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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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읽은 날 : 2004. 3. 3

칼의 노래를 처음 읽었던 날을 기억한다.

은빛 장정이 몹시 예뻐 그날 들어왔던 책을 정리하다 말고 책장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읽었던 책. 책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산중의 짧은 겨울해는 이미 져 버린 뒤였다. 그 화려할만큼 아름다운 문체, 낯선 이름의 작가 김 훈.

그로부터 꼭 2년, 김훈은 더 이상 나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이 책은 편집 순서상 전작 『칼의 노래』와 유사한 면이 많다.
칼의 노래 속표지 다음 장이 이순신의 한시 《한산도 야음》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이 책의 속표지 다음 장은 삼국유사 중 우륵의 가야금 곡조에 관련된 기록을 옮겨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칼의 노래』에서 무인 이순신의 삶을 통한 조선 중기의 세상을 ‘노래’하였듯, 이 책에서는 예인(藝人) 우륵을 통해 진흥왕 무렵의 신라와 가야를 ‘노래’하였다. 김훈에게는 무인도 예인도 같은 사람일 뿐. (“칼을 들여다보는 일과 악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나에게는 같았다.” 『현의 노래』, 김 훈, 생각의 나무, 2004, 서문 중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에 보면 독립운동을 하는 사팔뜨기 강쇠의 이종사촌 짝쇠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이 또 걸작인 게

「가령 너 지금 어디 갔다오느냐고 물을라치면,
“그놈의 버르지(벌레)를 씹었더마는,”
하는 식의 대답인데 배밭에 가서 배 한 개를 얻어먹었는데 배벌레 씹은 것이 기억에서 젤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어본 사람 편에서 보면 동문서답인 것이다.
『토지』, 박경리, 나남출판, 2002, 3부1권(9), p.105」


이런 식이다. 앞뒤, 양옆까지 다 잘라먹고 그 순간의 가장 강렬했던 어떤 것을 쑥 꺼내놓는 것이다. 타인에게는 동문서답일지라도 자기자신에게는 아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는 앞뒤, 양 옆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남아있으므로.

때로, 김훈의 글을 읽다보면 토지의 짝쇠가 생각난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칼의 노래 서문 중에서」
「2003년 1월부터 10월까지 나는 가끔씩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안의 악기박물관을 기웃거리면서 소일하였다. 관람객이 없어 늘 나 혼자였다.
별 할 일도 없는 나는 오랫동안 악기를 들여다보다가 혼자서 밥을 사먹곤 했다.
-현의 노래 서문 중에서」


창작의 모티프가 되어 준 칼과 악기를 하루 종일 혼자서 들여다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분명 앞뒤, 양 옆의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는 완벽한 이야기가 하나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완벽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굴리다 “기억에서 젤 뚜렷한” 부분만을 뚝 잘라 소설로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뜬금없는 동문서답이 되는데, 뜬금없는 동문서답이어서 아름답다.

김훈의 글은 단촐하다.
인물에 대해서도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그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 “젤 뚜렷한” 부분만 뚝 잘라 역시나 앞뒤, 양 옆이 뚝 잘린 사건 속에 던져 넣는다. 인물의 외면과 과거와 미래와 성격, 모든 것은 뚝 잘려 나가고 없고, 오직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할 고뇌, 감정 그런 것 들 만이 동문서답마냥 파닥파닥 살아 날뛴다. 결코 동문서답이 아닌 상태로.

#쓰다보니 늘, 김훈의 글에 대한 리뷰는 죄 문체론이다. ㅡㅡ;;;

2004. 4. 24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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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1-2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가 성립되지 않으면 한 줄도 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문체에 힘이 있지요. 김훈에게 있어서 문체란 "고통스런 글쓰기의 조건"이라 했으니... 잘 읽었습니다. ^.^

아시마 2009-11-25 15:03   좋아요 0 | URL
네. 굉장히 특이한 문체였어요, 처음 읽었을 땐. 김훈의 글로서는 처음읽었던 <칼의 노래>에서의 충격은 잊을수가 없죠. 그리고 읽은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문체이기도 하구요. 헌데 요즘은 김훈의 글을 많이 읽어서 그 문체에 익숙해진 건지, 김훈류의 글줄이 많아진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만큼 충격적일만큼 아름답다고 느껴지진 않아요.
그대신 요즘은, 문체가 김훈의 걸림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들어요. 매너리즘이란 말이 아니라, 문체 외에도 인물이라든가 사건이라든가 구성들 역시 훌륭한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문체만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훈의 사유에서 나오는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굉장히 독특하고 분명 생각거리를 던져주는데도, 문체의 화려함에 눌리죠.

마노아 2009-11-2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근데 ashima는 무슨 뜻일까요? '아시마'라고 읽는 게 맞나요? 소리내어 읽어보면 발음이 예뻐요!

아시마 2009-11-25 15:59   좋아요 0 | URL
중국 고산부족의 설화 <아시마>에서 따온 이름인데(아마 티벳쪽과 관련있는 것 같아요.) 인도쪽에서는 흔한 이름 같아요. 게다가 무려 성경에까지 나오는 이름이라는... ㅎㅎㅎ ashima로 검색해보면 인도의 디자이너가 나오죠. 성경구절과 함께. 뭔가 대단히 성스러우면서도 속스러운 이름 이잖아요? (막 혼자 자화자찬에 빠져있다. ㅎㅎ)
중국 고산부족의 설화에서 "아시마"는 향기로운 여자 라는 뜻이라고 하구요,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는 벵골이름 "아시마"는 경계를 모르는, 가능성이 무한한 여자라는 뜻이래요.

그나저나, 마노아는, 레 마누와 리할 사이에서 태어난 그 레 마노아(마누아?)와 연결되나요?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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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은 날 : 2005. 7. 31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김훈, 『개』, 푸른숲, 2005, p. 182-183」


나는 김훈의 그 특이한 마초이즘을 좋아하는데, 김훈의 마초이즘은 다음과 같다.

"나는 여자의 능력은 불신한다. 그러므로, 일언이 폐지하고, 밥과 돈을 버는 것이 남자의 일생이다."

여자의 능력을 불신하기 때문에 돈과 밥을 버는 것은 남자의 몫이라고 말하는 남자. 불신하는 그 능력에 기대는 비열함은 보이지 않는 남자. 나는 그래서 김훈의 마초이즘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는. 수컷 진돗개 보리의 시선을 통하여 이 땅에서 수컷으로 살아가는 것의 서글픔과 삼엄함을 끝도 없이 말한다.

「비 오는 날, 마을 회관에 모여서 할일 없이 술 마시는 뱃사람들의 몸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다. 수컷의 비린내와 땀냄새에 배에서 쓰는 경유 냄새가 절여진, 퀘퀘하고도 끈끈한 냄새였다. 그 사내들도 나처럼 수컷으로 태어난 신세가 슬프고 답답한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내들을 향해 컹컹 짖었다.
김훈, 같은 책, p. 146」


수컷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수컷인 보리가 암컷인 어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듯 암컷인 나도 수컷인 이 세상 남자들의 고단함을 알지못한다. 그저 그들도, 여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고단해하고 서글퍼하는 만큼이나 고단하고 서글프게 이 세상을 견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상상을 할 뿐.

그러므로 김훈의 말대로 "세상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눈부시다."

김훈의 아름다운 문체미학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책. 조금 더 질박해지고, 조금 더 투박해졌지만 화려한 명문은 그대로다. 음. 그러나, 너무 튀는 문체여서 그럴까. 이제는 조금 지겨워지려고 한다.

사내로 살아가는 것의 힘겨움을 역설하는 내용에도, 그 화려한 문체에도.

2005. 8. 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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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1-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에 공무도하 읽으면서 좀 지겹다 생각했어요. 지치기도 했구요.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을 읽을 때나, 칼의 노래를 읽을 때나, 화자의 말투가 늘 똑같이 들려서 캐릭터의 변별력이 좀 떨어졌어요. 보리도 마찬가지네요.^^

아시마 2009-11-25 15:49   좋아요 0 | URL
김훈 문체가 워낙에 쎄죠. 작중 등장인물의 말투도 작가의 서술도 김훈의 색이 너무 강해서, 다른 작가의 작품과는 눈에 띄는 개별성을 획득하면서도 김훈의 작품 끼리는 닮아버리는 경향이 확실히 있어요. 게다가 주제의식도 비슷하구요. 그러니 결국 김훈의 소설에 관한 논의는 문체론으로 흘러가는 형국이 되는거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김훈의 문체에 질리지 않아서인지, 전 봐도봐도 좋아요. ^^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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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사무가 구지가, 최초의 서정시가 황조가. 그리고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에 서 있는 공무도하가. 구지가가 집단 창작(가야부족장들의 노래)이고 황조가가 개인 창작이라면, 공무도하가는 그 창작자가 애매하다.  

우선, 이 노래를 가장 먼저 불렀음직한 사람으로 백수광부(익사자이자 이 노래의 주인공인 "님"이다)의 아내가 있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부른 노래를 듣고 아내에게 옮겨준 곽리자고가 있고,
남편 곽리자고의 말을 듣고 공후라는 악기를 연주해 이 노래를 부른 아내 여옥이 있다.(해서 이 노래 공무도하가의 또다른 별칭은 공후인이다.) 

이 셋중 이 노래의 진짜 창작자는 누구일까. 고등학생용 참고서에도 중구난방이어서 백수광부의 아내로 적혀있는 것도 있고 여옥으로 적혀있는 것도 있다. 아직 어느것도 정설이 아니고, 앞으로도 무엇을 정설로 삼을 것인가는 알수 없는 일. 뭐 사실 알고 보면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긴 하다.  

노래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이 노래를 단순한 서정시가로 보지 않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유리왕의 황조가에서 드러난 화희(禾姬-쌀여자)와 치희(雉姬-꿩여자)의 다툼에서 치희가 떠나고 화희가 남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고구려가 수렵 중심의 국가체제를 농경 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보는 견해가 있듯, 이 노래 공무도하가역시 한 시대의 교체를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낳은 아들 단군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세운 나라 고조선은 천부인을 가지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다스리던 나라였다. 하늘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매개자(무당)가 있다. 그러다 점점 하늘의 뜻은 잊혀져가고, 나라는 인간의 법칙, 즉 법률로 다스려진다. 그 과정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던 매개자인 무당의 권위는 추락하다못해 무화되어간다. 백수광부는 그 무당이었을 것이다. 권위가 추락한 것에 분개하여 술을 마시고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백수광부의 죽음을 지켜보는 곽리자고가 고조선의 진졸, 즉 일종의 공무원이었다는 것또한 의미심장하다.  

그야말로 미실, 미실의 시대 안녕히. 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래서, 나에게는 이 노래 공무도하가의 현대적 은유로 읽힌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해 가는 장철수(백수광부)와 시대와 영합해 점점 더 그 권력을 키워가는 박옥출(권력? 정치?). 그리고 그들을 냉정히 지켜보는 관찰자 문정수(곽리자고)와 문정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노목희(여옥). 그리고 여기에 장철수를 도와 함께 소멸해가는 후에(백수광부의 처)까지 구도를 잡아보면, 

김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가 손에 잡힌다. 그리고 아마, 고조선의 시대 교체도 이와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여, 이 사람, 

글 참, 잘 쓴다. 무시무시하도록.  

김훈의 그 지나치게 단정하여 끝간데 없이 화려한 문체도 여전하고, 이 문체가 과연 현대물에 어울릴까 했던 기우도 말끔히 씻어주었다. 신문기사를 써 내려가듯 감상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과 사건 중심으로만 써 내려 간 문장들인데 그 문장과 문장사이의 빈 공간에서 저절로 감상이 솟아난다. 확실히, 세상엔, 말하여 지지 않는 것이 더욱 강한 법이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어 세번째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난다. 백수광부는 죽었고, 곽리자고는 그 이야기를 여옥에게 전달할 뿐이며, 여옥은 그저 무심한 노래 한곡을 만들고 끝이 났다. 노목희가 그린 낙타 그림에 대한 묘사나 번역(이 번역이라는 부분 또한 여옥의 역할과 겹친다)한 타이웨이 교수의 책 제목인 <시간 너머로>에 관한 부분이 결국 김훈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 아닐까.  

낙타가 콧구멍을 사막의 바람 앞에 열어놓고 지평선 너머의 물과 나무와 풀의 냄새를 맡듯이 타이웨이 교수는 역사의 지평 너머로 사라진 인간의 체취를 맡고 있다고 서평자는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맡아내는 인간의 체취는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 합리와 불합리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p.204) 

인간은 과연 물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인가. 그 물을 건너가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상이 있기는 한것인가. 물을 건너 간 그곳에 펼쳐진 세상 또한 물 이쪽의 세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과거의 세상이 그러했듯 현재의 세상도 이러하고 미래의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타이웨이 교수의 입을 빌어 김훈이 말한다. 

일연은 무너진 황룡사의 잿더미와 그 참상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연에게 그 잿더미는 기록할 만한 가치에 미달했던 모양입니다.일연은오히려 애초에 황룡사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었던 유토피아의 원형에 관하여 썼습니다.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그는 썼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야만에 맞서는 그의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많은 노래와 이야기 들은 그가 한 생애에 걸친 유랑의 길 위에서 채집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래와 이야기 들은 모두 잿더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야만과 살육의 시대에 쓸리며 소진되었지만, 원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점에서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습니다.
(p.96-97)

 

결국 김훈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강을 건너가지 못한, 그럼에도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p.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야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그리고 인간은 결국 낙타와 같이 시간을 건너 시간 너머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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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1-2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리뷰예요. 이 리뷰를 읽고 나니 공무도하가 좀 이해가 됩니다. 이 책 읽고 너무 힘들었는데 좀 개운해진 느낌이에요.^^

아시마 2009-11-24 10:25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의 리뷰도 읽었었어요. 저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이 소설을 풀이하셨더라구요. ^^ 저 사실 이 소설 출간되자마자 읽고(10월 8일/그래서 저자 육필 사인본이라죠. 냐하하 자랑질) 리뷰쓰기 귀찮아 던져놨다가 마노아님 리뷰읽고 삘받아 썼어요. 리뷰 읽는 재미가 이런것 같아요. 그런데 마노아님 댓글이라니 와. 황송했어요.
제 리뷰는 마노아님 리뷰에 대한 답글로 읽어주세요. ^^

마노아 2009-11-24 12:15   좋아요 0 | URL
읽고 도무지 몰라서 찍어서 꿰었달까요. 아시마님 리뷰 읽고는 부끄러웠어요.ㅜ.ㅜ
리뷰의 답글이라니, 저야말로 황송합니다.^^

아시마 2009-11-24 20:29   좋아요 0 | URL
음. 솔직하게 말하면, 제 리뷰는 지나치게 도식적이지 않아요? 글 쓰고 나서 다시 읽어봐도 이건 고등학교 문학자습서 삘이라. 아하하. 전 개인적으로 저의 이런 성향이 상당히 문제있다고 생각해요. 왜 생각이 늘 이쪽으로만 흘러가는 걸까요. ^^;;;

Tomek 2009-11-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군요. 분명 한 권의 책인데 각기 다른 생각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신기함을 넘어서 경이감을 느낍니다. 잘 읽었습니다. ^.^;

아시마 2009-11-24 20:27   좋아요 0 | URL
하나의 텍스트가 다양한 의미층위로 읽힐때 그 텍스트는 위대해지는 거겠죠. 문학작품 뿐만이 아니라 모든 글이 다 독자의 개인적 체험이 들어가는 거니까요. 리뷰가 다양하다면 그만큼 대상 작품이 좋단 이야기 일 거예요.
김훈, 참 좋죠? ㅎㅎ
 
뉴요커 -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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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읽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로는 《축복 받은 집》, 《그저 좋은 사람》에 이어 세번째 책이었다. 첫번째 소설집 <축복 받은 집>을 무척 괜찮게 읽어놓고도 알수 없는 이유로 사지 않고 미뤄두었다가 그보다 늦게 나온 <그저 좋은 사람>을 먼저 읽고서 읽은 책이었는데, 역시나, 참 좋았다.  

그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문체라고 할까 그 분위기가 좋았다. 줌파 라히리의 문장은 촘촘하게 직조된 실크의 느낌을 주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빈 공간이 없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랄까. 이건, 내가 좋아하는 김훈의 문장과는 또다른 대극점에 있는 문체인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블랙홀이 있"고 (문장과 문장사이의)"전압이 높은"(따옴표 안은 김훈 본인의 표현 인용)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촘촘한 문장을 좋다라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호감이 갔다.  

 가끔, 번역 소설을 읽다보면 원문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 문장의 원문은 무엇이었을까, 원문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을까, 이 번역자가 과연 바르게 옮긴 것이 맞는 것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청바지 위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듯한 이런 느낌은 번역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고, 영어에 관해 거의 공포심 수준의 울렁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어 공부를 해보고 싶게 만드는 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은,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증오심도 생기고, 이런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번역까지 하게 되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까지. 아. 나 정말 이러다 언젠가는 영어를 정복해버리고 말거야. 나의 불행한 잉글리쉬 포비아. 

이럴때 나는 번역자에 관심을 가진다. 김연수는 김연수 스럽게 번역을 하고 이윤기는 이윤기 스럽게 번역을 한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번역된 소설은 자연스럽게 번역자의 스타일이 반영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적어도)내 머릿속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움베르토 에코는 닮은 꼴이다. 둘다 이윤기의 번역으로 읽었으니. 그때 내 눈에 띈 책이 이 책이었다. 

한때,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꾼 적이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내가 모르는 곳에서의 새로운 삶은 말 그대로의 매혹이었다. 내가 선택하는 새로운 탄생이랄까. 그렇다고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저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트인다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곳은 뉴욕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미드는 <C.S.I> 시리즈와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본 <프리즌 브레이크>가 전부인 내가 뉴요커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나는 아직도 뉴요커가 뭔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대한 상징인지도 모르고 더 솔직히 말해서는 관심도 없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내가 굳이 뉴욕을 선택한 건 아주 단순한 우연이었고, 뉴욕은 뉴욕이 아니라 런던, 파리, 시카고, 헬싱키 어디여도 상관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상관없고. 그곳이 어디든 나는 떠나지 않을테니까.  

 어쨌든,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길을 틔울수 있을때, 난 뉴욕에 관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산 책은 뉴욕 여행 안내서였고,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쓴 책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때 산 책이 이 책이다. 사 놓고 3-4년이 넘도록 펼쳐보지도 않았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줌파 라히리와 번역자 박상미는 전혀 달랐다. 문체도 느낌도 분위기도 모든 것이 다. 소설가와 미술가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만큼 달랐다. 이 책의 박상미는 그저 평범한, 압구정동에도 있을 법하고 인사동에도 있을 법한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냥 뉴욕에 관한 책이었다. 뉴욕에 사는 한국 사람의 여행기가 아닌 생활기. 줌파 라히리에 대한 기대덕에 약간은 실망스럽기까지 한 책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만을 놓고 보자면, 그럭저럭 괜찮다. 찬양에 치우치지 않고, 그렇다고 뉴욕에 억눌리지도 않고, 외국 문화에 대한 반감도 없이 말 그대로의 생활기로 잘 읽힌다. 한국 도산공원 앞의 이야기와 비슷하달까. 나고 자란 문화가 아닌 전혀 새로운 문화 속으로 뛰어들어 사는 사람의 이질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뉴욕에 잘 동화되어 사는 사람이구나,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든다. 그리고 그 안도감은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던 나의 숨길을 좀더 크게 열어준다. 그래, 뉴욕가서도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문득 무럭무럭 든달까.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책이었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살면서 그 나라의 문화에 관해 쓴 책인데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고 그래서 편안하게 읽힌다.  

밑줄 그은 구절 하나.  

"사람이 어딘가 쏟을 수 있는 열정이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거든. 한 곳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버리면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고 생각해."
(p.197)

 ps. 재미있게도, 이 책에도 김훈이 나온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훈의 소설 <화장>에 대한 감상이. 이 사람도 김훈에 감탄하는 구나, 신기했다. 결국 이쪽 끝과 저쪽 끝은 서로 닿아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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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2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시마님. 떠났다가 돌아오시는 건가요, 아니면 아주 떠나시는 건가요?

아시마 2009-11-23 12:17   좋아요 0 | URL
당근 돌아오죠. ㅎㅎㅎ 한 4년 있다가 와요. 아직 떠나는 것도 좀 남았구요.
아참, 뉴욕으로 가는 건 아녜요. 글 써놓은 게 꼭 나 뉴욕가, 라고 써놓은 것 같아서 사족 달아요. ^^

다락방 2009-11-23 12:41   좋아요 0 | URL
사족 땡큐에요. 뉴욕 가시는 줄로 알았거든요. ㅎㅎ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해의 크리스마스 였는지, 닉 혼비의 《어바웃 어 보이》를 읽으며 낄낄거린 생각이 난다. 함께할 사람 없는 크리스마스의 우울을 멋지게 날려준 유쾌한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전혀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인 "책에 관한 책" 인데다, 닉 혼비가 썼다니까. 

물론 이 책도, 닉 혼비 답게 유쾌하다. 순간순간 빵빵 터지는 부분도 있고, 꽤 진지한 통찰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고. 작가 매제에 관한 구절이나 <빌리버> 편집진에 대한 구절은 나올때마다 웃겼다. 책에 관한 관점도 비슷한데가 많고, 책에 대한 취향도 닮았다. 

그런데,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원래가 이런류의 취미와 관련된 책은(독서도 취미의 일종이란 전제하에) 취향을 타기 마련이지만, 이번에 새삼 느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책은 취향을 타는 것이구나. 라고. 

물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닉 혼비의 독서는 영미권 문학(그것도 디킨스와 체호프를 제외하면 최신의 현대문학)에 국한되어 있다. 치중도 아닌 국한. 책에 관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이 내가 읽은 책이기만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언급되는 작가에 대한 정보나 책에 대한 것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영미권 현대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사람 같고, 저 책이 이 책 같고, 이 책이 그 책 같아서,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중간중간에 달려있는 옮긴이의 주석을 보면 이 책에서 언급되어 있는 책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한국에서 번역되어 있는 것 같던데, 디킨스와 체호프를 제외하고라면, 내가 읽은 책은 거의 없어서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게 만드는 게 닉 혼비의 저력일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간 내가 한국사람이 쓴 책에 관한 책을 즐겁게 읽었던 건, 내가 알고 있는 작가나 나도 읽었던 책에 관해서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이건 달리 말하면, 영미권의 현대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무척 재미있고 유쾌하게, 닉 혼비의 농담을 즐기며 읽을 수 있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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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2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아시마님. 저도 이 책을 꽤 즐겁게 읽은건 제가 읽고 아는 작품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어요. 만약 닉 혼비가 언급한 작품들이 죄다 제가 모르는 것들이었다면 지금 읽었던 것처럼 재미있게 읽었을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