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4)




해프닝Happening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 앨런 캐프로Allan Kaprow(1927~)가 창안해낸 것이다.
캐프로는 1959년 뉴욕의 루빈 화랑에서 열린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 18 Happenings in 6 parts’이라는 자신의 전시회를 위해 만든 명칭이다.
이는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아티스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에서 참여자로서의 관람자는 오브제나 회화와 같으며 도구와 지침서는 캔버스의 천과 같다고 했다.
관람자는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요구되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다.
캐프로는 해프닝을 궁극의 실존적 참여라는 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세로 보았다.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화랑과 미술관과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하여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즈가 벌인 많은 해프닝들과 같이 정치-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일상적인 삶과 평범한 과학기술을 기이하고 낯선 상황이나 사건으로 바꿔 연출하는 것을 해프닝의 특성으로 본다.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 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되게 된 건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였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퍼포먼스 아트는 새로운 형식 중에서 가장 파악하기 쉽다.
퍼포먼스 작품에서는 아티스트 현전의 즉시성이 보장되고,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 대면의 직접성이 보장된다.
아티스트는 가능하면 폭발적인 전이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퍼포먼스 아트를 여성 다수가 차지하는 건 페미니즘 전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이 되기도 하는데, 요제프 보이즈에게서 보듯 의식의 변화를 통해 행위자가 변화된 사회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아트의 형태와 경향은 매우 다양한데, 빈 행위파는 사디즘과 마조히즘, 외설 취미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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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4)




해프닝Happening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 앨런 캐프로Allan Kaprow(1927~)가 창안해낸 것이다.
캐프로는 1959년 뉴욕의 루빈 화랑에서 열린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 18 Happenings in 6 parts’이라는 자신의 전시회를 위해 만든 명칭이다.
이는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아티스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에서 참여자로서의 관람자는 오브제나 회화와 같으며 도구와 지침서는 캔버스의 천과 같다고 했다.
관람자는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요구되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다.
캐프로는 해프닝을 궁극의 실존적 참여라는 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세로 보았다.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화랑과 미술관과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하여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즈가 벌인 많은 해프닝들과 같이 정치-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일상적인 삶과 평범한 과학기술을 기이하고 낯선 상황이나 사건으로 바꿔 연출하는 것을 해프닝의 특성으로 본다.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 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되게 된 건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였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퍼포먼스 아트는 새로운 형식 중에서 가장 파악하기 쉽다.
퍼포먼스 작품에서는 아티스트 현전의 즉시성이 보장되고,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 대면의 직접성이 보장된다.
아티스트는 가능하면 폭발적인 전이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퍼포먼스 아트를 여성 다수가 차지하는 건 페미니즘 전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이 되기도 하는데, 요제프 보이즈에게서 보듯 의식의 변화를 통해 행위자가 변화된 사회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아트의 형태와 경향은 매우 다양한데, 빈 행위파는 사디즘과 마조히즘, 외설 취미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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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5)




바디 아트Body art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 아트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 장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바디 아트 작품은 아티스트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몇몇 바디 아티스트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일부 미니멀 아티스트와 팝 아티스트들이 추구한 일상의 진부함을 계승하여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술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브루스 멕레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그의 <미소>(1969)는 아티스트가 미소 짓는 과정을 찍은 석장의 사진을 수직으로 배열한 것이다.
다재다능한 비토 아콘치Vito Acconci(1940~)는 매우 격한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 <들이마시기>(1969)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것이었다.


때때로 바디 아트 작품은 개인적으로 만들어져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전달된다.
작품 제작과정은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하며, 길버트Gilbert Proesch(1943~)와 조지George Passmore(1942~)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된다.


신체를 학대하는 아티스트들도 종종 있었다.
파리에서 지나 팡은 면도날로 자신의 신체를 베었으며 <식사>(1971)에서는 저민 고기 1근을 먹은 뒤 토했다.
윌리엄 웨그먼은 <11개의 이쑤시개 표정>(1970)에서 11개의 이쑤시개를 자신의 잇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레리 스미스는 자신의 팔에 6인치 길이의 상처를 내 <선 Line>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아콘치는 <문지르기>에서 레스토랑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계속 문질러 피부가 까지는 과정을 5분마다 사진에 담았다.
또 <손과 입>에서는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신의 손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1938~)은 자신의 몸을 롱아일랜드 해변의 햇볕에 노출시켜 햇볕에 그을리기 전과 후의 모습을 컬러사진에 담았다.
일부 아티스트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후기 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새로운 후기 회화적 추상 경향의 뛰어난 대표자들은 공통적으로 표현적인 붓자국, 특징적인 화면 질감과 같은 회화적 특질을 거부하고 액션페인팅의 자발적, 충동적 방법을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명료하게 규정하여 변화가 없는 색채의 영역으로 대체했다.
촉감이나 기타 착각을 일으키는 특질은 제거하고 미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하면서 일체의 부수적인 연상효과를 배제함으로써 순수 시각적 색채 미술을 목표로 했다.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것으로 1951년에 잭슨 폴록이 시작했고, 이를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에서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색면 회화에서 색채는 형상과 드로잉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유한 실재, 순수하게 시각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회화적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색채는 독립적이고 현실과 무관하며 비촉각적인 실재성을 지니게 된다.
종종 거대한 규모로 제작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시각 영역을 점유하고 크기의 효과를 창출한다.


하드에지 회화Hard Edge Painting는 평론가 쥘 랑스네르가 1958년에 ‘기하학적 추상’이란 기존의 낡은 명칭을 대신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명칭으로 로렌스 앨러웨이가 196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명칭의 채택 의도를 밝혔다.
그는 1959~60년경부터 단순한 형태와 풍부한 색채의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추상 흐름을 과거의 기하학적 추상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하드에지란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
하드에지 회화라는 명칭은 다소 서술적이며 모호하지만 색면 회화와 차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드에지 회화는 윤곽선이 분명한 넓은 색면으로 이루어지며 자연발생적이고 충동적으로 제작되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는 달리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추상표현주의가 실패한 이래 미술을 역사적 사명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갈 유일한 방법은 그가 1964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붙인 명칭인 후기 회화적 추상이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자신이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퇴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헬렌 프랭컨탤러,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Bernstein(1912~62), 그리고 케니스 놀런드Kenneth Noland(1924~)를 미술 발전의 투사들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제자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1939~)는 「세 명의 미국 화가들」이란 중요한 논문에서 이 영웅들의 집단을 확대해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1936~)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를 포함시켰으며, 그린버그 역시 두 사람을 칭찬하고 미술의 큰 희망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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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6)



키치Kitsch
키치는 한마디로 전위예술의 정반대인 후방예술을 말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지에 기고한 논문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에서 키치를 아방가르드의 정반대인 ‘모방의 모방’, 혹은 대중예술로 보았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소비문화가 만연하자 예술도 대중의 상품이 되었다.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것으로 키치는 순수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시뮬라크라simulacra(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한다.

키치의 선구자 중 한 사람 한스 라이만은 일찍이 1924년에 감미로운 것과 악마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에로티시즘의 묘사와 관련하여 “정욕이, 그러니까 목적이 그림에 거짓을 불어넣고, 이 거짓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고 했다.
에로티시즘은 결국 누드를 묘사하고 즐기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이 도덕적 정념과 에로틱한 욕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원하는 데서 키치의 양면성을 찾을 수 있다.
키치는 독일어로 ‘값싸게 하다’, ‘감상적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천박한 쓰레기’를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키치 대신 ‘싸구려 예술 Schlock art’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슐럭schlock은 결점이 있는 가짜, 싸구려의 조잡한 물건이란 뜻의 유태인의 이디시어에서 유래했다.

19세기 말의 인기 있는 회화는 하렘 장면이나 노예시장 장면이었다.
노예시장에서는 하렘의 백인 여자노예, 즉 오달리스크를 진열하여 매매했다.
이런 모티프는 여인을 누드로 묘사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며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말하자면 값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그림을 요구했으므로 화가들이 그들을 위해 그리게 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에서나 볼 수 있는 경박하고 음란한 성격이 악마적으로 유혹하는 요부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를 지오 H. 에드워즈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깨끗한 피부에 빨간 머리를 한 미녀가 북극곰 두 마리 사이에 있는 그림이다.
그녀가 앉아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미숙한 작품이다.
미숙함은 그녀의 양팔의 길이가 다르고, 다리의 길이가 실재보다 긴 데서도 나타난다.
화가는 원근법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드를 그리는 데만 관심을 두고 신비한 에로티시즘은 고려하지 않았다.

고대 건물이나 폐허는 감상적인 작품의 모티프로 적당하다.
폐허는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모티프였는데, 신비스러운 것, 과거의 이야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폐허는 키치적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 하는 수요를 충족시킨다.
폐허는 고대의 아름다운 것의 잔해인데, 사람들은 폐허 자체를 고대의 아름다움으로 바라본다.
부자 중에 폐허를 지어서 풍경을 미화시키고 부지를 더욱 흥미로운 장소로 만든 사람도 있다.
철학자 귄터 안더스는 이런 감정을 “열광적인 비애”라고 일컫는다.
열광적인 비애가 사람들로 하여금 산업적 폐기물을 아름다운 재료로 바라보게 만들며, 새것인데도 낡아 보이는 건물을 짓고, 일부러 허물어져가는 감상적인 분위를 불러일으키는 건물을 짓게 한다.
화가들은 폐허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폐허풍경을 묘사하면서 그림에 아름다움의 기능을 제공한다.
한스 차츠카의 작품에는 폐허의 아늑한 분위기와 함께 묘령의 미인이 환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이 있다.
들장미가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 잎 역할을 하면서, 화가가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은 면을 장식한다.
음울한 폐허와 창백한 소녀 사이의 강렬한 명암대조가 작품에 감상적 요소가 된다.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폐허가 두드러지거나 소녀가 두드러진다.
장미와 머리카락이 서로 얽혀있고, 어스레한 벽은 잠든 소녀 및 무성한 장미와 결합되어 작품이 신비롭게 보인다.

종교적 이미지에 키치가 도입되면 신앙심이 감상으로 바뀌게 된다.
루르드 수녀원의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환상을 토대로 곱슬머리에 불그스레한 입술, 육감적 표정으로 그려진 <자비로운 그리스도>는 감동적 순간의 진지하고 깊은 감정을 진부하고 감상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 그림은 그 앞에 있는 교황의 사진과 함께 2003년 10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즉위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되었다.
신, 성모 마리아, 예수 등을 플라스틱 이미지로 침대 탁자의 장식품으로 만들면 키치가 된다.
성물업자가 대량생산한 성화들에서는 깊은 종교적 감정이 진부하고 공허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바뀐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난다.
광고 및 디자인에 나타나는 유명 미술작품이 그런 경우다.
라파엘로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나오는 천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대표적이다.
1994년 이탈리아의 리치오네에서 열린 ‘예술과 담배’ 전시회에 F. 스피넬리는 천사들이 흡연하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흡연은 정말 유행이 지났는가?” 하고 물었다.
<최후의 만찬>을 100% 순면으로 만들면 키치가 된다.
사람들은 트럼프카드에서 <모나리자>를 보고 놀랄 것이다.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앤디 워홀에 의해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워홀은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하여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그가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라고 했지만, 보수적 비평가들은 “공허하고 초점을 잃은 그의 작품은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의식의 증거”라고 비판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게르노트 뵈메는 라스코 동굴화와 같이 보호를 위해 더 이상 전시될 수 없는 작품의 복제화에서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음을 예로 들어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복제를 통해 통속화된 지 이미 오래이므로 워홀이 서른 번 복제했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아트가 등장했다.
팝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아간 것이 키치아트이다.
제프 쿤스는 워홀이 멈춘 데서 출발하여 원화를 남용하지 않고 자신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천국에서 만든 Made in Heaven’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로나가 위에서>이다.
쿤스는 아내인 이탈리아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와 함께 자극적인 체위로 포즈를 취한 장면을 공개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나쁜 취향으로 여겨졌던 키치를 애용하는 것이 키치아트이다.
유머와 아이러니가 키치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사람들이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해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은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재한 키치적 성향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쁜 취향을 즐기던 사람이 떳떳해지고 그런 사람들이 일체감을 갖게 한 것이 키치아트의 성공이다.

키치는 경제상황이 나쁜 시기에 더 융성한다.
키치는 예술인 체 위장하기 때문에 키치를 키치로 식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도자기로 만든 섬세한 작은 인형 대부분이 키치이다.
키치는 예술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약간 아름답게 만들고 현실의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리려고 한다.
키치는 산업적 대중문화의 일부이다.
거의 차이가 없는 모티프를 늘 되풀이해서 그린 그림이 키치이다.
그런 그림이 과거에 이발소에 주로 걸려 있었으므로 ‘이발소 그림’이란 말이 생겼는데, 키치를 말한다.
요즘 중국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대량으로 제작하는 원화의 서툰 복제화가 키치이다.
키치는 저렴하기 때문에 장식용으로 널리 애용된다.
상아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성모상, 석고로 만든 그리스도상, 주물로 만든 성물들이 키치이다.
성모상의 볼에 흐르는 눈물은 키치의 특징이다.
거기에 조개를 붙이고 반짝이는 값싼 플라스틱 꽃을 장식하면 최악의 키치가 된다.
그러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파는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 복제품은 키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귀히 여긴다.
키치이지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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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전파Pre-Raphaelite>



르네상스 말기의 문화, 회화의 전통에 반대하며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 이전의 성실하고 소박한 화풍, 즉 아카데미즘의 원류로 간주되는 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는 왕립미술원에 재학하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존 에버렛 밀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세 명이 1848년에 결성했으며 이들은 영국 회화의 정체停滯를 타파하려고 했다.
라파엘전파가 과거 회화에 보인 지속적인 관심은 중세주의를 지향하던 낭만주의 운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9세기 초반 유럽에 만연한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가 중요하게 여긴 규칙의 준수에 반대하며 개인의 감정과 정체성에 더 가치를 두었다.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받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 회화보다는 중세 회화가 더 자유로운 개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중세는 현실과 반대되는, 상실한 정신과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는 성소였다.
그들은 중세의 건축과 미술, 문학 속에서 발견한 로맨스와 꿈같은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에 심취했다.


로제티는 홀먼 헌트와 밀레이를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서로의 우정, 과거 회화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무한한 열망으로 결속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이것이 라파엘전파를 결성하는 동기가 되었다.
로제티가 라파엘전파 구성원의 수를 늘리자고 제안했지만 무계획적이며 다소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은 새 구성원으로 선택되었지만 헌트가 그를 반대했는데, 이들보다 7년 연상인 브라운은 라파엘전파 결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새로운 구성원 대부분은 로제티의 친구들이었다.
가장 먼저 가입한 스물세 살의 토머스 울너Thomas Wollner(1825-92)는 빈약한 재능의 소유자이면서도 성공한 조각가이자 아마추어 시인이었다.
로제티가 그를 좋아했더라도 울너가 라파엘전파주의에 유일하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카데미에 대한 격양된 저항뿐이었다.
로제티가 지명한 또 다른 구성원은 자신의 동생이며 시 공무원으로 미술평론가 역할을 한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William Michael Rossetti(1829-1919)와 제임스 콜린슨James Collinson(1825-81)였다.
윌리엄은 열여섯 살 때 간접세무국(후에 내국세입청이 됨)의 사무원이 되어 연봉 80파운드를 받았고 이로써 로제티 집안의 대들보가 되었다. 윌리엄은 1874년 마흔다섯 살 때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딸인 에마 루시와 결혼했다.
노팅엄Nottingham에 있는 서적판매상의 아들 콜린슨은 왕립미술원에 수년 동안 재학하며 재능을 보인 학생이었다.
헌트는 로제티의 동생이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콜린슨이 구성원이 된 중요한 이유는 로제티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약혼자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헌트가 추천한 유일한 구성원은 자신의 친구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스Frederick George Stevens(1828-1907)로서 그의 학업은 왕립미술원의 고대학교 그 이상으로 진척되지 않았으므로 유화를 그려본 적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곱 명의 구성원이 서양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라파엘전파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울너는 뛰어난 작품을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거의 없자 1852년에 금광을 찾아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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