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이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썰고 지나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새빨간 피가 철철. 하나도 아니고 손가락이 두 개다. 무슨 액땜을 하려는지 걸핏하면 칼에 찔리고 베이고 난리굿인 요즘, 애도 아니고 정신을 어디다 놓고 있는지 오른손 엄지의 상처가 다 나아간다 싶더니 덜컥 왼손 엄지의 살점이 베어졌다. 너덜거리는 살점 사이로 뚝뚝 흐르는 붉은 피를 보니 오금이 다 저린다. 흐르는 물에 피를 닦으랴, 지혈하랴, 화장지를 찾고 반창고를 찾아 허둥지둥 하는 동안에 여기저기 핏방울이 날린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피가 나는 상황에는 도무지 침착한 대처가 불가하다. 고작 손가락에서 나는 피 정도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흐르는 그 흥건한 피바다는 도무지 상상도 못하겠다.
왼손을 심장보다 위로 치켜들고 욱신거리는 아픔을 참고 있자니 생각없이 해치웠던 소소한 일거리가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아직 세수도 못했는데, 양말도 빨아야하는데, 설겆이는 어쩌지? 내일 당장 머리는 한손으로 감아야 하나. 졸지에 바보가 되어버린 왼손의 쓸모가 이렇게 중요했던가. 놀란 가슴이 아직도 뛰고있다.
사건의 발단은 안 하던 짓을 하면서다. 평소 가위로 대충 잘라 버리던 파를 무슨 바람이 불어 칼을 꺼냈던가. 칼질이 서툴러 그 흔한 채썰기도 못하고 포기 김치도 가위로 자르는 위인이다. 요령도 없고 더구나 성의도 없이 음식을 만드는 것에 대한 따끔한 벌인지도. 아마 당분간은 칼 근처에는 가기도 싫겠다. 살갗을 파고드는 그 섬뜩한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날카로운 날만 보아도 멈칫하겠다.
요리는 어느정도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 우리집 여자들은 하나같이 부엌일을 질색하고 큰일 치루는 것을 겁낸다. 엄마부터가 그렇고 결혼한 동생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SF영화처럼 알약 하나로 한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미래를 꿈꿀까. 하루에 세끼를 챙겨 먹기가 벅차 혼자 지내게 되면서 하루 두끼의 식사법을 고수하는 것도 절반은 귀찮아서다. 불쌍한 시선으로 반창고에 칭칭 감긴 손가락을 바라보자니 그나마 있던 식욕이 싹 달아났다. 그러나 영양부족에 의한 무슨무슨 병 따위로 병원에 가는 일은 죽어도 싫으니 뭐든 먹긴 먹어야겠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