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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 석연치 않은 결말 [Mini Album]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노래 / 붕가붕가 레코드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한때 자주 들락거리던 인터넷 사이트 중에 국내 젊은 미술작가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무슨 사이트가 있었다. 작품 판매 활로를 마련하고자 작가들이 직접 본인들 작품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옥션을 여는, 신진 미술작가들의 자발적인 연대 조직 같은 사이트였다. 사이트 메뉴 한쪽에는 이백 명이 넘는 회원들 각각의 이름으로 작품갤러리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어서 작가별로 작품을 열람해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 조문기라는 작가가 있었다. 유머러스하고 명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온하고 음흉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작가였다. 웬만큼 독특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무수한 작가들 중에서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하 불쏘클)의 조까를로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둔하게도 나는, 동일인임을 알고 나서야 그의 작업에서 음악과 그림이 짝을 이루는 주제를 몇 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마도로스 K의 모험>이라는 노래를 만들면서 <분홍상자의 귀환>을 그리기도 하고, <이발소> 연작을 그리면서 <이발사 데니얼>을 작곡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동시적인 작업이 계속 이어지면 좋을 것 같았는데, 얼마 전에 조까를로스는 그동안 자신의 음악 활동이 한 마디로 ‘인간대포쇼’였다고 회고하고 돌연 은퇴를 선언해버렸다.
“(...)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었던 / 이도 저도 아니었던 내 일상은 / 사람들의 환호에 취해 나도 몰래 / 더 큰 포신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 섬광은 눈부시고 폭음에 놀라 / 몸을 가눌 수 없는 짜릿한 속도로 / 누구보다 높이 올라 귀를 막으며 / 꿈꾸듯 황홀한 안식을 느끼네 // 나는 알고 있어 잠시 정지해 / 마지막 포물선 끝이란 걸 / 이제 여기까지 오른 영광만큼 / 초라하게 추락하는 나의 마지막 쇼 / 하늘만 바라보고 날아왔지만 / 착륙할 곳을 찾지 못했네 / 떨어지는 나를 우연히 보게 되면 / 모른 척 해주겠니“ -인간대포쇼 中에서
불쏘클의 음악에 단순히 희극적인 요소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노래마다 지문처럼 스며있는 페이소스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지나치게 장난스런 이들의 음악은, 듣기에 따라서는 본질적인 비감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훼이크처럼 느껴지기마저 한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은 '고질적 신파'(1집 제목)다. 그동안의 밴드 활동에 대한 회고이자 음악인으로서의 자기규정이기도 할 <인간대포쇼>는 이러한 고질적 신파의 정점을 보여준다. 불쏘클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군들 목이 메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정말로 자신의 쇼가 초라하게 추락하게 될 것을 염려했나 보다. 넌지시 번복을 암시하는 은퇴 선언 말고는 적당히 우아하게 착륙할 만한 지점이 보이지 않았나 보다. 아니, 그렇다 해도 은퇴를 선언하는 마당에 이런 가사를 적는 건 또 무슨 신파란 말이냐.
신파를 단순히 오락이나 유희로서 다루는 듯 하다가도 때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마는 뼛속깊이 처절한 (그래서 갑자기 과도하게 진정성이 있어버리는) 신파적 감수성이라든지, 회화 작품에서 시종 느껴지던 불온하고도 음울한 음모론적 분위기가 내게는 이 사람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자 예술적 재능으로 느껴진다. 신파와 불안의 정서도 사람에 따라서는 재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철학적 사유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그런 기분들은 예술가에게는 유머와 해학적 센스보다도 훨씬 더 값진 재능인지 모른다.
아무튼 불쏘클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풍문에 따르면 우리들의 조까를로스는 이제 미술작가로서의 본업에 좀 더 충실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이건 마치 한때 문학판을 뒤흔들어놓고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쯤 무심히 손 털고 떠나버린 김승옥 선생의 수법과 다를 게 뭔가. 실로 석연치 않은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현재로서는 이 미니앨범이 불쏘클의 마지막 음반이지만, 은퇴를 번복하는 진정한 '석연치 않은 결말'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 우리는 결코 '인간대포쇼' 제2막에 대한 기대를 잃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