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그 혼돈의 연대기
론 파워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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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던 바로 그 책이다. 아내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2005년 7월, 3년 동안 조현병에 시달리던 작은아들 케빈이 스물한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우리 집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을 맨 뒤 10년 동안 나는 그 약속을 지켜왔다.

- 론 파워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머리말 중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왕왕 일어난다. 그것은 삶을 통과하는 시간과 공간과 사건들이 그런 약속을 했던 나 자신조차도 때로 변화시키기 때문일 테고 그렇게 했던 결심 그 자체가 가치는 의미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이 지극히 사적인 애통한 상실과 그 상실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함의를 천착한 보기 드문 책이 있다. 저널리스트 론 파워스에게는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 딘과 케빈은 음악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보통 형제 이상의 교감과 연대감을 나누었다. 과학자인 어머니와 작가인 아버지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우연으로 부부가 된 낭만적인 사연을 가지고 영민하고 아름다운 형제를 버몬트의 동화 같은 풍광 속에서 키운다. 너무나 현실 같지 않은 빛나던 시간들은 비극적인 결말의 지점으로부터 돌아서 바라 본 지점에서 회고된다. 그 시간들의 마침표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왜 이러한 일을 이렇게밖에 겪을 수밖에 없었는 가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을 가지고 온다.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조현병도 함께 앓게 된다. 동생은 형과 함께 연주하던 시간을 눈물어린 추억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적인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과한다. 론 파워스의 경우 비단 조현병 뿐 아니라 광범위한 의미의 정신질환을 둘러싼 미국의 200년간의 역사의 개관을 활용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무력한 자들을 어떻게 가장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를 지향한 철저한 몰이해와 오판의 사례다. 정신질환의 범죄화가 바로 그것이다. 


'문명'사회가 그 사회에서 가장 무력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사례로 끝없이 채워져 있는 나의 파일은 그 자체로 대대적인 잔혹함에 관한 하나의 서사다.

-p.261


결국 정신질환자들은 병원보다 감옥을 더 많이 채우는 비상식적인 결론을 낳았다. 이 안에서 애초에 받았어야 할 적절한 치료와 보호 대신 이들은 철저한 고립과 학대, 방임으로 더욱 망가진 상태로 세상 밖으로 내쳐진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더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는 것이 론 파워스의 결론이다. 적시의 진단, 적절한 개입, 인내심이 필요한 약물치료와 사회적 지지 대신 즉각적으로 손쉬운 교화, 분리 등을 택하는 사례는 그러나 용기 있는 이들에 의하여 재고되고 그 방향을 트는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의학적 진보는 질환에 대한 이해를 수반했고 이는 결국 이 책의 원제처럼(No one cares about crazy people)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개혁적인 움직임도 가지고 왔다. 명료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는 그 가름끈을 선악의 구도로 속단하지 말고 그러한 비극을 철저히 타인의 것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닌 공감어린 정책에 힘을 실어주자는 목소리는 저자 자신의 처절한 상실로 깊이 공명한다. 사적인 상실의 애도는 심오하게 깊어지고 확장되어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적인 시선으로까지 나아간다.


너무나 정상적이었던 그래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당연시하고 꿈꾸었던 한 가정이 어떻게 갑자기 몰아닥친 비극으로 흔들리고 그럼에도 그 상실을 딛고 또 다시 삶이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지금 여기에서 숨을 쉬고 생을 산다는 일의 그 엄중한 무게를 실감케 한다. 꽃길만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맨발로 때로 유리에 발을 베는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쌓는다. 그것을 개인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확장하려는 저자의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강고한 의지와 노력이 전해져 뭉클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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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잊지 못할 가교 역할을 한다. 그것은 사람, 장소, 취미 때로는 책이 될 수 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인도하는 텍스트의 링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서점에서 책의 실물이 단박에 나를 사로잡아 작가도 내용도 제대로 짐작조차 못하고 이 책을 샀다. 실제본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등, 어디 하나 걸리적거리지 않고 백팔십도로  활짝 펼쳐지는 책의 제본이 내용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읽다가도 자꾸 책등을 쓰다듬고 책을 펼쳐보게 만드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책은 흥미롭게도 그 책을 대책없이 사랑하는 출판인의 자신의 책에 대한 열정의 기록이었다. 



















저자 김흥식은 우연히 한문으로 접해 깊은 감동을 받았던 류성룡의 <징비록>을 대중들이 읽기 쉽게 번역하게 된다. 예상 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임진왜란의 포화 속에 임금을 수행했던 고위 관료가 우리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란이 수습되고 난 후 후손들에게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한 글은 우리 스스로 우리 국토를 수호하지 못해 명나라 구원병의 도움에 기대어야 했던 그 비굴한 상황과 오버랩되어 한없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저자 또한 수십 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했다. 제대로 된 무기도 방비도 없이 그저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쫓기는 신세에서 백성들은 도륙 당하고 사방에서 곡성이 치솟을 때 한양의 궁성을 빠져나가는 임금 곁에 서야 했던 류성룡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신하들과 병사들 앞에서야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홀로 있을 때 자주 눈물을 흘렸다. 

 

돈의문을 지나 사현 고개에 닿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려 성안을 바라보았더니 남대문 안의 커다란 창고에 불이 나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고개를 넘어 석교에 도착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류성룡 <징비록> 중


















그는 패색이 짙던 전란을 단 한번의 승리로 구도를 전환시킨 이순신을 천거했고 수시로 내빼고 싶어했던 명나라를 어떻게든설득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 일조를 담당하도록 지원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용단을 내려 임무를 재대로 수행하지 못한 병사와 신하를 징벌했다. 그 와중에 굶주린 백성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해 수시로 식량을 조달하고 구제를 도왔고 명나라에서 선진의 병법과 무기들을 전수받아 우리 군을 정비하는 근본적인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럼에도 그의 노후의 기록은 각종 당쟁과 사화들로 고립되는 것으로 나온다. 전란의 한가운데에서 그가 세운 공은 결국 그가 조정으로 나아가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후손들에게 이렇게 빛나는 기록으로 남았다. 그의 문체는 건조하고 담담한데 그 언어들이 그려내는 실상의 처절함과 생생함은 그 깊이와 넓이가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 광대하다. 참화의 가운데에 정작 우리는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한테 갈 때에 대한 묘사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젖먹이가 죽은 어미 옆에서 우는 풍경으로까지 나아간다. 그 와중에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용기있는 자들과 자신의 안위만 챙겨 도망가는 고위 관료들의 모습의 대비가 극명하다. 사백 년도 전에 이 가난하고 척박했던 땅을 사수하고자 초개 같이 목숨을 버렸던 숱한 선현들의 피땀이 오늘날의 평온한 일상을 가져왔다는 각성에 숙연해졌다. 여전히 깊은 울림을 가지는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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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는 묘한 삼십 대의 정서가 서려 있다. 청춘에서 중년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거기엔 청춘의 기억과 중년 초입의 어떤 체념이 섞여 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자각은 충분히 늙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직은 그래도 순수와 열정과 희망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시기. 그러고 보면 그녀의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던 나의 마음과 지금 '오직 한 삶의 차지'를 앞에 둔 내 모습의 온도차는 제법 크다. 

















<체스의 모슨 것>의 노아 선배 같은 엉뚱함, 치기는 삶의 '변화의 완수' 앞에서 때로 무력하다. 우리 모두는 변하고 관계 또한 그러하다. 김금희는 그러한 시간의 강을 통과한 청춘의 소멸을 때로 한꺼번에 소환해서 펼쳐놓기도 한다.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에서  까페의 사장은 엉뚱하게 아직 너무 젊고 가진 것이 없는 작업장의 청년을 은밀하게 짝사랑한다. '내'가 그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 사장과 소통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오히려 같은 또래의 아르바이트생인 '그'와  공모한 기발한 반역 같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그렇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조차도 사실은 착각이었다는 놀라운 깨달음을 준다. 사실 '우리'라고 생각했던 연대는 한없이 얄팍한 것이었다. 한데 뭉뚱그려 하나라고 생각하는 가상의 집단에 대한 허상. 청년 세대, 중년 세대, 장년 세대의 개별성과 구체성은 그 안의 서사에 귀 기울일 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K는 여자가 늙었다는 것,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침내 늙어버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여자는 거부하지 않았음을, 살 것을,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여자가 했다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 이 도시에서 어떤 무게를 감당하면서 거짓말처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금희 <쇼퍼, 미스터리, 픽션>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침내 늙어버렸다는 것"은 순리라기보다 하나의 성취임을 자각하게 되는 나이, 생활과 삶은 함부로 비하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수용해야 하는 지점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이미 걸어온 지난 청춘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과 이제는 꿈꿀 시간보다 견디고 그저 통과해야 하는 시간들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을 씁쓸하게 수긍하는 순간들과 만난다. 표제작인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는 책을 내는 일을 하다 실패한 화자가 결국 생활과 현실의 무게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순간들이 자꾸 금전적으로 기대게 되는 장인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부각된다. 현실과 삶에 자꾸 무릎이 꺾어야 하는 꿈꾸는 몽상가들의 좌절이 작가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김금희는 이들이 품고 있는 과거의 그렇지 않았던 시간들에 보내는 애도, 그리고 이제는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대한 담담한 수용의 지점에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그 비가는 왠지 서글픈 아름다움의 정조를 띤다.



"그렇게 눈을 녹이는 것이었다. 붙들 것이 없다면 그냥 자기가 걸어서."<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이제 작가는 그렇게 자기가 걸어서 수많은 좌절들과 상실들을 겪어내며 어떻게 늙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향해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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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9-29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4세까지는 청년이랍니다.노인도 70세 이상으로 상향조종 된다고 하니 그 중간은 그냥 장년층이라고 부르는것이 맞겠지요^^

blanca 2019-09-30 14:14   좋아요 0 | URL
이제 육십 대는 노인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중장년층으로 보이더라고요. 평균 수명이 길어지니 조종이 필요한 부분인 게 맞는 것 같아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란 어렵다.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이 도저히 어쩌지 못할 국가재난 사태나 자연재해일 경우 외부자의 시선은 더욱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한편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선은 감정적 동요나 주관적 편견을 극복하고 투명하고 넓은 지평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2011년 3월 동일본을 강타한 쓰나미의 대참사는 원전의 폭발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국의 외신 기자 리처드 로이드 페리가 르포 형식으로 쓴 이 책은 그 쓰나미의 직접 피해지역인 작은 어촌 마을 오카와의 초등학교의 아이들 몰살에 관련한 6년에 걸친 취재의 기록이다. 비교적 재난방비가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다고 알려진 일본에서도 한 초등학교 아이들이 교사의 지시에 따랐음에도 거의 전원이 죽음에 이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저자는 오카와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을 잃은 학부모들과의 심층면접으로 평범한 하루가 어떻게 예기치 않은 대재앙으로 붕괴되는지 그 상흔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다시 불행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밀하고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나간다. 이야기는 현 아베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혐오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일본 대다수의 국민성에 대한 분석으로까지 확장된다. 



오카와가 위치한 도호쿠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고립되고 낙후된 이미지가 강했다고 한다. 쓰나미와 지진에 대한 학교의 매뉴얼은 형식적이었고 관료주의에 찌든 교사진은 실제 재난이 발생했을 때 대처가 안이해서 아이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쓰나미가 오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는 우를 범했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음모가 아니라 평범한 우둔함과 어리석음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사는 아이들을 찾아 울부짖는 학부모들을 피해 다니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조작한다. 아이의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행정당국이나 학교보다 부모들에게 더 처절한 것이었다. 심지어 한 엄마는 딸아이를 찾기 위해 자신이 직접 중장비 기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땅을 판다. 가까스로 아이를 찾아낸 엄마는 아무리 아이에게서 닦아내도 없어지는 않는 진흙 앞에서 절망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시토 사요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에 의해 키워진 것은 바로 우리, 부모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우리는 아이들이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애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애들이야말로 주춧돌이었어요. 다른 모든 조각은 그 위에 의존하고 있었어요. 

-리처드 로이드 패리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아이를 잃은 부모들 간의 갈등과 내분에 대한 이야기도 슬프다. 상실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넓어서 그 안에서도 차이와 차별이 있었고 서로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의 골이 때로 그들을 싸우게 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책임자를 가려내고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의견은 자신들의 동료들을 공격해야 하는 민감하고 어려운 위치에 있는 다른 학부모들의 저어와 충돌했다. 어제까지 함께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녔던 관계는 서로를 반대편의 스파이로 오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또한 공권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는 일본의 국민성과도 만나는 이야기였다. 체념과 순응의 정서는 진실의 규명을 위해 취해야 하는 여러 적극적인 절차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쓰나미는 숨겨져 있던 많은 것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것은 때로 불편하고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우리의 어제와 같은 나날들은 사실 갑작스럽게 붕괴될 수 있는 한없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다. 외부에서 충격이 주어지면 찢어져버고 만다. 인간이 다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살 같은 아이를 속수무책으로 잃어버린 경험은 사실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이야기들에 닮은 구석이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고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국 사지로 내몰고 혼자 살아남은 교사 대신 끝까지 아이들과 함께 마지막을 맞이한 많은 교사들이 있었다. 


"오늘 평결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경험의 총합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로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한 일이 가지는 의미의 일부입니다.<중략>"


법정에서 부모들을 대변한 변호사의 이야기는 많은 울림을 가진다.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한 일이 가지는 의미의 일부"로써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고 사후 대책을 수립하는 일이 그토록 절실한 이유다.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어버린 부모들이 여전히 그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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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자서전
마크 트웨인.찰스 네이더 지음, 안기순 옮김 / 고즈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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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어른 한 분은 90이 넘자 자서전을 출판하고 싶어하셨다.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짐작이 갔다. 그 소망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안타깝게도 이루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삶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우리는 그 남은 기록이나 후손들의 기억의 조각들로 그 사람의 생을 재구성한다. 기록도 기억도 각자의 관점에서 왜곡되지만 그 왜곡이 전부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여하튼 누군가의 언어로 한 사람의 잊혀질 뻔한 삶을 재건하여 이해한다는 건 언어로는 다 형용하기 힘든 가치를 지닌다. 


여기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이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의 작가는 사실 '증기선의 안전 항행 수역 수심 두 길'을 뜻하는 필명이다. 그의 자서전은 그의 의지대로 사후에 출간되어 스스로를 이미 '죽은 자'로 칭하는 익살을 빛냈다. 상당 부분이 구술로 이루어져 어떻게 보면 다소 난삽하고 시간의 흐름도 때로 어긋난다. 찰스 네이더의 편집으로 독자들이 방대하고 난해한 그의 이야기의 숲에서 다행히 길을 잃고 헤매지 않게 되었다. 실제 대체로 탄생부터 시간의 흐름대로 펼쳐지는 그의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는 편집자에 의하여 재구성된 것이다. 때로 일흔흘 훌쩍 넘긴 마크 트웨인이 비집고 들어와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는 마치 한 대작가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술 한잔 걸치고 되는 대로 뱉어내지만 그 문장 문장 하나가 놀랍도록 문학적이고 심오해서 에피소드 하나로 때로 감동적인 단편 소설을 낭독하는 현장에 초대된 기분이다. 특히 찬사를 받는 그의 어린 시절 삼촌의 농장에서 사촌들과 보냈던 정경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감각적이라 지금 거기에 가 있는듯한 착각을 자아낼 정도다.


겨울 동안 저 아래 지하 저장실 통 안에 보관해 둔 냉동사과의 모양이 생각나고, 깨물면 어찌나 딱딱하고 이가 시렸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맛이 좋았는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겨울 저녁 화로에서 사과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지고 이렇게 구운 사과를 크림에 푹 담갔다가 설탕을 약간 뿌려서 뜨거운 채로 먹을 때는 정말 뿌듯했다. 

-p.71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고 때로 시니컬한 논객이지만 진지하게 삶에 대한 통찰을 얘기할 때는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들이 한 가득이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먹을 것을 위해 일하고 땀 흘리고 고군분투한다. 언쟁을 벌이고 비난하고 싸운다. 서로 앞다투어 조그만 이권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면서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하고 질병이 뒤따른다. 수치와 굴욕이 자존심과 허영에 상처를 입힌다. 사람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삶의 즐거움은 고통받는 슬픔으로 바뀐다. 고통, 근심, 비참함의 무게는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무거워진다. 마침내 야망이 죽고 만다. 자존심이 사라진다. 허영이 무너진다. 그리고는 드디어 세상이 부여한 것중에서 유일하게 독성이 없는 선물을 받는 순간에 도달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진다.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만을 저지른,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없는, 자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단 하루 애도를 표하고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p.298


무시무시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예리한 묘사다. 평범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요약해버리니 할 말이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직시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고 끄달리고 괴로워하는 시간들의 낭비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는한 우리는 또 유한한 금같은 나날들을 아깝게 소진하고 말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가족들은 그의 작품의 숨은 편집자이자 리뷰어들이었다. 특히 아내는 주도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수정하고 편집했다. 어린 딸들은 엄마의 주변에 앉아 엄마가 삭제해버릴 아빠의 사랑스러운 과감한 문장들을 비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들은 두 명이나 장성해서 마크 트웨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에게 아내와 딸들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질러 가족, 사랑, 존재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하게 한다. 그는 '영원'을 믿지 않고 삶은 한번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이들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선물이라는 믿음으로 시련을 통과한다. 가장 오래 남아 가슴 아픈 작별과 상실의 장을 통과해야 했던 대작가의 이러한 관조적인 시선은 소년들의 모험담을 통하여 미국을 이야기했던 위대한 작가가 마침내 얻어낸 가장 어렵고 고귀한 죽음에 대한 통찰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나에게도 위로가 된다.


스스로를 더없이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칭했던 그가 죽어가는 아내와 거의 최후까지 문틈으로 러브레터를 교환했던 대목은 그의 냉소보다 더 강렬하다. 그렇게 마크 트웨인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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