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알라딘 들어올때마다 기분이 좋다. 적립금이 맨날맨날 쌓여 있는 거다. 리뷰 한편 썼다고 사람들이 무려 140원씩이나 나한테 준다. 와 놀랍도록 고마워라. 그런데 얼마전엔 뜬금없이 몇천원이 올라가 있었다. Thanks to를 이렇게 많이했나 봤더니 다음 블로거 베스트 특종인가에 선정되었다고 오천원 주더라. 완전 감동먹고 남편한테 자랑했다.  

야옹씨 : 나, 리뷰 써서 다음 블로거 베스트 특종에 선정됐다!!! 
충무공 : 그게 뭔데?
야옹씨 : 그... 글쎄? 그게 뭘까? 뭐 네이버 메인 같은거 아닐까? 여튼 중요한 건 당선됐다고! 백만년만에 리뷰한편 써서 알라딘에 올려놨더니 떡하니 선정되고. 마누라 대단하지 않아?
충무공 : 상금은 있나?
야옹씨 : 그럼! 무려 오천원!
충무공 : 니 다 무라  

우리가 이 대화에서 알수 있는 것은, 첫째, 야옹씨와 그녀의 남편은 블로그 초보이거나 블로그 개념이 없다. 둘째, 그녀의 남편님하는 돈밖에 모른다.(무려 수전노 상대 출신이시다. 하.하.하.) 

2. 첫리뷰 개시를 한 뒤 며칠 있다 두번째 리뷰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날 방문했더니 적립금이 또 확 늘어있다. 이번에도 다음 블로거 베스트 특종 당선이란다. 헐헐헐... 쓰는 것마다 당선되는 거 아닐까 해서 오늘 읽은 글 또 리뷰한편 써봤다. 결과는 내일 발표~ 

3. 리뷰 써놓고 보니 알라딘에서 무슨 리뷰 대회를 한단다. 오호. 나 내 홈페이지에 써놨던 리뷰가 엄청나게 쟁여져 있는데(홈페이지는 닫았다.) 이번에 올리고 리뷰 많이 올리는 사람한테 주는 10만원이라도 노려볼까, 진지하게 생각중이다.  

4. 민음사판 세계문학 전집을 30% 할인행사 한다고 해서, 사고 싶던 것들 주섬주섬 담아놓고 얼마 담았나 봤더니 285,000원이다. 나 사까 마까. 사면 충무공이 나랑 그만살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하고, 아. 고민스러워. 살것인가 말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여기서 "살 것"과 "말 것"은 책 구매에도 해당되고 결혼 생활에도 해당된다. ㅎㅎㅎ 한국어 만쉐이. 

5. 예전 홈페이지 시절에는 이렇게 번호붙여 자잘자잘하게 쓰는 일기를 많이 썼었다. 새삼 써보니 반갑다. 기록도 습관이라, 이젠 슬슬 포스팅질(근데 솔직히 난 아직 포스팅이라는 말도 서먹하고 블로깅도 낯설다.)에 이력이 붙기 시작한다.  

6. 아참. 빼먹고 안써놓을뻔 했다. 난 알라딘에서 하는 이런저런 이벤트에 잘 당첨되는 편인데, 이벤트에 당첨되고 남편에게 막 자랑하면 남편님하는 매번 심드렁 하시다.  니가 알라딘에 갖다준돈이 얼만데, 앞으로도 계속 갖다 달라고 그런거 주는 거다. 라나. 아. 수전노 상대랑 사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난 무능문대이므로 참기로 한다. 에혀. 내 신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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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13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아시마님 앞으로 완전 탄력받아서 페이퍼나 리뷰 더 자주 올리실 것 같은데요. 리뷰대회도 도전 해 보세요. 1등은 무려 백만원이라니깐요!!(제세공과금은 본인부담이지만)

6번에 쓰신것처럼 사실 '알라딘에 갖다준돈이 얼만데' 매주 리뷰당첨금이나 다음 블로거 선정으로 책값을 충당하려면 택도 없지만 그래도 기분 좋잖아요. 뭔가 더 쓰고 싶다는 욕구도 스멀스멀 생기고. 그리고 아시마님, 다음 블로거 특종도 1등으로 뽑히면 2만원이에요. 후훗. 완전 공돈 생겨서 짭짤하다는. 헤헷 :)

아시마 2009-11-13 09: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오늘 찾아보니까 특종도 등수가 있더군요. 아... 하지만 전 1등하곤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아. 이건 운명적 좌절이예요.
탄력받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홈에 썼던 리뷰들이 걍 그대로 제 컴에 남아있어요. 안그래도 컴이 요즘 불안불안해서 얘네들을 어쩌나 하던 참인데 알라딘에 완전 도배질 해볼까 하다가, 음음, 알라딘 직원들이 얘 돈독 올랐다고 욕할까봐 참아요. 소심하기로는 1등까진 아니고 한 15등쯤은 될거라. ^^;;;

글구 딴소리지만, 저한테 다락방님 서재는 지뢰밭이예요. 오늘도 다락방님 덕에 몇권의 글을 장바구니에 담았는지 몰라요. 매번 다시는 안가야지 버럭! 이러고 결심한다는. ㅎㅎ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어린 소년이(사실 소녀라도) 화자가 되어 자신의 고난에 찬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글을 읽는 건 참 아프다. 어린소년을 화자로 택하기에 자연스레 오게되는 글 전체의 천진함이 더욱 아프다. 끝내, 나를 울린건, 열살 인줄 알고 있었던 열네살 모모의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도 살수 있나요?"  (p. 269)

라는 질문이었다.  

한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사랑이 꼭 필요하다고.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나의 존재가 의미있어 지는 거라고. 그런데 살면 살수록 그게 아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산다.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세상은 잿빛이다. 첫사랑의 시작과 함께 다가오는 세상의 팡파르를 누구나 기억한다. 바람은 더욱 상쾌해지고, 하늘은 더욱 푸르러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특별해지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한 귀퉁이,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모모는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는 끝내 로자 아줌마에게 "양모"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지만, 그 어느 엄마가 로자에 대한 모모 만큼의 절실한 사랑을 받아볼 수 있을까. 

 가끔 TV에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의 비참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은 엄마를 한달이고 두달이고 죽은 줄도 모르고 방에 뉘어둔채 살아가던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다. 도저히 그 아이의 목소리(음성변조가 된 것이라고 해도.)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나를 돌봐주지 못한다해도, 그저 누워만 있는다고 해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내가 무작정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의 죽음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이미 죽어버린 엄마라고 해도 그와의 행복한 공존을 파괴당하고, 이제는 정말 오갈데 없이 '사랑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나. 아이이기에 유창한 언어로 그 기분을 표현할 수도 없이, 그저, 엄마가 죽은 줄 몰랐어요. 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그 아이를. 정말 그 아이를 어떡하니.

세상의 끝에 다다른 두 사람, 늙은 창녀 로자와 창녀와 정신병자의 아들 모모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 안한다 보다 더욱 중요한, 내가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아줄 존재. 그 절박함에 마음이 에여왔다. 그리고 그들 주변의 가난하고 대책없지만 무작정 따뜻하고 그야말로 대책없이 인정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눈물섞인 웃음이 아니고는 볼수가 없다. 

이 소설은, 기묘하리만치 이중적이다. 정말 비참한 현실이고 비정한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고, 현실적인 악인이라도 이 소설 속에서만큼은 선량하고 인정많게 행동한다. 그건 화자가 14살 소년이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는 천진함일텐데, 실제로 모모는 그다지 천진난만 하지도 않고, 세상을 믿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조숙하기까지 하다. 세상을 믿지 않는, 이미 세파에 닳고 닳았음에도 어쩔수 없이 천진할 수 밖에 없는, '사랑할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모의 모습이. 정말이지 참.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소설은 이게 세번째인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유럽의 교육>-이 소설도 소년이 화자다) 이 작가의 글을 읽고나면 늘, 슬프다고만은 말할수 없는 뭔가 그냥 마음이 아프다고 밖에 표현할수 없는 기분이 된다. 아. 그래도 역시 슬프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여파가 꽤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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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앞의 생』도『새벽의 약속』도 좋았지만, 저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정말이지 자지러지게 좋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집을 세개만 꼽아보라면 그 중 하나는 로맹 가리가 될 거에요. 어쩌면 가장 우선 순위를 차지할지도 모르구요. 네, 정말 여파가 세죠.

아시마 2009-11-13 09:24   좋아요 0 | URL
아. 전글에서 다락방님 서재가 저한테는 지뢰밭같다고 썼는데, 쿨럭. 이제는 제 서재에도 지뢰를 심어두시는 군요. 하.하.하.
이해할수 없지만, 전 왜 로맹가리의 소설이 제가 읽은 세권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전 약간 전작주의자에 가까워서 웬만하면 다 수집하는 편이란 말이죠. 새벽의 약속이 뭔가 검색했다가 하늘의 뿌리까지 두권 다 장바구니에 담아버렸어요.
이제 전 돈 마련하러 가야해요. 남편 등은 하도많이 쳐서 더이상은 칠 등도 없다는. ㅠ.ㅠ
 
국시꼬랭이 동네 시리즈 15권 + DVD 세트 국시꼬랭이 동네
강동훈 외 그림, 이춘희 글, 임재해 감수 / 사파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대학 진학을 하느라 서울로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고향집은 작은 정원이 딸린 주택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아직도 거기 살고 계신다. 하숙집을 거쳐, 직장생활을 하던 몇년간의 원룸생활이 이어졌고, 결혼과 동시에 나는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주부로서, 어떤 집의 관리자로서 내가 주택에 살아본 적은 없으니 아파트가 주택보다 얼마나 편한지는 알수없으나 생활의 편의라는 면을 제외하고라면 아파트는 참... 자연이라는 측면에서는 삭막한 공간이다. 자연에서 소외된 삶은 삭막해진다.  

꽃잎 뜯고 솔잎 뜯고 흙 퍼담아 하던 소꿉장난에 대한 기억은, 아파트에 사는 내 딸들에게는 딴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할수가 없다. 내 딸이 아파트 내부 공간에서 보는 꽃이란 고작 양란이나 분재, 그도 아니면 꽃다발 정도니까. 호박꽃의 수꽃과 암꽃이 어떻게 다른지(어릴때 소꿉장난을 할때 열살 미만의 나이에도 암꽃은 따면 안된다고 알고 있었던 나였다.) 풀의 이름이 뭐가 있는지. 풀꽃 도감과 야생화 도감을 사 주어도 아이에게 그건 지식의 차원이지 놀이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러니 점점,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은 잊어가고, 내 아이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과일 모형과 역시 플라스틱으로 근사하게 엄마의 부엌을 본떠 만든 부엌에서 깨끗하게(?) 소꿉장난을 한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라 아파트에서 살아갈 내 아이를 보면, 이 아이가 상실한게 무엇인지, 이 아이 스스로는 알기나 할까, 하는 한숨이 난다. 하긴, 가져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은 생기지도 않겠지. 

그러다 발견한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은 "잃어버린 자투리 문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도대체 잃어버린 자투리 문화가 뭔가하고 봤더니, 내가 열살 미만에 하고 놀았던 놀이들이다.(하긴 나도 이 책에 나오는 풀각시 만들기나 풀싸움을 해 본일은 없지만.) 외국에서 만들어 낸 창작 그림책을 보듯 이 책을 본다, 내 아이는. 읽히다 보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래도 이게 한국의 놀이문화라고, 니가 잃어버린 문화라고 알려주고 싶어 책장의 다른 책들보다 자주 꺼내 읽힌다.  

그리고. 책의 소명에 관해 생각한다. 이제는, 아주 시골에 사는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이 놀이를 하며 자라는 아이도 없겠지. 그러면 역사책에 기록될 가치가 없는 이런 소소한 놀이문화들은 잊혀지겠지. 그러나 이 책이 존재함으로 해서 그 놀이들은 힘을 얻는다. 지금까지 천년을 유지해왔던 그 문화가 앞으로의 천년을 버티어나갈 힘을. 

이 열다섯권의 책은 글쓴이는 이춘희 한 사람이지만 그림을 그린 이는 다양하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한권한권 읽어나갈 수 있다. 난 전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책은 그나마 전집의 냄새가 좀 덜난다. 

이 책을 사고 얼마되지 않아 아이의 소꿉을 챙겨들고 벚꽃지는 공원으로 나가 꽃밥으로 소꿉놀이를 해 보았다. 벚꽃지는 계절이 지나 이제 아이와 함께 갔던 공원의 잔디는 모두 누래졌는데도 아이는 공원을 지날때 그 꽃밥을 지어 소꿉놀이를 했던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놀이를 다 해보는게 나의 소박한 소망이다. 그러려면 시골로 이사를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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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이란 인생이 항상 그렇게 심각하고, 형식적이고, 복잡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유물, 어린 시절이 남겨준 유물인 것이다. 애칭은 또한사람이란 함께있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준다.' 

줌파 라히리, <이름 뒤에 숨은 사랑>, 2004, p.41 

다인이 어렸을 때 엄마 아빠 맘마 등의 일상적인 단어를 제외하고는 제일 먼저 한 말은 "야옹"이었다. 

남편은 나를 "야옹이" 라 부른다.  

뭐, 내가 생각할때 나는 전반적으로 고양이과의 인물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전형적인 강아지과의 인물이 되는데(특히 남편에게) 남편이 나를 야옹이라 부르는 건 좀 아이러닉한 일이 아닐수 없지만 어쨌든 남편은 나를 야옹이라 부른다. 

그건, 결혼하기 전부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나의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남편은(사실 나의 본명은 별로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다. 아무런 고민 없이 생각나는 대로 지었음이 너무나 역력하고, 장차 이 이름을 쓸 아이가 자신의 이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이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를 야옹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즈음의 나는 남편에게도 고양이처럼 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솔직히 서른살 여자에게 야옹이라는 애칭은 좀. 

결혼 직후 남편은, 시댁이나 친정 식구들 앞에서는 야옹이라는 호칭을 좀 자제하는 것 같더니,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당당히 외쳐대기 시작했다. "야옹아!" 라고.  

남편의 나에 대한 호칭은 나름 다양하게 변주된다.  

야옹아, 옹아, 옹아야 등등등. 그리고 기분이 좋거나 심심하거나 괜히 한번 이름을 불러볼땐 나름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야옹 야옹아~" 라고. 솔직히 40이 멀잖은 남자가 마누라를 부르는 이름으로는 좀.  

하여간. 남편이 그렇게 가락을 붙여 "야옹 야옹아~" 라고 불러주면 나는 냉큼 "야옹!" 이라고 대꾸해 주곤 했다. 아주 부부가 죽이 잘 맞지. 전화를 받을때도 "여보세요"라는 말대신 "야옹" 이라고 받기도 한다. 뭐, 천생 연분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심심했던 남편이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 "야옹 야옹아~" 라고 부르자 내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다인이 냉큼 대꾸했다. "야옹." 이라고. 아이들의 학습력은 놀랍다. 그때가 아마 돌무렵이었을걸. 그 뒤, 아이에게 엄마 아빠의 이름과 주소들을 외게 할때 다인이 말했다. 

 "아빠 이름 뭐야?" 
"서**"
"엄마 이름은?"
"야옹이." 

이 문답으로 여럿 포복절도 했다. 37개월인 지금도 다인은 엄마 이름 뭐야를 물으면 야옹이를 외친다. ㅎㅎㅎ 웃긴다. 

한편. 다인의 애칭은 '찹쌀떡'이다.  사람들이 종종 묻더라 애를 왜 찹쌀떡이라고 부르느냐고. 뭐 별건 아니고, 아기의 말랑말랑한 엉덩이가 꼭 찹쌀떡 같아서, 어느날인가부터 다인을 찹쌀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애칭도 다양한 변주형태가 있는데, 

찹쌀, 찰떡, 떡이, 챱샤리, 살떡이, 똑이 등등등. 

어느해의 명절엔가 사촌 언니 부부와 함께 가진 술자리에서 사촌 언니 부부가 논쟁을 하고 있더라. 다인의 별명이 찹쌀인지 찰떡인지를 두고. 나는 주로 찹쌀이라 부르고 남편은 주로 찰떡이라 부른다. 이랬건 저랬건 그걸 왜 둘이 싸우냐고. 멀쩡하게 옆에 앉아있는 날 두고. 착한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찹쌀떡과 찹쌀과 찰떡의 변주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다인이 만큼 특이한 애칭을 가진 애를 본 적이 없다. 참고로, 그 사촌 언니 부부의 두 딸은 똘이와 짱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둘째의 애칭은 다인이 지어준 셈이다.  

태어나긴 둘다 비슷하게 3kg 언저리에서 나왔는데(다인이 2.94 / 해인이 3.07) 다인은 작고 야윈 아이로 자란 반면(돌때 체중이 8.4였다. 애고고.) 해인은 백일까지 무섭게 체중이 늘었다. 태어난지 한달만에 5kg를 돌파했고, 언니의 돌때 몸무게인 8kg는 백일 언저리에 돌파했다. 어익후. 비만 아기가 될까 얼마나 걱정했게. 

다행히 5개월무렵부터는 그렇게 무섭게 체중이 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평균체중을 윗도는 통통한 아기로 자랐다. 똑같이 젖먹이고 똑같이 이유식 먹이는데 왜그렇게 다른지 원.  

하여간 어느날 해인의 기저귀를 갈고 있는데 다인이 옆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토실 토실 엉덩이, 올록 볼록 예쁜배~"로 시작하는 동요를 아시는지? 다인은 그 노래의 가락에 맞추어 이렇게 불렀다. 물론 첫 소절 무한반복이다. 

"토실 토실 밤토실
해인이는 밤토실
토실 토실 밤토실." 

그래서 자연스레 해인의 애칭은 "밤토실"이다. 도대체 토실 앞에 "밤"이 왜 붙었는가는 나도 알수없는 다인만의 사고 매커니즘이고, 아직까지는 설명할 능력이 안되는 것 같으니 알수없고, 나중에 설명할 능력이 될만큼 언어 능력이 자라면 자신이 동생에게 "밤토실"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걸 잊을테니 영영 알수가 없겠지만 어쨌든 해인은 "밤토실"이 되었다. 

이름의 변주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남편은 밤토실을 주로 걍 토실이라 부르고, 나는 종종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와 놀아줄때 챈트 비슷한 저 구절을 중얼중얼 부른다. 아, 그러고보니 다인의 별명과 관련된 챈트도 있다.  

"찹쌀떡 찹쌀떡 다인이 찹쌀떡 엄마 찹쌀떡 다인이 찹쌀떡~"  

이 가락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건지 나도모르는, 걍 어쩌다보니 입에 붙어버린 가락이다.  

이래서, 다인에게 가족의 이름을 물으면 이렇게 나온다. 

"아빠 이름 뭐야?" 
"서**" 
"엄마 이름은?"
"야옹이"
"네 이름은 뭐야?"
"다인 찹쌀떡"
"동생이름은 뭐야?"
"해인 밤토실." 

이 무슨 동방신기식 작명법이람. 

뭐. 그건 그렇고. 이제 대망의 남편.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름 뒤에 "씨"를 붙여 꼬박꼬박 "**씨"라고 불렀다.  

보통은 다들 "오빠"라고 하는 모양인데, 난 당시 모시고 있던 선생님이 연인간의 "오빠"라는 호칭에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가진 분이셨던데다(근친상간이라는 단어까지 들먹이시며) 우리 부부의 나이 차와 같은 나이차인 언니네 부부가 "##씨"라 부르고 있던 상황이라 아무 고민 없이 "**씨"라 불렀다. 그랬더니 세번째 만났을 때인가, 남편이 자긴 "**씨"라 불리는 걸 너무 싫어한다나. 

그래서 그럼 뭐라 불러주랴? 물었더니 수줍게 "오빠"라 불러달란다. 어익후. 단칼에 자르며 말했다.  

"울 엄마가 널 낳았니?" 라고. 

그리고 "**씨"와 "아저씨"라는 호칭중에 선택하랬더니 눈물을 머금고 "아저씨"를 택하더라. 그래서 한동안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결혼 준비 과정에서 웨딩 컨설턴트가 나를 "신부님", 그리고 남편을 "신랑님"이라고 부른 것을 계기로 "신랑님"이라고 호칭을 바꿔줬다.  

그리고 한동안이 지난 뒤, 남편 친구 부부(여긴 동갑)가 "여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걸 보고 자연스레 "여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저씨"도 "신랑님"도 "여보"도 딱히 애칭으로 보긴 힘들고.   

얼마전부터 남편은 나에게 "충무공"이라고 불리고 있다. 무려 충무공. 애칭 치곤 좀 대단하시다.  

남편은 장가를 잘 들었는데(믿어라!) 난 늘 남편을 세뇌시키고 있다. 나만한 마누라가 어디있니.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세번은 구했지. 그랬으니 이생에 나같은 마누라를 만났지. 당신이 잘되는 건 다아아아아아아 내 덕인줄 알라고.  

처음엔 비웃던 남편, 내가 하도 집요하고 줄기차게 주장하니 이젠 뭐, 걍 인정한다.  

그러다가 얼마전, 집을 사고 팔고하는 과정에서 말했다. 

당신은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세번은 구했나보다. 도대체 전생에 뭔 공을 그렇게 쌓았길래 나같은 마누라를 다 얻었니? 당신은 아마 전생에 이순신이었을 거야. 앞으로 당신을 충무공이라고 부르겠어. 서 충무공. 

 해서 남편의 애칭아닌 애칭(? 이 경우엔 호칭 또는 별칭에 가깝겠다.)은 충무공이 되었다. 

결국은 다, 내가 잘났단 말이다. ㅎㅎㅎ  

이 책,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읽다보니, 문득 생각이 나서 주저리 주저리 길게도 써봤다. 

뭐, 따지고 보면 우리 가족의 애칭은 이 책에 나오는 분류대로 하자면 "벵골식 애칭"에 가깝다. 

"친구와 가족처럼 친한 사람들이 집에서 또는 그 밖의 사적이고 편안한 순간에 부르는 이름"
p.41 

이니까. 

이 애칭 외에 나의 또 하나의 이름은 아시마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써온 이름.  

난 이 아시마라는 이름을 중국 고산부족의 설화 <아시마>에서 따왔는데, 이 책의 설명에 따르자면 벵골이름 아시마의 뜻은 '경계를 모르는, 가능성이 무한한 여자' 라는 뜻이란다. 중국 고산 부족의 설화에서 아시마 라는 이름은 향기로운 이름이었는데.  

사람이 이름을 규정하기도 하고, (언제 였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나는데 김영삼 정권때 호적 일제 정정 기간이 있어서 이 시기에 이름을 바꾸는 게 쉬웠다고, 그때 가장 많이 바꾼 이름이 전두환 노태우 라던가.) 이름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데(이게 바로 동양 고전 작명의 원리겠지.) 후자쪽을 따르자면. 나는 경계를 모르는 가능성이 무한한 여자가 되어야 할텐데. 

뭐, 호기심의 경계는 모르겠고(여러가지로 관심이 많다.) 가능성이 무한한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대한 욕심은 무한하다. 결국 내가 이렇게 된 건 아시마라는 내가 택한 나의 이름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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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그 책과 관련된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단순한 우연? 아니면, 그쪽으로 감각이 열려 있기 때문에? 이유야 어찌되었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특정한 책을 찾아 읽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목적없이 단순히 선택한 책에서 책을 읽을 당시에 생각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거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거나 우연히 그 책을 읽는 동안 그 책의 저자에 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입수하게 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책을 읽는 큰 재미중의 하나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다. 

난 원래 유시민을 좋아한다. 노짱의 주변 인물로서의 유시민도 좋아하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유시민 역시 좋아한다. 어느쪽을 더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로서는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유시민의 신간이 나왔다길래 무슨 책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주문부터 해 넣으면서, 그 무렵 나는,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면, 예전의 그 재미를 느끼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우혁의 퇴마록을 다시 읽기도 했고. 퇴마록 국내편과 세계편을 다 읽고 난 뒤에 잡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도 바로 그 이야기다. 비록 나는 10년 전의 책을 이야기 하고, 유시민은 30년 전의 책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게다가 나는 대중 소설을 다시 읽고 있고 유시민은 위대한 인류의 고전을 이야기 하지만. (아, 창피하다.) 

퇴마록을 읽고 난 내 생각도 그거였다. 이 책이 과연 10년 전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그 책이 맞는가, 내가 읽은 퇴마록은 어디로 갔는가. 유시민은 E.M.카의 말을 빌어, 한 역사가는 같은 책을 두번 쓸 수 없다, 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독자 역시 같은 책을 두번 읽을 수는 없나보다.  

책의 후반부를 읽고 있던 어제, MBC 일요 인터뷰의 대상은 유시민이었다. 독서를 잠깐 중단하고 TV를 켜서 유시민을 봤다. 강퍅하게 마른 뺨이며, 날카로운 눈매며, 이 사람은 나이를 참 특이하게 먹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헤어스타일! 너무 거슬렸다. 아놔... 난 왜 이런게 눈에 들어오는 것인가.  

거기에서 유시민은, 별로 걸러지지 않은 어구들을 사용하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당을 비판하고, 한나라당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라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얼굴이 그다지 나이를 먹지 않듯(그렇다고 유시민이 동안이라는 말은 아니고... 예전엔 노안이었다가 이제는 나이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도 어색하고... 흠. 여튼 이 문제는 이 글의 토픽이 아니니 잠시.) 말도 그다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여전히 뾰족뽀족 상대의 의표를 찌르고 피아를 분명하게 나누고, 어지간히 공격적으로 말을 한다. 

 헌데 책은,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다. 말과 글의 차이인 걸까, 정치인 유시민과 지식인 유시민의 차이인 걸까. 이 책에서도 유시민은 여전히 예리하고 뾰족하지만, 공격적인 뾰족함은 아니다. 난 어떤 위치의, 어떤 입장의 사람을 불문하고, 똘똘한 사람은 무작정 좋은데, 이 책은 유시민의 똘똘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딴소리지만, 내가 박근혜나 정몽준을 싫어하는 건, 그 얼굴의 맹~한 느낌때문이다. 사업에 능하고 처세에 능하고 이런걸 다 떠나 이 둘은, 참 맹해 보인다. 게다가 맹~한 느낌의 얼굴이 악해 보이는 경우는 잘 없는데-악한 바보를 본 적이 있나- 이 둘은 맹한데다 천하고 탐욕적이기까지 하다. 어익후.) 

 그리고 창피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20대에, 이런 책들을 읽었단 말이지... 맹자와, 사기와, 유한 계급론과, 진보와 빈곤을, 역사는 무엇인가를.  

소설에 편중되어 있는 나의 독서를 무척이나 반성하면서. 

 생각해보면, 세상을 보는 틀 자체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사회과학적인 지식을 기반에 두고, 세상을 보는 사람과, 소설이 세상을 보는 틀이 되는 사람. 어느쪽이 낫다 못하다를 떠나, 어쨌든, 뭐, 기초가 튼튼해야 응용이 나오는 거니까.  

지식인 유시민, 글 참 잘 쓴다. 진짜로 잘 쓴다. 꽤 어럽고 난해한 내용의 책들에 관한 리뷰 아닌 리뷰인데도 쉽게 술술 읽힌다. 정치인 유시민의 그 예리함과 뾰족함이 훨씬 잘 다듬어져 있어서 읽는 내내 편안했다. 

유시민이 말한다. 

"긴 세월이 지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 나는 과거의 나 자신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p.313) 

라고. 책을 읽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이런 우연한 마주침은 독서를 계속하게 하는 큰 힘중의 하나다. 며칠 전의 내가, 하고 있던 바로 그생각이니까. 그 책을 읽던 시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무척 선명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경험. 

 

그것이 비록, 유시민은 <종의 기원>등을 비롯한 인류의 고전이었고, 나는 고작 이우혁의 <퇴마록>이라 하더라도. 

유시민이라는 이름을 배제하고서라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에 관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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