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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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며, 외국문학에서는 낭만파가 수행한 역할이 자연주의에 의해 성숙되었다" (<<메이지 문학사>>)라고 나카무라 미쓰오는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유럽의 '문학'을 규범으로 본 시각에 불과하다. 예컨대 구니키다 돗포가 낭만파인지 자연주의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돗포가 어느 한쪽이라고 하면 대단한 모순이며, 낭만파와 리얼리즘의 내적 연관을 단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서양의 '문학사'를 규범으로 삼는 한, 그것은 단기간에 서양문학을 받아들인 메이지 일본에서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 뿐이지만, 오히려 여기에 서양에서는 장기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단선적인 순서 속에서 은폐되어 버린 전도의 성질, 곧 서양에 고유한 전도의 성질을 밝혀 내는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할 것이다.-188쪽

명심해야 할 구절이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소세키가 거절한 것은 서구의 자기동일성(아이덴티티)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거기에는 '바꾸기'가 가능한, 다시 짜기가 가능한 구조가 있다. 하지만 가끔 선택된 하나의 구조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역사는 필연적으로 단선적인 것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소세키는 서양문학에 대비되는 일본문학을 수립하고, 그 차이와 상대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일본문학의 아이덴티티도 역시 의심스럽다. 그에게는 서구든 일본이든 마치 확실한 혈통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스럽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역사주의'적 사고에서 '제도'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문학사를 단선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다시짜기가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는 역사적인 개념이고 역사적인 순서로 나타난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것을 두 가지 요소로 본다.-184쪽

두 종류의 문학적 특성은 이상(以上)과 같은 데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데 있기 때문에 양쪽 모두 대단한 것입니다. 한쪽만 있으면 다른 쪽은 문단에서 쫓아내도 좋다고 말하는, 그런 뿌리가 얕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이름이 두 종류이기 대문에 자연파와 낭만파로 대립하면서 망루를 지키고 수로를 깊이 파서 적대시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만, 실상 적대시할 수 있는 것은 이름뿐이며, 내용은 양쪽 모두 왔다갔다하여 대부분 뒤섞여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것은 관점이나 독법에 따라 어느 쪽에도 편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세한 구별 운운하면 순수하게 객관적인 태도와 순수하게 주관적인 태도 사이에 무수한 변화가 생길 뿐 아니라, 그 변화하는 각각의 작품과 다른 것이 결부되어 잡종을 만든다면 또 무수한 제2의 변화가 성립하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은 자연파라든가 누구의 작품은 낭만파라든가, 그렇게 획일적으로 말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아무개 작품의 이 부분은 이런 뜻에서 자연파 정취라고, 작품을 해부해서 하나하나 지적할 뿐 아니라 그 지적한 곳의 정취까지도 단지 낭만이나 자연 두 가지로 간단하게 열거하지 말고, 얼마만큼의 다른 요소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섞여 있는지를 설명하게 된다면 오늘날의 폐단이 극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창작가의 태도>)-184-185쪽

소세키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이라면 건드릴 수 밖에 없는 주제인 것 같다. 이광수의 문제도 걸려 있다.

앞에서 나는 '풍경'이 외부세계를 거절하는 '내적 인간'(루터)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주관-객관이라는 근대인식론의 틀 자체가 '풍경' 속에서 성립한 것이다. '풍경' 자체가 하나의 전도물(轉倒物)이지만, 일단 그것이 성립되자마자 그 전도는 감춰진다. 이것이 결정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서구의 낭만파에서이며, 거기에서 리얼리즘 역시 확립되었다.-187쪽

이것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리얼리즘에 의해 '묘사'된 것은 풍경 또는 풍경으로서의 인간이지만, 그와 같은 풍경은 낭만파적인 전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쉬클로프스키(Victor Borisovich Shklovskii)는 리얼리즘의 본질이 비친화화(非親和化)에 있다고 한다. 요컨대 눈에 익었기 때문에 사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에 일정한 방법은 없다. 그것은 친화적인 것을 항상 계속해서 비친화적으로 만드는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반리얼리즘, 예컨대 카프카의 작품도 리얼리즘에 속한다. 리얼리즘이란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늘 풍경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하고 있던 풍경을 존재케 하는 일이기에, 리얼리스트는 언제나 '내적 인간'이다.
바꾸어 말하면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을 단지 대립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또 그것들은 과거 '문학사'의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낭만주의를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리얼리즘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187쪽

그런데 서양의 '문학사'에서는 낭만파 뒤에 자연주의가 온다. 또 자연주의 뒤에 반리얼리즘이 온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규범화는 이 본질을 놓치게 만든다. 소세키가 형식주의자보다 먼저 그것을 공시(共時)적으로 보려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낭만파와 자연주의파를 '비율'로 보는 관점 또한 근본적으로는 낭만파적인 것 위에 있다. 그것은 낭만파-자연주의라는 이원적인 양상의 더욱 깊은 근원에 있는 사태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풍경의 발견'이라는 사태 속에 낭만파와 자연주의라는 대립구조 자체를 파생시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의 문학을 이질적인 것으로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 의해 생긴, 또 '풍경'에 의해 은폐된 사태를 거슬러올라가서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187-188쪽

결국 문제는 '문학사'이다. 이것이 왜 필요한가. 문학사가의 욕망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 끊임없이 재배치를 통해서, 기존 틀을 부수고 새롭게 짜는 것이다. 고진의 작업 또한 '풍경의 발견'이라는 핵심어를 통해서 재구조하는 것. 언제나 작품이라는 개별적인 틀에 대한 폭력으로서 이론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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