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만화 봤을 땐, 어 그림이 이게 뭐야 혹은 또 요상한 스토리군 했다. 그러다가 여기저기서 이 만화에 대한 찬사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아는 게 약이라는 신념으로 읽기 시작. 지금은? 이성과 감성이 오랜만에 함께 흥분한 만화라고 지인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

등가교환은 연금술에서 필연의 법칙이다. 무언가를 원하면 같은 값으로 대가를 치뤄야한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마가 죽었다. 어린 두 형제는 연금술사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아기적부터 연금술을 놀이삼아 성장했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그 매혹적인 작업에 매료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은 죽은 엄마를 다시 만드는 것.

연금술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인체의 연성을 시도한 에드와 알 형제는 결국 참혹한 대가를 치루는데, 알의 육신과 에드의 다리 하나를 잃는 것. 그리고 알의 혼을 연성하는 대가로 다시 팔 하나를 내어준 것. 거구의  강철 갑옷에 갇힌 알의 혼을 부여안고 에드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한다. 널, 반드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줄게.

이야기는 '현자의 돌'이라고 알려진 연금술의 최후의 비법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두 형제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데,  시공간이 불분명한 시대는 내란으로 인해 혼란 속에 있고 국가에서 공인하는 연금술사의 자격증을 가진 '군부의 개'는 국가의 부름에 언제 어느 때라도 달려가 전투에 임해야 한다.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 연금술사 자격증을 취득한 에드는 그 특권을 이용해서 자신이 실패한 인체 연성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이 만화의 매력은 그 조악하고 거칠은 그림에도 불구하고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 엄마는 두 형제를 위해 고생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어린 두 형제는 연금술로 엄마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위대한 스승을 찾아가 갖은 고난을 겪으며 연금술사의 수련에 정진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산산히 부서지고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겼다. 이야기 안에는 상당히 유쾌하고 재밌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본질은 진지하고 어둡다. 그래서 읽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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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것 같네요. 저도 한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글 / 위미경(만화칼럼니스트)

"난 서른이 되기 전에 인생의 숙제 둘 중에 하난 해결할 줄 알았어. 결혼하거나 일에 성공하거나 근데 이게 뭐냐고, 서른이 코앞인데 당장 이달 카드값은 어떻게 할 지 그 걱정뿐이야."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싱글즈'를 보며 이 땅의 20대 후반, 30대 초반 미혼여성들은 거의 자신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았으리라. 직장에서의 좌천, 오랜 연인과의 이별, 결혼적령기를 이미 벗어난 나이에서 생기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의 지속에 대한 불안.... 나난의 옥탑방이나 새로운 연인의 설정은 여성의 환상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조금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그 속에 담긴 고민은 스물여덟의 나에게 공감과 위로, 약간은 안이한 안심과 희망을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만화 '금지된 사랑'에서 지이가 읊조린 대사가.

"서른이 넘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쓸데없이 격정적이던 십대와 방향을 갈피 못잡는 이십대를 보내고 서른이 넘으면, 서른이 넘으면... 조금은 평화로울까?"

'싱글즈'에 앞서 1999년에 발표된 만화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 지이는 직장을 잃고, 5년간 사귄 애인에게서 이별 통지를 받는다. 작가 한혜연은 '그치는 것을 금한다'라고 해석하며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을 제목에서 얘기하는데, 만화는 박동을 멈추는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사랑을 잃은 그녀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 조용히 흘러가는 만화는 작가의 현실적 감각이 살아있는 연출(그녀의 만화는 머리를 묶는 손가락 놀림의 묘사에서도 그 진가를 찾을 수 있다)을 따라 십대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교차하고, 주변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에두르다가 강과 강이 만나듯 끊임없이 유입되는 새로운 사랑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다.      그 사랑은 스물일곱의 지이에게는 부러운 대상이었던 삼십 대의 태경.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태경을 보며 서른의 평화를 궁금해 하는 지이는 나와 별 다르지 않았다.  

위의 질문을 십대 때부터 읊조리던 나는 왜 그리 조급한 애늙이였을까. 십대의 격정 따위가 실질적인 소용을 낳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십대가 되어봤자 방황만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나이기에 스무 살의 성인식은 전쟁 전의 공포와 집단 환각이 뒤엉킨 축제, 전야제였다. 어디선가 책임과 의무가 슬금슬금 걸어 들어와 덮칠 것 같은 그 날 밤, 문을 꼭 잠그고 난생처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쓰러진 나는 서른을 기다리는 데 스물의 대부분을 바친 것 같다.

사랑을 처음 잃었을 때도, 그리고 불신감에 두 번째 사랑을 포기할 때도, 연애와도 같은 직장 생활을 아슬아슬 이어나갈 때도 서른이 넘으면 모든 것은 나름의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지이가 그랬듯이 나 역시 이제 알겠다. 자신의 힘겨운 상황을 고백하며 눈물짓는 태경을 안고 위로하는 그녀의 말처럼, 삼십대 역시 힘들게 사랑하고, 힘겹게 살아가긴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신도 상처입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러면서도 삭막하게 메말라가지 않으려 애쓰면서 산다는 것을 말이다. 삶은 그렇게 사랑과 이별,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이어져가는 것이다.

'금지된 사랑'은 사랑을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아! 4년간 이 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련하게도 이제야 알았다. 왜 작가가 마지막에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틀어줬는가. 다시 또 사랑을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왜 던지는가. 사랑이 그쳤던 시점에서 시작하여, 다시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지이, 그 사랑을 떠나보낸 지이와 진정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던 친구 희성에게 이 음악은 쓸쓸함이 아니라 희망으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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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커트된 머리라 조금만 길어도 성가지고 신경이 쓰여, 머리 자를 때가 됐느데, 하면서 전전긍긍한다. 미용실에 가서 잡지를 읽으며 느긋하게 기다릴 인내심도, 그렇다고 한가하게 수다를 떨 여력이 늘 딸리는지라, 이맘  때, 목덜미를 덮는 머리카락이 거슬리기 시작하면 괜히 조바심을 친다. 적당히 바쁜 때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피루다 결국에 목적하던 바를 이루면 그만이지만 조금, 아주 조금 한가한 시기가 되면 다른 날보다 더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리 길이 살펴보고, 쇼윈도를 지나치다가도 내 머리가 어떤가 들여다보고,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 자를 때 됐지?'하고 물어보고, 눈에 스치는 미용실이란 미용실은 한 번씩 다 들여다 보는 웃기는 기행이 이어진다.

'뵈뵈'라는 아주 기이한 이름의 미용실이 오가는 길 옆 이층에 있는데, 퇴근 길에 쳐들어가듯 들렀다. 늘 다니던 미용실이 확장 이전을 하는 바람에 새 미용실을 어디로 결정할지 몰라 방황하던 차였다. 짧게 쳐 주세요. 다짜고짜 하는 내 말에 웃는 예쁜 언니, 지금도 충분히 짧다고 난색을 표했다. 전에는 더 짧았다고 전체적으로 짧게라고 주문하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익었네요'라고 한다. 정수리가 빨갛게 익었다고 온종일 햇볕에 노출시켰냐고. 어, 진짜로 익었어요? 나는 전혀 몰랐다. 어쩐지 정수리 부근이 따끔거리고 정신이 멍한 상태가 계속된다 싶었는데 원인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에 시골에 가서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퇴약볕에서 나가 밭일을 한 탓이다. 가벼운 선캡을 썼으니 머리 한 가운데가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거기까지 자외선차단제를 바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요즘 시골은 논일, 밭일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틈을 내어 가도 주말에 비라도 내리면 헛탕을 치기 일쑤고, 다행히 이번 주에는 날이 좋아 몸이 부서져라 봉사를 했다. 몸살난다고 적당히 하라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죽을 때 죽더라도 일하다 죽겠다고 하면서 했다. 내가 어쩌다 가서하는 그 일이 엄마에게는 일상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적당히라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음이다. 그 댓가를 치루듯, 지금 내 몸은 삐그덕 삐그덕 요상한 신호음을 보내면서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리고 있다. 깔아져 잠을 자고, 스트레칭으로 굳은 근육을 풀어주기를 이틀째인 지금은 그래도 살만하다. 월요일 아침에는 죽다 살아났다.

그런데 볕에 탄 두피는 무엇으로 치료를 해야할 지 감이 안 잡힌다. 얼음찜질이라도 해야하나. 이로써 얻은 교훈 하나, 일하러 갈 때엔 꼭 벙거지 모자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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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이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썰고 지나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새빨간 피가 철철. 하나도 아니고 손가락이 두 개다. 무슨 액땜을 하려는지 걸핏하면 칼에 찔리고 베이고 난리굿인 요즘, 애도 아니고 정신을 어디다 놓고 있는지 오른손 엄지의 상처가 다 나아간다 싶더니 덜컥 왼손 엄지의 살점이 베어졌다. 너덜거리는 살점 사이로 뚝뚝 흐르는 붉은 피를 보니 오금이 다 저린다. 흐르는 물에 피를 닦으랴, 지혈하랴, 화장지를 찾고 반창고를 찾아 허둥지둥 하는 동안에 여기저기 핏방울이 날린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피가 나는 상황에는 도무지 침착한 대처가 불가하다. 고작 손가락에서 나는 피 정도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흐르는 그 흥건한 피바다는 도무지 상상도 못하겠다.

왼손을 심장보다 위로 치켜들고 욱신거리는 아픔을 참고 있자니 생각없이 해치웠던 소소한 일거리가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아직 세수도 못했는데, 양말도 빨아야하는데, 설겆이는 어쩌지? 내일 당장 머리는 한손으로 감아야 하나. 졸지에 바보가 되어버린 왼손의 쓸모가 이렇게 중요했던가. 놀란 가슴이 아직도 뛰고있다.

사건의 발단은 안 하던 짓을 하면서다. 평소 가위로 대충 잘라 버리던 파를 무슨 바람이 불어 칼을 꺼냈던가. 칼질이 서툴러 그 흔한 채썰기도 못하고 포기 김치도 가위로 자르는 위인이다. 요령도 없고 더구나 성의도 없이 음식을 만드는 것에 대한 따끔한 벌인지도. 아마 당분간은 칼 근처에는 가기도 싫겠다. 살갗을 파고드는 그 섬뜩한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날카로운 날만 보아도 멈칫하겠다.

요리는 어느정도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 우리집 여자들은 하나같이 부엌일을 질색하고 큰일 치루는 것을 겁낸다. 엄마부터가 그렇고 결혼한 동생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SF영화처럼 알약 하나로 한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미래를 꿈꿀까. 하루에 세끼를 챙겨 먹기가 벅차 혼자 지내게 되면서 하루 두끼의 식사법을 고수하는 것도 절반은 귀찮아서다. 불쌍한 시선으로 반창고에 칭칭 감긴 손가락을 바라보자니 그나마 있던 식욕이 싹 달아났다. 그러나 영양부족에 의한 무슨무슨 병 따위로 병원에 가는 일은 죽어도 싫으니 뭐든 먹긴 먹어야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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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5-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손의 상처는 많이 아물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끔 종이에 베곤 하는데 그 느낌이 너무 싫어요.
요리에 재능이 필요하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아요. 재능은 없지만 가끔 요리에 대한 열정이 생기기는 해요. 요리책도 최근에 한 권 샀는데 실전은 못 해보았어요.

겨울 2004-05-17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감을 땐 고무장갑을 끼지만 통증이 없으니 살만해요. 그리고 간혹 생기는 요리에 대한 열정은, 완성작을 보기도 전에 식는다는 게 문제라죠. 상상으로 시작해서 상상으로 끝나버리기도 ^^
 

어릴적 기억에 있는 호밀밭은 내 키의 두 배는 넘는 푸른 줄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풍경이다. 수확철이 되면 동생들과 함께 숨박꼭질도 하고 부모님이 베어 놓은 호밀을 나르고 쌓는 작업을 했다. 벼나 보리와는 달리 쑥쑥 멀대처럼 자라는 호밀의 운명은 그 단단한 열매가 아닌 연한 잎과 줄기를 베어 소에게 먹인다는 사실에 '쓸모없는 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그리고 멋모르고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의 그 호밀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공터에 사철 각양각색의 채소를 재배하는 누군가가 올 해는 보리를 심었다. 기억에 가물거리는 보리의 형태와 이것이 같은 것인가 긴가민가해서 동생을 시켜 확인한 결과 그것은 보리가 확실했다. 짙은 초록색의 무릎정도 되는 키만큼 자란 보리를 보고 신기해 하다니,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벼와는 달리 익어서도 뾰족한 수염한 하늘로 세우는 보리를 상상하고(그런가?) 가슴이 뛰다니, 나도 어지간히 한심한 인간이 되었구나. 누군지 보리를 키우는 그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며 제발 무탈하게 자라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기억에서 가물거리는 보리 대신에 지금 시골에서는 호밀 수확이 한창이다. 네 마지기 남짓한 들판에 무성히 자란 호밀밭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계실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아프다. 어버이날을 기해서 동생과 함께 가서 일을 돕겠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평생을 땅을 파고 사신 부모님의 고달픔을 이런저런 이유로 몰라라했다. 값비싼 사료에만 의존해서 가축을 키우는 일이 점점 더 버겁다고 한다. 축협에서 외상으로 사는 사료는 일년 정산을 하는데 농사를 짓는 소득과 맞먹는다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그렇다고 평생의 업에서 손을 놓는 것도 능사가 아니고, 손해을 감수하면서도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심고 가꾸는 고된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자식들 중 아무도 선뜻 그것을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고 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비극이다.

도심에 있지만 시시때때로 마음은 기억 너머 고향으로 달려가곤 한다. 그리움, 추억, 회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고 몇 년을 발걸음을 뚝 끊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돌아가는 곳은 늘 거기였다. 부정도, 자르지도 못하는 질기고 질긴 뿌리. 주말, 하룻동안은 따가운 햇살을 견디며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할 생각이다. 내 기억의 호밀과 실제의 호밀이 똑같은지도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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