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매너리즘: 퐁텐블로파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미술에서는 퐁텐블로 파의 역할이 컸다.
16세기 중후반, 대략 1530년부터 1579년까지 퐁텐블로 궁전과 관련 있는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 집단을 훗날 퐁텐블로파라고 불렀는데, 퐁텐블로궁은 프랑수아 1세의 대망을 가장 멋지게 구현한 곳이다.
프랑수아는 국가적 예술부흥을 실현함으로써 이탈리아의 고전을 신봉하던 대제후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이 같은 장대한 이념에 어울릴 만한 대벽화 장식의 전통이 없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의 대가들을 초빙해야 했고, 이 작업은 1528~58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퐁텐블로 궁전의 내부를 장식하면서 궁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프랑스로 도입되는 창구가 되었으며, 여기에 뿌리를 내린 양식이 바로크 양식의 선구가 되었다.
초청된 예술가들이 누드 여인의 관능미와 궁정풍의 우아미를 조화시킨 온화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제1차 퐁텐블로 파라고 한다.
피오렌티노가 퐁텐블로 궁전에서 주로 한 작업은 프랑수아 대회랑을 당시 프랑스의 궁정 취향에 맞추면서 이탈리아 양식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스승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영향을 받았지만 <피에타>23에서 보듯 어느 정도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고 동판화 제작을 위한 수많은 밑그림은 프랑스의 회화와 장식미술에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1540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대회랑을 장식하는 일에 전념했다.


볼로냐 태생의 프란세스코 프리마티초는 줄리오 로마노로부터 매너리즘을 익히고 화가·건축가·실내장식가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1526년 볼로냐를 떠나 만투바로 가서 줄리오 로마노 작업장에서 조수로 일한 그는 1540~41년 프랑수아를 위해 로마로 가서 당시 가장 유명한 고대 조상들의 모형을 수집했다.
1546년 다시 로마로 갔을 때 바티칸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피에타>의 모형을 만들어 프랑스 추기경에게 전달했다.
프리마티초는 로소 피오렌티노와 더불어서 프랑스 매너리즘 일파인 제1차 퐁텐블로 파를 이끌었다.
그는 1559년에 프랑스의 궁정건축가가 되었으며 그의 장식화는 종래의 종교적 주제를 고전적인 신화로 대체하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내며 이에 의해 파르미자니노의 거친 매너리즘 양식이 프랑스 취향에 합치하는 지적 세련됨을 갖춘 표현으로 변화했다.
프리마티초는 1532년부터 피오렌티노와 함께 퐁텐블로 궁전의 ‘프랑수아 1세의 회랑’ 내부를 장식했고, 퐁텐블로 궁전 내에 있는 다른 회랑들의 내부 장식도 맡았다.
1559년에는 앙리 2세의 왕실 건축가가 되어 생드니 수도원 성당의 발루아 예배당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


피오렌티노·프리마티초·니콜로 델 아바테 세 사람은 프랑스와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양식을 프랑스 궁정의 기호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에 의해서 관능성과 장식성, 규방의 사치스럽고 자유분방함과 다소곳하고 우아함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매너리즘 양식이 생겨났으며, 스투코Stucco(구운 석회와 고운 흙을 섞어 만든 치장 벽토) 장식과 벽화의 결합은 ‘프랑스 양식’으로 알려진 독특한 기법을 완성시켰다.
‘프랑수아 1세의 회랑’에 있는 피오렌티노의 장식과 프리마티초의 작품은 두 번씩이나 덧칠이 되어 있어서 그 후 복원작업이 수차례 시도되었으나 최초의 상태를 어림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두드러진 전통으로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로 보급되어 새로운 장식 양식에 크게 기여했다.
이 양식에서는 신화적인 세계를 연출한 인위적 장치·목가적 풍경·나긋나긋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억지 미소를 짓는 누드 여인 등 새로운 것을 지향했으므로 진지하고 화려한 회화에 속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유행한 실내장식 분야에 속한다.


종교전쟁으로 인한 공백 이후 궁전의 장식화는 앙리 4세(1589-1610년 재위)의 비호 하에 부활했다.
일반적으로 제2차 퐁텐블로 파라는 명칭은 앙리 4세를 위한 장식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을 말한다.
그들의 작업은 평범했으며 제1세대의 예술가들의 특징이었던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전의 플랑드르 사실주의가 프랑스 궁정 취향과 결합하여 국제 고딕 양식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퐁텐블로에서도 이탈리아 매너리즘이 궁정의 기호에 맞춰진 독특한 프랑스 화파가 형성되었다.
이는 가냘프고 창백한 누드의 요정에서 보이는 섬세함·규방을 암시하는 정경·전통적인 종교적 내용을 대신하는 신비주의적인 테마 등 거의 유희에 가까운 묘사들이 결합된 것이다.27
이것은 세기가 바뀐 후에도 프랑스 회화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 모태가 되는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더불어 인접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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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 루이 14세시대의 예술적 기호

그랜드 매너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드 샹파뉴 그리고 푸생과 더불어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웅대한 간결성과 힘 있는 구도는 푸생, 로랭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1620년경 로랭 공작령인 뤼네빌로 가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한 라 투르는 위트레흐트 파에 속한 네덜란드 화가로, 풍속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린 게리트 반 혼토르스트50로부터 카라바조 풍의 극적인 효과를 내는 명암법을 배웠다.
1645년경에 그린 <신생아>49가 한 예인데, 대부분의 화가들이 실재 아기를 보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라 투르는 실재 모습을 보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코와 입이 두드러지고 볼이 생략된 것은 아기를 보고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물의 형상을 기하적 형태로 단순화시키고 촛불이나 횃불만이 비추는 실내 정경을 묘사하여 장엄한 단순미와 경이로운 고요함을 보여주었다.
라 투르는 카라바조 신봉자들로부터 유래한 자연주의를 고전주의로 전환시켰으며 거기에는 푸생과 샹파뉴와 동일한 정신이 담겨 있다.


루이 13세는 1643년 5월 14일에 사망했다. 당시 루이 14세(1661-1715)는 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의 어머니인 안은 파리에 자리를 잡고 새 섭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남편의 유언을 무효화했고, 추기경 쥘 마자랭(1604-61)은 수석대신이 되었다.
안이 섭정을 시작할 때의 나이는 42세였다. 보석과 궁정 생활을 좋아한 안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로부터 자주 모욕을 받곤 했다.
두 아들 루이와 필리프를 둔 안은 정치적 경험이 없었으므로 국사의 운영을 마자랭에게 맡겼다.
여러 해에 걸쳐서 스페인 출신의 안과 이탈리아 출신의 마자랭의 기이한 결합은 메디치 가의 마리의 섭정기 때와 마찬가지로 불평과 중상모략, 끝내는 다양한 사회 층에서 반란을 야기했다.
루이 14세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648년, 마자랭의 미움을 받아오던 귀족들과 파리 최고법원이 왕에 대항해 반기를 든 프롱드의 난(1648-53)으로 알려진 기나긴 내란이 시작되었다.
내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루이 14세는 가난과 불운, 두려움과 굴욕감,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이런 시련이 앞으로 드러낼 성격과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에 크게 작용했다.


1653년 반란 진압 후 마자랭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루이 14세와 더불어 특별한 행정기구를 만들어 나갔으며, 어린 왕은 예술과 우아함 그리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마자랭의 성향을 몸에 익혔다.
그는 마자랭의 조카딸 마리 만치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2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절박한 정치 상황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스페인과의 평화를 위해 1660년 8월 26일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를 아내로 맞아야 했다.


마자랭은 1661년 3월 9일에 사망했다.
유방암에 걸린 안은 1666년 1월 20일에 사망했다. 섭정을 해오던 마자랭이 죽자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 루이 14세는 재무총감 장-밥티스트 콜베르(1619-83)의 도움을 받아 국가 재정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다.
상인 집안 출신의 콜베르는 다양한 행정직을 거친 뒤 재무총감이 되고 국가의 통제 기관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이 된다.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업적으로 국력이 증대된 프랑스는 17세기 후반기의 유럽에서 명백한 우월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대부인 마자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간키의 그는 끊임없는 예식 속에 살면서 하녀에게도 경어를 쓸 만큼 예의범절에 밝고 비상한 자제력을 지녔다.
그는 대식가, 사냥꾼, 호색가였고, 그의 정부들은 12명의 서자를 낳았다.
그는 지나친 오만함, 매우 높은 직분의식으로 말미암아 1662년부터 태양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54년 동안 매일 8시간 정무에 열중했다.
궁정의 예절부터 군대의 이동까지 그리고 길을 닦는 일부터 신학적 논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하려고 했다.
그는 젊음과 정열이 넘쳐흘렀으며, 장엄함에 매료되는 프랑스다운 기질을 충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둔 셈이다.
왕은 정력적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세우는 데 열을 쏟았으며 프랑스의 모습과 삶의 방식이 바뀌어 거대한 도시들의 형태가 변했고 풍경은 달라졌다.
생제르맹과 마를리에 있던 눈부신 궁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아직도 건재하다.
건축 도중에는 낭비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며 나라를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비난받았으나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진 뒤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프랑스의 위신을 드높였다.


루이 14세의 정치적 절대주의는 17세기에 가장 과장된 형태로 나타났다.
절대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왕권신수설과 계약설이 있다. 왕권신수설은 지상에 왕권이 가장 우월하고 이는 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견해이다.
왕의 권력행사는 절대적이며 어느 누구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계약설은 토마스 홉스로 대표되는데,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체계 있는 군주론을 전개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왕이란 신의 지시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유일한 입법자이자 사법자이고, 또한 국민의 최고 행정관이라고 선언했다.


결정의 권리를 신하에게 혹은 명령의 권리를 백성에게 귀속시키는 건 사물의 올바른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이다.
심의 혹은 결정의 권리는 오로지 수장인 왕에게 있다.
신하들의 권리는 자기들에게 내려진 명령을 효과 있게 운영하고 수행하는 데 있다.


그는 “신하가 군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비록 군주가 악인이나 압제자라 하더라도 언제나 변치 않는 범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또 “왕은 절대군주이므로 당연히 성직자든 평신도든 신하들의 전 재산의 처분권은 완전히 왕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 후반기를 루이 14세의 시대라 한다.
루이 14세의 왕권신수설은 17세기 유럽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서 1660년대까지는 공화국인 스위스 일부와 이탈리아 및 네덜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나라들은 절대군주제를 받아들였으며, 각국의 군주는 루이의 행동 패턴을 모방하려고 했다.
루이는 ‘태양왕 le Roi-Soleile’ 혹은 ‘대군주 Grand Monarque’로 불렸다.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을 때 파리 시민이 마자랭 추기경의 저택 유리창을 돌로 깬 사건이 일어나자 1651년 마자랭은 파리를 떠나 지방 도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 남은 콜베르는 마자랭의 대리인이 되어 파리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고 개인적인 일을 돌보아주었다.
마자랭은 다시 권력을 잡은 뒤 콜베르를 개인비서에 임명하고 사적으로 이익이 많이 남는 관직을 사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콜베르는 부자가 되었고 세넬레 남작령도 취득했다.
마자랭은 임종하면서 루이 14세에게 콜베르를 추천했고 왕은 곧 콜베르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콜베르는 왕의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의 행정 전반에 걸쳐 국왕에게 봉사하는 데 비상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콜베르는 통찰력이 있었으며 매우 부지런했고, 오늘날의 6~8명의 장관에 맞먹는 권한을 지녔다.
그는 총감독관이자 재무총감이며, 고등참사회의 구성원이자, 바로 그 자격으로 국무대신이며, 해군담당 국가비서이자 왕실담당 국가비서였다.
콜베르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지출을 절감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강화시켰다.
가장 정직하고 효과적인 제도에 따라 정부 수입을 징수했으며, 예산 지출을 절감하고 담세 능력이 있는 모든 계급에게 과세를 균등하게 부담시켰다.
그리고 부진한 농업과 공업 부분을 면세와 지원으로 장려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중상주의와 일치한다.
이 같은 콜베르주의는 새로운 절대군주의 국가 정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콜베르가 이루어놓은 풍부한 재원으로 국방장관 루보아의 지휘 아래 프랑스 육군은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군대가 되었다.
프랑스는 정부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봉급과 제복을 지급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1669년에 콜베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해 프랑스의 예술 및 지적 생활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었다.
콜베르는 예술에서도 프랑스의 힘과 명성을 높인다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콜베르는 왕의 승리를 기념하는 훈장과 기념비에 새길 명문을 선정하기 위해서 ‘금석학 및 문학 아카데미’를 창설했고(1663), 프랑스 왕국을 위해 과학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과학 아카데미를 창설했으며(1666), 프랑스 건축 작품의 취향을 세련되게 하고 규칙을 정하기 위해서 왕립 건축 아카데미를 창설했다(1671).
콜베르는 또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처럼 예술가들이 당대의 거장들 밑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을 세웠고, ‘언어 학교’처럼 동양의 언어들을 공부하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진 학교도 세웠다.
그와 루이 14세의 목적 중 하나는 프랑스의 왕권을 전 세계에 장엄한 이미지로 알리는 것이었다.
루이 14세의 치세기가 고전예술이 꽃피고 교양인의 전형이 나타난 시기이기는 했으나 1690년경 남성의 70퍼센트와 여성의 86퍼센트는 여전히 문맹이었으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허황된 이야기나 미신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인 세계였다.


장엄한 프랑스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의 재건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화려한 위용은 중앙집권체제의 상징이 되었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 위치한 이 궁전은 1624년 루이 13세가 착공한 수렵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3단계로 증축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실권을 잡자마자 1661년 르 보에게 베르사유 궁전 앞뜰에 두 개의 부속건물을 증축하고 장식을 첨가해 기존의 성채를 확장할 것을 명령했다.
정원은 1662~90년 조경설계가 앙드레 르 노트르의 설계에 따라 변형되었다.54, 55
이것은 당시의 프랑스 문화를 지배하던 합리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형식과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루이 14세는 1669년에 르 보의 설계에 따라 좀 더 근본적이고 장대한 궁전 재건축을 시도했다.
이때 중앙부가 증축되었으며 그 의장은 장대한 규모와 고전주의 원리가 결합된 것이다. 건물 내부는 르 브룅의 지휘 아래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당시 이탈리아 바로크의 흐름을 받아들인 기법과 디자인을 적용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대사의 계단’이 유명하다.


세 번째 재건축은 1678년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지휘로 시작되었다.
망사르는 1674년 루이 14세의 정부 몽테스팡 부인을 위한 클라니 성 개수작업을 맡으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재건축은 그 규모가 유례없이 커서 르 보의 건축물에 담겨 있던 정신을 모두 없앨 정도였다.
정원쪽 1층 위에 세운 르 보의 테라스는 뮤지엄으로 대체되었으며 양쪽 부속건물은 일직선으로 통합되었다.
그는 중앙 건물 남북에 약간씩 후퇴한 부속건물을 각각 세워 전체적으로 파사드를 503미터까지 확장시켰다.
‘거울의 회랑’56에는 17개의 거울로 만들어진 아케이드가 천장 부근까지 메우고 있으며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였다.
‘그 양쪽에 인접한 두 개의 회랑, 즉 ‘전쟁의 회랑’과 ‘평화의 회랑’도 이때 만들어졌으며 망사르와 르 브룅이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전쟁의 회랑’에는 색조 회반죽으로 된 타원형의 커다란 부조가 있었으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졌다.
‘평화의 회랑’에도 유럽의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졌다.
망사르는 1689년 베르사유 궁전에 거대한 궁전 예배당57을 착공했으며 건축물은 1703년에 완공되었다.
여러 해 동안 2~3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루이 14세는 공사장에서 죽은 노동자들의 부인들에게 연금을 주었다.


바로크의 풍요로움과 장중함을 프랑스 합리주의와 ‘좋은 취미’에 적당히 결합시킨 베르사유 궁전의 기호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과 유럽에서 궁정 양식의 기준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자신의 위대함의 상징으로 계획하여 궁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여기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수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지만 왕의 전례 없이 강력한 과시욕에도 자극을 받았다.
루이 14세는 여섯 개의 궁전을 가졌지만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했다.
이 궁전의 인구는 1만 5천 명에 달했으며 궁전에서는 사치와 안일의 생활이 지속되었다.


1663년 소규모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던 고블랭이 왕가에 물건을 대주는 종합공장으로 확장되면서 르 브룅은 책임자가 되어 왕실에 봉사하는 각종 공예기술자들을 모집했다.
이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예술적 교의의 공식 체계와 미적 가치관의 공식 기준이 1663년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재편성을 통해 강화되었다.
1666년에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공인된 훈련을 제공할 목적으로 로마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콜베르가 정치 고문 겸 재무총감에 임명된 후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는 전제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고도의 체계화된 강력한 기구가 되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예술적 기호와 제작의 통제도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미술품 컬렉터였으며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 기여한 유능한 수완가였다.
콜베르의 독재 하에 콜베르의 사상을 충실히 구현한 샤를 르 브룅의 기교에 힘입어 유럽 예술의 중심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옮겨졌다.
루이 13세의 전형적인 프랑스 고전주의에서 루이 14세의 장엄하고 화려한 양식으로서의 그랜드 매너Grand Manner가 탄생했다.


루이 13세 때에 예술과 정신의 영역에서 나타났던 표현의 절제, 중용, 고대적 장중함의 존중 등의 경향이 루이 14세의 치세 초기에 확고해졌다.
이리하여 1660년경에 고전주의가 만개하여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와 르네상스에 뿌리를 둔 고전주의는 절제와 조화를 추구하고 상상력을 이성에 종속시키며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다.
고전주의는 바로크적 조류와 결정적으로 단절하지 않으면서 그 극단적인 경향과는 거리를 두었다.
예술의 개화가 치세의 영광을 드높일 것으로 확신한 루이 14세는 권력을 정신과 예술의 문제에까지 확대시켰다.
그의 문예옹호는 재능인의 공무원화로 나타났다.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도움을 받아 외국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초빙하고 문예한림원, 과학한림원, 음악한림원, 왕립 천문대, 식물원, 국립 극장과 같은 수용기관을 많이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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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파와 푸생파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기운 속에서 아카데미 회원이 누리던 귀족주의적인 특권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다비드를 지도자로 한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로 재출발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위협한 것은 예술가를 천재로 본 낭만주의적인 작가 개념이었다.
즉 예술가는 가르쳐질 수도 없고 규범에 종속될 수도 없는 영감의 빛으로 걸작을 창조하는 천재라는 관점이었다.
예술가가 곧 천재라는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처음 생겼다.
이 개념을 칸트가 공식화했으며 괴테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촉진되었다.


푸생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시적 분위기로 다루었으며, 인물의 몸짓·자세·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심리적 묘사에 심사숙고했다.
이 같은 그의 감정 표현은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그 결과 베네치아파는 색채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경시되었으며 플랑드르파와 네덜란드 파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사실성이 그랜드 매너의 장중한 테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되었다.
르 브룅은 푸생의 이론에 따라 감정의 표현법에 관한 논문을 간행하고 일정한 정서와 심리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방법을 규칙화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서기관 앙리 테스트랭을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엄밀하고 총괄적인 법칙집을 1680년에 간행했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반대뿐만 아니라 미술사에서 푸생 파와 루벤스파 사이의 논쟁으로 알려진 사건을 야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가·이론가 드 필과, 화가 라 포스가 이끈 개혁파는 베네치아파와 루벤스 작품에 나타난 색채의 중요성과 일정한 사실성을 주장했다.
푸생과 루벤스는 동시대 화가지만 서로 다른 경향의 그림을 그렸는데, 푸생은 고대와 르네상스로 회귀하려고 한 데 반해 루벤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바로크 풍의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성과 감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한 푸생의 추종자들에게 바로크 회화는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는 또한 소묘를 중요시한 푸생과 색채를 중요시한 루벤스와의 차이이기도 해서 선과 색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이런 대립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더욱 커졌다.


드 필은 루이 14세의 외교사절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각 나라의 미술을 현지에서 직접 연구했다.
루벤스를 숭배한 그는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아카데믹한 드로잉의 강조에 반대하고 색채와 명암법이 회화에서 가장 중요하다며 루벤스파의 편에 섰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장르인 역사화의 개념을 확대하여 모든 종류의 테마를 이에 적용했다.
그는 『색채에 관한 대화』(1673), 『루벤스의 생애를 포함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론』(1681), 『화가들의 생애론 - 화가의 완전한 이상』(1699), 『화가들의 원리와 균형에 의한 회화 강연』(1708) 등을 출간했는데, 이중 마지막 저서는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샤를 라 포스는 1658~60년 이탈리아에 체류했고, 1670년대에는 주로 르 브룅의 조수로 활동했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다이아나 회랑과 아폴로 회랑 장식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
1680년대의 그의 작품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화파, 특히 베로네세와 코레조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드 필의 친구로서 색채와 소묘의 우열 논쟁에서 색채가 중요하다고 한 드 필의 주장을 지지했다.
라 포스는 1680년대 프랑스 화단에 루벤스의 영향을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17세기 말 프랑스 회화의 쇠퇴기에 많은 예술가들 가운데 최대의 독창성을 발휘한 그의 작품에는 차세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을 앞서는 것도 있다.


르 브룅은 1672년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소묘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공식 견해가 되어 다음 세기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고전주의가 곧 아카데미즘이 되었다.
그리고 예술에서 교육과 비평이라는 개념에 정식으로 권위가 주어졌으며 이후 이 개념은 아카데미의 관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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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적이며 낙천적인 로코코

우아한 경박함이 유행하다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7세기가 왕의 세기라고 한다면 18세기는 귀족의 세기였다.
콜베르가 타계한 지 2년 후 1685년에 낭트 칙령의 폐지로 위그노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였다.
이에 독일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 고개를 들었고 신교 국가에서 낭트 칙령의 폐지와 초기 위그노 망명객의 도착이 여론을 부추겼다.
17세기 말의 암울했던 정치적 실패에 대한 반동은 도덕적 규범의 완화와 예술의 경쾌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자유주의적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섭정시대(1715-23)에 완전히 실현되었다.


루이 14세는 1715년 8월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의사들은 암당나귀의 젖에 목욕할 것을 처방했다. 그는 열병에 걸렸고 회저병에 걸린 다리는 검게 변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여 왕세자를 오게 하고 1715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은 해산되었으며 다섯 살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15세(1715-74년 재위)는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졌다.
루이 14세가 타계한 1715년부터 1815년까지의 한 세기는 명확한 근대사적 특징을 갖는 혁명의 시대였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은 비단 두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에 걸쳐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하여 유럽 각국 및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영향을 주어 현대인의 물질적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동시에 빈부 격차·시장 개척·노동 문제·제국주의적 침략 및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세계사의 과정에서 유럽 문명 특히 대서양 문명권의 우위를 확립시켜 놓았다.


루이 15세 즉위 이후 사회풍조가 변하면서 예술과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취향이 발전했으며 우아한 경박함이 유행했다.
미술품 감정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고 미술품 컬렉터들도 늘었다.
호화롭고 장대한 과거의 취향 대신에 작고 장식적인 미술품이 유행했으며 이런 수요에 부응해서 체계화된 상업이 발달했다.


루이 14세 치하의 베르사유 궁의 웅장함과 그의 치세 동안 유행한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로코코 양식은 가볍고 정교하며 우아하고 고상하나 곡선과 자연 형상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여러 명의 실내장식가·화가·조각가들이 파리 귀족의 새로운 주택을 경쾌하고 보다 아늑하게 장식했으며 이 양식이 동판화에 의해 프랑스 전역에 퍼졌다.
로코코 양식에서는 벽면과 천장, 소조 등을 조개나 자연물 형상뿐 아니라 ‘C’나 ‘S’자 같은 기본형태 위에 교차곡선과 역곡선을 그린 문양으로 장식했는데, 대칭보다는 비대칭을 기본으로 삼았다.


로코코 양식은 본질적으로 실내장식의 혁명이었고 이 혁명은 회화와 조각으로 부차적인 개혁을 가져왔다.
17세기의 실내를 일련의 엄숙한 틀처럼 보이게 한 태피스트리와 천장화, 코니스cornice(벽 윗부분에 장식으로 두른 돌출부)와 엔태블러처entablature(기둥 위에 걸쳐놓은 수평 부분)는 사라졌다.
18세기의 회랑은 흰색 타원형으로 되었으며 거울, 패널화, 중국풍 커튼 등이 장식되었다.
코니스는 수비즈 저택63의 타원형 살롱에서처럼 벽면에 드리우거나 천장의 코브cove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아라베스크 모양이다.
이런 회랑에 장식된 회화는 소형이며 색조는 밝고 모티브도 경쾌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 규모의 축소가 회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로코코 화가들은 바로크의 복잡한 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의 복잡함·칙칙한 색·지나친 허식 대신 밝은 핑크색·파란색·초록색을 사용하며 때로는 흰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지나치게 과대한 장식에 진력을 내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한 점을 요구했다.
로코코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처음에는 주로 장식적이었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는 장-안트완 바토이고 로코코의 성숙된 낙천적 정신을 잘 표현한 화가들로는 프랑수아 부셰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가 있다.
궁정 화가들의 영향은 매우 컸으며 부셰의 작품은 당시 보편적인 미적 취향이 되었고 화가 지망생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로코코 회화의 전형적인 모티브는 남신과 여신의 호색적 기질에 관해 전래된 신화와 님프, 목자가 있는 목가적 장면들이었다.
신과 목자는 도자기 인형에도 사용될 만큼 흔한 주제였으며 파스텔 핑크·노란색·파란색·초록색 등을 주로 사용하여 화사하게 나타났다.
프라고나르의 <큐피드에게서 받은 선물을 자매들에게 보여주는 사이키>65는 한 예이다.


프라고나르는 한동안 샤르댕과 부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52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역사화 <칼리로에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코로에수스>를 그려 1765년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에로틱한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뒤 바리를 여러 점 그렸으며, 마담 뒤 바리가 새로 지은 루브시엔의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1770년에 그녀의 요청으로 그린 네 점의 대형 작품 〈사랑의 과정〉(뉴욕 프릭컬렉션)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마담 뒤 바리는 더 이상 명랑한 분위기가 아닌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에게 되돌려 보냈다.
프라고나르는 새로이 부상한 신고전주의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다비드의 도움과 후원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희생자가 되어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프라고나르는 바토와 더불어 18세기의 단조로운 프랑스 미술계에서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받는다.
놀랄 만큼 활동적이었던 그는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 및 35점의 에칭을 제작했다.
그의 양식은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꽉 차거나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았으며 민첩하고 활기차고 유연했다.
활동기간의 상당 부분이 신고전주의시기에 속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코코 양식으로 그렸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이자 르네상스 최후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700년경이었고 18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성행했다.
로코코는 회화와 건축에 나타난 양식으로 밝고 우아하며, 우스꽝스럽거나 쾌활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로코코는 바로크Baroque(포르투갈어 바로코Barocco에서 온 말로 ‘불규칙한 진주나 돌’을 의미)에 반발하여 생긴 양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로부터 진전된 양식이다.
로코코Rococo라는 말은 바로코Barocco와 조약돌이란 뜻의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의 합성어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로카이유는 바로크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불규칙하고 유연한 선으로 장식된 형상들을 로카이유라고 불렀다.
로코코의 어원적 의미는 ‘비속하게 현란하거나 잘 꾸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경멸적인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18세기 말에 다비드의 제자들 사이에서 바로크와 로코코라는 말은 혼용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로코코는 18세기 미술에 국한하여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17세기 미술을 바로크라 부르면서 약 1700년부터 프랑스 혁명까지의 로코코와 구분하기도 하고, 로코코를 단지 바로크 후기의 프랑스 미술에 국한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바토가 지닌 시적인 경향과 우울함은 프라고나르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그 시대의 경박함과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샤르댕과 더불어 대혁명 이전의 18세기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 최고로 평가받는 바토가 다룬 테마는 상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였다.


생전에 그가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건 그의 화풍 때문이 아니라 태어난 지역에 대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의 고향 발렌시엔느는 그가 태어나기 6년 전 스페인 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령으로 이양된 지역이었다.
지붕기와공의 아들로 태어난 바토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소설을 탐독하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18세에 파리로 갔으며 1703년경 클로드 질로를 만났는데, 질로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목신이나 사티로스의 그림 및 오페라 장면 등 무대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였다.
질로는 유려하고 여성적인 우아함을 갖춘 16세기 퐁텐블로 파의 양식을 선호했는데, 그의 소묘 방식과 주제 선택이 바토의 작품에도 나타나 있다.
바토는 극장의 2층 발코니에 앉아 무대를 관찰하면서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모든 분장과 도구 및 무대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분장한 얼굴, 화려한 의상, 그려진 배경막과 짙은 그림자에 비치는 다양한 인공조명의 반사광을 통해 빛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그는 연극계와 뤽상부르 대정원, 미술품 연구 등 파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
루벤스가 30여 년 전 마리 데 메디치에게 바친 일련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림들을 연구했으며 생기 있고 기쁨이 넘치는 루벤스의 대작들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명성은 점점 높아졌지만 바토는 여전히 수줍어하며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정신은 자유분방했지만 행실은 신중했다’.


바토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엄숙한 비극이 아니라 가장 생명이 짧은 극형식들이었는데, 특히 희곡을 인용하기보다 배우가 즉흥적으로 연기함으로써 말보다 가면이나 제스처를 중요하고 등장인물이 항상 전형화되어 있는 코메디아 델아르테comedia dell’arte였다.
바토를 사로잡은 또 다른 주제는 댄스·노래·의상·장식물로 구현된 순간적인 상을 보여주는 오페라 발레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전前시대의 고전주의에 반발을 일으킨 시기였으며, 예술 여러 장르와 양식적 조류들이 각기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던 장르들 소극·즉흥희극·소설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시·음악·회화·무용이 융합되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진 것처럼 여러 분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대체로 바토의 회화는 오페라를 색채로 치환한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그는 모든 형태의 회화적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덧없는 것들에 전념했으며, 회화에서 여인들에게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다.
호위 기사나 어릿광대 같은 남자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두르고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여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원에 있는 조각상도 대부분이 여인상이며 또 자연조차도 여성적인데, 나무는 줄기가 가늘며 윤곽이 부드럽고 흐릿한 잎으로 무성하다.


바토는 이탈리아화 된 아카데미의 규범으로부터 프랑스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루벤스와 파올로 베로네세의 여러 요소를 채용하면서도 진정한 ‘파리풍’ 양식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
이 양식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테마가 외견상 경박함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우수가 감돌고 있으며 그의 깊은 시정에 찬 화풍 앞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평범해졌다.
그의 명성은 대혁명과 함께 한때 빛을 잃었지만 공쿠르 형제와 월터 호레티오 페이터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베로네세는 자신의 양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출생지인 베로나의 전통과 함께, 줄리오 로마노와 파르미자니노 등의 매너리즘 화가들과 당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유행한 급진적인 매너리즘이 지닌 무절제한 표현의 과잉을 피했다.
그는 틴토레토보다 아홉 살 어렸는데, 이 두 대가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은 두 화가의 작품 분위기가 상당히 유사한 우의화에서 특히 눈에 띈다.
티에폴로의 밝은 색상, 당당한 인물 표현 등은 그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일화적인 풍속화의 창시자 장-밥티스트 그뢰즈의 작품에서는 지나친 감상적 요소가 결점으로 지적되지만 일련의 극적인 그림에는 고결한 농민의 모습이 있다.70
그뢰즈는 풍속적인 정경에 도덕적·사회적 의미를 불어넣었으며 시골의 순박한 미덕과 바르비종 파의 지도자 테오도르 루소의 화풍처럼 감상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관능적 도덕주의자 드니 디드로는 그의 작품을 “회화로 나타낸 도덕”이라고 칭송하면서 당대 회화의 최고 이상을 대표한다고 극찬했다.
그뢰즈는 다비드와 심지어 제리코의 일면을 예견하는 뛰어난 화가지만 작위성과 위선, 그리고 대중 취향에 영합하려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성의 암시 때문에 실패했다.
취향이 신고전주의로 변화되는 것과 더불어 그의 작품은 유행에 뒤쳐지게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후에는 세상에서 잊혀졌다.


로코코 양식을 완벽하게 표현한 프랑수아 부셰는 레이스 디자이너인 아버지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며, 1723년에 로마상을 수상했다.
티에폴로, 루벤스 그리고 스승 프랑수아 르 무안의 영향을 받은 그가 주문받은 첫 주요 작품은 앙투안 바토가 그린 125점의 드로잉을 판화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감각적이고 명랑한 분위기의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과 목가적 풍경화로 명성을 얻었다.
1734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그 후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의 책임자이자 왕립 자기공장의 주요 도안가가 되었다.
1765년 왕립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으며 루이 15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다.
1740년대와 1750년대 동안 부셰의 우아하고 세련되면서도 경쾌한 양식은 루이 15세 왕실의 특징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묘한 색채의 사용과 품위 있는 형태, 뛰어난 기교, 평범한 주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71의 후원을 받은 가장 전형적인 로코코 화가 부셰는 신화를 매력적인 내용으로 표현했다.
<목욕하는 다이아나>73에서는 남신과 여신 모두 영웅이 아닌 16세의 젊은이들처럼 행동한다.


마담 드 퐁파두르를 파스텔화로 그린 모리스-켄탱 드 라 투르는 페로노와 더불어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파스텔 초상화가였다.
라 투르는 이 기법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의 예술의 본질은 빠르고 정확한 소묘에 있으며, 결코 깊지 않은 색채와 화려하면서 매끄러운 마감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종종 통속적인 부분도 보이지만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표정을 잘 포착한 생기 넘치는 작품이다.


로코코 회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었지만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회화가 단지 장식적이거나 감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날 동요시켜라. 날 놀라게 하라. 날 공격하고, 전율하게 하며, 울게 만들고 조바심 나게 하고, 화나게 하라. 그러고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눈을 진정시켜라.


디드로의 말에서 로코코 회화가 결여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만 요란한 로코코 회화에는 관람자의 정신 혹은 영혼에 호소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이론을 추구한 디드로는 매년 개최되는 살롱전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알려졌는데, 1759년부터 1781년까지 살롱전에 계속 참여했다.
프랑스의 첫 미술비평가로 알려진 디드로는 자신의 글을 묶어 책으로 출간했고 그의 저서는 훗날 작가이면서 미술비평가 테오필 고티에·샤를 보들레르·에밀 졸라 등에게 규범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철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어조로 일시적인 인상이나 주제에 대한 문학적 흥미나 충분한 성찰 없이 내려진 판단 등에 기인한 자가당착적인 면도 있지만, 미술비평이라는 장르를 마련하여 작품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프랑스에서 미술비평을 활성화시켜 미술 발전에 기여한 데 의의가 있다.
그는 살롱전 비평에 덧붙여 「회화, 건축예술, 시작詩作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합리적 측면으로만 경직된 예술관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규칙은 예술가를 상투적으로 만든다. 나는 규칙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지 않을까 저으기 의심한다.
규칙이란 평범한 예술가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천재에게는 해가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내게 바르게 이해시켜준다.


디드로는 화가들이 화실에서 모델을 사용하여 인위적인 제스처를 그리는 것을 비난하고 아카데미 회화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성당에 가서 고해실 근처를 서성거리도록 하라. 그러면 경건함과 참회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술집에 가라. 그러면 성난 남자의 참 제스처를 보게 될 것이다.
대중이 모이는 곳을 찾고 거리에서 정원에서 시장에서 관망하도록 하라.
그러면 삶의 약동 안에서 자연적 운동의 적절한 아이디어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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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정의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낭만주의라는 말은 르네상스시대부터 사용된 말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 국경에 있는 로마냐Romagna(로마냐는 로마Roma에서 온 말이므로 굳이 말하면 로마에서 파생된 말이라 하겠다), 즉 라틴어의 방언 로망스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의미이면서 공상적 혹은 경이적이란 뜻도 내포하게 되었다. .


이 낭만적romantic이란 말의 근대적 기원은 17세기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통속어로 전래된 중세의 목인소설이나 기사에 관한 이야기, 예를 들면 아서 왕이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다고 믿어지는 성배를 찾으려고 한 원탁기사의 이야기와 같은 중세 모험담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이를 전형으로 근대에 창작된 괴담에서 고딕·낭만 류의 황당무계한 바보 같음을 야유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로망스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들이 라틴어가 아닌 낭만적인 언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로망스romance라고 하는데, 전기적인 이야기란 뜻으로 이것이 낭만이 되었다.


‘낭만적’이란 말은 ‘기발한 또는 환상적인’ 혹은 ‘있을 법 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술의 한 양식으로 불린 것은 1798년으로 독일 평론가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과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슐레겔 그리고 노발리스가 관여한 기관지 『아테네움』(1798-1800)에서 낭만적 시를 가리켜서 이 말을 사용한 후 슐레겔 형제가 후원하는 환상적인 내용의 문학과 중세 미술 그리고 거칠고 원시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미술에 사용되었다.


슐레겔은 낭만주의를 넓은 의미에서 근대의 특징을 지적하는 말로 사용했는데 근대 문학이 고전 문학과 다른 한에 있어서 ‘낭만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그 특질로 개별적인 모티브의 우위, 철학적 모티브의 우위, ‘충만과 생명력’에서 얻어지는 쾌감, 형식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규칙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기괴하고 추한 것 속에 있는 평정함, 환상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상적인 내용 등을 꼽았다.
그는 ‘낭만적’이란 명칭을 근대 문학 전체에 적용시켰으며 낭만주의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작가들에게서도 낭만주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괴테와 실러같이 걸출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낭만주의의 선구자 괴테는 『독일 건축에 관하여』(1773)에서 스트라스브루크의 대성당을 예로 들어 고딕적 예술을 내면적 정신 혹은 감정에서 생겨난 주관적 원리를 좇는 예술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낭만주의는 이교적 고대의 미에 반하는 기독교적 근대의 미로 본 것이다.


낭만주의라는 말이 독일 밖에서도 사용된 것은 프랑스의 여류작가 스탈 부인(1766-1817)의 『독일론』(1813)에서 소개된 후였다.
18세기 사람들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유행하는 기존 가치관에 반발하면서 이성적·감정적 경험에 만족할 만한 것에 근거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성적·감정적 경험의 일반적인 공통점은 “자연으로 돌아가자 Return to Nature”였다.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을 이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존중한 데 비해서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경계가 없고 거칠며 늘 변하는 것으로 숭배했다.
이들 모두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위하는 한 악은 사라질 것으로 믿었으며 욕구에 자유를 부여했다.
이런 이상을 마음에 품은 낭만주의자들은 감정을 강렬하게 하는 것을 그 자체 목적으로 삼았다.


신속하게 생기는 경험을 영원한 형태로 남기기 위해서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이에 걸 맞는 양식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 반발했으므로 자신들의 시대에 유행하는 로코코 양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과거에 경시했거나 냉소한 형태들을 재발견하고 채택하여 그것들 자체를 원리로 진전시켰으므로 재활된 양식들이 낭만주의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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