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위기의 탐구자, 가라타니
탐구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새물결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1.

  본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독아론」과 「타자」라는 두 개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것들은 물론 철학의 영역에서는 데카르트 이후 지치지 않고 반복되어온 진부한 화제에 속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전략목표는 이것들의 논의에 새로운 논점을 첨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아론」과 「타자」를 둘러싼 기존의 문제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도」하는 것에 두어져 있다. 이 「전도」작업은 독아론의 극복을 내세우면서도 독아론을 재생산해 온 것에 지나지 않는 지금까지의 철학(가라타니는 그것을 「변증법」이라 부른다)의 전면적인 부정으로 직결되고 있다. 가라타니가 비트겐쉬타인과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통상 나와 타자와의 사이에 「언어게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전부터 피아(彼我)의 사이에 공통의 규칙(코드)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라타니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야말로 「독아론」의 전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독아론이란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타자는 「다른 하나의 자기의식」에 불과하고, 여기서 행해지는 언어게임은 외관은 어떻든 간에 단지 「자기대화(모노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타자의 「타자성」이 처음부터 누락된 것이다. 현상학을 비롯한 「내성(內省)」을 특권적 방법으로 하는 철학은 「나」로부터 「우리」로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2.

  자기대화의 폐쇄된 영역을 타파하기 위해 가라타니가 요구하는 것은 「말하다 - 듣다」 입장에서 「가르치다 - 배우다」 입장으로의 근본적인 시좌의 전환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오스틴의 행위론에 이르기까지 「말하다 - 듣다」관계를 기초에 두고, 그것들을 교환 가능한 역할로 간주하는 입장은 결국 「모노로그」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랑그」, 오스틴의 「관습」 등은 공통의 코드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에 의해 역으로 「타자」의 존재를 은폐하는 개념장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비트겐쉬타인의 독창성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다」라는 관점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고찰하는 것에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동일한 「의미」나 「규칙」을 아프리오리하게 전제할 수 없다. 오히려 의미이해의 주도권은 항상 「배우는」측의 자의에 맡겨져 있다. 「의미하는 것」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사적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언어게임은 「어둠 속의 도약」(크립키)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공통의 규칙」이 되는 것은 후지혜(後知惠)로서 날조된 사후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이러한 가라타니의 비트겐쉬타인 해석은 크립키의 규칙수순(規則隨順)을 둘러싼 고찰에 많은 것을 신세지고 있다. 그러나 크립키가 사적 규칙에 관련된 패러독스를 「공동체의 선행성」에 호소하여 해소하려고 할 때, 가라타니는 크립키로부터 결별한다. 비트겐쉬타인의 사적 언어비판을 사회적 제도나 공동주관성의 우위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일종의 「공인된 학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에 의하면 그것은 공통의 의미나 규칙을 「기계장치의 신」으로 무대에 등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데카르트의 「신」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것은 문제의 회피가 아니면 순환논법의 아포리아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3.

  「말하다 - 듣다」라는 관계가 결국은 자기대화(독아론)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가르치다 - 배우다」라는 관계는 그 속에 가교설정이 불가능한 심연을 안고 있는 것에 의해 역으로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타자란 공동체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속하는 자인 것이다. 이것을 가라타니는 "대화란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와의 사이에만 있다. 그리고 타자란 자신과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가 아니지 않으면 안 된다"하고 간결하게 요약한다. 물론 이것은 역설 등이 아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근원적인 「비대칭성」은 타자를 타자답게 하는 성흔(聖痕, stigmata)인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가라타니는 키에르케고르의 「예수」개념 속에서 발견한다. 즉, 「절대타자(=신)」도 아닌, 「상대타자(=사람)」도 아닌 「神人」이라는 양의성을 지닌 예수야말로 우리들의 언어게임을 「異化」하는 힘을 갖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타자인 것이다.


  가라타니가 비트겐쉬타인과 키에르케고르에서 발견한 것은 이른바 「이인(異人)으로서의 타자」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외부로부터 부지불식간에 도래하고 공동체의 동일성(identity)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폭력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예수」라 불러도, 혹은 「바로바로이」라 불러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대화」라는 미명 하에 이 「바로바로이」의 존재를 고의로 은폐하고 배제하는 것에 의해 점차 공동체 내부에 모노로그의 질서를 보지해 왔다. 가라타니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러한 「모노로그의 질서」 혹은 「독아론적 이성」의 수호신으로서 자신을 바쳐 온 기존의 철학에 대한 것이다.


  「나」와 「공동체」는 대립개념이 아닌 보완개념에 불과하다. 공동체 내부에 안주하는 한, 「내」가 「우리」로 확장된다 해도 그것은 독아론의 꿈을 꾸는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독아론의 일장춘몽은 타자와의 조우에 의해서만 깨어질 수 있다. 언어에 그 진면목을 묻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이다. 즉, 「대화」란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에서 생기하는 스릴 있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가라타니는 비트겐쉬타인의 「언어게임」과 맑스의 「등가교환」 속에서 그러한 「대화」의 있어야 할 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 蛇足 : 내가 가라타니의 저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탐구 1, 2이다. 아마 가라타니의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문예평론가에서 비평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부분에서 쓴 글일 것이다. 가라타니 스스로도 자신이 태도의 변경이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미답의 영역으로 처음 들어가려는 고독한 가라타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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