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32-33쪽
"기억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73쪽
정민과 잠을 자고 난 뒤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서로 몸을 비벼대며 한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온기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 것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마녀의 오랜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입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길거리에 버려진 귤껍질이 방금까지 그 귤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혼난 마음을 달랜 아이의 하루를 얘기했고, 공중전화부스에 펼쳐진 전화번호부는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혹시 오래 전에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화번호부를 펼쳐본 주부의 사연을 들려줬다. -88-89쪽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 -94쪽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의 사랑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너의 환상들을 약간의 진실과 바꾸어라. 너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을 짐을 꾸려 떠나보내라. 이웃은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123쪽
한국을 떠나오던 날, 공항에서 정민을 껴안은 채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정민은 토요일 저녁이면 외로울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도 토요일 저녁이면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은 히말라야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도 히말라야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민은 겨울이 오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겨울이 오면 정민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민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두 진짜라고 말했다. 안고 있던 팔을 떼고 바라보니 정민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정민은 내 뺨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170-171쪽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지. 침묵을 이겨내기 위해 태어났지만, 결국 또다른 침묵으로 끝날 뿐이니까. 삶이 그런 것처럼."-227쪽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236쪽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329쪽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37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