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 제로 조직 - 건전한 기업문화의 핵심
로버트 서튼 지음, 서영준 옮김 / 이실MBA / 2007년 5월
절판


나는 어째서 저 수많은 또라이들이 우리의 인생이 소중한 오늘의 연속이라는 것, 우리는 생애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스티브 잡스는 '여행은 보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도 그가 이룬 업적을 존경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보상만 해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용납될 수 있을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 또라이들이 아무리 '그럴싸한' 장점들을 들이대더라도, 나는 비열한 꼴통들과 내 소중한 나날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앞으로도 왜 그런 꼴통 짓을 많은 사람들이 참아내고, 당연시하며, 심지어 받들기까지 하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259쪽

이 쓰라린 기억이, 내가 어떤 사람이 또라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구별할 때 사용하는 두 가지 테스트를 잘 설명한다.
테스트 1 : 또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나면, 우울해지고 비참해지고 기운 빠지고 초라해진 느낌이 드는가?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버리는가?
테스트 2 : 또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자기보다 힘 있는 사람보다 힘없어 보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추악한 성질을 부리지 않는가? -16쪽

열두 가지 비열한 행동: 일반적인 또라이 행동 양식
1. 인신공격
2. 개인 공간 침범하기
3. 함부로 신체 접촉하기
4. 말 혹은 몸짓, 행동으로 위협하고 협박하기
5.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깔린 냉소적인 우스개와 약 올리기
6. 기분 나쁜 이메일 보내기
7. 사회적인 신분 모욕하기
8. 공개적으로 망신주기 또는 지위를 격하시키는 행동하기
9. 무례하게 끼어들기
10. 앞에서는 아닌 척하면서 뒤로 공격하기(이중 인격 쓰기)
11. 경멸하는 표정 짓기
12.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18-19쪽

나는 내 자신이 아주 선량하고 도의적이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주변에 그런 비열한 녀석들이 있어도 닮아가지 않을 줄 알았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더미 같은 증거들과 빌 레지어의 충고가 말해주는 것처럼, 또라이 중독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전염성 강한 병이다. 참 나쁜 소식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우리 자신이 또라이 관습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신랄하고 잔인한 녀석이 될 운명을 가진 힘없는 꼭두각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145쪽

그리고 당신이 또라이이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있다고 해서 당신에게, 당신 자신이나 동료들이나 회사의 또라이 관련 문제를 해결할 자격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님을 명심하라. 내 아들 테일러가 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떤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그 문제에 대해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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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엔진 - 천사, 귀신, 부적, 종교, 징크스, 점성술...... 이성을 뛰어넘는 인간 믿음에 관한 진화론적 탐구
루이스 월퍼트 지음, 황소연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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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의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믿음보다는 사람의 믿음을 결정하는 인과적 믿음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인간의 생각과 믿음이 동물과 어떻게 결정적으로 다르며, 이것이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하는 것이다. -5쪽

나는 과학에 충실한 사람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최선책 또한 과학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과학자로서 종교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종교가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다면 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6쪽

사람들은 기존의 믿음과 관련해서 증거를 조사할 때 자신이 보고자한 바를 보고, 결론지으려고 기대한 바대로 결론을 내리는 성향이 있다. 반증이 나타날 때도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증거를 비판하기 일쑤다. 게다가 자신의 믿음에 쐐기를 박는 정보나 사건들은 역행하는 것들보다 더 잘 기억할 뿐 아니라 머릿속에 쉽게 떠올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17쪽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특히 믿을 게 못 된다. 평범한 사람도 대부분은 자신에 대해서 아부에 가까운 믿음을 갖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지성적이고 공정하며 달변가이고 편견이 적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21쪽

하지만 아인슈타인에서 다윈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확고하게 자리잡은 과학적 믿음도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과학의 근간이다. 그리고 과학적 믿음이 신뢰도와는 별개로 본래 윤리성이나 도덕성과는 무관함을 납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단지 과학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해 말할 뿐이다. 뉴턴의 법칙에도, 유전자 코드에도, 유전자가 우리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도 윤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316쪽

우리는 신비한 경험으로 치부하며 해답을 꾸며내기보다는 그런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안고 살아갈 만큼 지적인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윤리나 도덕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제임스의 말처럼, 종교의 거룩함은 세상에 꼭 필요한 특성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잣대를 부여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 인본주의자들이 잘 알다시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337쪽

미국만 봐도 선진화된 산업문화 속에 존재하는 종교의 힘은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불만스러울지라도 믿음을 갖고 있기에 우리가 인간다울 수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증거가 취약하거나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없다면 그들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감수해야 한다. 종교적 믿음의 상실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이 점은 타인에게 종교적 믿음을 강요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이며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근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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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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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을 추구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낫다든가, 한 생활 방식이 다른 생활 방식보다 더 도덕적이라든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에는 많은 한계가 있으며, 양날을 가진 검과 같다. 현대 세계를 이룬 것이 과학이긴 하지만, 그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도 과학이다. -94쪽

회의주의자이자 비판적 사고자인 우리는 감정적인 대응을 넘어서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잘못 사고하게 되는지, 과학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 통제와 문화적 영향을 받는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계의 운행 방식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뿐만 아니라 사이비 과학의 역사까지 이해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128쪽

도덕성은 도덕의 기준틀에 따라 상대적이다. 도덕성이 인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구상한 것임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믿음 체계에 대해서, 나아가 타인에 대해서도 더욱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인 도덕적 조정자로 자처하고 나서는 집단이 있다면, 특히 그 집단의 구성원이 자기들이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을 발견했다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관용은 물론 이성과 합리성의 몰락이 시작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컬트, 종교, 국가 등 개인의 자유에 위해가 되는 모든 집단들이 가지는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233-234쪽

과학에서는 최종적인 정답이란 없다. 오직 다양한 정도의 확률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사실'조차도 잠정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게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만 확증된 결론일 따름이며, 그렇게 이루어진 합의는 결코 최종적이지 않다. 과학은 일련의 믿음들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박과 확증에 열려 있는 시험 가능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탐구의 과정이다. 과학에서 지식은 유동적이고, 확실성은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과학을 제약하는 것이며, 또한 과학이 가진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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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 스페인 산티아고 편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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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엇보다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든 생각은 '나도 꼭 그 길을 걸어봐야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저술 목적 중에 독자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저자가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 자신의 생각, 장소들을 중심으로 매일 쓴 일기 같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가는 지는 다르지만 결국은 자신이 변화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다.

국적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그렇게 잘 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아마 나는 그 길을 걷더라도 혼자가 아닐까 싶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의사 소통에 가장 큰 장애가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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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발칙하다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8
카렌 쿠시맨 지음, 이정인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원제를 그대로 쓰면 너무 평범한 제목이 되려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 때문이 아니라 저자의 다른 책인 [너는 쓸모가 없어]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책 날개에 있는 저자의 말 - 왕, 왕비, 공주, 왕자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시대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는- 에 동감한다. 

중세 영국에 살았던 기사의 딸인 캐서린이 쓴  일년동안의 일기이다. 일기는 열세살이 지나서 열네살이 되어가는 캐서린이 가장 좋아했던 오빠인 에드워드의 충고를 따라 쓰는 것이라며 시작한다. 

일기를 보면 중세 영국의 기사 집안의 딸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면에서 상당히 많은 자료 조사를 했음에 틀림이 없다. 당연히 역사소설이 갖추어야 할 점이기도 하다. 인물이나 상황이 허구일지라도 시대적 배경과 사회상은 그 시대를 충실히 묘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캐서린과 다른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이야기 전개도 재미있었다. 거기다 캐서린이 자신의 결혼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궁금증도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부분이었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주요 독자로 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성장소설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데, 이 소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결말에 이르러서 캐서린이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졌다는 것을 보여 주니까.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얻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삶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의 어려움이 많은 부분 해결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주인공의 생각은 늘 옳은 것이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잠재의식 저 아래에 그런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인공이 기술한 사실은 다 옳은 것이라는 착각을 했더랬다. 이 책을 덮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의견이 이러니까 전적으로 맞을거야 하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니...

이 소설을 같이 읽은 딸은 캐서린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 공감도 한다는데, 나는 캐서린의 엄마와 조앤나 마님의 말에 공감이 가니 역시나 나이를 먹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아이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것도 착각이었나보다.

소설 시작 전 일러두기에 '여기 나오는 축일 표기는 한국가톨릭의 표기에 따랐습니다.'라는 문구를 보며 내심 반가웠다. 그런데, 축일 표기는 그럴지 모르지만 전적으로 한국가톨릭 용어를 따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어차피 가톨릭 표기를 따르는 것이라면 이런 식(예, 종려주일 -> 성지주일)으로 해 주었다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에서는  다른 표기를 사용하는 지는 모르지만 중세 영국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를 다니고 있었을테니 축일 표기와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몇가지가 더 있지만 아마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면 별 문제없이 지날 것들이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의 번역에서도 특별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당 전문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평소에도 하고 있던 생각이다.  전문 분야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독자가 정확한 표기를 안다는 것은 나중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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