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책들이 이사를 왔다. 일터에 나가있는 동안에 말끔히 정리를 마친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의 책장을 마주하니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다. 애지중지 아끼고 보살펴온 저 책의 주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하지만 새 식구를 향한 나의 인사는 정겹다. 안녕, 잘 지내자.
더러는 내가 가진 책들도 있고 생소한 제목의 책도 보이고, 걸레를 들고 훔치고 문지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구경에 몰두하다가 저녁 먹을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부랴부랴 미뤄둔 설걷이며 걸레를 빨아널었다. 간밤에 내린 소나기로 어질러진 마당도 치워야 하는데 왠 여유인가. 감잎이며 감꼭지가 우수수 흩뿌려진 위에 붉게 익은 보리똥 열매도 제 몫을 한다고 너저분하다. 올 해는 진딧물약을 치질 않아서 열매의 크기가 전 년의 반도 못미친다. 덜생긴 녀석들을 보니 일일이 따줄 맘도 안 들고 해서 방치했더니 아침 저녁으로 시멘트 바닥이 수난을 당한다. 뻘건 즙이 으깨진 모양 그대로 말라 비틀어진 것을 빗자루로 쓸어담는 비애라니 대책이 필요하다.
오늘 책과 장을 들여와 정리까지 손수 하신 분이 이사를 간다. 사업의 실패로 인한 이사이기에 마음은 그지없이 무거운데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가져가신다지만 손수 짜맞춘 책장을 남의 집에 들이고 가야하는 그 분의 마음이 애닯다. 처음엔 아무 창고든 박스에 넣어 보관할 계획이었는데 우리집에 공간이 있으니 들이자고 제안했고 결국 내 방의 책들 맞은편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여분의 공간에 마침 중고로 사서 바리바리 챙겨온 만화책 '백귀야행'을 눈에 띄게 진열하니 그 자리가 명당이다. 책에도 인연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