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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Morgen und Abend)』, 문학동네, 2019/07


1

모처럼, 오늘 어떤 일을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분 좋습니다. 해야 할 일에 매여

시간에 따라 정해진 아침을 시작하던 때와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나는 아주 느릿하게 아침을 먹습니다, 어제 저녁 남겨 둔 김밥을 풀어 볶습니다. 그 사이에 시원한 우유 하나를 꺼냈습니다, 손움직임이 여유롭습니다, 가볍게 식사를 마칩니다. 그리고 나는 단촐한 차림으로 흐릿한 하늘을 시크하게 올려다보며 집을 나섰습니다, 문을 나서기 바로 직전, 가야할 곳을 정했습니다. 오랜만에 어둑한 조명 아래 책들이 빛나는 서점입니다. 서점에는 책, 소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한 켠 까페에서 책 대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즐기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책들은 서가에 세워지거나 눕혀진 채 마치 뒤엉켜 진 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 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펼치고, 다시 던지듯 내려두는 일을 반복합니다. 새로 나온 책들은 어디에 두나요? 내가 물었습니다, 이 코너는 그런 책을 따로 두지는 않습니다, 갓 들어온 책을 컴퓨터에 목록저장 작업하던 직원이 쳐다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서둘러 서점 저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서점 저 끝에 유난히 한가하고 정갈한 서가가 있었습니다, 나는 책을 하나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선 채로 한참 읽었습니다,『아침 그리고 저녁(Morgen und Abend)』 책값을 치루고 언젠가 다시 올 서점을 나섰습니다,


2.

차에 올라 시동을 켜기 전 책을 열었습니다. 앞날개, 저자 소개를 펼쳤습니다. 노르웨이 출신, 욘 포세(60). 소설가로서 그의 경력이 화려합니다. 하지만, 이런 목록을 나는 읽는 둥 마는 둥 합니다. 곧 책 첫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낯선 대화가 첫 문장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제1부가 끝날 때까지도 마침표가 없습니다. 호기심에 책 끝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도 그렇습니다. 문장과 문장은 모두 쉼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오히려 빈번합니다. 누가 읽어도 피해야 할 글쓰기방식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대화와 대화 사이에 말하는 자와 듣는 자는 뒤섞입니다. 말과 말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인물과 인물 관계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대화는 리듬을 따라가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래처럼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웅얼거리듯 주고받는 비언어도 빼곡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마저도 모두 살아있습니다. 숨소리, 혼잣말, 밑도끝도 없이 툭 던지는 대화, 말과 사이에 난데없이 끼어드는 몸짓들도 의미있습니다. 사건은 긴장없이 평화롭습니다. 오히려 흐릿합니다. 사건보다도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말과 말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호흡인 것 같습니다.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모든 움직임이 글로 남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멈춰서는 모든 것이 언어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입니다.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무엇을 말하고, 생각하고, 또 말하고, 생각하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정작 끝내 마침표는 없습니다. 끝까지 쉼표였습니다. 소설은, 고단하지만, 그렇게 살아있는 삶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생은 아무리 힘겨워도,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소설은 아이가 태어나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곧 그의 죽음시간도 같이 흐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부만 읽은 채 책을 일단 덮었습니다. 나는 소설 끝을 상상합니다. 아침과 저녁이 삶과 죽음으로 치환되어 한 어부의 생애가 아무 사건도 없이 고즈넉하게 강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 내가 겪는 삶이라는 것을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읽기에 쉽지 않은 서사입니다.


3.

무엇보다 나는 마침표 찍지 않은 산문이 여러모로 인상적입니다. 사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현대에 들어서 시쓰기의 전유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시인 김수영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습니다. 시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로써 그는 정형화된 편집문법에 저항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 시들은 이 저항기법을 문법처럼 따랐던 것 같습니다. 문장을 마감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는 삶을 조각조각 얼른 마감해 버리는 습관을 경계합니다.(참조, 심보선 시인의「삼십대」, 『슬픔이 없는 십오초』(문학과지성사, 2008)) 독자에게 열린 문장은 어색합니다. 마침표는 안정감을 줍니다. 하나가 끝나야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당연한 속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한 때 매듭이라는 말로 삶을 조각하기도 했습니다. 얼른 매듭짓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라고 재촉하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는 그 마침표를 욕망을 향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는 그것을 해체해버렸습니다. 시인들은 문장에서 마침표를 없앰으로써 삶을 경각시켰습니다. 어떤 매듭도 쉼표일 뿐, 마침표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삶이 끝없이 저항해야 하는 산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 셈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삶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최후의 방법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누구든 쉽게 자기 삶에 자기 손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4.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강한 비가 내리기 직전처럼 바람이 한반 크게 붑니다. 차 창밖으로 휘청거리는 나무들이 보입니다. 그 속에 여릿한 나뭇잎들이 쉼표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강에 놓인 징검다리같습니다. 그것들은 흔들림으로써 도드라지 않고 서로 어울려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사건과 사건으로써만 삶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명확한 기승전결이 우리 삶을 지탱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우리에게 거대한 사건보다도, 도드라지지 못하고, 의미없게 들리는 옹알이, 언어로 들리지 못하는 몸짓, 눈빛에서 생존하는 이야기를 더 크게 주고받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려는 욕구가 숱하게 일어나는 세계입니다. 자기가 정한 문법에 어긋난 몸짓들을 거북해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얼른 마침표를 찍어 삶을 내칠근거를 찾으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삶은 마침표를 찍기 전 쉼표로 이어져가는 거대한 강이라는 것을 한번 쯤 생각해보면 좋을 일입니다. '아침 그리고 저녁. 간은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 반복됩니다, 태어났다가 다시 저물고, 저물었다가 다시 살아나 쌓입니다. 


더운물 더요 올라이,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
거기 부엌문 엎에서 서성대지 멀고 이 사람아, 그녀가 말한다.
네네, 올라이가 말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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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5-1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밥헬퍼 2020-05-15 18:57   좋아요 1 | URL
아, 여전히 이 서재를 잘 가꾸고 계시네요^^오랜만인데도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써좋으신 글들 새롭고 참 좋습니다.
 

 한인준,『아름다운 그런데』, 창비시선409(창비, 2017)


1.

시대가 거칠다. 방향없는 바람같이 삶이 요동치고 있다. 고요한 폭풍같다. 부디 바람이 이 땅을 가볍게, 아주 가볍게 스쳐가기를 바란다. 평소엔 무심했으나 오늘은 한번 더 지나온 길을 둘러본다. 우연이지만, 한인준 시집『아름다운 그런데』, 창비시선409(창비, 2017)를 떠올렸다. 이미 회자되었지만, 이 시집은 별다르다. 그의 시 형태가 그렇다. 단어와 단어는 예상대로 나열되지 않는다. 주어와 동사라는 문법체계는 질서정연하지만, 단어들은 무질서하다. 아예 얽혀버려 의미가 숨어버렸다.


2.

예를 들면 이런 시다.


<종언:없>


내가 가족이다.

나는 ‘그러므로’와 화목하다. 어디서든 자세하게 앉는다, 하지만

방파제로 운다

주문진과 바다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몰래는 왜 자꾸와 함께 닫혀야 했나 <후략>


시집을 바로 덮을만한 시들이다. 무엇을 썼을지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이해하려면 해석이 필요하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시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종언:없>이라는 시에 ‘나는 그러므로 화목하다’는 시구가 있는데요. ‘나는 가족 구성원같지 않아.’ ‘나는 화목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프고 그래서 오히려 마음에 가닿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족은 화목해야 한다는 이 세계의 윤리를 깨고 싶었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문득 그러면 ‘그러므로’와 화목해보자라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주문진과 바다 하지는 않았다.’는 문장은 잊고 싶은 공간인데 잊고 싶다고 말하기 싫어서 쓴 문장이고요.”


3.

이 시집이 출간되던 날, 호기심에 곧바로 끝까지 읽었다. 예상대로다. 무엇하나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글자는 변절되었다. 의미도 뒤틀렸다. 문장은 의미를 상실했다. 이후 나는 틈나는 대로 이 시집을 펼쳤다. 일단 그냥 읽었다. 눈에 잡히는 어느 시를 가만히 읽어보는 것이 전부다.


시인 자신이 시를 풀어 주었다해도, 나는 그의 싯구가 여전히 모호하다. 평론가들에게도 난해했던 모양이다. 시를 세밀하게 해석하기로 정평이 난 그들에게도 이 시집은 방향을 정하기 어려웠다. 비록 시집을 추천한 황지우시인이 이 시들에 대해 ‘한국어의 관절을 꺾었다’고 호평을 했지만, 이 말조차 애매하다. 가볍게 읽어내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하다.


4.

난해한 시는 자주 오래 읽는 것이 좋다. 그러다보면 시가 말하는 시간이 온다. 시인의 감정이다. 이 시집은 뒤로 갈수록 어떤 감정이 증폭된다. 아마도 시인은 불확정된 언어조합 틈에 자기 감정을 잠복시켜놓은 모양이다. 모호한 시어들은 그의 감정을 반영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짐작했다. 그 감정을 감지하는 것이 이 시를 읽어내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시인은 글자로써 문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독자로서 나는 시인이 파편처럼 펼쳐놓은 그 감정을 따라가본다. 변형된 언어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해놓은 시인의 시어를 폭풍같은 이 시대 속에서 ‘느낀다’. ‘그냥’ 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 본다. 어려운 퍼즐같지만 오늘도 여전히 나는 이 시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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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월,『김소월 시집 진달래꽃』,(나태주 시평),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03-15.
  • 산유화, ‘소월(素月)에게 정치를 듣다’

1.

소월(素月)은 살아있다. 상상해보라. 어둑해지는 밤길, 맑고 흰 달이 뜨고 지고, 다시 뜨고 다시 진다. 채웠다 비어가고 비었다 채워간다. 비었을 때 채움을 상상하고, 채웠을 때 비움을 상상한다. 그것은 달의 생명이다. 밤길을 걸을 때, 그 언젠가 꼭 한번은 볼 것이다. 나는 기억해두고 있다. 밤하늘 소월은 실현되는 상상, 현실이다.

소월이라는 시인이 있다. 그의 시 한 두 편은 삶 곳곳에 숨처럼 스며있을 것이다. 봄날 산길을 걷는다면, 그의 시들은 더욱 오롯하다. 맑은 달빛 아래라면 밤이 수채화처럼 번지는 길이라도 그의 시는 오히려 선명하다. 소월의 시에서는 밤새 꽃이 지고 핀다. 달이 뜨고 달이 진다. 아침이 되면 꽃은 다시 피고진다. 그 틈에 봄날은 저만치 흘러가다 되돌아온다. 생명이 자유하며 진보한다.


2.

며칠 전 산길을 걸은 적이 있다. 나는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이 길과 저 길을 돌고 돌았다. 지친 몸을 다독이며 걸어야 했다. 다행히, 산 길에 지천인 진달래가 나를 위로한다. 새가 있고, 바람이 있다. 위로부터 내리는 선물이다.

그 산 길에 핀 꽃은 진달래만은 아니었다. 산에는 여러 꽃이 있다. 산벚꽃도 무수히 날렸고, 산수유도 옹골찬 노란색으로 당당했으며, 개나리는 천연덕스럽게 온 길을 물들여버렸다. 산유화(山有花)다. 소월이 남긴 시를 기억한다. 어떤 시는 마음과 몸에 각인되어 있다. <진달래>가 그렇고, <산유화>가 그렇다. 시 <산유화>가 바람 따라 자연스럽다.


3.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시집 『진달래꽃』(1925)에 수록-


4.

그 날, 소월은 꽃을 보았던 모양이다. 그의 앞에 꽃피고, 꽃지고, 홀로 있고 함께 있으며, 계절은 이어져가는 꽃세계가 펼쳐진다. 그는 그려본다. 가을은 봄으로 가고, 가을 끝에 겨울은 사라져버린다. 계절의 시작은 봄이 아니다. 오히려 가을이다. 시인에게는 나무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계절의 출발선이다. 그렇게 죽음과 삶은 함께 있다. 시인 윤동주가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죽어가는’ 모든 것들은 ‘사랑’하려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힘을 흘깃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죽음으로써 삶을 본다.


소월은 이 시에서 시간을 섞어버렸다. 공간도 해체해버렸다. 그는 대립하는 것들을 동시에 보고 있다. 발표 당시 완벽하게 ‘기적같은 구성’을 보인다는 평은 과찬이 아니다. 비평에 따르면, 4연으로 구성된 짧은 시에서 그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최대한 완벽하게 서술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

소월은 상상하며 은유한다. 산, 꽃, 적은 새, 갈-봄, 여름, 가을은 시 안에서 자유로운 상상매개체다. 나는 이 매개들을 힘입어 자유로운 은유 속을 유영한다. 그러다 순례하는 생명들과 그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만난다. 이유는 이렇다.


5-1. 시의 공간

공간은 둘이다. 동시에 하나다. 먼저 산이 있다. 산은 물체적이며, 구상적이다. 그는 산 속에 들어와 꽃이 피고 지는 사건을 동시에 보고 있다. 다른 하나가 있다. 꽃과 자신 사이다. 꽃은 ‘저만치’에 피어있다. 그렇게 꽃은 홀로 핀다. 자신은 그 꽃을 본다. 시인은 이 꽃에서 홀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꽃과 시인 사이에 공간이 있다. ‘저만치’는 가리키는 이가 내뻗는 거기까지다. 정해지지 않았으나 정해져있다. 정할 수 없으나 손에 잡힐 듯하다. 특정할 수 없으나 특정할 수 있다. ‘저만치’는 나와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임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시선이 만나야 확정되고, 시간이 겹쳐야 비로서 살아나는 공간이다. 경계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다. 마음에 그은 선, 그것이 ‘나-저만치’ 사이를 가를 뿐이다.


나는 소월이 설정한 두 공간이 소월 자신이 직시하는 상상세계이면서 동시에 현실세계라는 생각을 한다. 힘에게 자유가 압제당한 채 살아있는 유약한 자기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는 산을 보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산 어딘가에 홀로 자리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자신의 자리는 저만치 떨어진 꽃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와 꽃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 빈 거리에 ‘적은 새’가 날아든다. 새는 이 산을 좋아한다. 떠나지 않는다. 꽃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꽃이 되어 새에게 자기 마음을 건넨다.


5-2. 시의 시간

이 시에서 시간은 하나다. 계절이다. 눈에 띄는 표현이 있다. ‘꽃피고 진다’. 개화(開花)와 낙화(落花)는 구분되지 않는다. 동시성이다. 시인에게 꽃은, 피면서 지고, 지면서 핀다. 그에게서 시간은 ‘나눠지니 않는 영원’이다. 끊어지지 않으면서 순서도 사라진다. 봄-여름-가을일 필요도 없다. 갈-봄-여름이어도 좋다. 가을과 봄 사이에 겨울을 억지로 인식할 필요도 없다. 시인에게는 가을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한 줄기 강처럼 정해져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공간 사이 어딘가에 찍혀있는 좌표다. 흐르는 시간에 막무가내 밀려갈 이유가 없다. 앞으로가다 물러서기도 하고, 물러서다 힘차게 도약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간은 경계없는 공간이다. 공간은 자유로운 시간이다. 시간은 해체된 공간이며, 공간은 분산된 시간이다.


5-3. 시의 시공간-그것을 채우는 새-꽃-인간

이제 시인은 시간과 공간을 한데 묶었다. 산은 꽃과 새와 인간에게 생존터전이다. 시간과 공간은 마침내 시공간으로 태어난다. 이 산에서 과거-현재-미래는 과거현재미래다. 과거는 현재이며, 동시에 미래이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이면서도 또한 미래다. 미래는 과거, 현재를 모두 아우른다. ‘동시성’이다. 공간도 그렇다. 여기와 저기를 가르는 경계가 사라졌다. ‘무경계성’이다. 여기는 곧 저기다. 산에는 계절없이 꽃이 있고, 적은 새가 있으며 시인이 있다. 시인에게 이 산은 창발된 시공간이다.


이 산은 함께 사는 터전이 된다. 홀로 핀 꽃들과 그 꽃으로 날아드는 적은 새, 시인 자신이 함께 산다. 꽃은 이 산에서 언제나 핀다. 또한 그 꽃은 ‘저만치 홀로’ 있다. 새가 날아든다. 꽃이 거기 때문이다. 새는 산을 떠날 마음이 없다. 새는 꽃이 좋다. 시인은 꽃과 새에게서 자신을 본다. 시인은 ‘홀로 핀 꽃’이자 ‘적은 새’이기도 하다. 시인도 새처럼 꽃을 좋아한다. 새처럼 꽃을 떠나지 않는다. 산을 떠날 마음도 없다. 분명 어느 날 꽃은 질 것이다. 새는 날아갈 것이다. 인간은 돌아갈 것이다. 꽃이 피어나는 날, 시인은 환호했을 터이고, 지는 날 시인은 회한이 밀려왔을 것이다. 새가 날아들 때 시인은 기뻤을테고, 날아갈 때 아쉬웠을 것이다. 시인이 꽃을 찾아올 때, 꽃은 행복했을 것이며, 돌아갈 때 슬펐을 것이다. 새가 자신 위에 앉았을 때 감격했을 것이며 날아갈 때 애둘러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모든 대조는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게 삶은 죽어가고, 죽음은 살아간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의 시가 만들어낸 세계가 흥미롭다. 시공간에서 새와꽃과시인은 홀로 있으면서 함께 살고, 진다. ‘거리를 두면서’, ‘거리를 없앤다’.


6.

나는 소월이 그려낸 이 산에서 ‘정치’(政治)를 읽는다. ‘그의 시는 진정 정치인가?’ 이 질문을 위해 나는 다시 시(詩)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6-1. 시란 언어로 만드는 세계다

시(詩)란 경계없는 집, 우주(宇宙)다. 글자들로 축조하는 끝없는 ‘사상 공간’처럼 보인다. 이 글자와 저 글자가 만난다. 저 단어와 이 단어가 마주친다. 그림이 그려진다. 사물과 사물이 어울린다. 새로운 사물과 사건이 창발한다. 글자와 단어, 문장이 얽히고 설킨다. 마침내 단단한 사상으로 소생한다. 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손에 잡히듯, 글로 그려내고야 만다. 결국 시는 상상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현실세계다. 우주이면서 자기 사유를 자유롭게 발현하는 개인국가다. 모든 개인은 ‘저만치’ 홀로 핀 우주-세계다.


6-2.시란 언어로 만든 현실이다.

시는 이미지다. 직유가 아닌 은유를 택함으로써 현실은 상상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다시 상상은 현실로 소생한다. 은유로서 시는 시간을 포괄하며, 공간을 아우르고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한데 엮어버린다. 은유로서 시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거리와 간극이 상쇄된다. ‘거리두기’와 ‘거리없기’를 구분하는 시도가 의미없는 이유다. 시 안에서 거리와 간극은 동시다.


한 가지 더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시는 자유하면서 동시에 절제한다. 나는 이 속성이야말로 시가 정치(政治)인 한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속성은 시가 정치에 대한 정의에 기여하는 힘이다. 정치가 ‘의도를 가지고 물길을 다스리듯 지혜롭게 헤아려’ 가는 일이라면 ‘시는 당연히 정치다.’ 시인은 당연히 정치인이다. 그는 상상으로써 현실세계를 포착하는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7.

이제 나는 생각한다. 정치인은 당연히 시인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 시의 길에서 정치인은 시인이 포착한 저 상상세계를 여기 현실에 투영하는 ‘시의 수행자’가 된다. 정치인이 시인의 상상을 현실에 투사할 때, 비로서 정치는 정치답게 실현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나는 소월의 <산유화>에서 이런 정치를 상상한다. 나는 이 시에서 세 가지 정치덕목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관성, 고독성, 연대성이다.


첫째, 일관성이다. 꽃은 피고 진다. 지고 핀다. 생명은 이렇게 새롭게 전진하며 순환한다. 한결같다.

둘째, 고독성이다. 꽃은 홀로 핀다. ‘저만치’ 피어있다. 어느 꽃도 뒤섞이지 않는다. 생명은 모두 고독하다. 홀로 있다.

셋째, 연대성이다. 새가 날아든다. 홀로 핀 꽃 위에 내려앉는다. 새는 꽃을 떠나지 않는다. 새는 꽃과 함께 있다.


8.

산은 그렇게 살아있다. 소월은 그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낸다.

그가 노래한 것처럼 꽃-새-인간은 홀로 있으면서 함께 있다. 피었다지고, 날아들다 날아간다. 정치인은 시인이 상상해 낸 세계를 현실 속에서 실현할 용기를 가진 자이다. 그 상상을 함께 기억하도록 돕는 매개시인이라는 말이다. 시가 그려내는 상상을 마음에 담지 못하고, 적절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정치와 정치인은 슬프다. 정치인은 시인이 상상히는 세계를 몸 어딘가에 늘 각인해 둘 필요가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 앞에서 그 상상세계를 쉼없이 기억해내고 현실로 재현할 용기와 지혜를 끄집어 올려야 한다. 정치는 상상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들에게 기억으로써 일깨워야 한다. 기억저항으로 호소해야 한다.


9

그것을 위해 정치인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내 몸에서 소생하도록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시로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기억이란 자주 듣고, 떠올리면서 강화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기억되는 일은 드물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충격과 트라우마에 가깝다. 기억이 뇌가 아니라 몸에 장착될 때, 비로소 기억은 망각에 저항하며 살아있는 실체가 된다.


나는 바른 정치를 꿈꾸는 세계를 살고 있다. 나는 시인이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시이면서 정치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서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위로하고, 버려야 할 것을 망각하도록 도움으로써 격려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 새로운 정치인의 책임이며, 의무이자, 권리다. 정치인은 시인일 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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