않는다. <13계단>은 중립이다. 그렇기에 기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법 진행 과정 등 현실적인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울하게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떠나는 이들이 없도록 문제를 제기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13계단>, 계속되는 반전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추리소설로서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반가운 것은 이 작품이 가슴을 넘어 머리까지 뜨겁게 만든다는 것이다. "너나 나나 종신형이다. 가석방 따윈 없어"라는 말로 추리소설의 핵심들을 비틀어버린 <13계단>, 법에 대한 생각까지 비틀어버리는, 정말 심상치 않은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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