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이모는 내게 외출할 명분을 만들어주고싶어하는 눈치였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버스를 타고 시내로나가 단풍이 물든 이곳저곳의 풍경을 찍어 이모에게 보냈다. 그러면 이모는 ‘아름답구나. 내일은 또 어디에 가서 찍어올 거야?‘ 같은 식의 짧은 답신과 함께 G시의 가을 풍경 사진을 보내왔다. 침대 시트까지 걷어내어 이불 빨래를 돌리고, 집밖을 벗어나 한낮에사람들 사이를 걷는 것. 규칙적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것. 별것 아닌일들이지만 다시 그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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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후회가 밀려왔다. 한수를 정말로 위한다면 한수에게 다시연락해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야만 한다고, 내 안의 누군가가 자꾸 속삭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수를 다시 좌절시키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수가 나에게 실망해버릴 거라는생각을 하면 무서워졌으니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나를 한수는 경멸할지도 몰랐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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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나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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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 적막과 그것에 균열을 내는 나지막한 코 고는 소리. 그 소리는 나에게서 아주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놀랍게도 내 옆의 온기처럼 위안이 되곤했다. 이모가 우리집에 머무는 동안 만나거나 통화하기가 어려울거라고 말해놓았기 때문에 우재는 퇴근하면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따금씩은 메시지에서 이모를 같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우재를 선뜻 이모에게 보여줄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재가 더이상 단순한대학 동기가 아니라는 자각이 내 안에서 또렷해졌지만, 누군가가내 삶에 중요해진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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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게도 하는 K.H.

그런데도 나는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사실 나는 모른 척해왔지만 네가 대학에 들어간이후 데모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단다. 큰오빠가 딱하다며얘기해줬거든. 그 이야기를 처음 전해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걱정이 되었어. 그렇게 열심히공부해서 대학에 가놓고 데모만 하다니.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고 너 몰래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K. H. 야, 어쩌면 나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너를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몰라.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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