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책장에서 건져올린 책 한 권으로 무더위를 난다.

등줄기를 따라 땀이 배는 여름 한 낮에 달달달 돌아가는 선풍기를 옆구리에 꿰차고 앉아서 전우익 할아버지의 나무 이야기를 읽는다. 사는 일이 별다르냐고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10년, 20년 자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면 된다고 조곤조곤 타이르고 어루만져 주시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촌사람이라 나무 얘기, 채소 얘기, 곡식 얘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하다. 심어만 놓으면 저절로 자라는 줄 알다가 아침 저녁으로 눈도장, 손도장, 발도장을 찍어주는 정성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안 탓이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할머니는 요즘도 아침과 저녁으로 옥수수밭에 다니신다고,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에도 기어이 갔다오시더라고, 엄마는 불안해 하신다. 작년인가 논두렁에서 굴러 인대가 늘어나는 사고를 당하시고도 벌써 잊으셨나. 오늘도 종일 할머니의 전화만 대여섯 통을 받았다. 한가지 생각에 골몰하시면 해결이 날 때까지는 멈추지를 않는다.

어쩐지 이 세상과는 다른 별세계의 주인같으신 할아버지.. 오래오래 만수무강 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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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세계의 주인 같으신 할아버지. 저도 이 분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어요. 책은 읽지 않았지만요. 무더위를 날 수 있는 책 한 권 저도 기억할래요. 자연을 닮은 사람들은 무더위도 잊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님도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5학년인 현이가 이제는 슬금슬금 책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 당장은 아니라도 일 년이나 이 년 후 정도에는 읽을 법한 책들을 골라서 가져가라하니 입이 함지박이다.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누렇게 색이 바랬고 곰팡이 냄새도 풍기지만 적어도 한 번은 읽어주라 당부를 한다.

흥미롭게 읽히는 톰 클랜시, 클라이브 커슬러, 딘 R 쿤츠, 존 그리샴을 일차로 골라냈다. 보통은 한 번 이상을 읽었던 책이고 남자아이가 좋아할 법하다. 그 다음이 간디, 헬렌 켈러 , 링컨, 처어칠, 러셀 등 언젠가 한번은 호기심에 들춰볼 전기류. 마지막으로 재미있게 풀어 쓴 세계사, 한국사, 일본, 중국에 관한 잡다한 책들. 그리고 세계명작 중에서는 스릴과 모험 위주로. 이빨 빠진 배가본드도 몇 권 있고, 역시 이빨 빠진 고스트 바둑왕도 있다. 만화라면 무조건 좋아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도 아낌없이 줄까. 아시모프의 로봇시리즈도 곁들이고... 베르베르의 '개미'와 '타나토 노트'..     

겹겹으로 쌓아놓고 대책없이 바라보던 책장의 빈자리가 그다지 쓸쓸하지 않은 것은 썩 좋은 주인을 찾아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 그렇게 빠진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즐거운 내 몫이다. 책 구경도 희귀했던 시절에 장에 가셨던 아빠가 사오신 한아름의 헌책을 끌어안고 좋아라했던 기억이 있다. 눈물나게 행복했다. 책을 사는 사치를 처음 누린 것이 아마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였지 싶다. 아니다. 시골에는 오일장이 섰는데, 맨 바닥에 낡디 낡은 잡다한 책들을 늘어놓고 파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거기서 '벤허'라는 헌 책을 500원 주고 처음 샀었다. 즐거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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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0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맨 처음 헌책방에 아버지따라 갔다가 산 책이 펄벅의 대지였답니다. 삼중당문고로요...

잉크냄새 2004-07-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일장 시골장터에서 좌판 벌려놓고 팔던 책들이 떠오르네요. 그때는 돈이 없어 쉽게 집어들지 못했는데... 물만두님의 삼중당 문고 책들도 떠오르고요. 좋은 추억이네요.^^

겨울 2004-07-0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성격의 할아버지 댁 사랑방에는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 뽀대나게 모셔져있었는데, 초등학교 방학만 시작하면 한 권 씩 빌려다가 읽고 돌려드렸다. 무지 험악한 얼굴로 잘 보고 갖다 놔라 하시던 할아버지가 없을 때를 틈 타서 꺼내오는 스릴이 마냥 즐거웠던 건 아니다. 어째서 할아버지는 본인은 읽지도 않는 그 책들을 그렇게 소중히 아끼셨을까. 물론 덕분에 나는 어지간한 소설은 초등학교 시절에 설렵했다. 적과 흑,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달과 6펜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쿠오바디스 기타 등등. 그 중 쿠오바디스는 엄청나게 좋아했다. 센켄비치라는 작가를 지금까지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박해받는 기독교인과 네로황제 그리고 몰락한 나라의 공주와 로마 귀족과의 로맨스는 손에 땀을 쥐게했더랬다.
 

일요일 아침 시끄럽게 울어대는 전화벨은 단연코 할머니다.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으니 힘없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제 통화로 감기기운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문에 컨디션이 영 아니란다. 아침은, 약은 드셨는지 부러 큰소리로 물어도 여전히 나 힘들다고 하는 듯한  축 쳐진 목소리, 이럴땐 마음이 쓰리다. 토요일부터 태풍이 온다고 겁을 주어서 갈까 말까 망설이다 다음주에나 가겠노라 말씀드렸는데, 일요일 늘어지게 잔 잠조차도 죄스러운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할머니의 전화에 내 정신은 명료해졌다.

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 연배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공포.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 거기다 지병없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것이 내 가족 특히 할머니의 죽음을 상상하면 무섭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고 부모님이 다하지 못한 자리를 채워 주신 정신적 지주였던 이유겠지만, 한 해, 두 해 흐르는 세월이 어린 조카들을 살찌우는 대신 할머니에게서는 기력을 앗아가고 있음은 역시 무서운 깨달음이다. 부모가 자식을 앞세워 보내는 고통의 깊이를 가끔 듣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어떤 죽음이 자식을 보내는 고통보다 덜 하다고는 생각지 못하겠다. 가끔 농담처럼 할머니는 아흔 혹은 백 세까지도 사실 거라고 동생과 주고받다 보면 정말 그럴것 같은 확신이 마구 든다. 그리고 오늘처럼 걸려오는 전화나 어느날 찾아뵙더니 나빠진 안색을 보면 그런 확신은 다시 바닥으로 추락한다.

어쩌면 비 탓이겠지. 습한 날씨가 노인에게는 치명적이고 밖으로 들로 나들이를 못하시니 무료하고 적적하신 게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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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7-0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이 모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전부 모이게 장소가 친구의 상가집이더군요. 왠지 우울하지만 어쩔수 없는 현상이네요. 그런곳에 모이면 다들 나이들어가시는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떠올리지 않을수가 없더군요.
아무튼 할머님 오래도록 무병장수하시길 바랍니다.

겨울 2004-07-06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대부분을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와 지낸 특이한 이력이 이런 감상에 빠져들게 하네요. 불가피한 가출을 시도한 몇 년을 제외하곤 늘 함께였는데, 고향으로 가신 이후부터 마음이 많이 불편합니다. 이번 주에는 꼭 찾아 뵈야죠.
 

 

아가사 크리스트의 전 작품을 설렵할 만큼 한 때는 추리소설의 절대적인 애독자였다.

대개는 장편을 선호하지만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같은 빼어난 구성과 문장의 밀도있는 단편을 읽고, 짧은 이야기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색다른 묘미를 알게 되었다. 평소 서사적이고 드라마틱한 장편만이 문학의 진수라고 자신하던 나 자신이, 추리소설에 맛을 들이게 된 동기가 추리물이 추구하는 범죄자와 형사 혹은 탐정의 두뇌싸움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절묘한 인물배치와 구성력이었다. 이를테면 외도다.

<미소지은 남자>라는 작품 소개를 읽다가 눈에 뜨인 것은 잘 쓰여진 문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웨덴이라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을 덜 알려진 나라의, 해닝 만켈이라는 작가의 프로필이었다. 아동문학가로서 범죄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스웨덴의 현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작가에게 왠지 호기심이 동했다. 모름지기 작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내 나름의 틀 속에 적합했다.

아마도 책을 몹시도 즐겨있는 사람이라면, 책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기쁨은 문체의 흡인력일 것이다. 의미없는 단어 하나도 빼먹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글의 흐름과 연결은 인물이나 줄거리가 주는 매혹 이전의 산뜻한 첫인상으로 기억되었다. '안개. 안개가 마치 한 마리의 맹수처럼 소리없이 접근해 왔다. 그는 평생을 쇼넨에 살았지만, 앞으로도 결코 안개에는 익숙해지지 못하리라. 쇼넨의 안개는 언제나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형체로 가라앉혔다.'라는 첫 장을 열고 있는 것은 미지와의 조우였다.

결코 완벽하지 않은, 결핍의 주인공 발란더의 심리만으로도 족히 한 편의 소설감이 될 거라는 걸 작가도 알고 있을까. 그의 사고와 상념을 따라 가는 과정은 매끄러운 문장을 미끄럼처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좋았다. 그것이 스웨덴 경찰의 특성인지 아님 번역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다. 범죄에 직면하고 그것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과 접근이 아마도 시끄럽고 거칠고 고압적인 헐리웃 영화와 우리 영화 속의 경찰과 달라서였는지도...

이 소설은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부를 경계하라고 한다. 정당하지 않은 부의 분배에도 경고를 한다. 사고 팔아서는 안될 인간의 장기까지도 매매시키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자신감에 찬 우월한 인간의 병든 정신을 고발하고 미소안에 갇힌 짐승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도덕과 부도덕의 의미가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사라져가는 사회, 명령할 뿐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는 논리로 스스로의 죄를 사하는 권력자의 오만과 자부심은 픽션이 아니다.

간결하고 쉬운 글로 쓰여진 <미소지은 남자>는 분명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목록에 들어간다. 잘 쓰여진 글을 읽어가는 동안의 행복감은 좋은 글 즉 내용이 훌륭한 글을 읽는 재미와 비교할 수 있다. 또한 읽는 것 만큼 쓴다는 것의 즐거움도 멋질 거라는 걸 부추기는 데,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꿈은 바로 쓰는 것이므로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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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이라 불리는 세계와 소년만화의 조우랄까. 판타지 혹은 학원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한없이 다정다감한 만화를 그리고 쓰시는 작가님께 선망을 넘어 질투를 느끼곤 한다. 색으로 비유하면 푸른색 내지 초록색일까. 아니면 투명한 흰색?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림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림에 녹아드는 글을 읽노라면 마냥 마음이 느긋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만화라는 매체는 다분히 아직까지도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산문과 시를 풀어놓은 그림의 위대성을 높이 사지는 못할망정 '순정만화 따위'등의 무지몽매한 비하를 서슴없이 던지는 소수, 혹은 다수에게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싶다.

주인공인 긍하의 주변 인물들, 한강, 소현민, 최정언 등을 보면 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드러내지 않는 문제를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상하게 유독 긍하만은 보이는 그대로이다. 원만하고 완벽한 가족관계와 무난한 성격, 성적도 상위이고 외모도 귀엽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듯 싶지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미남 미녀로 선망의 대상이 된 강이나 현민 정언은 긍하와는 다른 부류다.

먼저 강은 어머니가 부재하고 현민은 대단한 집의 손자임을 언급하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역시 없으며 강과 정언 사이에서 표류하면서 의도적으로 과장된 행동을 한다. 특히, 정언의 존재는 무게감을 느끼게 하며 고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차갑고 도도하게 비치는 외향의 틀을 스스로 깰 의지도 없고 강을 향하는 감정마져도 성숙된 분석과 의도로 잠재운다. 매력적이지만 외롭고 저 홀로 떨어진 별같다.

아직은 이 만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가 없다. 긍하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지 혹은 강이 그것을 알아챌지는 미지수다.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전개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것이므로 궁금중을 참고 기다릴 뿐이다. 정말 괜찮을 작가를 좋아하는 아주 괜찮은 독자이고 싶은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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