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모호한 낭만주의 개념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아르놀트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서양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로 보며 낭만주의자들은 스스로 역사적 역할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딕 이래 감수성의 발달이 그때처럼 강한 자극을 받고 자신의 감정과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리가 철저히 강조된 적이 일찍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낭만주의자들이 묘사한 예술감정과 세계감정의 특징에는 늘 향수 아니면 고향상실이라는 사고가 나타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스스로 목적도 끝도 없는 방랑을 했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자 했으며, 찾은 후에는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독을 택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괴로워하면서도 이런 소외를 긍정하고 소망했다.
그래서 노발리스는 낭만주의 시를 “쾌적한 방식으로 사물을 소외시키는 예술, 즉 사물을 낯설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친숙하고 매력 있게 만드는 예술”로 규정하며 모든 것은 “그것을 먼 곳으로 옮겨놓을 때” 낭만적·시적으로 되고 또한 “평범한 것에 신비스러운 외관을,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위엄을, 유한한 것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할 때” 모든 것은 낭만화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발리스가 삶을 낭만적으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삶을 예술에 적응시키고 미학적·유토피아적 생존의 착각 속에 잠기게 했다.
이런 낭만화는 인생을 단순화시키고 통일화하며, 모든 역사적 존재의 고통스러운 변증법으로부터 인생을 해방하는 것을 뜻하며,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인생으로부터 제거하고 소원성취의 꿈과 환상에 대한 합리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 이후의 시대는 한마디로 환멸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현재를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것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지식인층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다른 사회계층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정신적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그들만의 고립된 삶을 영위했다.
속물이라는 개념과, 시민과 대비되는 부르주아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예술가와 시인들이 자기들의 물질적·정신적 생존을 힘입어왔던 바로 그 계급에 대해 경멸과 증오를 퍼붓는 유례가 없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초기 낭만주의가 시도한 것처럼 자기들의 유미주의를 통해 다른 세계로부터 단절된 그리고 자기들만이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려고 했다.


예술가들에게 낭만주의는 자의로 그리고 타의로 붙여졌다.
낭만주의와 유사한 경향을 띤 과거 예술가들도 낭만주의에 속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의 선조인 디드로는 『극적 시에 관하여』(1758)에서 시는 “무지막대하고 야만적이며 미개한 것을 목표로 삼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낭만적 속성들 중 하나이지만 낭만주의가 시작된 시기에 비하면 40년 전의 선언이었다.
원래는 작가들에게만 한정되었던 ‘낭만적’이란 명칭이 유사한 사고를 가진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붙여지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화가로는 들라크루아·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조각가로는 당제르, 작곡가로는 슈만·베버·베를리오즈 등이었다.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상의 유사성만으로 계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이 계보에 속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타칭으로 분류된 예술가들 사이에 유대가 없었으므로 하나의 계보에 속했다 하더라도 공통된 권리를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라고 하면 매우 다양하고 서로 이질적인 인물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되어버렸다.


타타르키비츠는 낭만주의에 대한 무수한 정의 가운데 25개를 선별하여 저서 『미학의 기본개념사』에 소개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이 모든 정의들은 다양하지만 어느 면에서 서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우선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의 반대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정의들에서 낭만적인 미를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요약했다.
강력한 열정의 미, 상상력의 미, 시적인 것의 미, 서정적인 것의 미, 형식이나 규칙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적이고 무정형인 미, 이상야릇함, 무한함, 심오함, 신비, 상징, 다양성의 미, 힘, 갈등, 고통의 미일 뿐 아니라 환상, 소원함, 그림같이 생생함의 미, 강력한 효과의 미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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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낭만주의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이다.
전례 없는 정치적·사회적 대변혁의 시기에 출현한 낭만주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비극적 관점은 미술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작가, 배우, 음악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종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갖고 민중의 선도자로 우뚝 서는 것이었다.
1800년 스탈 부인은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운명의 불완전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감정 덕분이다”라 하고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감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정신·감정·행위의 숭고함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그 힘을 얻는다.


화가들은 복잡한 인간의 존재와 미래가 불확실한 사회를 그리면서 극적 표현을 강조했는데, 이는 고전의 이상적 미를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대조가 되었다.
근대가 ‘우리시대의’ 혹은 ‘바로 지금’이란 의미에서 본다면 아이러니하고 반영웅주의가 낭만주의에 나타난 것은 아주 당연하다 하겠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향은 감정적으로 좀 더 조절된 사실주의가 출현하는 1840년대까지 존속되었다.


1800년부터 나폴레옹 집권 시의 업적을 기록하는 서사시적 그림들이 등장했다.
그로와 지로데의 전투장면들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들, 특히 다비드가 금기시한 폭력과 죽음 등이 있었다.
그로가 1804년에 그린 <자파의 역병 환자들의 집을 방문한 보나파르트>87가 그 한 예가 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화 외에도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화와는 달리 밤의 분위기, 혼란스러운 감정의 표현, 몽환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
이성적이기 이전의 감정적인 인간, 자연과 인간에 더욱 더 잘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일관된 숭배, 전체적인 삶과 함께 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점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하여 발생하는 존재의 행복에 대한 향수, 이 모든 것이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 이미 루소의 영향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여기에 화가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가 샤토브리앙(1768-1848)으로부터 비롯된 자아숭배를 서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전통 미학의 규제와 금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는데, 낭만적 감정이 싹튼 것이다.
생말로에서 태어나 브르타뉴 지방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근대 세계의 불안정성을 이론화한 『대혁명에 관한 논평』(1797)을 썼다.
이 책은 낭만주의의 모든 기본 주제들을 망라했다.
1792년부터 1800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그는 1800년 프랑스로 돌아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 생활을 시작했다.
『아탈라』(1801)는 그가 쓴 최초의 위대한 문학 텍스트로서 샥타스와 아탈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참신한 문체와 언어로 낭만주의자들의 이국 취향을 예고했다.
지로데는 이 이야기를 <아탈라의 매장>88이라는 제목으로 묘사했다.
샤토브리앙의 기념비적 낭만주의 작품인 『죽음 저편의 회상』이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에 그려진 것은 불연속적이거나 방황하는 자아로서 여행자·작가·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세 가지 성격을 되짚은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원정과 황실의 주문은 화가들에게 동방(유럽의 시각에서 본 동방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말함)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동방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언론에 상세하게 보도되었으며 그로, 지로데 등의 화가들이 역사화에서 즐겨 다루었던 소재인 나폴레옹 원정을 계기로 또다시 현실성 있게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래 화가들이 선호하던 여행지는 이탈리아에서 동방으로 바뀌었다.
동방에 대한 관심은 낯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다른 민족을 만나보기 위해 자국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811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발표한 샤토브리앙을 본받아 포르뱅(1818), 드캉(1827), 도자(1830), 들라크루아(1832), 마지막으로 샤세리오(1846)가 스페인, 아프리카, 근동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받은 인상은 그들의 화풍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주로 과거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고, 1832년 모로코를 방문한 뒤로는 좀 더 이국적인 주제도 다루게 되었다.
하렘(후궁)의 모습을 담은 <알제리의 여인들>89은 1832년에 6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의 결과이다.
앵그르는 동방에서 영감을 얻어 관능적이면서도 차가운 하렘의 여인들을 그리게 되었으며 동방 여인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앵그르와는 반대로 들라크루아가 그린 동방의 여인들은 보다 야성적인 관능성이 배어나거나 하렘의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어 그의 영감이 열정적이거나 향수에 젖어 있음을 나타냈다.
마리 클로드 쇼도느레 외 네 명의 공저 『프랑스 낭만주의』에는 프랑스 낭만주의에 끼친 동방의 오리엔탈리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지리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동방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동물적 관능성의 확인에 이르기까지, 나르시스적 내향성에서 자아의 충일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낭만적 상상계의 모든 단면을 담고 있었다.
네르발과 고티에의 여행기 『콘스탄티노플』(1853)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빅토르 위고의 『동방 시집』(1829) 서문은 동방이 낭만주의자들을 얼마나 강한 매력으로 사로잡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의 또 다른 바다인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중세시대처럼 위대하고 호화롭고 풍요롭다.”


프랑스 낭만주의에 끼친 영향으로 독일과 영국의 문학을 꼽을 수 있다.
스탈 부인으로 불리는 안-루이즈-제르맹 네케르(1766-1817)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외국 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스탈 부인은 파리에서 스위스인 부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가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시대에 재무장관을 지낸 자크 네케르였고, 어머니 쉬잔 퀴르쇼는 프랑스계 스위스 목사의 딸로서 파리에 문인과 정객들이 모이는 화려한 살롱을 열어 남편의 출세를 도왔다.
일찍부터 미모뿐 아니라 발랄한 재치로 명성을 얻었던 스탈 부인의 사상에는 루소의 열정과 몽테스키외의 합리주의가 특이하고 대립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몽테스키외의 숭배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견해를 받아들였고, 프랑스 혁명을 지지해 자코뱅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국민이 선출한 기구인 국민공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를 다스리던 시기에, 온건한 지롱드 파는 그녀의 사상과 가장 잘 들어맞았다.
스탈 부인은 또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유럽인들은 그녀를 나폴레옹과 앙숙으로 여겼다.
그녀는 자신의 코페 성을 유럽의 재능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소로 만들었으며 『독일론』을 통해 독일 문학을 소개하는 일에 기여했다.
괴테는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위대한 미학적 원천이 되었고 네르발은 1828년부터 『파우스트』를 번역했다.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기를 그린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클로드 프롤로라는 인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는 1836년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문학의 가장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자살로 이끄는 정열을 묘사한 이후 『파우스트』에서는 악과 불행을 가장 어두운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 낭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영국 문학이다.
심리적·정치적 통찰의 작품으로 유명한 스탕달은 『라신과 셰익스피어』(1823-25)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에게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본받아야 한다고 적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은 대단했는데 위고는 『동방 시집』(1829)에 실린 시 《하렘의 머리들》에서 “오 끔찍하도다! 오 끔찍하도다! 너무도 끔찍하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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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영향





보이즈는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제나 그룹Jena Group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제나 그룹은 1798년부터 1803년까지 존속한 매우 단명한 그룹이지만 이 그룹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낭만주의 학파였다.
독일 새 문화를 창조한 이 그룹에는 프리드리흐 슐레겔Friedrich Schlegel과 그의 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 그리고 그의 아내 캐롤린Caroline이 있었고, 시인 루드빅 틱Ludwig Tieck이 있었으며 그들 모두 제나에 살고 있었다.
보이즈는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철학자 셀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1775-1854)이 제나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역사학자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1759-1805)가 또한 이 대학에서 가르쳤고, 나중에 소설가 노발리스Novalis(본명은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Friedrich von Hardenberg, 1772-1801)가 이곳에서 가르쳤는데 보이즈는 그들 모두에게 관심이 많았다.
제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이마르Weimar이며 그곳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가 살고 있었다.
괴테와 쉴러는 낭만주의 그룹을 형성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들은 낭만주의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으며, 보이즈가 존경한 사람들이었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은 보이즈가 낭만주의 작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이었으며 인간의 이상주의와 자연의 실재가 조화로워야 한다는 괴테의 주장을 그가 받아들였다.
괴테는 자연에서 삶의 형성과 동력주의를 발견했고 보이즈 또한 자연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보이즈는 과학의 기계주의와 수학적 개념이 유기적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힘의 양극성을 통해서 발전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괴테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괴테는 예술이 작용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로서의 과학을 주장하였으며 이런 점을 보이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보이즈는 괴테와 노발리스의 작품을 탐독했다고 했는데 노발리스 또한 예술과 과학의 평행주의를 주장한 인물이다.
노발리스는 “평범한 것을 우수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신비의 출현을 보며,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하라”고 했으며 노발리스의 말을 보이즈가 받아들였다.
노발리스는 시인의 영혼이 자연 또는 실재와의 균형 또는 조화로운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예술가가 자연에서 정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고, 실재 오브제 안에서 혼을 발견하며, 일상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신비를 발견하는 걸 의미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닌데 과학자는 자신을 지식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가정을 실험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알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정이 유용하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괴테와 노발리스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예술과 과학의 평행주의를 주장한 것이며 이 평행주의가 보이즈에게 영향을 주었다.


보이즈가 스타이너의 저서를 읽을 때 순수 지식의 형상과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보이즈는 동양 철학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서양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나타난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증명을 요구하지만 동양 사람들은 단순한 관망으로도 삶의 흐름을 안다고 생각했다.
동양 사람들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증명하는 걸 원치 않는다.
노발리스와 스타이너는 자연을 모든 수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상들의 보물로 보았으며 이런 점을 보이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보이즈는 자연에 인간을 위한 은유가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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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2)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정크 아트Junk art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61년 뉴욕 모마에서 개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5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참가한 전시회에 종합적 입체주의를 비롯하여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제작한 콜라주와 작은 구성작품, 뒤샹의 레디메이드, 코넬의 상자 구성작품, 드 쿠닝, 머더웰, 라우셴버그 등이 제작한 콜라주, 알베르토 부리의 거친 삼베를 부착한 회화, 네벨슨, 탱글리, 스탕키에비치, 장 크로티의 조형물, 세자르의 압축된 자동차 집적물, 키엔홀츠의 타블로 작품 등 다양한 양식과 화파를 폭넓게 보여주는 오브제들이 전시되었다.
아상블라주라는 명칭이 이처럼 폭넓게 확대 해석되고,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자 상대적으로 명칭의 유용성은 감소했다.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데, 정크 아티스트들은 종종 산업쓰레기들을 조립하여 표현적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 목적을 위해 비미술의 재료를 조각적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용어이므로 팝 아트, 표현주의 미술, 정크 아트, 혹은 펑크 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정크 아트는 전통 재료를 무시하고 쓸모없는 재료, 폐품,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 구성된 미술로서, 미국에서 이 운동의 기원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1925~)의 ‘콤바인 combines’ 회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티스트와 미술 자체의 극단적인 가치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라우셴버그는 이런 혼란스러운 작품을 한동안 제작했다.
그가 오브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사용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에서까지 계속 유지되어 온 환영적 공간을 파괴하고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미술의 인상을 바꾸어놓기 위해 삶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신문지, 인쇄된 복제물, 낙서, 전구, 박제된 새와 동물, 의자, 문, 창문, 침대, 베개, 가방, 군화, 괘종시계, 걸레, 자동차바퀴, 스프링 등 삶의 도구들을 작품에 혼용했는데, 존 케이지John Cage(1912~92) 영향이었다.
케이지의 기본 사상은 이미지의 범람으로 관람자의 정신을 분산시켜 명상적 분위기를 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크 아트에서 체임벌린과 디 수베로의 작품은 유명한데, 두 사람 모두 산업재료를 사용한 영국의 입체주의 조각가 앤터니 카로의 영향을 받았다.
카로의 조형물은 모든 부분이 조형물 자체로 보이는 것으로 채색된 형태들의 공간적 관계 속에 내재된 것 외에는 어느 형태나 의미도 배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위트가 있고 우아하며 미니멀 조각보다는 덜 엄격하다.
이런 지적, 미적 기반이 카로를 추종한 조각가들이 발견해낸 것이다.
미국 조각가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1927~)은 자동차의 몸체를 일그러뜨려 추상 아상블라주 조형물을 제작하여 유명해졌다.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다.
체임벌린의 조형물은 회화에서 드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으며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를 분출했다.
이런 재료를 사용한 의도는 사회적 논평보다는 완성된 작품의 형식적 특성과 관련되지만, 재료의 출처가 작품에 남아 있어 전체적 인상에 영향을 준다.

미국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1933~)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 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아상블라주를 제작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 원리를 반기하적 균형으로 나타냈다.


상황 미술Situation art
상황 미술은 관람자를 단순한 외부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게 하나의 사건, 혹은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프닝과 그 목적이 같다.
팝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결여되어 있는 휴머니즘의 가치를 신봉한 조지 시걸George Segal(1924~2000)은 석고로 인물상을 실물에서 떠낸 뒤 실물과 똑같이 제작한 것을 상황으로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물상은 사실적으로 나타났으나,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상의 흰색이 사실주의의 환영을 없앴다.
1950년대 말 조형물로 관심을 옮겨 철사 그물과 올이 굵은 삼베 위에 석고를 바르는 실험적 작업을 했으며, 작품의 특징은 하나의 인물상, 혹은 군상으로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인다.
그가 제작한 실제 크기의 고독한 익명의 석고 인물들은 진부한 일상에서 따온 몇몇 실재 사물들이 있는 상황 속에 자리 잡는다.
판에 박힌 제스처 속에 고정되어 버린 유령 같은 인물들은 몰개성적 사회 속에서 영혼이 없는 육체들이다.
그의 인물상과 군상은 금세기의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보다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 주제인 현대인의 정신적 고립과 소외감을 잘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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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3)




펑크 아트Punk art

펑크 아트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아티스트 그룹이 시작한 것으로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다룬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시크 아트Sick art로도 불린다. 불쾌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병적 자기 현시욕을 다다, 팝 아트와 결합시킨 것이다.
펑크 아트의 특징은 감정이 배제된 비인간적인 순수성에 반발해 혼합물, 병적인 것, 싸구려, 기이한 것, 모조품, 사악한 것,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성적인 점을 선호하는 것이다.
펑크와 ‘냄새나는’, 혹은 ‘더러운’이란 뜻의 펑키라는 용어는 재즈 용어에서 온 것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에드워드 키엔홀츠Edward Kienholz(1927~94)는 1950년대 말부터 회화를 그만두고 오브제를 가지고 작업하기 시작했으며, 오브제들이 비싸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1961년에 매음굴의 장면을 <록시의 집 Roxy's>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첫 펑크 아트 작품을 ‘잡동사니’라고 했다.
이 작품은 라스베가스의 매음굴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것이며, 제목은 ‘수지맞는 일이 머릿속에서 활개 칠 때’라는 어린이들이 술래잡기에서 부르는 노래구절에서 따왔다.
평범한 장식의 침실 패러디에서 라디오는 멋없는 음악을 뱉어내고 거울은 성교를 준비하는 한 쌍의 사실적 이미지를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이불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미국 민속의 일면을 취해 부패하고 심리적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미국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키엔홀츠에 의해서 펑크 아트는 팝 아트가 지향하던 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도덕적 분개의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키엔홀츠는 생활의 기이하고 하찮은 단편을 이용하며, 실제 오브제로 구성되는 환경 속에 인간의 육체, 혹은 시체를 설치하여 혐오스럽고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상황을 만들었다.
살인, 섹스, 출산, 죽음, 부패와 같은 잔혹한 이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를 막기도 한다.


비디오 아트Video art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비디오 아트는 반문화, 특히 1960년대 초 일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의 작업 중에 생겨난 해악적 상업 TV에 반대하는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프랭크 포퍼Frank Popper는 비디오 아트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포퍼는 ‘게릴라 비디오’라 칭했다.
넷째,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 설치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1964년에 뉴욕에 정착한 백남준은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하고 즉시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그 날 저녁 아티스트 클럽 카페 고고에서 선보였다.
케이지의 <조합 피아노>에서 감동을 받은 백남준은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 방영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렸다.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백남준은 종종 첼리스트 샤롯 무어만과 공동으로 작업했다.
1965년에 소개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은 에로틱한 작품이다.
무어만은 <첼로 조곡 Suite for Cello>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계속했다.
같은 해 발표한 <생상스 테마의 변주곡 Variation on a Theme of Saint-Saens>에서 무어만은 좀 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 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특히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다.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좀 더 진지한 성격을 띤 빌 비올라Bill Viola(1951~)는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늘 첨단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고 종교적 경건함까지 느끼게 한다.
빛과 어둠, 움직임과 정지, 물질과 정신 등의 대립적인 요소와 이미지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작품은 고도의 촬영과 편집기술을 동원한 것으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관람자를 그의 세계로 몰입시킨다.
그의 작품을 동양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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