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 - 포르쉐 UX 디자이너가 들려주는, 2023년도 세종도서 교양부문 추천도서
박수레 지음 / 책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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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제목이 <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라고 해서 자동차 디자인 전공자나 실무자를 위한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동차 인터페이스 변천사로 돌아보는 인간 중심 디자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부제를 미처 살피지 않고 이 책을 지나친다면 당신은 인간의 운전 생활을 조금이라도 편리하게끔 백 년 이상 치열하게 연구해온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 역사를 모르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은 디자이너를 위한 책이 아니고 모든 운전자를 위한 책이다. 아니다.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자동차야말로 현대의 문명과 기술이 총 집결된 결정체니까. 책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기계에 달린 수십 가지의 유틸리티가 어떤 취지에서 개발되었고 어떻게 발달하여 왔으며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알려준다.

자동차라는 생활방식의 가장 흥미로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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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이면서 공간이고, 도구이면서 생활 방식인 자동차가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지고 볶아온 흔적을 추적하고 자동차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이게 왜 여기에 붙어 있는 건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구해온 결과가 바로 <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다. 굳이 자동차광이 아니더라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주제다.

이 책의 저자가 하는 일은 '자동차 UX 디자인'이다. 자동차 디자인은 알겠는데 자동차 UX 디자인은 무엇일까? 잘 모른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2015년 소셜 미디어 링크드인에 의하면 부모에게 설명하기 불가능한 직업 TOP 15 중 1위가 바로 이 직업이니까.
 
만약 당신이 자동차 UX 디자인을 한다면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 "자동차 핸들에 들어가는 버튼은 몇 개가 좋을까? 와이퍼 스위치는 오른쪽이 좋을까? 비상스위치는 어느 정도 높이에 달리는 게 맞을까? 볼륨 조절은 몇 단계로 나눠놓는 것이 가장 편할까? 그러니까 UX 디자인은 운전자가 보고 만지고 조작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심미적, 기능적, 상징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이다.
 
<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에는 글러브 박스, 컵 홀드, 창문, 사이드미러, 에어컨, 시트 조절 스위치, 시가잭, 계기판을 비롯한 운전자가 조작하는 유틸리티에 대한 흥미로운 탄생과 진화 과정 그리고 속사정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당신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언제나 동고동락한 존재는 부모나 배우자가 아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동차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동차의 소소한 도구들이 우리의 편리함과 안락함 그리고 안전을 위해서 뒤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인가?
 
자동차 안에 생화를 꽂는 꽃병이 있다?

그럼 글러브 박스부터 시작해볼까? 우선 차량 수납공간을 왜 글러브(장갑) 박스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마차와 비슷하게 생겼던 초기 자동차를 모는 운전자는 시린 바람에 덜덜 떨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바람막이(앞 유리창)가 생겨났는데 찬바람에 손이 시리면 운전 자체를 하기가 힘드니 방한 장갑을 하나씩 꼭 챙겨야 했다.

또 파워스티어링이 아니었던 초기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방향을 돌리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고 손에 굳은살이 박이기도 했을 테니 장갑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자동차의 대표적인 수납공간인 글러브 박스가 처음부터 조수석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시트 밑에서 출발해서 운전석으로 갔다가 또 다른 장소로 유목민처럼 이사한 것이 글러브 박스였다. 그러다가 1933년 클로슬리 모터스가 최초로 자동차에 라디오를 장착했는데 이를 계기로 대시보드의 중앙에 라디오, 운전석에는 계기판, 조수석에는 글러브 박스가 자리 잡은 오늘날의 익숙한 레이아웃이 완성된다.
 
전기자동차가 미래형 자동차로 주목받지만 따지고 보면 전기 자동차가 내연 기관 엔진보다 더 먼저 나왔다. 1832년에 로버트 앤더슨이 원유 전기 마차를 만들었는데 내연 기관 엔진은 1800년대 후반에야 나왔다. 당시 전기자동차는 구조가 간단하고 운전이 쉬워서 여성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이 주로 애용하는 전기차에 여성의 취향을 저격해서 자동차 전용 꽃병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그 시절에는 참으로 많은 운전자가 자동차에 꽃을 꽂아두고 다녔다. 그리고 이 꽃은 전기자동차의 특성상 달고 다니는 배터리 냄새를 없애주는 방향제 역할도 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꽃보다 훨씬 효력이 강력하고 편리한 방향제가 많으니 '차 속의 생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1957년식 폭스바겐 비틀에는 개인이 원하는 꽃병을 차에 달았다.
▲  1957년식 폭스바겐 비틀에는 개인이 원하는 꽃병을 차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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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이미 파워 윈도 기능이 있었다?

군생활을 할 때 우리 부대의 전승기념관에서 선배들이 한국전쟁 때 탈취했다는 김일성의 승용차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승용차의 모델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차에 무려 파워 윈도 기능이 장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1990년대 후반까지 수동을 창문을 여닫아야 하는 소형차를 몰았다. 이미 그 당시에도 웬만한 차는 파워 윈도가 장착되어 있어서 내 차를 타는 사람이 '아니, 창문을 직접 손으로 올려야 해요?'라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 왠지 모를 굴욕감을 느꼈더랬다.

그런데 북한의 김일성은 이미 1950년대에 파워 윈도 기능을 사용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는데 <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읽고 그 궁금증을 해결했다. 파워 윈도 기능은 이미 1940년식 '패커드 180'이라는 자동차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니까 1950년대에 몰았던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일성의 자동차에 파워 윈도가 장착된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파워 윈도가 장착된 1942년식 패커드 180
▲  파워 윈도가 장착된 1942년식 패커드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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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돌출된 형태의 파워 윈도가 일반적이었다가 지금은 당기면 올라가고 아래로 누르면 내려가는 방식의 파워 윈도로 바꿨다. 나는 후자 파워 윈도를 사용하면서 돌출형 형태를 그리워했다. 왜 자동차 인터페이스가 퇴보를 하는가 싶어서 의아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아이들이 창문 사이에 목을 내밀고 기어오르다가 실수로 돌출형 파워 윈도를 발로 밟아서 생기는 인사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동차는 호위무사처럼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쓴다. 변속기만 해도 그렇다. 변속기가 P에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내렸다가 화를 당하는 운전자를 막고 그 밖에 다양한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위아래로 밀고 당기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방식에서 탈피해서 기어 변경마다 일종의 턱을 만들어 놓는 스텝 게이트 변속기가 자리 잡았다. 그러니까 기어 변경이 단번에 빨리 되지 않고 덜컥거린다고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스텝 게이트가 없는 변속기(좌)와 스텝 게이트가 장착된 변속기(우)
▲  스텝 게이트가 없는 변속기(좌)와 스텝 게이트가 장착된 변속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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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디자인은 우리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이지만 운전을 하는 재미 자체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테슬라는 '차 문을 열면' 전원이 들어오는 전기 자동차를 진즉 개발했지만, 엔진을 시작하는 신성한 행위 즉 시동 버튼을 누르는 행위 없이 차를 움직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운전자를 위해서 '시동'버튼을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내연 기관처럼 우렁찬 소리는 나지 않지만 그래도 '슈웅~'하는 효과음 정도는 잊지 않았다.
 
누가 소장 가치가 있는 추천 해달라면 나는 가장 먼저 <자동차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즐거움과 안전을 위해서 불철주야 애쓰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동차 속에 숨겨진 인류의 흥미로운 역사를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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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청주 신항서원에서 5회에 걸쳐서 강연하게 되었다. 청주 미사도서관에서 8회에 걸친 줌 강연을 악전고투 끝에 마쳤고 이젠 코로나 사태도 진정이 되어서 내심 대면 강연을 기대했지만, 아직 대면 수업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대면 강연을 하기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르치는 일을 25년간 해온 나는 여전히 비대면 강연이 낯설고 힘든데 청중들은 이제 줌 강연의 편리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된다고 해도 줌 강연은 살아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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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오브제 - 사물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궁리가 있다
이재경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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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를 마치고 신용카드를 빼려는데 주유소 직원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다행히 내가 목표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문득 후방거울을 보니 아뿔싸 주유 뚜껑이 혀를 내민 것처럼 열려있었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닫으려는 순간 주유구 마개가 자리를 비운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주유를 마치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미처 주유구 마개에까지 내 빈약한 주의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리라.

다시 유턴해서 주유소로 돌아가는 몇 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뚜껑을 찾지 못하면 내가 방금 피 같은 돈으로 넣은 금싸라기 같은 기름이 공중으로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또 주유구 마개를 잃어버렸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비싸도 좋으니 살 수 없느냐고 자동차 공업사를 찾아갈 생각을 하니 그 자체로 머리가 아득해졌다.

되돌아간 주유소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마개를 발견한 순간 나는 집 나간 자식을 다시 찾은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사소한 물건은 하찮은 물건이 아니다. 사소한 물건이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마땅히 추앙받아야 할 존재다.


이재경 작가가 쓴 <설레는 오브제>는 평소 우리가 우리의 가장 사소한 용도와 필요에 종사하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물건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와 깊은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사소한 물건이지만 거대한 역사를 가졌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 통찰로 귀결되며, 무명(無名)의 존재로 시작한 물건이 유명(有名)의 존재로 부상하는 경험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된다.

가령 오직 꿀을 뜨기 위해 탄생했고 존재하는 '꿀뜨개'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통찰을 발견한다.
 

다용도를 내세운 물건의 합체는 불가피하게 물건의 변형을 부른다. 그 변형은 장식적 변주에 그치지 않고 원형을 깬다. 더는 그 물건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그건 물건이 애초에 생긴 목적을 무시하는 처사고, 그건 결국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다. 물건의 변형만큼 시대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 때로는 꿀뜨개 같은 것들을 일상에 추가한다. 시간에 휩쓸리면서 가끔 붙잡고 쉬어가는 말뚝을 박듯이.

 
집주변을 할 일 없이 산책하는 행위에 대한 이런 통찰은 또 어떻고.
 

알다시피 주거지의 면적을 늘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도 동물처럼 산책으로 영토를 넓힐 수 있다. 공적인 장소에 사적인 의미를 심는 일은 나를 확장한다. 거기서 먹이처럼 시적 단상을 모을 수 있다. 매일 경로가 다져지고 샛길이 번지면서 내 서식지가 늘어난다. 그곳은 나만의 감상과 집착과 미련이 묻어 있어서 다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다.


아내가 실론티를 사 왔는데 차 통이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예쁘다. 나는 평소 출근을 하면 봉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며 차는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슬쩍 아내가 사 온 차 통을 보고 브랜드를 기억한다.

그리고 잽싸게 서재에 들어와 아내가 사 온 차를 주문한다. 사무실 내 책상 위에 올려두면 뭔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설레는 오브제>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은 어쩌면 '웰빙'보다 웰빙의 느낌'에 돈을 쓰고 그 기억을 산다. 그게 내용물이 없어진 후에도 용기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같다.
 

 
그리고 차에 얽힌 중국과 영국의 애증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이재경이라는 작가는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사람이고 사람에 대한 통찰도 매우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다. <설레는 오브제>가 한 사람이 쓴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 한 권의 책은 사소한 물건에서 시작해서 인류의 역사와 인류에 대한 통찰이 끝없이 이어진다.

귀퉁이마다 기둥이 있고, 그 위에 천장처럼 덮개가 있는 침대를 그냥 부잣집 여자의 플렉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설레는 오브제>를 읽다가 이 물건의 이름이 사주 침대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인데 사주 침대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과 역사를 읽게 되는 호사도 누리게 되었다(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이재경 작가는 책 모서리를 접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책에 표시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마땅히 <설레는 오브제>에 그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감동하고 공감을 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열심히 핸드폰 사진에 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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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째 대학 기숙사에서 사는 딸아이가 이번 학기에 최악의 배정을 받았다고 한다. 우선 방이 원래는 장애인을 위한 구조라서 일반 학생들이 사용하기엔 불편한 점이 많으며 룸메이트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룸메이트가 누구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좌우되는데 이번엔 아주 최악이란다.


룸메이트는 미얀마에서 유학 온 학생인데 입사 첫날부터 딸아이가 정성껏 청소한 방에 여행용 가방 바퀴를 닦지도 않고 끌고 온 순간부터 선을 넘기 시작했다고.

 

딸아이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이 룸메이트가 종일 방안에서 끊임없이 전화 통화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과제나 공부를 하면서도 전화 통화를 한다고.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에도 전화 통화를 할 때는 반드시 복도로 나가는 딸아이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고 힘든 일이기도 할 것이다. 딸아이는 룸메이트 때문에 방안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생활한다고 한다. 이 상황 때문에 딸아이는 몹시 힘들어하는데 부모라고 다르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딸아이의 불운에 안타까워했다. 아내는 혼자서 분노를 삭이다가 도대체 도윤이가 기숙사에서 몇 년째 살고 있냐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아내의 포효를 들은 나는 불똥이 나에게 떨어진 것은 아닌지 파르르 떨었다. 사실 아내와 딸은 가끔 기숙사에서 나가 오피스텔에서 생활하고 싶어 했지만 내가 절대 불가를 외쳤기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다음 절차로 이어질 당신 때문에 ~”라는 원망이 눈에 그려졌다. 그러나 아내의 다음 말은 이랬다. “대체 그 대학은 기숙사 단골을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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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힘들거라고요. 친구 딸아이는 결국 여성전용 원룸 구해서 나갔어요 ㅠㅠ 불안하시죠

박균호 2022-04-18 18:47   좋아요 1 | URL
네 글쵸...하루 종일 얼굴 맞대고 생활해야 하니까...ㅎㅎ 여성원룸은 그나마 좀 안심이 되겠는데요.

다섯 2022-04-1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처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시는군요.ㅎㅎ 재미있습니다^^

박균호 2022-04-19 09: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경처가 맞습니다.
 
사소한 기쁨 - 산책과 커피와 책 한 권의 행복
최현미 지음 / 현암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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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 지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비대면 강연은 나에게 넘기 어려운 험난한 산이다. (ZOOM)으로 하는 강연이 시작되기 30분이 되면서부터 딸아이의 대학합격발표를 기다리는 만큼의 긴장을 하게 된다. 화장실을 연신 들락거리고 물을 금붕어처럼 들이킨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최현미 기자가 쓴 독서 에세이 <사소한 기쁨>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초긴장 상태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지내기보다는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300분처럼 느끼지는 30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포의 30분이 마치 3초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사소한 기쁨>은 독자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독서에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흡입장치가 들어 있다. 기자 특유의 간결하고 울림이 있는 문체, 사소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일상의 즐거움, 지성미가 넘치는 세상사에 관한 통찰, 책과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선, 책과 영화의 등장인물이 마치 내 친구나 식구처럼 느껴지는 친밀감, 그리고 과학적인 지식까지.

 

<사소한 기쁨>은 기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책을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모범적인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일상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사안에 따라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때로는 밝게 볼 수 있는 통찰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달>이라는 꼭지를 살펴보자. 기자로서 새벽에 출근하는 일상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주인공 덴고가 하늘에 뜬 달을 보면서 한 생각으로 넘어간다. “일류가 불이며 도구며 언어를 손에 넣기 전부터 달은 변함없이 사람들 편이었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 자신의 달에 대한 소고로 이어진다.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지켜낸 달이 나의 출근길을 밝힌다. 달은 내가 태어났던 날 저녁부터 변함없이 나를 지켜 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달은 저 먼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달은 나도 기억 못 하는 나를 알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상상대로라면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테다.

 

언젠가 시골에 사는 내 친구가 웬 큰 나무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동네 나무를 왜 올렸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멋있잖아나무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의아해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사소한 기쁨>을 읽고 나서야 그 친구가 어떤 느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내가 이 벚나무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간 숱한 시간을 꼽아본다. 수십 년 동안 수천 번 이 나무 옆을 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고, 동료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걸었다. 가벼운 산책에, 글이 막힐 땐 머릿속으로 글 앞뒤를 정리하며 걸었다. -중략-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시간 속에 걸었다.

 

그 친구도 자신의 집 앞에 있는 그 나무와 수많은 추억을 남겼고 그 나무는 마치 달처럼 그 친구의 모든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무와 추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무에 대한 애정을 이토록 진솔하고 공감을 주는 글이라니.

 

또 이런 글은 어떤가?

 

그렇다면 이 쓸데없는 수다야말로 인간을 지구상의 다른 생명과 따로 구분 짓는 가장 인간다운 일일지 모른다. 실제로 수다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일단 맘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관심과 취향이 비슷하고 주고받는 말의 리듬이 맞아야 한다. 주거니 받거니 쿵하면 짝하는 파트너십을 발휘해야 한다. 유머 코드가 같아서 별것 아닌 농담에도 같이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수다에 관한 이토록 재미나고 놀라운 통찰이라니.

 

최현미 기자는 동화는 어린이가 독자라는 이유로 그 시대가 믿는 윤리와 도덕 가치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성인 소설보다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어린이를 위한다는 동화가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사소한 기쁨>이라는 동화를 쓰면 어쩌냔 말이다. 그것도 그저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동화를.

 

<사소한 기쁨>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이 귀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과 어울려 낫질을 하면서 느낀 행복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 갔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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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2022-04-1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는 다다익선입니다. 감사합니다^^

박균호 2022-04-20 16:26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