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불
다카하시 히로키 지음, 손정임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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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년들의 세계는 흔히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성인들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하지만 구태여 꼭 그렇게 치환되지 않더라도 절제와 자제와 위장이 본능과 탐욕을 아직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시기의 이야기는 인간의 심연에 있는 어두운 구석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구태여 과거의 것이라 치부될 것도 나와 상관 없는 세계의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을 만큼 지금 현재 여기에서의 우리의 비겁한 모습을 드러내는 생생함을 품고 있다. 권력을 남용하고 약자를 짓밟아 사익을 추구하는 행태는 낯설지 않다. 또 그 회색 지대에서 그 광경을 방조하고 때로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득을 알게 모르게 누리는 많은 우리들의 모습도. 


<배웅불>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의 구성은 대단히 치밀하고 밀도있게 직조되어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대체 이 촘촘한 이야기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가 예측불허다. 한마디로 아주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에서 벽지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전학 온 소년, 그 소년을 맞아들이는 또래 집단의 역학 구도는 자연스럽게 소년을 포섭한다. 소년은 아닌 척 하지만 내도록 그 부당한 폭력적인 관계망으로 저도 모르게 서서히 빨려들어가게 된다. 이쯤 되면 과연 그 소년에게는 죄가 없었나 묻게 된다. 그리고 결말은 그에 대한 답을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라면 이미 <파리대왕>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경험한 익숙한 서사다. 강하고 악하고 매력적인 지배자가 있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듯 보이는 '나'의 입지는 더없이 약하다.  '나'는 도덕적으로도 힘의 역학 관계 안에서도 길항 작용에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그 악에 수시로 굴복하는 이야기였다. 


<배웅불>은 일본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풍속의 하나인 오봉에 조상의 영혼을 배웅하는 의미로 피우는 '배웅불'은 그 자체로 괴괴한 배경이자 음침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살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살인하고 말지도 모른다. 죽일 마음 없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학교폭력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횡행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끔찍한 사건들이 애초부터 강력한 의도로 빚어진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비판의식 없이 상황에 매몰되어 도덕적 성찰 과정을 방기하다 보면 어느새 벌어지고 마는 많은 비극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괴롭힘을 당하던 미노루가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던진 "나는 처음부터 네가 제일 열 받았었어!"라고 한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긴다. '그'는 수많은 '우리'와 닮아 있다. 폭력을 사주하지도 약자를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때로 선행을 베푸는 많은 사람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그런 시스템 자체 안에 순응하며 나날을 살아나가며 약자들을 양산하고 핍박하게 되는 거대 헤게모니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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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세계를 겪은 방식과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텐데, 마치 똑같은 생을 겪은 것 같았다. 웃지 않았고 눈빛이 멍했고 박탈감에 사로잡히고 회한만 남았다.

-편혜영 <다음 손님>

















편혜영의 문장은 장황하지 않은데 예리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런 대목은 밑줄을 긋게 된다. 작가는 음험한 인간의 내면, 하루키의 그 검은 우물을 응시하고 퍼올린다. 이 얘기만 해도 그렇다. 화자의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따뜻하고 사려 깊고 예의 바른 사람이다. 일하는 엄마 대신 그는 치매가 온 장인 어른을 돌본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헌신에 감동한다. 이야기는 이 출발점에서 심연으로 틀어 나간다. 그것은 따뜻한 보살핌이 아니라 학대였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선뜩하다. 인간은 복잡하다. 보이는 곳과 드러나는 부분과 숨긴 구석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하나의 삶이 완성된다. 외형적으로는 할아버지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아버지를 둔 소년은 자라 노인에게 더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병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며 결국 그 어긋난 충돌 지점에 작가는 우뚝 선다. 편혜영의 이야기들은 선뜩한 핍진성을 띤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시시각각 서스펜스적 서사로 형상화된다. 



<식물 애호>는 아마 <홀>이라는 장편으로 발전된 것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위와 장모의 괴괴한 관계도 그렇다. 딸은 죽고 사위만 살아남은 상황에 장모는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사고 휴유증에 시달리는 사위의 간병을 자처한다. 제대로 된 의사표현과 거동이 불가능한 사위는 장모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의 코드를 해석하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그 행동은 가면을 쓴 폭력이다. 바깥에서 볼 때 장모는 성녀 수준의 헌신을 보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딸 대신 살아 돌아온 사위에 대한 교묘한 앙갚음이 행해지고 있었다. 


대단한 복수나 보이는 폭력 대신 이런 음험한 진탕을 통해 작가는 인간을 제대로 읽어내려 한다. 친절을 가장한 폭력, 배려를 가장한 참견. 이상주의적인 관계, 소통, 사랑의 대척점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대단하다. 그것 또한 읽는 이들은 스스로와 가족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담만으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소화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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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 바쇼는 평생을 길위에서 보내다 객사했다. 무사의 길을 포기했고 그가 길에서 지은 수많은 하이쿠들과 산문들은 절창이 되어 남았다. 17세기의 시인은 수세기가 지나 자신의 시가 때로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줄 예감하지 못했다. 일본의 정신은 바쇼의 언어로 응축되었고 일본은 천황이라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접합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정복할 날을 꿈꾸었다. 그 부속품에는 타민족들이 있었고 그 수단은 검이었다.


이차대전 당시 1943년 초  점차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타이-미얀마 간 대규모 철로를 건설하려 수십만의 연합군 포로를 동원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캠프에는 심지어 호주인, 대만인, 타이인, 자바인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 대신 일본은 그들이 죽어가며 만들어낸 증기기관차를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하여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을 면죄받고 일본의 정신을 밀봉하려 했다.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익명으로 잊혀간 총 이십오만 명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다.
















"왜 태초에는 항상 빛이 있는 걸까?"로 시작하는 도리고 에번스의 회고는 기억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선형적이지 않다. 그는 때로 고모 에이미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 청년이었다 시암의 정글속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의 대령을 오가는 일흔일곱 살의 전쟁 영웅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적국 일본의 무모한 일본의 철로를 건설하는 명령에 호주의 포로는 자신이 이끄는 죽어가는 부하들 중 가장 죽음에 덜 근접한 이들을 선별해 내어 그 진창에 집어넣는 일에 협조해야 했다.


언제나 그들을 위한 일. 그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매일 그는 자신의 사랑이 실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계. 인간에 대한 존중도 존엄도 애저녁에 포기한 곳. 몸을 제대로 가릴 옷도 먹을 것도, 썩어가는 피부를 치료할 약조차 없고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백 명 앞에서 짓이겨지는 진창에서 그들은 서로 짐승처럼 사랑했다. 미워하고 투닥거리던 동료에게 자신의 형편없는 배급음식을 나누어 주고 똥통에 빠진 죽은 시체를 들어올려 장사지냈다. 아무리 그들이 짓밟으려 해도 전멸시킬 수 없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눈물겹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실제 그 현장의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의 역사의 현장에서 광기의 신들이 날뛰는 정글에서 길어올리는 참혹한 실상과 '나'가 아닌 '우리'에 기대어 마침내 생존의 출구를 찾아내는 이야기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의 시선은 피해자에게만 닿아있지 않고 반성없이 그 그 가해자의 패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비판없이 오히려 미화하며 수행하는 일본군 가해자들의 시점에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전후에 일상의 삶에 어떻게 편입되는지, 제대로 된 악행의 청산없이 스스로를 어떻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지에 대한 과정에 대한 탐사도 이어진다. 


조선인 부사관 최상민에 대한 이야기. 식민지국의 백성으로 가해자의 꼭두각시에 동원되는 그의 비극에 대한 설명은 먹먹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원하지 않음에도 그는 오스트레일리안 포로를 잔인하게 때려야 했다. 정작 1급 전범들은 용서받았음에도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조선인 최상민은 영문도 모른 채 처형당해야 했다. 이 모순과 이 억울한 방랑의 이야기에 호주인 작가가 부여한 서사는 놀라울 정도의 이해와 공감이 있다. "어머니가 담근 매콤한 김치"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대목. 어떻게 이러한 감성, 이러한 그리움을 알아냈을까.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기억에서 길어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의에 상관없이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가해자적 입장에 폭력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비극적 역사에 대한 복원이 정작 우리의 손이 아닌 머나먼 나라의 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페이지가 없었다. 그의 인생이라는 책이 그대로 끊어져버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그는 평화도 희망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도리고 에번스는 사랑 이야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였다. 

그는 지옥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사랑 또한 지옥이므로.

사랑이라는 '지옥'에 대한 절창. 그 기적에 대한 믿음이 삶을 지탱하는 연가. 인생이라는 시. 이 모든 것이 한곳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극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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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07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두고 여태 안읽고 있었는데, 이제 읽어야할 때가 온 것 같네요. 블랑카님 글은 역시 좋네요.

blanca 2019-05-07 12: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 그 문학동네 북클럽 가입하며 신청해서 받아놓고 막상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두었다 시작했어요. 초반부는 뭐랄까 좀 진부한 것 같아서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 싶어서 안 읽으려고도 했다니까요. 아, 다 읽고 나서는 정말 심장이 두근거려서... 맨부커는 딱 그 어떤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좀 서정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작품성도 있고 묘사력도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재주가. 마이클 온다치 생각도 나더라고요. 여하튼 한국 경비병 얘기 쓴 대목에서는 대체 이 사람 뭐지? 이랬어요. 호주의 백인 작가가 어떻게 한국 사람의 역사와 마음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혹시 부인이 한국인인가? 이런 심증까지 들었어요. 댓글이 너무 중구난방 길어졌네요. 핵심은 꼭 읽으시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예요. ^^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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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웬만하면 참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거나 취향이 아니면 초반에서 책을 멈추기로 하고 있다. 나는 더이상 하루 종일 시간이 너무 많아 주체가 안 되던 이십 대가 아니므로 남은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팟캐스트에서 알게 됐다. 무언가 진중하고 사려 깊은 느낌의 목소리. 확신에 찬 어조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후로는 오히려 이런 머뭇거림이 때로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요는 초반부의 감정의 과잉이 식상하다는 생각에 멈추려 했던 읽기가 종반부에 와서는 이야기가 끝날까 아쉬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인 포로 경비병의 시선에 대한 묘사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다 읽기 두려운 이야기. 알기 전과 그 이후의 진실의 무게는 하늘과 땅차이다. 실제 일본인의 포로였던 아버지의 체험이 투영된 호주 작가의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과 이 이야기의 완성은 맞물렸었다 한다. 시작이 이야기의 전부를 이야기해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 읽고 다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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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B. 피터슨은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삶은 원래가 고해'라는 이야기, 소아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키운 딸 이야기가 와닿았다. 뭐랄까, 진부하거나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언변이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사변적이지 않고 그것에 따른 해석이나 평가가 고답적이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인 색채나 논쟁적인 발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그의 논쟁적인 입지를 닮았다.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은 기억할 만한 대목이 많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섣부른 이상주의, 기만, 위선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이기심과 권력욕, 악에 대한 시선의 깊이와 명료함도 놀랍다. 한 마디로 낭만을 박살내는 엄중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근래들어 삶에서 중구난방으로 일어났던 각종 유쾌하지 못한 일들이 전혀 개별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삶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삶의 엄중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 인정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혼돈과 무질서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고 그것을 뚫고 나아갈 기량이 부족했다. 다소 직설적인 표현이 많아 때로 움찔할 정도다. 하지만 누군가는 옆에서 반드시 이런 조언들을 삶의 길목마다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일의 무게, 엄중한 책임은 흔히 쾌락과 편의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쉽고 즉각적인 쾌락, 보이는 것들의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알곡과 실재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는 조언은 나를 저격했다. 


당장 편하자고 갈등 상황을 피하고 문제를 언어화하는 데에 물러서는 자세에 대한 비판도 기억해 둘 만하다. 욕망의 경주장에서 정작 놓치는 것들에 대한 지적과 의식적인 노력과 주의에 대한 각성은 날카롭다. 



아쉬운 점도 있다. 기독교 교리가 절대 해법으로 제시되는 대목과 페미니즘과 성차에 대한 의견은 편향적이라 불편한 부분이다. 많은 이야기를 깊이 있게 하려고 시도하다 제대로 된 완결을 짓지 못하고 성급히 마무리해 버릴 때도 있다. 결함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책인데 장점도 그 만큼 많은 책이라 읽어보면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는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유튜브에 저자의 강연이 많으니 같이 찾아 함께 들어보며 읽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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