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책들이 이사를 왔다. 일터에 나가있는 동안에 말끔히 정리를 마친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의 책장을 마주하니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다. 애지중지 아끼고 보살펴온 저 책의 주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하지만 새 식구를 향한 나의 인사는 정겹다. 안녕, 잘 지내자.

더러는 내가 가진 책들도 있고 생소한 제목의 책도 보이고, 걸레를 들고 훔치고 문지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구경에 몰두하다가 저녁 먹을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부랴부랴 미뤄둔 설걷이며 걸레를 빨아널었다. 간밤에 내린 소나기로 어질러진 마당도 치워야 하는데 왠 여유인가. 감잎이며 감꼭지가 우수수 흩뿌려진 위에 붉게 익은 보리똥 열매도 제 몫을 한다고 너저분하다. 올 해는 진딧물약을 치질 않아서 열매의 크기가 전 년의 반도 못미친다. 덜생긴 녀석들을 보니 일일이 따줄 맘도 안 들고 해서 방치했더니 아침 저녁으로 시멘트 바닥이 수난을 당한다. 뻘건 즙이 으깨진 모양 그대로 말라 비틀어진 것을 빗자루로 쓸어담는 비애라니 대책이 필요하다.

오늘 책과 장을 들여와 정리까지 손수 하신 분이 이사를 간다. 사업의 실패로 인한 이사이기에 마음은 그지없이 무거운데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가져가신다지만 손수 짜맞춘 책장을 남의 집에 들이고 가야하는 그 분의 마음이 애닯다. 처음엔 아무 창고든 박스에 넣어 보관할 계획이었는데 우리집에 공간이 있으니 들이자고 제안했고 결국 내 방의 책들 맞은편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여분의 공간에 마침 중고로 사서 바리바리 챙겨온 만화책 '백귀야행'을 눈에 띄게 진열하니 그 자리가 명당이다.  책에도 인연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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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2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이사온 날,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 알 것 같아요. 님이 책에게 하는 인사, 정겹게 들리네요. 어떨 때는 사람보다 책이 더 좋은 친구가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책에도 인연이 있다는 말, 맞아요. 책도 주인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들고, 책꽂이에 꽂을 때도 자기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벽 다섯시는 내게 꿈같은 시간이다. 밤늦도록 잠이 없어 고민은 하되 아침의 달콤한 늦잠의 유혹은 도무지 뿌리치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학교생활도 직장생활도 늘 괴롭기만 했었다. 이런 내가 내 의지로 새벽잠을 떨구고 벌떡 일어나게 된 계기는 산에 다니면서다. 아니면 서른 이후 호르몬의 변화가 새벽잠의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게 한 것인가.

일요일에 마늘을 캐러 시골에 다녀왔다. 한낮의 불볕 더위를 피해 기상은 새벽 다섯시였고 동생과 나는 덜 깬 잠을 쫓으며 총총 밭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이미 부모님은 밭에서 일을 시작하셨을 터이라 오랜만에 일을 도우러 와서 지각을 하는 면구함은 피하고 싶었다. 쪼그리고 앉아 마늘을 캐기 시작해서 허리와 다리에서 쥐가 나도록 손발을 놀렸지만, 육십이 훌쩍 넘은 엄마의 속도를 따라집기란 하늘의 별따기. 밭일, 논일에 이골이 난 엄마와의 비교가 애초에 가당찮지만 마음으로는 겅중겅중 앞으로 나아가는데 몸은 점점 땅으로 가라앉았다. 매번 절감하지만 농사 일은 정말 힘겹다.

오전 8시, 새참은 컵라면과 커피. 역시 배가 부르니 기운이 솟구쳤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캔 마늘을 묶어서 경운기에 싣고 집으로 출발. 

어느새 계절은 여름이다.  뽕나무에는 검붉은 오디가 탐스럽게 열렸고 보리똥나무에도 새빨간 열매가 촘촘히 꽃인 듯 피어 시선을 붙든다. 밤톨만한 복숭아가 어른 주먹보다 커질 즈음에 다시 와서 싱싱한 자두며 토마토랑 양껏 먹어야겠다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시골 인심은 예전같지 않다지만 어린시절 뛰어놀던 장소들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축축히 젖어든다.

마늘은 캐는 일보다 그 후의 마무리가 더 힘들다. 마른 잎들을 떼내고 크기별로 반듯하게 정리하여 적당한 크기로 묶은 다음에 통풍이 잘드는 곳에 매달아야 하는데, 처마 밑 그늘진 곳에 철퍼덕 주저앉아 마른 먼지를 마시자니 재치기에 콧물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엄살과 불평을 늘어놓을 군번은 더구나 아니니 미련하더라도 꾹 참아가며 해야하는 게 농사 일이다.

오후 다섯시, 거의 마무리를 짓고 샤워를 하니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다. 일을 돕는다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현이와 원이도 씻기고 빵과 음료수를 사다 먹으니 낙원이 여기다. 이제 대전으로 돌아가 끙끙 앓는 일만 남았나? 

그리하여 월요일과 화요일까지 내내 근육통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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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6-17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농촌 풍경이 금방 손에 잡힐 듯 합니다. 피로는 회복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앗,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지는 않으시겠죠?^^

겨울 2004-06-17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도 익숙한 이름인지라 놀라는 대신 반갑네요^^. 다른 분들의 서재에서 종종 뵈었죠.
 

[소박함이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스스로 선을 긋는 능력이다.]

[소비는 인격의 표현이다.]

[미래에는 대량생산품의 공정한 분배가 아닌 다른 것들이 중요해진다. 빠른 자동차, 금제 샴페인 박스, 향수 따위는 드물거나 희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갈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대신 삶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것들, 이를테면 한적함, 깨끗한 물, 넉넉한 공간 따위가 중요해진다. 미래에는 산업생산품의 풍요가 아니라, 그런 걸 만들어내느라고 우리가 파괴해버린 것들, 즉 자연. 시간. 공간. 여유. 건강. 환경 등이 중요해진다.]

[돈 없는 삶을 더더욱 힘겹게 만드는 것은 남들과 비교할 때 찾아드는 인격적인 낭패감이다. 사회적인 동정은 있을지언정, 가장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경제와 정치에 그 책임이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의 책임을 가난한 사람들 자신에게로 돌린다. 가난이 자신의 탓인한, 그것은 터부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육식을 하면서 제3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가축의 사료는 대부분 제3세계에서 수입해온다. 따라서 제3세계는 농사를 짓기 위해 우리보다 더 넓은 땅이 필요하다. 튀니지의 사헬 지역에 기근이 덮쳤을 때 국제원조기구는 비상식량을 들여보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이 선진국의 가축사료로 이 굶주림의 나라를 빠져나갔다.]

[산업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극단적 시도, 과열된 소비욕은 여러 면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한계를 휠씬 넘어서버렸다. 우리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한계를 넘어설 참에 있다. 그 결과는 재난이다.]

[광우병은 순전히 식물성을 섭취해야 하는 가축에게 고농도의 동물성 사료를 먹인 까닭에 생겨난 질병이다. 이것은 속도에 대한 광기어린 신념이 축산업에 불러일으킨 재난이다.]

[행복은 더 많이 갖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덜 갖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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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0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박한 삶이란, 그리고 사회적 연대감이란, 행동하는 사유를 하게 하는 책인 것 같네요. 그저 님의 페이퍼에서 오는 느낌이요.^^ '굶주리는 세계'도 가난과 기아의 범세계적인 연대책임에 대한 생각을 주는 책이겠군요. 다음에 읽어봐야겠어요. 둘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열두시를 막 넘기고 있네요.
 

화단에 심어놓은 고추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냈다. 새끼손가락만한 푸른 고추가 두어 개씩 열린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같달까. 저녁마다 마른 땅에 물을 듬뿍 주어도 다음날 그 맘때가 되면 잎이 시들시들 해서 비소식을 고대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어찌나 반가운지 '비다!'라고 소리까지 쳤다.

전 날 저녁에는 시골에 계신 엄마가 전화를 했다. 다음 주 즈음에 마늘을 수확하는데 다들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동생들과 상의를 해서 가겠노라 했다. 그러자면 일단은 비가 내려야 하는데 마른 땅을 흠뻑 적셔줄 비를 고대했겄만 내리는 모양새가 어쩐지 시원찮다. 수확기가 된 그 마늘을 심는다고 가서 중노동을 한 것이 어끄제 같은데 벌써 알이 토실토실 여물었다니.. 땅이란 정말 정직하다. 심으면 심은대로 나고 가꾸면 가꾼대로 알찬 열매로 보답을 한다. 얼마전에 돌밭을 일구어 심어놓은 옥수수도 파랗게 싹이 돋았다고 한다.

이번에 집에 내려가면 옥수수와 콩을 얻어다 화단 한켠에 심어볼 생각이다. 장기간 방치했던 땅이라 척박한 곳에서도 생장이 가능한 작물이 적합하다. 고추가 열렸다고는 하나 크는 속도가 실한 토양에서 자란 고추와는 비교도 안된다. 할머니가 화분에 키우는 고추도 짙은 초록색을 띄우며 튼실하게 컸는데 땅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비좁은 화단에 심은 고추는 크기도 제각각이고 햇볕 강한 낮이면 잎을 떨구고 기절하기 일쑤니 마음이 영 불편하다. 해마다 땅을 일궈 씨를 심고 가꾸는 농부의 마음은 위대하고 위대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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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 시티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며 씌어진 일기다. 지난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내 일기를 읽는 머쓱함에 비해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은 지극히 비밀스럽고 설렌다. 더구나 이렇게 편견없이 소탈한 작가의 색이 분명한 글을 만나기란 쉽지 않으므로, 최승자가 누구지? 라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탐색은 그녀의 시집이며 에세이 번역서등을 찾기에 이르렀다.

여자로서 괜찮은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괜찮은 남자를 발견하는 것보다 가치가 크다. 이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지 않으면 결코 모를 경험과 사유를 공유했다는 가치만으로 책을 통해 만난 그녀는 근사했다. 어지간하지 않고는 두어 번을 찾아 읽기가 드문 책 중에서도 손이 닿는 자리에 놓고 보는 책이란 얼마나 특별한지. 유독 여성작가에게서 동지애를 느끼는 것은 나 뿐일까?

이 책의 하단에는 전체적으로 누런 커피 얼룩이 번져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선뜻 빌려주기 꺼렸던 탓인지, 영구적으로 내 소유가 되었다. 책에 관련한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너무 괜찮다 싶으면 반강제적으로 지인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것인데, 그러다보면 그 책을 다시 돌려받기가 요원할 때가 많다. 다시 갖고 싶으면 새로 사던가 그게 귀찮으면 영영 무소유다. 그러지말자고 매번 결심하지만 혼자보기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쩌랴.

아이오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들....

'이곳 아이오와 시티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한 대학을 졸업한 뒤에 또 다른 대학에 들어가 또다른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무지 많다는 거다. 한국에서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에 일류기업체나 아니면 대학이거나, 아무튼 사회적인 신분과 안정된 생활기반을 얻기 위해 어떤 안정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곳 X세대의 용어들이다. slacker는 본래 회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병역기피자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X세대적 의미로는,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흔히 서너 가지의 중요한 창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며 -대개는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는- 그런 완정되지 않을 창작을 추구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terminal wanderlust는 결코 한 군데 머무는 법 없이 이 도시 저 도시,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떠돌고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이 Mcjob(임금도 낮고 내노랄 것도 없고 안정성도 없고 품위도 없고 미래도 없는 서비스 분야의 직업, 이를테면 피자 배달부 같은 임시 직업)에서 저 맥잡으로 전전하는 것을 뜻하고 여기엔 제삼세계를 방문하는 것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한국에 가서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터미널 원더러스트에 들어가는 거다.

mid twenties breakdown은 20대 중반에 겪는 정신적 붕괴를 말하는데, 그것은 학교를 벗어나서 혹은 조직화된 환경을 벗어나면 제 구실을 못하는 무능력과 이 세상에서 자신은 원래부터 외롭다는 자각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판단마비는 문자 그대로 무제한적인 선택권이 주어질 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판단마비 증세'

개인적으로는 슬랙커와 터미널 원더러스트를 지향한다. 최근 눈에 많이 띄는 외국인의 다수는 저런 종족들인가.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거만한 외국인들을 보면 화가 난다. 생존과는 무관하게 제3세계를 유랑하는 그들의 색깔있는 눈이 거북하다. 그들의 옆에서 유창한 영어를 쓰는 한국인도 또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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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04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로서 괜찮은 여자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 맞아요. 최승자씨의 시는 전에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모르는 책이네요. 남의 일기 읽는 것이 소설읽기보다 재미있을 때도 있어요. 이 책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에 넣어야겠어요.

겨울 2004-06-0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저는 이 책이 절판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검색해 보니 여전히 건재하네요. 깨끗하고 예쁜 책으로 다시 사고 싶어라.....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 중의 하납니다. 필히 보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