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언니 - 언니들 앞에서라면 나는 마냥 철부지가 되어도 괜찮다 아무튼 시리즈 32
원도 지음 / 제철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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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의 몸으로 노동에 시달리던 엄마는 임신 7개월 만에 조산했고, 병원 과실로 산소 공급 미확보로 뇌병변 1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아들을 낳았다. 또 다른 희망과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으면 어쩌나의 고민에서 전자를 택하여 딸을 낳았다. ‘오빠 때문에 너를 낳았다.’라는 필터 되지 않은 문장이 주는 폭력성은 ‘장애인 오빠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위해 설계된 목숨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겠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오빠의 수발을 들라고 하면 들었고, 대소변을 치우라고 하면 군말 없이 치울 수밖에 없었을 어린 여자아이를, 대형마트에서 오빠의 휠체어를 밀다가 학교 친구와 마주쳤고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장애인 동생이라는 소문을 견뎌야 했던 어린 여자아이를, 학교폭력을 당하는 것을 언니에게 털어놓았을 때 ‘니가 그러니까 왕따를 당하는 거’라던 언니의 말을 듣고 상처를 입었을 어린 여자아이를, 너무 어린 나이부터 나를 잃어버린 어린 여자아이를 상상했다. 읽으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장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대상은 가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못내 쓰렸다.

나도 언니가 갖고 싶었다. 친구에게 다 하지 못하는 은밀한 말들을 속닥거리기도 하고 일상을 나누기도 하는 그런 언니. 주변에 보면 언니랑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이럴 때 남동생은 정말 필요 없어... 나도 언니가 갖고 싶다는 말에 j는 자기가 언니 해주겠단다.

<아무튼, 언니>에서 자신의 혈육인 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언니들을 구원자라고 믿는 저자를 보면서 언니라는 대상이 타인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114. 가족끼리는 좀 더 타인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말에 조심스럽지만 완강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으로 힘들어하던 언니가 동생의 책을 내준 독립서점에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택배를 보냈다는 부분을 읽으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혈육만이 줄 수 있는 온기가 따로 있는 모양이라고, 언니 없는 나는 또 언니가 갖고 싶어진다.

44. 운전이 단순히 먼 거리를 빨리 갈 수 있게 해주는 것만은 아니다. 기동성이 확보되는 순간, 세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다. 특히 대중교통의 종류나 노선이 서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지방에서는 자동차가 확장해주는 생의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버스로 한 시간이 걸리는 곳을 내 차로 15분 만에 주파하는 쾌감이라니… 그건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j라는) 기사를 두고 운전하지 않는 삶을 꿈꿨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운전을 함으로써 내 세계가 확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와서 많이 힘들었고, 이곳은 있는 동안 적응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느껴서 그 사실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살만하네?라고 생각했다.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8km 떨어진 도서관을 운전해서 가는 것뿐이었는데 내가 아무 때나 아무렇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 있네.라는 생각과 함께 편안해지던, 그때를 잊을 수 없다. 거길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했다면, 그 마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대중교통을 두어 번 갈아타야 하고, 도서관까지 직진으로 1km를 걸어서 가야 하니까 오히려 귀찮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곳을 차로 15분 만에 갈 수 있다는 것! 이거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운전은 제대로 배우고 거리에 나오자. 깜빡이는 버릇처럼 켜주고, 무슨 일 있거나 후진할 거면 비상 깜빡이도 좀 켜고, 밤에는 라이트도 좀 켜고... 억지로 끼어들지 좀 말고...

84.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스크린 속을, 어떤 말이든 얹기 쉬운 휴대전화 액정 속을 벗어나 진짜 현실에서 마주하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딱 한 발자국만큼만 앞으로 가는 사람이다.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앞만 보고 가는 장군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가끔 현실에 타협하고 자주 자괴감이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옳은 방향을 향해 엔진 없는 오리 배의 페달을 낑낑거리며 밟는 사람이다. 악을 쓰고 욕을 하면서도 결국엔 가슴이 시키는 정의를 따르는 사람이다.

나도 열심히 오리배 굴리고 있다. 영차영차.

14. 어디에든 언니들이 있었다.

그 언젠가 j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몇십 년이 더 지나면, 세상은 좀 더 그로테스크해질 것 같아. 더 냉담해질 것도 같고. 나는 중년 아줌마들의 오지랖이 너무나도 싫거든. 지금도 그런 아줌마들이 너무 싫어. 그런 거 하나도 듣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나에 대해 신경을 꺼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가 났다고 앉으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도 아줌마고, 가방이 무거워 보이니 들어주겠다는 것도 아줌마야. 길을 가다 위치를 물어봐도 마음을 다해 알려주려고 하는 것도 아줌마야. 진짜 웃기지 않아?

아줌마들한테도 언니가 있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언니라고 불릴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의아해진다. 그렇다면 지금의 언니들이 그런 아줌마가 될 수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언니가 갖고 싶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인데도 언니, 그놈의 언니에 대해서는 자꾸만 미련이 생긴다.

나만 언니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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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 농산물 MD의 우리 작물 이야기 : #사계절 #힐링 #리틀포레스트
전성배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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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책 냄새를 몸의 안에 깊숙이 채워 넣으며 책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작고 귀여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계절을 팔고 있다니, 무엇을 파는 걸까. 하며 책을 꺼내는데 책을 꺼내기 전부터 알겠다. 과일이구나. 책의 옆 귀퉁이와 표지에는 한라봉이 채도 높은 주황빛으로 칠해져있었다. 어쩐지 한라봉의 달큼함이 입속에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표지에는 농산물 MD의 우리 작물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과일을 팔며 글을 쓰는 사람, 퍽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책에는 계절에 나는 과일과 채소들을 하나씩 열거하며 그에 따른 유년시절과 경험들과 기타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봄 : 대저 토마토, 설향 딸기, 산채, 황매

여름 : 수박, 참외, 대석 자두, 토마토, 복숭아, 샤인머스캣, 패션프루트

가을 : 무화과, 홍로 사과, 보은 대추, 배, 석류, 단감, 참다래, 홍시

겨울 : 귤, 유자, 한라봉, 곶감

농업의 발전과 부지런한 농부 덕분에 우리는 제철 과일을 원하는 때에 손쉽게 구해서 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있는데, 재작년 겨울에 그렇게 먹고 싶던 복숭아와 캠벨포도가 그랬다. 요즘은 다 파니까 하며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기가 너무 어려웠었다. 파는 곳을 찾아서 기뻐서 들어가 보면 이미 품절이어서, 왜 나한테 포도를 안 팔지, 왜 복숭아를...하며 억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먹고 싶던 포도와 복숭아를 작년에는 죄책감 때문에 사먹지 못했는데, 올해는 기필코 사먹고야 말 거라며 나는 다짐을 한다. 올해는 좋아하는 거봉도 많이 먹어야지. 그런데 왜 거봉은 이름이 거봉일까? 꺼벙이도 아니고... (별 걸 다 시비)

결혼을 한 순간부터는 집에 과일을 두는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과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과일을 사두고 초반에 열심히 먹다가 며칠이 지나면 무르거나 곰팡이가 펴서 버리기 일쑤였다. 어떤 과일은 처음에 구매해서 너무 잘 먹어서 똑같은 과일을 두 번째 사면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버림을 당했다. 그러다보니 과일을 사는데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고, 고민하다가 어차피 다 못먹는데 하며 구매하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한번은 귤이 먹고 싶어서 지역에 있는 조금 큰 농산물 시장엘 갔더니, 한 박스가 아니면 팔지 않는다고 하여 당황한 채로 돌아 나온 적도 있다.

19. 나는 소망한다. 현재의 고난과 시련에 우리가 맞서는 것이 허사가 되지 않기를. 대저 토마토와 같은 결실을 보기를.

이번 달부터 토마토를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토마토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재작년에 토마토를 먹기 시작했을 땐 기껏해야 한 팩 또는 한 봉지 정도였는데 한 박스씩 구매를 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토마토를 구매하게 되면서 대저 토마토(짭짤이)라는 것도 처음 먹어보았고, 흑토마토도 처음 먹어보았다. 나는 딱히 어떤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j는 흑토마토가 신맛과 짠맛이 덜하다고 했다. 난 그냥 열심히 먹기만 했나보다. 나는 아마 j의 요청에 의해 앞으로도 토마토를 꾸준히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일년감’이라는 것에 조금 낙담을 했다. 일 년 내내 나오는 채소라니...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 “먹고 남은 꼭지를 저렇게 던져두어도 내년이면 토마토가 열리더라. 신기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한편으로는 정말 꼭지를 흙에 심어두면 토마토가 열릴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도 해볼까?

5월 초, 갈비뼈가 골절된 것을 알고는 그동안 먹고 싶던 참외가 트럭에서 파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사왔다. 참외가 10개도 안 되는데 만 원이었고, 그렇다면 개당 어림잡아 천 원 정도였다. 과일을 자주 사지 않으니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 감도 안 오지만, 참외가 비싼 채소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조금 놀랐던 기억이다. 참외가 이렇게 비쌌었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년 전에도 참외가 먹고 싶어 구매했다가 맛이 없어서 실망했는데, 이번에는 그 보상을 해주는 건지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런데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꼭 맞게도, 점점 냉장고에서 물러가고 있어서 한 알 남은 거 오늘 저녁에 먹어야겠다.

책을 읽으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지금 집에 있어 심심할 때마다 한 알씩 먹고 있는 토마토도, 추운 겨울에 먹는 게 이상하지 않게 된 맛있는 딸기도, 민소매 입고 먹어야 할 것 같은 시원한 수박도,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맛있는 참외도, 신맛을 본 뒤로 자주 찾지 않게 된 자두도, 올해는 꼭 딱딱이와 황도와 백도를 먹어볼 예정인 복숭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사과도, 결혼할 때 처음 맛보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눈이 동그래진 대추도, 뜬금없이 먹고 싶어지는 배도, 한 알만 먹어도 몇 년은 생각이 나질 않는 석류도, 매년 겨울이 되면 찾게 되는 귤도. 읽는 것만으로도 맛있는 책이었다. (책에는 있지만 나열하지 않은 것은 좋아하지 않거나 먹어보지 않았거나. 감, 홍시, 곶감은 너무나도 성실하게 빠뜨린 걸 보니 나는 감은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나보다. 매우 성실해...)

책에 의하면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기온 상승이 가파른 나라 중 하나라고 말한다. 지구 지표면의 온도가 평균 1˚미만으로 상승한 반면, 한국은 1.8˚가량이 상승해서 열대 과일이 강세를 보이는 사이에 한국의 작물은 점점 밀려나고 있다. 한국의 재배 한계선이 기온 상승과 함께 남에서 북으로 빠르게 올라가면서 제주의 전유물이었던 감귤은 전남과 경남으로, 멜론은 곡성에서 강원도로, 무화과는 전남에서 충북으로, 사과는 대구에서 강원도로 북상했다. 이대로 간다면 작물의 재배지 북상이 아니라 소멸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염려가 책에 들어있다. 다시 한번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 도서관에서 빌려온 환경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

오탈자 56p. 교실 한쪽에서는 삽겹살을 구웠고 ▶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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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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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서 <나목>에 대한 이야기가 슬쩍 나왔었다. 원고 부피에 끔찍한 생각이 났다는, 그래서 지긋지긋해졌다는, 우송까지 끝마친 뒤에 너무 허전해 울고 싶었다는 그 소설을. 독서모임에서 <나목>이 지정도서가 된 걸 알고는 나도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도서관에 간 김에 제일 먼저 찾았다. 하지만 책의 연도와 그 역사에 걸맞게 책의 상태는 더럽혀져 있었다. 내가 책의 구매를 망설였던 것은 필시 이전에 작가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에서 왔는데, 책 구매를 실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대부분의 책을, 사전 지식을 갖추지 않은 채로 읽는다. 알게 된 것은 모르겠지만, 부러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전 지식을 갖추고 읽으면 보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기존보다 넓어질 것을 모르지 않지만, 성격상 그것과 이것을 별개로 두지 못하고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꼴이 되는 것 같아서 어느 순간 내 입맛에 맞게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교집합이 되어 결국은 과부하가 되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한 채로, 끄적거렸던 독서노트만 준비해서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어느 부분들에 마음을 두고 이 책을 읽었는지를.

유난히 소설에는 부연, 회색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쓰인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연 하늘, 부연 화면, 부연 혼돈, 부연 눈, 그리고 회색빛 고집, 회색 머리, 회색 건물, 회색 휘장, 회색빛 절망. 그 부연 것과 회색은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이루고 있는 부연 회색을 미워하는 이경인 까닭이다.

321. “나 때문이었을까?”

오빠들이 머물고 있었던 곳을 큰아버지와 그 아들에게 내어주고 오빠들은 행랑채에 머물게 하자고 한 것이 이경이었고, 그 행랑채가 폭격을 당해 오빠들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에 의해 더 선명해지고 만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살아 있다는 것이 거리낌 없이 좋았던 날들은, 그 말에 의해 살아 있다는 것을 송구스럽다고 느끼게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이경은, 가끔은 처절하고 가끔은 가엾고 가끔은 처량하게까지 느껴진다.

51. “식기 전에 잡숴보셔요. 식을까 봐 가슴에 품고 왔어요.”

이번에야말로 설마 어머니의 눈빛이 무슨 뜻을 지녀오겠지 기대하며 주시했다. 어머니는 시들하게 받아놓고 습관화된 딴 일을 시작했다. 국을 데우고 상에다 수저와 그릇들을 올려놓고. 어머니의 눈은 결코 딴 뜻을 지니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라는 완강한 고집 외에는. 나는 빈대떡 산 것을 후회했다. 가슴에 품고 왔음도.

특히 내가 한 나중 말, “식을까 봐 가슴에 품고 왔어요”를 후회했다. 물건이라면 뺏고 싶도록 그 말을 돌려받고 싶었다.

이경은 그렇게 어머니를 원하지만, 결국은 미워하게 되고,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겉에서 맴돌며 보살피는 건 이경이다. 다만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집요하게 나를 쫓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 부연 눈에 공포와 증오를 동시에 느끼는 이경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시절, 그렇게 아들이 중요했던 걸까. 장가는 급하지 않아도 손주는 급하다던, 더구나 세상이 이러니 빨리 씨를 받아놓고 봐야 한다던 그 말이, 그 시대를 짐작게 했지만, 종족 보존과 번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좀 질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종족에 대한 열망이 아니더라도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한숨을 자주 내쉬어야만 했다. 결국 이경이 어머니에게 원했던 것이, ‘때때로 아주 가끔만이라도, 자상한 시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옥희도 씨의 부인이 건넨 자상한 시중은, 때로는 샘이 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위안이었고 위로였으며 따듯한 손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360. “오, 어떡하면 자네가 알아줄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미칠 듯이 암담한 몇 년을, 그 회색빛 절망을, 그 숱한 굴욕을, 가정적으로가 아닌 예술가로서 말일세. 나는 곧 질식할 것 같았네. 이 절망적인 회색빛 생활에서 문득 경아라는 풍성한 색채의 신기루에 황홀하게 정신을 팔았대서 나는 과연 파렴치한 치한일까? 이 신기루에 바친 소년 같은 동경이 그렇게도 부도덕한 것일까?”

옥희도 씨와 이경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옥희도에게 이경은 본인이 가질 수 없었던 풍성한 색채였고, 이경에게 옥희도는 어머니가 주는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버지이자 오빠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행보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나는, 가난을 궁상맞지 않게 다스리는 부인이 자꾸만 떠올랐으므로.

소설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결국은 전쟁을 겪었고, 겪어냈고, 겪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깊은 밤,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내일, 삶과 죽음을 번갈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 날들, 결국 나로서 살고 싶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망들이, 그들의 삶 깊숙이 숨어들었고, 스며들었다. 우리는 모든 것들에 노크를 할 수 있다. 이미 지나왔던 시간, 지나가는 시간, 머물러있는 시간, 다가올 시간들에. 새로운 생활에의 노크들을 망설이지 않기를, 그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그 노크에 마음이 가닿았기를.

덧_ 이후 박완서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몇 가지 사소한 이유로 에세이를 좀 더 가까이 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좀 더 강해서) 뜬금없이 이번 소설 전집 표지가 마음에 든다. 어릴 적에 신문에 있는 글자들을 오려 글씨조합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이건 내가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참.

 

 

 

 

*책 속의 문장

62. 그는 난리 통에 하나도 다치지 않은 그의 아들딸의 이름을 나열하며 완전히 주름을 폈다. 순간 그는 거침없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 집의 처지와 자기들과를 비교함으로써 그의 행복은 완벽한 것 같았다.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해야 더욱더 고소하고, 맛난 자기의 행복…….

65. 나는 할 수 없이 옥희도 씨를 생각했다. 그리고 주문처럼 ‘그는 딴 사람과 다르다. 그는 딴 사람과 다르다’고 외었다.

나는 그런 되풀이를 통해 어쩌면 새로운 생활에의 노크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23. 난 쓰기를 그쳤다. 밤이 깊다. 밤은 텅 빈, 무엇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텅 빈 내일을 몰고 오리라. 차라리 내일이 없었음 좋겠다.

바람은 아직도 멎지 않은 채 고가의 허술한 곳들, 함석 차양, 수많은 문짝과 창문을 흔들었다. 설음질을 끝마친 어머니가 분합문을 드르륵 닫으며.

124. 나는 여기서 기억의 소급을 정지시켰다.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갈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지금도 그것이 궁금할 뿐 내 기억의 소급은 노오란 빛 속에 용해되어 다시는 헤어나질 못했다.

145. 육친이라서 주저되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받쳤다.

그 놀라운 인색, 무서운 고집,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을 그토록 참담하게 만들 권리는 없으리라. 그토록 자혜롭기에 인색할 수가.

227. “사람이고 싶어. 내가 사람이라는 확인을 하고 싶어.”

“내가 아직도 화가인가 알고 싶어.”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어.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 정진과 몰두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261. 그 그림은 물론 그녀 때문일 리는 없었다. 그것은 필경 그 회색 휘장 대문일 게다. 부옇게 그의 시선을 가로막은 휘장 때문일 게다. 그 휘장이 그의 영감을, 그의 상상력을 억압했을 게다.

257.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부연 화면에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그뿐이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부연 혼돈 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257. 나는 그런 그림들에서 어떤 언어를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냥 그 빛과 빛깔을 즐겼었다. 삶의 기쁨이 여러 형태의 풍성한 빛깔로 나타난 그림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나의 그림에 대한 눈은 오색 풍선을 동경하는 아이들처럼, 포목점 앞에서 아름다운 천을 선망하는 여인처럼 소박하고 단순했다.

322. 내가 내 허물에 관대해졌다 해서 어머니의 허물에까지 관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결코 어머니를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다.

329. 우리는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인 것이다. 유쾌한 구경꾼들이 자꾸만 몰려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무런 재주도 부릴 줄 모르는 무능한 원숭이일 뿐, 우리의 절망이 그들에게 미칠 리 없고 또한 그들의 애환이 우리에게 생소하다. 우리는 휘장을 밀었다.

366. “어렸을 땐 맴을 돌고, 커가면 술을 배우고, 사람들은 원래가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권태롭고 답답해 못 견디게 태어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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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드로잉 내가 좋아하는 것들 4
황수연 지음 / 스토리닷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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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노래를 못 불러 음악시간을 싫어했고, 모든 운동에 겁을 내기도 했고 체력이 안 되기도 하여 체육시간을 싫어했고, 손재주가 없어 미술시간과 가정시간을 싫어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과목은 너무나도 협소했다. 아니, 어떻게 신은 내게 이렇다 할 재주 하나 주지 않은 걸까, 많이 원망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도대체 내가 잘 하는 건 뭐지? 하고 깊은, 정말 아주아주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져 생각을 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지만, 본질적으로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운동신경이 뛰어나지 않고 손재주가 없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10. 정말 닿고 싶지만 닿지 않아 애틋함까지 느꼈다. 미술은 나와 거리가 먼 영역이니 바깥에서 우러러볼 뿐, 그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중에 미술을 말하자면, “두 시간 동안 그린 게 이거야?”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선을 그렸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원을 그렸다가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그러다 보니 스케치북은 금세 너덜너덜해졌고 주위에 완성된 그림을 제출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주 조급함을 느꼈고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다 보면 스케치북을 찢고 도망을 가고 싶을 때도 여러 번이었으나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대충 아무렇게나 그려서 제출하기 일쑤였다. 점점 그렇게 재미없는 과목이 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더 이상 강제로 그리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비로소 자발적으로 그림을 보기 시작했고 감상하는 것을,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찾아다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경외심을 가지며 존경하게 되었고 그뿐이었다.

 

 

어느 날 글을 쓰다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게 있는데, 그것을 글로 나열하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런 일은 빈번하게 찾아왔지만, 그때는 왜인지 글로 써낼 수 없는 그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가 처음 그림을 배워볼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게 세 달 전이었다. 바로 실천에 옮길 수도 있었지만, 아직 적절한 학원을 찾지 못해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내게 학원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림을 더 숙제처럼 생각하고 더 두렵게 생각해서 멀어질까 봐인데, ‘잘 못 그릴까 봐’, ‘실패할까 봐’라는 두려움을 걷어내면 그림은 재미있는 놀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하지만, 쉽게 배워봐야지!라고 생각하기에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유튜브로 배워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책으로도.

 

 

 

이번에 읽은 책이 단순히 드로잉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었다면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드로잉이 있었다. 그림을 못 그려 보는 것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와는 달리,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아, 좋아하는 게 그림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림’이 주제인 책이다 보니,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곳곳에서 그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도 많아서 어쩐지 슬몃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책에는 표지 외에 저자의 그림이 실려있는 페이지가 없어 아쉬웠는데 찾아보니 다른 그림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참 다채로운 색감을 쓰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그런지 통통 튀는 생동감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걸 보니,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내 그림 실력이 생각나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못 그린 그림은 없다.는 문장이 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그게 언제가 되든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작가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이런 나도 반가워해주시려나. 하하.

 

 

 

163. 저는 뭔가 선택을 할 때 어려움에 놓이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질투하고 있는가.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그게 제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거든요. - 유튜버 ‘이연’

그런데 글을 읽다가 문득, 좋아하는 것들은 어떻게든 삶을 살게 해주고 삶의 자세를, 삶의 매무새를 고쳐주는 역할을 하는구나. 좋아하는 것들을 꽉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를 살게 하는 것을, 나의 기쁨이 되는 것들을, 다시 하나둘씩 적어본다.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척도는 될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마음에.

 

 

 

 

덧, 몇 달 전에 j랑 핸드폰으로 코끼리를 그렸는데... 내가 그린 코끼리를 보고 j가, “넌 코끼리를 본 적이 없어?”라고 물었다. 아무래도 그이는 나의 안티인 것 같으니 무찔러야겠고(!)

 

 

 

 

 

 

 

 

 

 

*책 속의 글

103. 끝이 정해지지 않은 자유 속에 던져진 나를 겪어보니 나는 별로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소한 것까지 미리 정하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그럴 때 안정감을 느꼈다. 계획이 차근차근 실현될 대 행복감을 느꼈고 정해둔 일정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발견했다.

더욱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웠다. 스스로 생산적인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행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흐지부지 지나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고자 했다.

 

168. 결과를 갈망하는 욕심들을 지나고 지나 다시 과정을 잘 겪어 내며 살고 싶은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렇다 할 결과를 손에 쥔 누군가를 보면 잔잔했던 마음이 소란해질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목표했던 결과를 얻는 것보다, 과정 내내 나를 잃지 않고 나답게 살아나가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매 순간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며, 타인에 상관없이 내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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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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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들이 툭툭 끊어져내리는 무료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다 말다 가다 말다 하는 억지스러운 마음들을 부여잡고 책 한 권을 간신히 읽어내렸다. 무척 좋았지만, 단편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해져버려 그 감정들이 소멸되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 소설을 읽는 게 아니었나 하며 혼자 툴툴대고 있었는데, 이건 단순히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좀 깊숙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 장편을 찾았다. 그렇게 읽기 시작했고, 한 챕터가 끝났다. 이게 웬걸, 이거 단편이었어?

편혜영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어떤 책이 가장 좋았나 하고 물으면 궁색해지는 대답이 그 이유를 대신한다. 하지만 어떤 점이 좋은가 하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다. 인물의 형상이 아니라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들이 책을 아우르는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그런데 이번 책을 읽다가, 나는 첫 번째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 지나간다>도 아니고, <저녁의 구애>도 아니고, <선의 법칙>도 아니고, <홀>도 아니고, 이 책, <어쩌면 스무 번>이라는 것을. 한 단편씩 서평을 쓰고 싶었는데,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몇 번을 더 읽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이해라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뒤편에 있는 이야기의 결말을 조심스럽게 상상해보기도 하고, 내 이야기를 껴넣어보기도 하고, 그냥 놔둬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단편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나 그랬다. 이 책이.

올여름은 옥수수를 많이 될 것 같다. <어쩌면 스무 번>

“여기가 어쩌다 이렇게 됐어?” <호텔 창문>

“소령님 덕에 우린 좀 좋아졌잖아요.” <홀리데이 홈>

“항아리 다음에 말이야. 차라리 이름을 부를걸.” <리코더>

남편은 선택했다. 돌아오지 않기로. <플리즈 콜 미>

우리가 불리해서 키운 전장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낱낱이 드러낸다고. <후견>

흘러가는 건 다 좋은 거라고. 좋은 건 다 흘러간다고 말했다. <좋은 날이 되었네>

아줌마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구했다. <미래의 끝>

읽는 내내 등 뒤가 서늘해져 자주 뒤를 돌아보아야 했고, 으슬으슬함에 이불을 목까지 덮어야만 했다. 뒤를 돌아보면 머리카락이 다섯 가닥만 남고 혀가 꼬부라진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좀비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내 안의 괴물을 닮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건 정말이다. 크고 작은 몰락이 만들어낸 커다란 ‘홀’은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었고 우리는 그 구멍에 발을 내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시작한 일을 끝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 구멍은 내가 만들었을 수도, 니가 만들었을 수도, 제3자가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구멍을 만든 이를 힐난하고 책망하다가, 우리는 곧 현실을 깨닫고 체념하고야 만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깨닫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나... 하고 자문한다.

근래에 내가 가장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가족, 가족이란 무엇일까였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거였나, 하고 절망스러울 때가 종종 있는데, 장인을 대하는 아내(<어쩌면 스무 번>)를 보면서, 나를 구하고 죽은 형의 이름을 나에게 부르는 큰어머니(<호텔 창문>)를 보면서, 누군가 그를 알은척을 할 때면 두려움이 먼저 든다는 아내(<홀리데이 홈>)를 보면서, 깨진 항아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남편(<플리즈 콜 미>)을 보면서, 도울 방법이 없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하는 엄마(<플리즈 콜 미>)를 보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솔하려는 아버지(<후견>)를 보면서, 아는 바가 없었기에 사이가 좋았을 어머니와 아들(<좋은 날이 되었네>)을 보면서, 바깥의 부모가 미래를 만들고 깨뜨리는 것을 보는 딸(<미래의 끝>)을 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그 생각들은 완전하지 못하고 흩어져서 종착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그 덕분에 조금 덜 절망스러워질 수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언제 다시 절망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이야기들에서 삶의 애환이 녹아있었다. 그들의 삶의 가지를 천천히 상상했고, 내 삶의 가지는 어느 부분에 있는지 점쳐보며 어떤 구멍이 있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구멍이 있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지. 분명 그 가지의 어느 부분에는 내가 예견하지 못한 자리에 구멍을 만들기도 하고, 이곳에는 구멍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부분의 구멍은 메꿔지기도 하며, 어떤 예상치 못한 부분에 다른 어린 가지를 만들어내 더 풍성하고 다양한 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_책 속의 문장

28. 조금 더 기다리면 하늘에 희미하게 달이 떠올랐다. 운 좋게 둥근 달을 보는 날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33. “오늘은 옥수수 없어?”

“가서 따올게.”

“아니, 이제 옥수수는 없어.”

49. 운오는 간혹 형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지만 결코 형이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자기를 죽일 줄 알았던 형이 자신을 살린 것을 ㅇ라고 운오는 구역질을 했다. (…) 그렇기는 해도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무섭고 겁이 났다. 죽기 전에도 형은 그런 존재였는데 죽고 나니 더 두려운 사람이 됐다. 고마운 적은 없었다. 자신을 구해줬어도 마찬가지였다. 형이 자신을 살린 걸 생각하면 언제나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82. “소령님 덕에 우린 좀 좋아졌잖아요.”

“소령님이 멀리서 걸어오시기만 해도 우린 다 쫄았어요.”

이진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권위와 위계를 칭찬으로 여겼다.

“우릴 엄청 팼으니까요. 툭하면 팼잖아요. 우리더러 악마에 씌웠다면서요.”

83. “사진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남아 있잖아요. 나를 때린 사람도 있고 내가 잘못한 사람도 있고요. 심지어 죽은 사람도 있어서 기분이 이상해져요. 소령님도 그럴 때가 있어요?”

86. “그런데 소령님.”

“소령님.”

“예? 소령님.”

106. 그후 수오와 무영은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둘이 있으면 적어도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미안해지는 일은 없었다. 서로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있었다. 죽을까봐 무서웠지만 죽지 않아 더 무섭다는 말 같은 것.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는 이유나 밤에도 불을 켜고 자는 사정을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 살아났다는 것에 감동받은 적 없지만 적어도 안심은 됐다.

113. 어떤 말은 내내 품고 있지만 결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도.

118. 미조가 거짓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하기 싫은 말을 하지 않았다.

121. 술은 미조가 온종일 잠을 자든 소리 죽여 울든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잠을 자도록 도왔고 마음껏 울도록 도와주었다. 미조에게 그렇게 해주는 건 술이 유일했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느긋하고 애틋하게 지난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금 더 마시면 금세 낙담에 빠져들었다. 취하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찾아왔고 알고도 간과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126. 딸은 요즘 들어 그런 말투를 썼다. 달래고 어르는 말투.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설득하고 안심시키려는 말투.

미조는 웃었다. 누군가 가까이 있기만 해도 충분할 때가 있다는걸, 미조에게 딸이 그런 존재라는 걸 딸은 모르는 것 같았다.

130. 남편은 황당하거나 불쾌한 일을 겪으면 화를 내는 대신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남편이나 미조나 어떤 일은 겪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경험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130. 여보.

어서 와요.

그래, 알았어요. 잘 있어요.

133. 여보, 나는 돈 새는 깨진 항아리가 되었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기껏 깨진 항아리라니.

미조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자신에게 부쩍 다가와 있는 미래에 가느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134. 남편은 순전히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헤매다가 종내는 스스로를 잃게 되는 일도 있으니까.

138. 미조는 모른 척했을 뿐이다.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울 방법이 없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해버린 것이다.

139. 아무리 말해도 달라지지 않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걸까. 자신이 그랬듯 딸 역시도 도울 수 없으니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일까.

189.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이가 괜찮았다.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했다.

195. 어머니가 가고자 했던 곳이, 멈추려던 곳이 어디인지, 날카로운 가위를 휘두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윤에게 가위를 휘둘렀을 때, 어린아이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을 때,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상처 입은 마음과 가위뿐이었으리라는 것을 막연히 이해했다.

201. 부모는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다.

209. 무엇보다 아줌마는 바깥의 공기를, 미래라 부를 수 있는 들뜬 마음을 환기시켜주었다.

210. 미래를 위한 보험이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달래지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집에는 언제나 나 혼자뿐이었다.

221. 아줌마는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거라고 했지만, 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자 여러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 미래는 바닥나버렸다.

223. 우리 미래를 부순 돈이 아주 적은 액수가 되어 돌아왔다.

224. 어떤 더한 일이 생겨야 엄마가 아줌마를 찾을지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생기기를 바랐고 더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아줌마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시련이 닥치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도움이 필요치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

작가의 말 _ 내게 있어 소설은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 낙차가 소설 쓰는 나를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는 것도. 그렇기는 해도 나아진 채로 삶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이 낙차와 실패를 잘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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