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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네덜란드, 1632~1677). 그는 1673년 하에델베르크 철학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철학의 자유를 지킨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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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방법은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 두 가지였다. 독일 관념론 이래로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아무런 부정성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실정적인 절대자이며, 역동성을 결여한 부정적이고 정태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들로 지칭되는 자연 안의 실체들은 독자적인 개체성이나 실재성을 결여한 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일자로서 실체에 포섭되어 있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 철학에는 인간의 개체성이나 재유를 위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1960년대 이래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는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진면목을 드러내주었다. 역량론적 해석이라 불리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근본적으로 역동적인 실재라고 주장했다. 곧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한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며, 자연은 실재들의 생산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역동적인 장이라고 파악했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투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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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나투스 본능을 설명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친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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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존재론적인 역량은 개인들이 예속적인 실존 조건에서 벗어나 자유를 달성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마르샬 게루,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 피에르 마슈레 등과 같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작업에 기반을 둔 역량론적 관점은 스피노자 철학이 지닌 이론적 독창성을 잡아내고 이를 실천적 의의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량론은 여전히 스피노자의 진면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관련 논문을 발표해온 진태원 서울대 강사가 최근 스피노자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박사논문으로 완성해 발표했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2006, 서울대학교)이 그것이다.
진 박사는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의 8가지 주제를 검토하면서 관계론적 해석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1. 스콜라철학에서 데카르트에 이르는 용법과 비교해볼 때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의 독창성은 이 개념을 탈신학화했다는 점에 있다. 곧 자기 원인 개념은 부동적인 절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으로 한정될 수도 없으며, 자연 전체를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 스피노자의 실체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닐 뿐 아니라,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어떤 통일적 기체(基體)도 아니다. 곧 그것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통해 구성되고 표현되는 무한한 인과연관의 동일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탈실체화된 실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체와 양태 관계는 인과관계로 일의적으로 표현된다.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의 독창성은 갈릴레이가 설립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과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이라는 개념을 결합했다는 점에 있다. 곧 타동적 인과성과 내재적 인과성은 두개의 상이한 인과관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변용의 연관을 가리킨다.
4. 스피노자의 개체는 분할 불가능한 원자가 아닐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에서 독립하여 성립하는 존재론적 기초 단위도 아니다. 그것은 개체 자신의 부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며, 따라서 항상 이미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자신의 본질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인간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 스피노자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상상적 관계다. 상상적 관계는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의 삶의 자연적 기초이면서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루고 있다.
6. 스피노자에게는 인식론이라는 독립된 분과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의 문제는 항상 윤리의 문제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중심 쟁점은 인간의 인식과 삶을 구속하는 상상적, 예속적 관계를 어떻게 개조하여 적합한 인식을 얻고 자유를 획득하느냐에 있다. 이는 공통 통념들의 형성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7. 스피노자 인간학의 또다른 축은 정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정서 개념을 통해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재기한다. 스피노자의 독창성은 수동과 능동을 관계론적 개념으로 개조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8.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의 특징은 자유를 관계론적 범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곧 그에게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의 자유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한 사람의 능동화는 다른 사람들의 능동화를 촉진한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개념이다.
진 박사는 이상의 8가지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을 좀더 명쾌하게 해석하고, 그 현재성을 평가하고 응용하기 위한 이론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