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기는 힘이 세다 - 지치지 않는 독서교육을 꿈꾸는 보통 교사들의 새로운 교실이야기 배우는 사람, 교사
경기도중등독서교육연구회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우리는 우리가 직접 해본 수업만 이야기 햇다. 보통의 교사들이 정규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같이 한 사례를 모았다.

화려한 독서교육 모형이 이 책에는 없다. .... 우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독서교육을 하려 했다.

사회구조를 문제삼으며 교육 불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 현재의 교육 환경에서 교사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는 우리가 교실에서 실천하며 겪은 어려움을 기록하고, 실패를 고백하고, 그 실패속에서 찾아낸 성공의 길을 정리하려 했다.     --머리말 중에서 발췌

 

해마다 수많은 교육청의 수업모형과 수업연구 성과들이 쏟아지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 외면받는 이유가 사실상 저 머리말에서 모두 설명이 된다.

즉 저 반대로 하면 딱 교육청 주도의 수업모델이 된다는 얘기다.

교육청의 각종 연구성과들은 대부분 교사들의 승진 점수와 연계되어 있고, 따라서 항상 단기간의 성과나 밖으로 보이기에 그럴싸한 이론적 배경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폼이 나야 한다.

 

하지만 교육은 절대로 폼이 날 수가 없다.

어떤 교육방법도 100%의 아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다만 좀 더 많은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적용하는 과정일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출발점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라는 점에서 정당한 출발선에 서있다.

또한 요즈음의 교육현장에서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를 진단하는데서도 올바른 출발점, 즉 교사와 학생의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현실에서 제대로 출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거시적인 교육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의 고민의 대상은 미시적인 교실 현장이므로....)

 

실제로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소통의 문제는 심각하다.

이것은 단순히 수업의 기법이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있는 사회의 현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부모들이 겪고있는 불평등과 무기력과 희망의 부재를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다.

그것이 교실에서의 무기력으로, 교우관계에서 폭력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실붕괴니, 학교폭력이니, 중2병이니 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부르는 명칭만 다를뿐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이 책의 교사들이 함께 읽는 책읽기를 하고자 하는 출발점이 바로 여기이다.

수업내용 아니 수업 자체에 아무 관심이 없는, 이 수업이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체현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아이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하게 만들것인가?

소통의 물꼬는 일단 한번 트이면 흘러가게 되어있다.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라면 막히지 않는 것이다.

항상 시작이 어렵고, 그래서 시작이 중요하다.

함께 읽는 책읽기는 바로 그 시작을 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준다.

 

이 책의 교사들을 보면서 힘을 얻는다.

그것은 이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실제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과목에서 각 과목에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된 독서교육의 사례들을 보며 나에게 맞는 방식을 구성한다.

어느 한 교사의 방법이 절대적일 수 없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교사들의 경험을 따라가다보면 내게 맞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의 생각이 모인다.

1월 2월은 다음 해의 수업을 고민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 올해의 수업계획에 독서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의 줄기와 전체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아마도 올해 나의 독서수업은 그리 큰 성과를 낳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쌓아가는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과를 바로 바라지 말것이며, 천천히 한걸음을 내딛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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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는 괴물 - 다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권재원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나도 모르는 새 나는 좀 많이 지쳐있었나보다.

교육에 대한 온갖 담론들과 책들과 학교의 문제들과....

하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왔지만 예전처럼 새로운 열정으로 그 책들을 보고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온 국민이 교육전문가인것 같은 나라에서 정작 가장 앞서 교육을 고민해야할 의무가 있는 나는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던듯하다.

 

교육서적들은 이것 저것 잡설들을 빼고나면 결국 2가지다.

대한민국이 처한 심각한 교육의 문제를 어디서 풀어갈 것인가 해법을 구하는 거대담론이 그 하나고,

온갖 새로운 방법론 내지는 기술들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선언하는 만병통치약같은 책들이 나머지 하나다.

 

전자는 사실상 답이 뻔한 문제를 내놓고 그 답을 피하고 싶어서 이리저리 에둘러 가는 듯했다.

이 나라의 심각한 입시교육과 아이들의 살인적인 학습과잉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세상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나가는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어떤 직업이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최소한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다면 왜 대학입시에 이토록 목을 매달겠는가?

이상적인 사회란 이 나라의 모든 노동을 하는 이들이 그 노동의 성실한 댓가로 먹고 살고, 뭐든지 한가지 정도는 하고싶은 취미든 뭐든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사회란 생각이 든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연구를 하고, 손재주가 좋은 아이는 뭔가 기술을 배우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이는 자동차를 만들든 디자인하든 버스운전을 하든 하여튼 무엇을 하든 먹고살수 있어야 한다.

직업의 종류가 다를 뿐 삶의 질은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명한 해답을 빼고 대안을 찾으려니 어떤 대안이든 구름잡는 소리일 수 밖에 없다.

 

후자의 온갖 방법론과 기술들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이 책에서도 비판하고 있는 바 EBS의 최고의 교사류의 책은 당사자인 교사에게 무한노동을 은근히 요구한다.

나는 지난 4년간 소위 행정교사로 살았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얘기하자면 학교에 행정교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온갖 행정잡무에 치여 서류더미에 파묻혀살게 되는걸 말하는 것이다.

학교에도 3D는 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왠만하면 모두가 피하려고 하는 자리가....

그 자리를 4년동안 하다보니 학교에서의 생활은 딱 2가지다.

수업과 그외의 모든 시간은 행정잡무 처리.

우리 반의 아이들과 상담할 시간 하나 내기 힘들고, 학교에서 수업자료 준비는 꿈도 못꾸고....

결국 일이며 수업준비며 모두 집으로 싸들고 와서 우리집 아이들 뒷치닥꺼리와 저녁식사와 집안일이 끝나는 밤 11시쯤 돼야 비로소 일거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집안일을 포기하든 학교 업무를 완전히 내팽개치든 뭔가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새로운 수업준비니 뭐니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다.

언론같은 매체들에서 뭔가 새로운 교육담론을 얘기하면 감이 딱 온다.

저거 또 일거리로 떨어지겠구나...

 

그런 내가 오랫만에 이런 교육서적을 다시 든건 순전히 한 때 알라딘 서재를 풍미했던 바람구두님 때문이다.

시사인인가 한겨레21인가 헷갈리는데(둘다 정기구독을 하고 있으니 기사들은 항상 헷갈린다. ㅠ.ㅠ) 하여튼 거기에 바람구두님이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걸 발견했다.

원래 바람구두님에 대한 신뢰와 또 그 글이 맘에 들었기 때문에 한 번 다시 읽을볼까 하게 된거다.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

이 책은 저자가 몇년간 각종 매체에 썼던 교육에 대한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덕분에 어렵지 않으면서 학교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동시에 현장교사로서의 풍부한 경험이 그러한 논의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 온갖 교육문제의 책임이 마치 학교에 있는 것처럼 마녀사냥을 하는 풍조에 반대하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런 거다. 학교폭력 문제로 온나라가 떠들석하면서 그것이 학교의 문제인듯 얘기하지만 교사들은 안다. 그건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의 문제이고, 가정의 문제는 사회노동의 문제임을.....

학교가 왜 괴물이 되어가는가? 결국 무한경쟁과 무한노동의 사회가 그대로 그 체제를 학교에 삼투압시키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보면 해법도 보이는 법이다.

학교 교육의 기본 이념이 바뀌어야 한다.

사회가 학교를 괴물로 만든다면 학교는 교육은 그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아이들이 자신의 노동의 권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있도록 올바른 판단력과 비판정신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개천에서 용나도록 열심히 공부하면 너도 출세할 수 있어가 아니라 아이들이 처할 현실을 인식하고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가르쳐야 한다.

이 책은 출발점을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 변화의 진정한 시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 프레임을 다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를 위한 용기를 내기 위해서 변화의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전교조의 기존 정책을 비판하고, 방법론들을 다시 살펴본다.

 

새해의 출발과 함께 하기에 좋은 책이다.

신발끈을 다시 묶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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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1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에게 은근히 강요하는 무한노동.
그와 비슷한 것이 또하나 있어요.
일하는 엄마에게 은근히 강요하는 슈퍼맘이요.

결국은 돌고돌아 그 어느 누구라도 함께 짐을 나누어야하는게 정답이죠. 사회도, 학교도, 가정도!

새해 아침에 저 또한 마음에 담을 만한 이야기인 것같아 좋아요. 하고 갑니다. ^^

바람돌이 2015-01-02 00:13   좋아요 1 | URL
아 슈퍼맘... ㅎㅎ 무한노동 맞죠.
고통을 나누자고 앞에서 소리치는 사람치고 진짜 고통을 분담하는거 못봤어요. 진짜 분담하는 사람은 말없이 조용히 하죠.
새해는 제발 아픈 사람들이 좀이라도 고통을 나누고 덜수있는 사회를 기원합니다.

라파엘 2015-01-0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감사합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ㅎ

바람돌이 2015-01-02 00:14   좋아요 0 | URL
안단테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닉네임을 소리내보니 왜인지 한발짝씩 리듬에 맞춰 타다탁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

반딧불,, 2015-01-01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교사만이 아니라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잘 해보려고 하는 사람에겐 무한노동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네가 선택했으니 더 해라고 합니다. 그거 아시죠? 지쳐 나가떨어지면 잘난 척 하더니 잘됐다고 합니다.
같이 노력하지 않지요. 왜 그런 것인지 늘 궁금했는데 그 무한노동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더군요.
시작하면 결국 그만두지 못하는 일부가 늘 다치게 되는 시스템이라니.
아하,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 정말 잔인하죠? 그것이 제가 겪어본 현실이라는 것이.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바꾸는 것이 가능할지 요사이는 자신이 없습니다.
분개만 하는 스스로가 참 많이도 싫구요.

바람돌이 2015-01-02 00:20   좋아요 0 | URL
정말로 세상이 바뀌어질지 어떨지 사실 저도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거지요. 오히려 악화되어가지요.
어떤 권리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더이다. 칭얼거리기라도 해야 고물이라도 하나 얻어먹는거죠.

새해 우리 같이 힘내요. 같이 나누면 좋은게 또 이런 위로잖아요. ^^

순오기 2015-01-0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면 좋겠네요~~일단 찜해둡니다!

바람돌이 2015-01-03 00:06   좋아요 0 | URL
^^ 뭐 솔직히 학부모보다는 교사들이 읽으면 더 좋은 책이지 싶긴해요. ^^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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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술'이라는 개념이 형식화되고 고정되면 쉽사리 권력으로 변한다. 가령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만이 '우리'이며 '우리'란 어떤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리는 배타적인 자의식을 공고히 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와 미술 사이에 굳이 빗금을 넣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빗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작품들의 이야기다.

 

'우리'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속에서만 사유할 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경식 선생님의 글을 만나기 이전의 나 역시도 그러했다.

무수히 많은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별로 떠나본적이 없었던 나의 주요 관심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 우리 민족의 미술, 우리 나라의 민중 등등 무수히 많은 우리였다.

이 '우리'는 타자를 전제하는 것이었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 타자는 늘 억압자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와 '타자'의 대립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겠다.

그런 나의 관념에 '우리'도 적대적 '타자'도 아닌 디아스포라의 존재, 즉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고 '배제'되어버린 이들의 이야기는 내게 나의 생각 전체를 되짚어보게 하는 충격이었다.

다르게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고, 여전히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깨닫게 해준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 독서와 사유의 스승이었다.

 

저자는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우리/미술이라 지칭하고 싶었다 한다.

우리와 미술사이의 저 빗금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영역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구분지어버리는 우리와 타자의 경계이기도 하며, 그럼으로써 또한 배제의 영역이기도 하다.

내가 우리속에 갇혀있는 한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인식의 벽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희망은 존재한다.

이 빗금위를 춤추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그래서 '우리'의 틀에 갇힌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알려주는 친절한 저자도 있다.

우리도 같이 그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저 빗금위를 춤추고 놀아본다면 이 굳을대로 굳은 '나와 타자'의 철학의 한계를 조금은 벗어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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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2-3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하게도 같은 책을 읽고 있었네요. 서경식 선생의 어느 책에선가 조선민족공동체의 틀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제 나름으로는 그걸 읽고 정리하기를 같은 땅에 살거나, 역사가 같거나, 언어가 같거나 이런 식으로 끝도 없는 OR로 연결된 공동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닫힌 우리로는 문제를 정확히 보고 나아갈 수 없다, 끊없는 더 작은 우리들이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람돌이 2014-12-30 22:43   좋아요 0 | URL
소년의 눈물과 이 책을 우리 비슷하게 읽고 있는 것 같아요. ㅎㅎ서경식선생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내 존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도 있다는걸 느꼈습니다. 근데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이런 식의 우리라는 틀덕분에 끊임없이 타자화되고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면에서 서경식선생의 책은 어떤 책이든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팬이구요. ^^
 
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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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을 읽는다는건.....

어쩌다가 잠시 쉬던 때 누군가가 평전을 소개한 출판사 광고지를 가리키며  "이런 책은 도대체 누가 읽냐?"라고 했던 것 같다.

하필 옆에 있는 나는 웃으면서 "저같은 사람이 읽어요. 저는 평전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나를 희안하다는듯이 보며 "진짜? 이런걸 읽는 사람이 있네......" 잠시 우리 둘다 웃었던듯.....

 

어쨌든 나는 평전을 많이 좋아한다.

역사서를 직접 읽는 것보다 평전을 통해 시대를 보는 것이 더 좋다.

왜?

한 시대를 온몸으로 부대껴낸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삶에서는 역사서의 내용이 그의 삶을 무대로 현장감있게 펼쳐질뿐 아니라,

역사서의 서술에 포함되기 어려운 디테일한 삶의 풍경들이 손끝에 와 닿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도 내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역사는 그저 지나간 일이 아니라 내가 꼭 기억하고 보듬고 다독여야할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안도현이란 한 시인의 오랜 짝사랑이 만들어낸 시인 백석의 평전은 어떤 풍경들을 보여줄까?

평전의 첫 장을 펼칠 때는 늘 두근거림이다.

누군가의 삶의 소중한 시간들을 마치 나만 알게되는듯한 묘한 설레임.

소설과도 다르고 역사서나 인문학서적과는 완전히 다른 그런 개인적이고 내밀한 시간이 기다린다는 느낌이랄까?

 

백석은.....

백석은 그의 시 '나와 나탸샤와 흰 당나귀'로 내게 왔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이란 시대에 뜬금없이 다른 세계에서 푹 던져진것 같은 모던보이의 낭만적인 외모로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고 우주급 뻥을 치는 이의 정신세계라니! 궁금하지 않은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다행히도 시인 안도현의 짝사랑 덕분에 나의 호기심과 설레임도 충족되었으니,

살아 다른 사람의 짝사랑을 고마워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책 속에 보이는 백석이란 시크한 이름의 시인은 딱 그의 詩가 보여준 그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식민지시대, 누구나 그러했듯이 시인의 삶 역시 2가지 선택지 위에서 춤을 출 운명이었을게다.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나서든지  친일파로 권력에 철저히 붙어 일신의 안일을 구하든지,

이 2가지의 선택지 사이에서 좌우를 끊임없이 오가며 왔다갔다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시대의 삶은 고난과 자괴감사이를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오고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니, 그것은 만들어진 틀 사이를 자유롭게 탈출하는 이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백석이 그런 사람이다.

 

백석은 이념에 맞춰 시를 쓰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유년의 자유로왔던 감성을 노래하고, 고향의 기억을 고향의 사투리속에 날것으로 담고싶어했고, 그것이 사람의 감정을 울릴 수 있으리라 믿었던 듯하다.

사람이 모두 다르듯이 시인 역시 모두 다르다.

백석의 시가 이육사의 시와 같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육사의 시가 그의 선택이었듯, 백석의 시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가 그 시로 개인의 안일을 위해 다른 이를 희생시키지 않는 한 백석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나는 지금 21세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생각한다.

비록 식민지시대 오장환이란 젊은 작가처럼 현실비판의식이 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시라고 (133-135쪽) 백석의 시를 폄하한 이도 있었지만, 그 역시 그 시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고 나올 수 있는 비판이다.

문제는 백석의 시창작의 자유도, 오장환의 다소 설익었지만 그 비판 역시 자유로울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석은 독립운동을 하지도 않았고, 그 시대 카프문학처럼 현실참여를 외치며 식민지시대 민중을 위한 문학을 소리높여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조용히 어릴적 얘기를 하며 고향의 얘기를 하며 나직나직 노래불렀을 뿐이다.

하지만 말이다.

분명히 이런 조용한 속삭임덕분에 위로받는 마음도 당연히 존재한다.

누군가는 목소리 큰 투쟁가에 힘을 얻지만, 누군가는 사랑노래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기도 한다.

백석의 시 역시 그 시절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웃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백석의 시는 아름답다.

지금에 와서 그의 연시가, 그의 산문에서 흐뭇함의 미소를 짓는 내가 있기에 또한 백석의 글은 여전히 아름답다.

 

식민지 시대의 삶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그리고 하고싶지 않은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야 하는 상황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백석 역시 쓰고 싶은 시와 쓰도록 강요받는 시, 쓰고 싶지 않은 시 사이에서 계속 갈등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타고난 자유인이었던 백석이 그래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걸 쓰지 않을 정도의 숨구멍은 있었다는 것이다.

민족말살정책의 시기에는 만주로 잠시 피신한다던지 하는 식으로라도.....

어쨌든 자신의 시정신을 배반하는 친일문학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서 저항 아닌 저항을 백석이 하게 되는것이 그의 민족정신 때문이 아니라 詩정신이라는 것에 백석이라는 한 인간의 본질이 있겠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오히려 백석에게 더 큰 올가미를 죄어대니

어떤 시를 쓰느냐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상황(아마도 그것은 개인 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생존과 삶의  문제였을 것이다.)이 일제 시대가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벌어지다니...

 

역사책을 뒤적이다가 비감할때가 딱 이런 경우다.

어떻게 일제시대보다 해방공간이, 그리고 지금이 더 개인의 자유가 억압될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발견할때.

북한에서의 아동문학논쟁 이후 시인으로서의 생명이 끊긴 백석이 살아남기 위해 쓴 몇개의 시들을 읽는 것은 고통이다.

읽는 이의 심정이 이럴진대 이런 시들을 쓰는 백석의 심정은 어느만큼 고통스러웠을까?

시인을 시인답지 못하게 하는 세상은 출구없는 닫힌 세상인것이다.

 

백석이라는 자유롭고자한 영혼, 그 한 사람의 삶만으로도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삶이 그 자신 개인으로 봤을때 결코 행복한 삶이 되기는 힘들다는건 누구나 알지 않나?

백석의 산수갑산 시절,

시인으로서의 삶이 끝나고, 한가족의 가장으로, 개인으로서의 백석의 삶에 대해서는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건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평전에 오르지 못한 그 기간이 오히려 백석이라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평화로웠던 기간이 아니었을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산수갑산으로 가기 전에 백석이 아들에게 하는 말이 내내 귓전에 맴돈다.

거기 가서 우리는 양을 키울거야. 양이 자꾸 늘어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거야라던....

이것이 백석이 살아온 삶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저자인 안도현시인의 말대로 그의 시인으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개인으로서의 삶까지 무너졌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오지랖일듯 싶다.

다만 그의 시를 더 많이 보지 못하는 우리 후인들의 안타까움이 큰 것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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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2-04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바람처럼 나타나셨네요~~~~~~
백석평전. 우리도서관 인문학서평쓰기 동아리 내년 1월 선정도서예요.
저도 조만간 읽으려고 합니다.
백석시인은 시인들의 멘토인듯요. 기대됩니다^^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도 좋았어요.

바람돌이 2014-12-04 16:21   좋아요 0 | URL
바람이라기엔 좀 무겁습니다. ㅎㅎ
세실님이야말로 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시는 그야말로 바람같은 분인듯한데요. 순오기님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항상 에너지가 넘치시는듯 늘 보기 좋아요. ㅎㅎ
백석시인은 매력적이었어요. 추천하신 책도 급관심이 가네요. 이상하게 전 강신주의 책이 손이 안가던데 한번 읽어볼까요? ^^
 
<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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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 내가 소싯적에 "돌아온 혁명가"라는 농담이 있었다.
운동권의 이론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진정한 혁명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누군가가 온갖 이론서적들을 끌어안고 산속에 들어가서 정말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결국 드디어 진리의 길, 혁명의 길을 발견한다.(아! 이건 무협지에서 정말 자주 써먹는 장면이다. ㅎㅎ)
그런데 돌아와보니 세상에나~~~ 이미 세상은 혁명이 끝나버렸다나 어쨌다나...
아주 뻔한 진실, 그러니까 결국 진짜 지식, 진짜 혁명의 길은 현실에 있다는 것, 그런데 그 현실을 벗어나버린 온갖 이론적 논쟁에 지친 이들이 만들어낸 농담일게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도 이 돌아온 혁명가라는 농담이 통할수 있을까?
아! 정말 썰렁하다.  이미 세상은 누구도 혁명을 말하지 않으니 저런 농담이 농담이 될 수 없는 시대인게다.
책의 표제에서 그렇게 말한다.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라고...
저 혼돈의 시대라는 말에 마음이 가 꽂힌다.
사실 세상이 혼돈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80년대이전의 시절은 모두가 군부독재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적이 누구인지가 너무나 분명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단순해보였고...
하지만 정말로 단순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저 세상을 보는 시선의 편협함이 세상을 단순화시켜버렸던게 아닌가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그렇게 싸웠는데도 아직도 세상이 요모양 요꼴이지 하면서...
그렇다면 지금은 적어도 혼돈의 시대, 무엇이 나아갈 길인지 누구도 제대로 알지못한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해야 하는건 아닐까싶기도 하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들 비판의 달인들이 된듯하다.
정부에, 정부의 정책 비판에 누구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듯...
그러나 동시에 모두가 묻는다.
그래서 대안이 뭐예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놈의 세상이 달라지냐구요?
일단 이런 질문은 80년대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대하는 대답은 정말이지 다르지 않을까?
80년대에는 그 대답이 혁명이라고 많은 사람이 기대했다. 다만 그 혁명으로 가는 길이 무어냐를 물었을뿐...
하지만 지금은 대안을 묻는 누구도 혁명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쓸어엎어버릴 혁명을 빼버리고 나니 더더욱 대안은 궁색해진다.
누구도 이것이 길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길에서 촛불을 들고, 술자리에서 정부 비판을 하고, 앞선 두 대통령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그 모든 행위들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갖지 못한다.
모두들 그 자리에서 맴돌고 맴돌고... 어쩌면 그러다 지치기를 그 누군가는 바라고 있겠지... 

연구공간 수유 너머에서 펴내는 부커진에서 이들이 지금의 사회는 주류운동세력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운동에 의해서 바뀌어간다라는 논지를 읽었다.
주류에 대항하는 온갖 소수자들의 구멍내기가 결국 배를 침몰시키든 아니면 배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배로 개조하게 만들든지 할것이라는 논지였던것 같은데...
그때는 읽으면서 지나치게 낙관적인게 아닌가라는 의구심부터 들었었다.
그런데 요즘, 특히나 <거꾸로, 희망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들의 그런 실험적인 생각들이 마음에 와닿는걸 자꾸 느끼게 된다.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세력, 저항세력의 거대한 한 축들을 이루어온 이들이 강연을 하고 좀 더 젊은 이들이 사회와 질문을 한다.
모두들 거대 담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선생은 자율적인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서 자본과 국가라는 지배체제 바깥에서 살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는 농촌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농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못한다면 도시에서라도 농업적 가치, 농사를 도울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고.....
김수행선생은 사회보장을 지속적으로 줄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결국 시장의 축소를 가져오고 결국 그것이 세계적 규모의 공황을 불러왔다고 얘기한다.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과 모든 국민이 잘살게 되는 것은 분명히 다른데도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헷갈리게 한다는 것.
이런 신자유주의하에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를 깨지 못하는 이상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 모델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사회보장제도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구매력을 향상시킬 것, 그럼으로 내수를 늘려야 하며, 일정정도의 계획경제,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국민의 기본소득은 보장해주는 체제, 감세가 아니라 세금을 올려 재원을 마련할 것 - 결국 보다 확실하게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는 체제의 구축을 얘기한다. 이 정도라면 사실 자본주의 체제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는 체제 내에서의 개혁인데 이놈의 나라에서는 이것을 이루어내기도 참으로 멀어보이니...
한편 박원순 선생은 정부에 무엇을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기업 - 아름다운 가게처럼 공공적 목적을 기업적적 방식으로 실현하는 기업, 각 지역의 특성에 기반한 향토산업의 활성화, 창조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소기업의 활성화, 1만명을 고용한 1개 대기업이 아니라 1인을 고용한 1만개의 소기업을 만들어냄으로써 지금의 경제 위기를 원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제작소를 통해 이런 사업들을 위한 첫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경제의 해법을 찾아내고자 하는 위의 논지들과 함께 개인대 개인의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인간다움의 회복, 세상을 보는 제대로 된 시각의 확보를 위한 논지를 펼쳐주는 이들도 있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선생은 돈과 학벌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의 자기자신과의 대면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조한혜정선생은 권력에 항거할 때 쓰는 언어가 실제 삶을 지배함으로 그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냥꾼의 질서에서 벗어나 우정과 환대의 소통과 문화로의 전환을 위한 새로운 주술과 주문 언어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얘기하여 신선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책은 마지막으로 작년 이놈의 정부의 건국절논쟁과 관련하여 역사학자 서중석 선생의 입을 통해 건국절이란 명칭이 이 나라에서 친일파의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유력한 근거를 제시하며 동시에 남북의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남한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하는 남한만을 전체로 둔갑하는 논리가 됨을 살펴보며 제대로 된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결국 모든 이들이 궁극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않는다.
아니 누구도 그런 말을 하기에는 사실 지금의 세계가 너무 혼돈스럽잖아?
근데 다르게 생각하면 그 혼돈 자체가,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비록 소수에서부터지만 그렇게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들어가고 있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삶의 양식들이 나타나고 다양한 생각들이 출현하고 그렇게 다양한 모델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세상이 변화해나가는 것, 너무 낙관적인가?
현실은 너무 힘들고 어두운데 희망은 너무 소박하여 이걸 희망이라고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게 되지만 그럼 다른 대안은 있어? 라는 질문에 또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거꾸로 희망이다 그래 희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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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9-09-0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굳이 피하고 있슴다. 사고싶지 않아요. 다 아는 얘기일까봐 왠지 겁난다고 할까요. 책장을 덮고 나면 어떤 생각일지..별로 궁금해하지 않는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이게 정답에 가까운거야...라고 하면 기분이 별로일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