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을 외치기에는 이번 수업 만으로는, 불교에 대한 개념이 턱없이 모자른 듯 하네요..^^
저번 '주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전혀 글을 올리지 않았던 바 반성하며, 써 놓은 글을 올리긴하는데..
지금도..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독화살의 비유'에서 느꼈던 점을 집중적으로 쓴 것이니 아무리 편협하게 느껴지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써 놓은 글을 올리는 것이라.. 경어체 쓰지 못한점 죄송합니다.
[공이란 무엇인가] 후기
매우 기대하던 수업이었는데, 안타깝게도 40분이나 늦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꽉 막힌 버스 안에서 내내 마음 편히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영진 선생님의 <공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기대했던 것을 뛰어넘는 텍스트였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절에 몇 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도덕책에서 언뜻 보이는 ‘공’사상이나 만화에서 접한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와 같은 글귀에 홀려 불교에 대한 아련한 매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배울 시간이 없다 미루고 미루던 중, 드디어 김영진 선생님의 수업으로 불교에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앞의 수업을 못 듣고 바로 ‘독화살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부분부터 들었는데,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몇몇 부분은 나를 회의주의로 몰아가기까지 했다. 더 깊은 이해도 없이 감정만이 앞선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이를 짚고 넘어감 없이는 피안의 세계로 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우문(愚問)을 시작해보려 한다.
*형이상학의 질문에 無記로 답함.
독화살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만동자의 질문은 분명 실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었다. 이에 무기(無記)로 답한 부처님.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이 있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과격한 은유가 아니었을 텐데, 내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혹은 과도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 독화살의 비유를 듣고 나니, 형이상학의 질문을 이어받아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 온 철학자들이 모두 ‘독화살에 맞은 채로 독화살에 대해 논하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 것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영혼은 있는가?’ 이런 고민을 매일 일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런 고민들을 한다. 고민이 곧 고통임을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임을 인정하지만, 고민은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불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바로 고통 극복을 위한 것이었다.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만동자의 고민이 깨달음을 얻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지고 있었던 고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내가 볼 때, 고민을 하는 만동자는 분명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난 ‘형이상학의 질문들이 왜 필요가 없는가?’라고 부처님께 따지고 싶은 것이다. 형이상학의 질문에 매몰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형이상학은 개인에게는 자신을 알게 하고 사회에는 올바른 윤리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기제는 인간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사고’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드러내어 논의 해야지만, 즉 따져 묻고 잘못된 점은 없는지 성토해 봐야지만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그나마 올바르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독화살에 대한 주객전도 된’ 논의라니.
만동자의 에피소드 후에 반야경과 금강경의 내용을 듣고 있으려니, 역설적이게도 만동자가 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답을 열심히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찰, 실체의 부정. 앞의 1)재현이란 무엇인가 2)주체란 무엇인가의 교훈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단한 차이화만이 존재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나 없음’을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도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인간을 결국에 자유롭게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知)라고 결정론이 결론을 맺는 것처럼, 불교도 ‘반야’를 통해 ‘바라밀다’한다고 말한다. 사법인과 연기법에 이은 ‘공’사상. 이렇게 깨달음으로 가는 설법을 할 것이었으면서, 왜 형이상학의 ‘물음’은 원천봉쇄 해버렸단 말인가. 깨달음이 있기 전에 물음이 먼저 있는 것이 이치인데 말이다.
사실.. 깨달음의 기쁨을 누리며 공부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를 부정당하는 것 같아 매우 거부감이 들었었다. 그러나 글을 쓰고 난 뒤인 지금, 결국 불교 자체도 내가 필요 하다면 삶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일 뿐이고, 앎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철학 이론들과 크게 배치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독화살의 비유'는 수행은 안하고 고민만 하는 만동자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 부처님이 생각하신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번민을 넘어오니 그나마 불교의 사상에 한결 가깝게 다가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