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 장석남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놓고는 물끄
러미 그걸 치어다보면서 나는 그 그림의 제목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보곤 하는데 원래 제목인 「강변」도 좋지만은 「할머니」
라든가 「손주」라는 제목을 붙여보아도 가슴이 알알한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장
면이 떠오릅니다. 그가 술을 드시러 저녁 무렵 외출할 때에
는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어다 개어놓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빨래를 개는 손이 참 커다랐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장엄
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聖者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멋쟁이이긴 멋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
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쫓아갔
는가 아니면 이승에 아직 남아서 어느 그러한, 장엄한 손길
위에 다시 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른 빨래를 개며
들었을지 모르는 뻐꾹새 소리 같은 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
까, 내가 궁금한 일들은 그러한 궁금한 일들입니다. 그가 가
지고 갔을 가난이며 그리움 같은 것은 다 무엇이 되어 오는
지…… 저녁이 되어 오는지…… 가을이 되어 오는지……
궁금한 일들은 다 슬픈 일들입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아이들의 이미지를 그린다.' 화가 박수근이 한 말이다. - 김용택의 코멘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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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 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 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올해 3월, 남편과 싸웠을 때 다음 까페에서 보고 빠지게 된 시.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그런데 그 마음 다스리는 것이 지금까지 왔다.. 이제야 좀 정리가 된 듯. 휴~
도종환 시인 얘기하다 보니 다시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이 추천해 주고 싶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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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왠지 파블로 네루다의 '산책'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하는 시. '산책'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이다. '걷는다'는 행위와 어우러진 이미지들이 너무 멋진 시라서. 이 시는 이미지 면에서는 '산책'만 못하지만, '부끄러움'이라는 정서 면에서는 나와 더욱 맞닿아 있는 시.. 어느 누가 이렇게 진솔하고 순수하게 사는 것의 구차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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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꼭 샤갈의 이런 그림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정말 좋아해서 거의 외다시피 한 백석의 시.

오늘 안도현 시인 강연회 갔다가 이 시 얘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기억이 났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너무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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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크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공부할 때 배워서 참 좋아하던 시. 개인적으로 백석님은 우리 나라에서 젤 위대한 시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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