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 루이 14세시대의 예술적 기호
그랜드 매너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드 샹파뉴 그리고 푸생과 더불어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웅대한 간결성과 힘 있는 구도는 푸생, 로랭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1620년경 로랭 공작령인 뤼네빌로 가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한 라 투르는 위트레흐트 파에 속한 네덜란드 화가로, 풍속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린 게리트 반 혼토르스트50로부터 카라바조 풍의 극적인 효과를 내는 명암법을 배웠다.
1645년경에 그린 <신생아>49가 한 예인데, 대부분의 화가들이 실재 아기를 보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라 투르는 실재 모습을 보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코와 입이 두드러지고 볼이 생략된 것은 아기를 보고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물의 형상을 기하적 형태로 단순화시키고 촛불이나 횃불만이 비추는 실내 정경을 묘사하여 장엄한 단순미와 경이로운 고요함을 보여주었다.
라 투르는 카라바조 신봉자들로부터 유래한 자연주의를 고전주의로 전환시켰으며 거기에는 푸생과 샹파뉴와 동일한 정신이 담겨 있다.
루이 13세는 1643년 5월 14일에 사망했다. 당시 루이 14세(1661-1715)는 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의 어머니인 안은 파리에 자리를 잡고 새 섭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남편의 유언을 무효화했고, 추기경 쥘 마자랭(1604-61)은 수석대신이 되었다.
안이 섭정을 시작할 때의 나이는 42세였다. 보석과 궁정 생활을 좋아한 안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로부터 자주 모욕을 받곤 했다.
두 아들 루이와 필리프를 둔 안은 정치적 경험이 없었으므로 국사의 운영을 마자랭에게 맡겼다.
여러 해에 걸쳐서 스페인 출신의 안과 이탈리아 출신의 마자랭의 기이한 결합은 메디치 가의 마리의 섭정기 때와 마찬가지로 불평과 중상모략, 끝내는 다양한 사회 층에서 반란을 야기했다.
루이 14세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648년, 마자랭의 미움을 받아오던 귀족들과 파리 최고법원이 왕에 대항해 반기를 든 프롱드의 난(1648-53)으로 알려진 기나긴 내란이 시작되었다.
내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루이 14세는 가난과 불운, 두려움과 굴욕감,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이런 시련이 앞으로 드러낼 성격과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에 크게 작용했다.
1653년 반란 진압 후 마자랭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루이 14세와 더불어 특별한 행정기구를 만들어 나갔으며, 어린 왕은 예술과 우아함 그리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마자랭의 성향을 몸에 익혔다.
그는 마자랭의 조카딸 마리 만치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2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절박한 정치 상황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스페인과의 평화를 위해 1660년 8월 26일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를 아내로 맞아야 했다.
마자랭은 1661년 3월 9일에 사망했다.
유방암에 걸린 안은 1666년 1월 20일에 사망했다. 섭정을 해오던 마자랭이 죽자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 루이 14세는 재무총감 장-밥티스트 콜베르(1619-83)의 도움을 받아 국가 재정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다.
상인 집안 출신의 콜베르는 다양한 행정직을 거친 뒤 재무총감이 되고 국가의 통제 기관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이 된다.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업적으로 국력이 증대된 프랑스는 17세기 후반기의 유럽에서 명백한 우월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대부인 마자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간키의 그는 끊임없는 예식 속에 살면서 하녀에게도 경어를 쓸 만큼 예의범절에 밝고 비상한 자제력을 지녔다.
그는 대식가, 사냥꾼, 호색가였고, 그의 정부들은 12명의 서자를 낳았다.
그는 지나친 오만함, 매우 높은 직분의식으로 말미암아 1662년부터 태양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54년 동안 매일 8시간 정무에 열중했다.
궁정의 예절부터 군대의 이동까지 그리고 길을 닦는 일부터 신학적 논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하려고 했다.
그는 젊음과 정열이 넘쳐흘렀으며, 장엄함에 매료되는 프랑스다운 기질을 충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둔 셈이다.
왕은 정력적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세우는 데 열을 쏟았으며 프랑스의 모습과 삶의 방식이 바뀌어 거대한 도시들의 형태가 변했고 풍경은 달라졌다.
생제르맹과 마를리에 있던 눈부신 궁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아직도 건재하다.
건축 도중에는 낭비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며 나라를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비난받았으나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진 뒤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프랑스의 위신을 드높였다.
루이 14세의 정치적 절대주의는 17세기에 가장 과장된 형태로 나타났다.
절대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왕권신수설과 계약설이 있다. 왕권신수설은 지상에 왕권이 가장 우월하고 이는 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견해이다.
왕의 권력행사는 절대적이며 어느 누구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계약설은 토마스 홉스로 대표되는데,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체계 있는 군주론을 전개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왕이란 신의 지시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유일한 입법자이자 사법자이고, 또한 국민의 최고 행정관이라고 선언했다.
결정의 권리를 신하에게 혹은 명령의 권리를 백성에게 귀속시키는 건 사물의 올바른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이다.
심의 혹은 결정의 권리는 오로지 수장인 왕에게 있다.
신하들의 권리는 자기들에게 내려진 명령을 효과 있게 운영하고 수행하는 데 있다.
그는 “신하가 군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비록 군주가 악인이나 압제자라 하더라도 언제나 변치 않는 범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또 “왕은 절대군주이므로 당연히 성직자든 평신도든 신하들의 전 재산의 처분권은 완전히 왕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 후반기를 루이 14세의 시대라 한다.
루이 14세의 왕권신수설은 17세기 유럽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서 1660년대까지는 공화국인 스위스 일부와 이탈리아 및 네덜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나라들은 절대군주제를 받아들였으며, 각국의 군주는 루이의 행동 패턴을 모방하려고 했다.
루이는 ‘태양왕 le Roi-Soleile’ 혹은 ‘대군주 Grand Monarque’로 불렸다.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을 때 파리 시민이 마자랭 추기경의 저택 유리창을 돌로 깬 사건이 일어나자 1651년 마자랭은 파리를 떠나 지방 도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 남은 콜베르는 마자랭의 대리인이 되어 파리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고 개인적인 일을 돌보아주었다.
마자랭은 다시 권력을 잡은 뒤 콜베르를 개인비서에 임명하고 사적으로 이익이 많이 남는 관직을 사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콜베르는 부자가 되었고 세넬레 남작령도 취득했다.
마자랭은 임종하면서 루이 14세에게 콜베르를 추천했고 왕은 곧 콜베르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콜베르는 왕의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의 행정 전반에 걸쳐 국왕에게 봉사하는 데 비상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콜베르는 통찰력이 있었으며 매우 부지런했고, 오늘날의 6~8명의 장관에 맞먹는 권한을 지녔다.
그는 총감독관이자 재무총감이며, 고등참사회의 구성원이자, 바로 그 자격으로 국무대신이며, 해군담당 국가비서이자 왕실담당 국가비서였다.
콜베르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지출을 절감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강화시켰다.
가장 정직하고 효과적인 제도에 따라 정부 수입을 징수했으며, 예산 지출을 절감하고 담세 능력이 있는 모든 계급에게 과세를 균등하게 부담시켰다.
그리고 부진한 농업과 공업 부분을 면세와 지원으로 장려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중상주의와 일치한다.
이 같은 콜베르주의는 새로운 절대군주의 국가 정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콜베르가 이루어놓은 풍부한 재원으로 국방장관 루보아의 지휘 아래 프랑스 육군은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군대가 되었다.
프랑스는 정부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봉급과 제복을 지급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1669년에 콜베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해 프랑스의 예술 및 지적 생활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었다.
콜베르는 예술에서도 프랑스의 힘과 명성을 높인다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콜베르는 왕의 승리를 기념하는 훈장과 기념비에 새길 명문을 선정하기 위해서 ‘금석학 및 문학 아카데미’를 창설했고(1663), 프랑스 왕국을 위해 과학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과학 아카데미를 창설했으며(1666), 프랑스 건축 작품의 취향을 세련되게 하고 규칙을 정하기 위해서 왕립 건축 아카데미를 창설했다(1671).
콜베르는 또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처럼 예술가들이 당대의 거장들 밑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을 세웠고, ‘언어 학교’처럼 동양의 언어들을 공부하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진 학교도 세웠다.
그와 루이 14세의 목적 중 하나는 프랑스의 왕권을 전 세계에 장엄한 이미지로 알리는 것이었다.
루이 14세의 치세기가 고전예술이 꽃피고 교양인의 전형이 나타난 시기이기는 했으나 1690년경 남성의 70퍼센트와 여성의 86퍼센트는 여전히 문맹이었으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허황된 이야기나 미신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인 세계였다.
장엄한 프랑스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의 재건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화려한 위용은 중앙집권체제의 상징이 되었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 위치한 이 궁전은 1624년 루이 13세가 착공한 수렵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3단계로 증축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실권을 잡자마자 1661년 르 보에게 베르사유 궁전 앞뜰에 두 개의 부속건물을 증축하고 장식을 첨가해 기존의 성채를 확장할 것을 명령했다.
정원은 1662~90년 조경설계가 앙드레 르 노트르의 설계에 따라 변형되었다.54, 55
이것은 당시의 프랑스 문화를 지배하던 합리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형식과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루이 14세는 1669년에 르 보의 설계에 따라 좀 더 근본적이고 장대한 궁전 재건축을 시도했다.
이때 중앙부가 증축되었으며 그 의장은 장대한 규모와 고전주의 원리가 결합된 것이다. 건물 내부는 르 브룅의 지휘 아래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당시 이탈리아 바로크의 흐름을 받아들인 기법과 디자인을 적용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대사의 계단’이 유명하다.
세 번째 재건축은 1678년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지휘로 시작되었다.
망사르는 1674년 루이 14세의 정부 몽테스팡 부인을 위한 클라니 성 개수작업을 맡으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재건축은 그 규모가 유례없이 커서 르 보의 건축물에 담겨 있던 정신을 모두 없앨 정도였다.
정원쪽 1층 위에 세운 르 보의 테라스는 뮤지엄으로 대체되었으며 양쪽 부속건물은 일직선으로 통합되었다.
그는 중앙 건물 남북에 약간씩 후퇴한 부속건물을 각각 세워 전체적으로 파사드를 503미터까지 확장시켰다.
‘거울의 회랑’56에는 17개의 거울로 만들어진 아케이드가 천장 부근까지 메우고 있으며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였다.
‘그 양쪽에 인접한 두 개의 회랑, 즉 ‘전쟁의 회랑’과 ‘평화의 회랑’도 이때 만들어졌으며 망사르와 르 브룅이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전쟁의 회랑’에는 색조 회반죽으로 된 타원형의 커다란 부조가 있었으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졌다.
‘평화의 회랑’에도 유럽의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졌다.
망사르는 1689년 베르사유 궁전에 거대한 궁전 예배당57을 착공했으며 건축물은 1703년에 완공되었다.
여러 해 동안 2~3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루이 14세는 공사장에서 죽은 노동자들의 부인들에게 연금을 주었다.
바로크의 풍요로움과 장중함을 프랑스 합리주의와 ‘좋은 취미’에 적당히 결합시킨 베르사유 궁전의 기호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과 유럽에서 궁정 양식의 기준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자신의 위대함의 상징으로 계획하여 궁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여기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수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지만 왕의 전례 없이 강력한 과시욕에도 자극을 받았다.
루이 14세는 여섯 개의 궁전을 가졌지만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했다.
이 궁전의 인구는 1만 5천 명에 달했으며 궁전에서는 사치와 안일의 생활이 지속되었다.
1663년 소규모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던 고블랭이 왕가에 물건을 대주는 종합공장으로 확장되면서 르 브룅은 책임자가 되어 왕실에 봉사하는 각종 공예기술자들을 모집했다.
이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예술적 교의의 공식 체계와 미적 가치관의 공식 기준이 1663년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재편성을 통해 강화되었다.
1666년에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공인된 훈련을 제공할 목적으로 로마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콜베르가 정치 고문 겸 재무총감에 임명된 후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는 전제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고도의 체계화된 강력한 기구가 되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예술적 기호와 제작의 통제도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미술품 컬렉터였으며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 기여한 유능한 수완가였다.
콜베르의 독재 하에 콜베르의 사상을 충실히 구현한 샤를 르 브룅의 기교에 힘입어 유럽 예술의 중심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옮겨졌다.
루이 13세의 전형적인 프랑스 고전주의에서 루이 14세의 장엄하고 화려한 양식으로서의 그랜드 매너Grand Manner가 탄생했다.
루이 13세 때에 예술과 정신의 영역에서 나타났던 표현의 절제, 중용, 고대적 장중함의 존중 등의 경향이 루이 14세의 치세 초기에 확고해졌다.
이리하여 1660년경에 고전주의가 만개하여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와 르네상스에 뿌리를 둔 고전주의는 절제와 조화를 추구하고 상상력을 이성에 종속시키며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다.
고전주의는 바로크적 조류와 결정적으로 단절하지 않으면서 그 극단적인 경향과는 거리를 두었다.
예술의 개화가 치세의 영광을 드높일 것으로 확신한 루이 14세는 권력을 정신과 예술의 문제에까지 확대시켰다.
그의 문예옹호는 재능인의 공무원화로 나타났다.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도움을 받아 외국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초빙하고 문예한림원, 과학한림원, 음악한림원, 왕립 천문대, 식물원, 국립 극장과 같은 수용기관을 많이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