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마음 - 문예 세계문학선 014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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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마음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굳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로 시작하는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혹은 뉴스를 보면서, 심지어는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볼 때도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토록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진 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름부터가 ‘마음’이란다. 어떤 이야기를 전개해서 마음에 관한 문제를 풀어갈지 무척 궁금해서, 제목만 들었을 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야말로 나에겐 ‘마음’에 쏙 든 이름이었다.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을 크게 세 편으로 나누고 1‧2편과 3편에 각각 다른 서술자를 내세워, 이들 두 주인공의 만남과 ‘선생님’의 과거, 그리고 그에 따른 인물들의 내면에 특히 큰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작중 인물의 심리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밀하다.

 '선생님’은 도쿄 제국 대학 출신의, 이른바 엘리트 지식인인 중년의 남성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집에 칩거한 채 아내와 단둘이 살아간다. 그는 젊은 시절 작은아버지의 배신과 친구의 자살로 큰 충격을 겪고 고독하게 살아간다. 방학을 맞아 한 해안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던 ‘나’는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고 그와 가까워지게 된다. ‘나’는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매료되어 그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선생님’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대한다. ‘나’는 그 이유는 몰랐지만, 여전히 관계를 지속해간다. 그러던 중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가게 된다. 이때 ‘나’는 편지로 보내진 ‘선생님’의 유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3편은 '선생님'이 ‘나’로 등장하여 유서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선생님’은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염세주의자는 대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다가서지만, 도리어 연약한 마음에 여러 상처를 입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유서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저버리고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329p)

 ‘선생님’은 세상에 대한 환멸을 넘어 자기 자신조차 증오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내가 앞서 제시한 염세주의자의 모습보다 더 정도가 심하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최후의 피난처인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잃어버린 채 ‘닫힌 공간’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런데도 작품을 읽어나가며 ‘선생님’에게 공감하게 된 것은, 나 역시 '선생님'과 비슷한 태도를 가질 때가 종종 있어서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태도, 스스로에 대한 비난, 인간에 대한 환멸…….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뒤표지를 보니, 본 작품을 두고 "한 인간의 ‘아집'을 절제된 투명한 문체로 써나간 수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작중 인물인 ‘선생님’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읽었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를 두고 아집이라고 평한 의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집이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자신을 변호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저런 삶의 태도를 아집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래서 작품을 다 읽은 뒤 ‘선생님’의 태도, 더불어 나 자신의 관점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사전에는 ‘아집(我執)’을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의를 알고 나자 ‘선생님’의 태도를 아집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충분히 평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선생님’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고,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절친한 친구 'K'를 자신이 사는 하숙집에 들이고자 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서적들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있던 K의 마음이 점차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있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네. 난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일을 진행했으니까 말이야.’(248p) 그는 ''K'를 설득할 때 그가 고집하는 것은 맹신에 불과하다는 걸 반드시 깨우쳐주고 싶었네.’(244p) 라며 유서에서 그때를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마저도 친구인 ‘K’ 못지않은 아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아집이다. 그는 ‘K’의 비관적인 태도와 처지를, 그를 자신의 하숙집에 들임으로써 바꿀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강한 믿음에 기반한 선의로 시작하였으나, ‘선생님’은 그로써 생겨난 사건으로 큰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지내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확신은 무섭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 가진 직관과 정보에 의한 판단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은 비극적이다.

 “아무튼 날 너무 믿지 말게.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기만당했다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끔찍한 복수를 하게 될 테니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훗날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고 싶네. 나는 지금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참기보다 차라리 외로운 지금의 상태로 버텨가고 싶네.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나는 이 생각을 신앙처럼 품고 계신 선생님에게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몰랐다.(49p)

 ‘선생님’은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자신에게 주어진 대가로 받아들이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아집’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순수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끝까지 뜻대로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일관된 삶을 이루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모습이라고 확신했다. ‘작은아버지’로 대표되는 그토록 싫어하던 인간의 모습, 제 잘못을 의식조차 못 하는 그들과 결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믿고 살아왔던, 홀로 남겨질 ‘사모님’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결정은 다른 결과에 대한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유서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다른 선택지는 고려할 수조차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를 속 시원히 아내에게 털어놓으려 했던 적도 몇 번 있었네. 허나 그럴 때면 반드시 그다음 순간에 나 이외의 어떤 힘이 나타나 고백하고자 하는 날 억누르는 거야.’(328p)

 ‘내가 이 감옥 안에 더 이상 틀어박혀 있을 수 없게 됐을 때, 그리고 어찌해도 그 감옥을 깨부술 수 없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지. 자네는 어째서 그것만이 길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은 모든 면에서 나의 활동을 차단하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길만큼은 갈 수 있도록 날 놓아주었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나?’(336-7p)

 이 작품을 이해할 때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가정하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적용한다면, 그의 죽음은 쉽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그는 모든 사실을 홀로 간직한 채, 모른 척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는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도 더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그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 것은 일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는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위의 유서 내용에서 가장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양심’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하였을 때 흔히 ‘양심이 찔린다’고 표현하는 마음속의 어떤 것 말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남들보다 더 결벽성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보통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누군가는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인생관을 완전히 뒤집고,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며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와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성향,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 안에 확립된 가치관이 매우 확고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그리스 비극을 참조하여 그의 선택을 분석해볼 수 있다. 그의 유서에는 ‘불가사의한 힘,’ ‘운명’과 같은 말이 꾸준히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다른 어떤 선택도 그로서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음』은 일종의 운명극(주인공의 모든 행위를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려 파멸과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희곡 작품.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다분히 문학적이어서, 논리적 원인을 규명하기에는 거의 효용이 없다고 하겠다. 더구나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와 같이 지배적인 신조차 없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때때로 문학 작품 밖의 실제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말 못할 '운명'과도 같은 해석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곤 한다. 물론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은 어느 정도는 믿음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해석이 다양하다는 것은 결국 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현대에조차도 인간이 갖가지 현상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 역시 여전히 그 실체와 작용 방식이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 뇌과학, 심리학 등의 학문 영역에서는 뇌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인간 마음의 작동 기제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 추세로 보면 여러 문학 작품이 뇌과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힐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의 작동 기제가 어떻든 소세키의 『마음』이 백여 년이 지나도록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죄책감의 문제’와 ‘복잡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세밀하고 고백적인 문체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2018. 8. 7. (화) 23:44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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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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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힘없는 조선 땅과 조선 국민이 무참히 짓밟혔던 시기이다. 36년 동안 무수히 많은 수탈과 폭력·인권 유린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제는 오로지 국가의 전승(戰勝)을 위해 개인을 철저히 도구화하였다.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위안부 강제 동원’일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한다. 더 이상 이런 국가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품 속 ‘그녀(윤금실)’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유는 몰랐다. 동의 여부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어린 여성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열세 살에서 많아야 열여섯 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다. 몸과 마음이 채 다 자라지 않아 영양과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그런 나이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월경을 시작조차 않은 어린 여성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동원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소녀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가 다녀갔다. 일요일에는 50명도 넘게 다녀갔다(87p).’ 누군가는 ‘불두덩에 대고 성냥을 그어댔다(44p).' 그렇게 십여 년을 보낸 뒤,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을 맞아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잊혀졌다. 아니면 몸을 버리고 왔다며 손가락질 당하거나, 큰오빠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는다며 비난받아야 했다. 감정이 소진되어 눈물조차 나지 않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누구에게 털어 놓을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끌려가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밝힐 수조차 없었고, 홀로 엄청난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외롭게 살아야 했다. ‘그녀’ 역시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심지어 자식도 하나 없이 외롭게 한 많은 삶을 아흔 셋까지 살아왔다.

 그런 한 많은 그녀지만,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신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56p).’ 항상 움츠리고 살아온 그녀가 역설적으로 신을 가장 두려워한다. 정작 악한 이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에도 말이다. 또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24p)'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 사람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인간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인간으로서, 짐승 같았던 이들의 행동이 초래할지 모를 신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열세 살이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만주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인간이었다(204p).' 물론 잔인한 일본 국가주의의 폭정 속에서도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 주고 고향에서 온 전보를 가져다 준 야전 우체국 국장, 전투를 앞두고 울던 일본 군인……. 심지어 향숙은 일본 군인들을 동정하기도 한다.

 “일본 군인들도 우리처럼 부모형제하고 생이별하고, 목숨을 버리러 만주까지 왔대. 어제는 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니까 그러더라. 죽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서 엄마가 있는 조선에 돌아가라고…….”(174p)

 작품 말미에서 한 생존자 할머니가 TV에 소개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소설 ‘부활’ 만 여섯 번을 읽었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방송사 여자에게 읽어준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서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어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191p)

 ‘누굴까? 누가 새끼 고양이를 양파망에서 꺼내 놓아주었을까?(205p)' 나는 고양이를 꺼내준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해치는 이가 있으면, 구하는 이도 있다. 망치는 인간이 있으면, 회복시키는 인간도 있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국가들에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한 나라에 역사적 과오가 아예 없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고, 기록이 남았다. 일본 제국을 계승한 현재의 일본이 ‘망치는 나라’를 벗어나 ‘회복시키는 나라’가 되고 싶다면, 대한민국과 위안부(성노예)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국가적 폭력 안에서, 국가보다 존엄한 한 명 한 명의 인간이 무참히 착취당하지 않았던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시는 지금이 일본이 인간의 얼굴을 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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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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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녀는 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찡그린 표정일까, 화가 난 표정일까, 체념한 표정일까,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일까.
그런데 신에게도 얼굴이 있을까?
그렇다면 신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처럼 늙을까?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 - P24

24 장롱에서 요를 내려 거울 아래에 편다.
문지방를 등지고 앉아 요를 손으로 쓸고, 또 쓴다.
서쪽으로 앉은 마루 깊숙이 오후 볕이 든다. 그녀의 그림자가 요 위로 오줌 자국처럼 번진다.
그녀는 요 위로 올라가 천장을 바라보고 눕는다.
눈을 감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녀는 잠들려 애쓰지 않는다. 인간이 잠을 안 자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그녀는 온전히 잠들었던 적이 없다. 몸뚱이가 잠든 동안에는 영혼이, 영혼이 잠든 동안에는 몸뚱이가 깨어 있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도로 뜨고 옆으로 천천히 돌아눕는다. 누군가 자신의 옆으로 와서 눕기를 기다리듯 손으로 요를 쓰다듬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다. - P24

41 그녀는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게 타고난 사주팔자인지, 기질인지, 신의 의지인지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이 합심해서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그녀는 신을 느낄 때가 있다. 간유리에 새벽빛이 번질 때, 풀숲에서 참새들이 떼 지어 날아오를 때, 다디단 복숭아를 베어 물 때……. 신을 느낄 때를 헤아려보던 그녀는 자신이 신을 느낄 때가 많다는 걸 깨닫고 놀란다. 생전 처음 도라지꽃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신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혹여나 신이 볼까봐 남의 집 마당에 떨어진 모과 한 알 몰래 줍지 않는다. 신이 들을까봐 속말로라도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는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보다 자신이 어쩌면 더 신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P41

90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다 하면서도,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 P90

128 분선은 자신에게 자주 오던 야전 우체국 국장에게 부탁해 고향으로 전보를 부쳤다. 그는 일본 동경이 고향으로 와세다 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우체국에 취직을 했는데 야전 우체국으로 발령이 나서 만주까지 왔다. 그는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주었다.
분선은 글자를 쓸 줄 몰라 금복 언니가 대신 써주었다.

저는 비단공장에 와 있어요. 돈 벌어 돌아갈 때까지 몸 건강히 계세요. 답장은 하지 마세요.

얼마 뒤 분선은 고향에서 부쳐온 두 통의 전보를 받았다. 우체국 국장이 그 전보들을 챙겨서 가져다주었다. 두 통의 전보는 한 달 정도 시간차를 두고서 도착했다.

어머니가 아파 죽어간다.

어머니가 죽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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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황선미 지음 / 비룡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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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장미가 인정하지 못하거나 잘 모르는 게 있었다. 장미가 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누군가에게는 장미도 시선을 끄는 데가 있는 애라는 사실. 장미가 혼자 남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그나마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믿는 것과 달리 제법 괜찮은 애라는 인상을 주곤 했던 것이다. - P94

140 포만감이 날 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건 장미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고 청소부에 대한 인식마저 바꿔 버렸다. - P140

199 "당분간만이야."
청소부가 딱 잘라 말하고 나갔다.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장미는 군소리 없이 청소부를 따라갔다.
김순영. 그녀가 병원비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묻지 않았고 당분간이 얼마 동안을 의미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통원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녀가 곁에 있기로 했고 머물 곳이 그룹홈은 아니라는 걸 짐작한 게 다였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따르면서도 장미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청소부는 고모보다 먼 사람이었다. 내가 미쳤지, 라는 말처럼 언제든지 정신 차리고 타인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녀가 언제 돌아서든 상관없으려면 경계심을 가져야만 했다. 그게 언제든 덜 힘들게 괜찮을 수 있게. - P199

231 한밤중에 진주로부터 문자가 왔다.
-ok?
괜찮은지 묻는 듯했다.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왔는지.
-ㅇㅇ
-잘살아기지배야
-너두
-나이제너몰라안녕
안녕. 그 글자를 장미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숨 막히게 붙어 있는 글자들. 진주가 떠났다는 게 느껴졌다. 어디서 이걸 보냈을까. 이렇게 적으며 진주는 웃었을까. - P231

232 장미는 꾸역꾸역 밥그릇을 비웠다. 청소부는 장미가 짐작만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른이다. 고모도 꺼린 자기를 챙겨 주고 편이 돼 주고 옷을 사 주고 집에 들이고 택시비를 내준 사람이다. 장미에게 유일한 어른, 유일한 의지. 그렇다고 장미가 안심한 건 아니었다. 설명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청소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믿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간절히.
청소부가 식탁 귀퉁이에 놓였던 쪽지를 집어 들었다. 밤에 하티 분유를 타던 중에 장미가 적어 놓은 거였다. 제가 너무 나쁜 애라서 정말 죄송해요. 청소부가 마음을 풀고 용서해 주기를, 모든 걸 눈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거였다. 경찰에 연락할 줄 알았으면 남기지 않았을.
청소부가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야."
그 소리가 장미의 심장에 쿡 박혀 버렸다. 감당할 수 없게 몸이 떨려서 장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말이 되지 못한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기어올랐다. 몸이 뜨거워졌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도망치는 장미를 청소부가 붙들었다. 그리고 숨도 못 쉬게 끌어안았다. 청소부의 앞자락에는 조금 전에 만든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장미처럼 뜨겁고 장미처럼 떨고 있는 가슴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 장미는 믿었다. 괜찮을 거야. 나쁜 일 아냐.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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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범우사상신서 30
자크 모노 지음 / 범우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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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리고 인간: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적인 존재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1985년 번역 출간)
 

 삶은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연속일 뿐인가? 평생 한 번쯤 우릴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건 이 질문이 결국 ‘우린 삶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갈 수 있나?’, 혹은 ‘우린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나?’와 같은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행복한 삶과 관련이 있어서일 것이다.

 

 ‘라플라스의 도깨비’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1749-1827)가 19세기 초에 떠올린 것으로, ‘‘현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유추하는 존재'이다. 만약 이 누군가가 전 우주의 모든 원자들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면 고전 역학의 법칙들로 그 원자들의 그 어떤 과거나 미래의 물리 값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출처: 위키백과)’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은 운동 법칙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과학적 결정론의 상징이다. 현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긴 하지만, 이 관점에서라면 삶도 운명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위 문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우선 저자는 노벨 생리·의학상(1965)을 받은 20세기의 과학자다. 바로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1910-1976). 이 책 『우연과 필연』은 프랑스에서 1970년에 출간됐다. 책에서는 현대 생물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의 출현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삶은 어떨까?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모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생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전통적 관점인 생기설과 물활설의 정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생기설은 ‘생물체는 무생물체와 성질상 다르다'는 관점이다. 여기에서 생명과 무생명의 구별은 합목적성(어떤 사물이 일정한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질.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곧 생명체는 무생물과 달리 분명한 목적을 갖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물활설은 ‘모든 물질은 생명이나 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연관(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생기설적 관점에서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 물질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생명 현상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47p)’고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관점은 다르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이미 모든 생명체가 가진 놀라울 정도의 구조적 동일성을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인 저자 역시 생명에 있어서 ‘신비의 영역’은 이미 거의 소멸되었다고 본다. 이를테면 모든 생물의 화학적 기구는 단백질과 핵산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구조상 같으며, 대사 반응을 수행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과학은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과학적 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부터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과학적 세계는 모든 것이 오직 객관성이라는 유일한 전제로 측정되는 세계다. 바로 이러한 특성 덕택에, 과학은 오랜 역사를 거쳐 내려오는 철학적 논쟁에 참여할 필요 없이 오직 모든 현상을 분석하여 불변성을 찾는 노력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철학적 논쟁들은 모두 ‘선험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리 품고 있던 윤리와 정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후천적 구조물이었던 것이다(131-2p).’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과학 이전까지의 철학은 객관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윤리와 정치를 위한 짜맞추기에 불과했단 것이다.

 

 이어 저자는 진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현대 분자유전학에서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연구한 결과, 그러한 변화는 순전히 ‘우발적인 것이며 무방향적인 것(146p)’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목적없는 이런 우연한 변화가 생명체의 진화를 낳는 것이다. ‘그 변화가 유전의 텍스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며, 이 텍스트가 생물의 유전적 구조의 유일한 저장물이므로,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생물권에 있어서의 모든 신기한 것과 모든 창조의 원천은 다만 단순한 우연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146-7p).’ 즉 저자가 책 제목에서 말한 ‘우연’은 곧 돌연변이를 뜻한다. 이는 양자적 구조가 원인이라 불확정성의 원리가 적용되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예견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한다. 더구나 책이 쓰여질 당시 ‘삼십 억에 이르는 인류는 각 세대마다 천억 내지 일조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다(157p)’고 하니, 유전정보의 우발적 변화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결국 그는 진화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과학 분야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파괴하는 것(147p)’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서다.

 

 인간이 진화의 산물인 이상 우연의 영역에서 인본주의는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책 이름에 쓰인 나머지 단어인 ‘필연’의 영역에서는 어떨까? 여기서도 인본주의는 처참히 무너진다. 우선, 어떤 행위를 하게끔 만드는 유전자를 가진 인간은 당연히 그러한 행동을 한다. 놀라운 것은 학습된 행동조차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 행동을 발현시킬 거라는 게 미리 예정되어 있다. ‘프로그램의 구조가 학습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습이라는 것도 종의 유전적 유산으로서 미리 만들어진 '형태' 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192p).’ 요컨대 유전자 및 모든 조상의 축적된 경험에서 우리의 행동이 유래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와 비교했을 때 하등 우월한 점이 없으며, 그 존재조차 우연적 산물이라는 점을 과학이 이토록 무자비하게 파헤쳤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그토록 경계해마지않는 ‘인간 중심주의’의 불씨는 지금껏 거의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가 ‘물질이 그 자체의 최고의 개화인 사고하는 정신을 비정(非情)의 필연성으로써 어느 날엔가 지구상에서 근절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물질은 똑같은 필연성으로써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대에 사고하는 두뇌를 재생시키고야 말 것이다(66p).’라고 역설하며 자연 변증법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창한 것, 그리고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이 자유주의와 냉전을 벌인 것은 각각 과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19, 20세기의 일이다. 인간 중심주의적 경향의 또 한 가지는 뇌와 정신이 실생활에서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뇌라는 관념과 정신이라는 관념과는 17세기의 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실제 생활 체험 속에서 구별되고 있다(199p).’

 

 독서량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생명과학의 발견 간의 충돌’을 우려하는 주장이 뇌과학 연구 성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최근의 연구에서뿐 아니라 1970년 출간된 이 책에서도 이미 등장하였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유발 하라리와 같은 유명 저술가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저자 또한 이러한 간극의 원인을 ‘두뇌와 정신의 이원론’으로 설명한다. 그는 ‘영혼 속에 비물질적인 '실체'를 인정한다는 환상을 단념하는 일은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적·문화적 유산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개인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풍부함·측량할 수 없는 깊이 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 개개인의 정신보다도, 집단으로 이어져 내려온 '호모 사피엔스' 종의 총체로서의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서 과학주의로의 전환은 오늘날까지 큰 진전을 이루어내고 있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여전히 한 시대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함께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가깝게는 자연계열 전공자와 인문계열 전공자 간의 소통 문제부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나아가 종교와 과학계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 근대적 형벌 제도가 뇌과학적 연구 성과가 상치된다는 뇌과학계의 주장이 가장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2015)에서 지적했듯,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감옥제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묘사했습니다. 그 핵심은 절대왕정 시대의 잔학한 형태에서 규율 훈련을 토대로 정신을 교정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진 개인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푸코 자신도 깨달았듯, 이런 근대적 형벌제도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닐까요? …(중략)…

뇌과학 연구는 근대적 형벌제도의 전제에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정말로 이성적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범죄자의 경우, 뇌 속 회로에 원인이 있어서 범죄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흉악범이나 약물중독자의 뇌가 종종 사례로 제시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아직은 확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는 뇌가 원인이 되어 범죄행위가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범죄의 원인이 그 사람의 뇌에 있다고 말하는 날도 머지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당연히 처벌 형태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처럼 형무소에 수용해도, 범죄의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적 처벌을 대신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을 구상해야 할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근대적 처벌제도는 이제 황혼을 맞이하는 듯합니다.”

 

_오카모토 유이치로, 『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2018), 147p.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그다지 오래 무시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정치·사법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자유롭고 영원한 영혼이 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앙의 환생이다. 하지만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개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_유발 하라리, 『사피엔스』(2015), 334p.

 

 이러한 의문에 저자는 뭐라고 답하고 있을까? 그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가치와 지식의 통합’만이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토대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예측한다. 따라서 과학이 점차 발달하면서 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사는 최근의 시대를 관찰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과학에 의한 가치와 지식의 통합은 가능성 높은 미래로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에서 유물 변증법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물활설의 전통은 가치, 도덕, 의무, 권리, 금지의 기초를 신화적 내지는 철학적 개체 발생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인데 과학은 이 모든 것들을 파멸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216p)."

 

 한편 이와는 대조적인 관점으로, 과학 또한 다른 철학과 마찬가지로 특정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과학사를 살피면,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란 신화는 무너지고 만다. 어느 시대가 낳은 과학이론은 과학자의 인생관, 자연관은 물론 당대의 시대사조나 사회·경제·문화적 제반 요소들이 상당히 긴밀하게 상호작용한 총체적 산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느 시대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어떤 과학이론을 출현시키는가 하면, 그 배출된 이론이 다시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되먹임 되어 직접 또는 간접의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이다.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사회적 다윈주의가 출현한 것은 그 가장 극적인 예이고, '엔트로피 법칙'이 현존 과학기술 문명에 깔린 발전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틀이 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_「국어」, 『2010년 대한민국 국가직 9급』, 4번 지문(원전을 찾지 못해 해당 출처로 표기)

 

 그러나 모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위 주장도 지식의 영역에 속한 과학을 무분별하게 가치의 영역에 대입해 버린 것에 불과하다. 즉, 지식을 제공하는 과학의 힘을 물활론적 가치지향 사회에서 객관성을 결여한 채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위 주장은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란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말하는, 가치와 지식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해 생기는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미래가 항상 예측한 바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며 주저 『사피엔스』를 마무리 지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와는 달리, 자크 모노는 과학자로서 ‘필연’이라고 믿는 미래의 도래를 역설한다. 그것은 지식과 가치의 원천이 과학으로 일치되는 미래다. 이것이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는 이를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을 만들어내는 일에 비유한다. 왜냐하면 ‘현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이와 같은 분열을 경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킬 것이며, 이것이 ‘진정성의 탐구가 도달하는 필연적 결론’이라고 말한다. 그 유토피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인간의 마음은 진화가 축적된 산물이기에, 과학으로 가치와 지식을 통합시키면 필연적으로 과학의 힘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자크 모노는 말하고 있다. 만일 실현된다면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그 이상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마치 다른 차원의 우주를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서론에서 제시한 삶의 행복과 관련된 고민 따위는 전혀 의미를 가지지 않는 세상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생명이 우연과 필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간다는 건 결국 앞일을 있는 대로 예측해 놓고서도, 미래는 항상 예측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유발 하라리의 다소 어정쩡한 결론과도 궤를 같이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능성 높은 미래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돌연변이라는 우연적 요인에 의하여 결국 인간은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한 까닭이다. 비록 38억 년 동안 축적된 유능한 시뮬레이션 장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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